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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마음

글 / 뉴질랜드 대법제자 샤오후이(曉慧)

[명혜망 2007년 1월3일] 이 몇 년간 수련해오면서 아주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돌이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 자신은 이미 완전히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았는가? 나 자신은 항상 모든 일에 법의 기점에 서서 자신을 수련하고 있는가?’ 아마도 어떤 사람은 그것은 이미 원만의 상태에 근접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표준은 매우 높은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속인의 마음을 내려놓으면 바로 신이고 속인의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면 바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집착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데 정(情)에 구애되고 혹은 이익을 위하여 혹은 안일(安逸)을 구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해 보면, 나는 내가 잘못했을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잘못을 승인하려면 언제나 마음이 그리 편하지가 않았고 또한 항상 자신의 잘못을 숨길 구실을 찾았는데 그것은 바로 정(情)이었다.

나는 또 자신의 수면 시간이 너무 적어 눈언저리가 검게된 것을 보고 두 시간이던 연공시간을 한 시간으로 줄이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것은 안일(安逸)을 구한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모두 강렬한 사람의 마음이며 사람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었다. 진정한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어떻게 수면이 적음으로 인해 눈언저리가 검게 되는 것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이것 또한 내가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 정도가 불충분함을 반영한 것이었다.

나는 장차 이런 것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공부를 많이 하고 정념을 강화해야 하며 어려울수록 더욱 이렇게 해야 한다. 체면을 중시하고 있다면 오늘 즉시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을 공개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이미 새벽 2시40분이지만 나는 법회 교류문장을 완성하려고 한다. 나는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다. 나는 다시는 내 관념을 고수하지 않고 이러한 틀에 얽매이지 않으며 나는 속인 중에서 걸어 나오려고 한다. 나는 사부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이밖에 우리는 수련과정 중에 때로는 자신의 집착을 보아내지 못하고, 때로는 심지어 다른 사람이 지적해도 승인하지 않으려 하며 모순이 이미 매우 엄중할 때에도 왜 그런지 알지 못하는데, 주요원인은 안에서 찾지 않고 자신을 수련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공부를 할 때 대부분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배우는 것으로 항상 ‘이 단락의 법은 어느 수련생을 견주어 말한 것이다.’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때는 사부님께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를 지적하셨지만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은 그 중에 있지 않다고 여기면서 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염두가 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사부님께서 주식 문제를 언급하셨을 때, 나는 이전에 세 번이나 그 부분을 읽었지만 주식에 투자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최근 나는 다시 이 단락의 법을 읽게 되었다. ‘매일 가격표의 변동을 보고 마음이 그야말로 그것에 의해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2005년 샌프란시스코시 설법》 중)

이 한 구절은 바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나는 평상시 항상 각종 마음에 의해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는가? 나는 금강부동(金剛不動)을 해내었는가? 나의 가장 부족한 부분은 다른 사람이 대법을 욕할 때, 마음이 펄펄 끓는 물과 같게 되는 것인데 어떻게 자비로운 말투와 지혜가 생길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상대는 갈수록 더 심하게 욕하게 되는데 나는 어디 중생을 구하고 있는 것인가? 분명히 중생을 밀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로스엔젤렌스시 설법》 중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법제자지만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데 말하기만 하면 화를 낸다. 맞아도 다른 사람이 지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틀려도 다른 사람이 지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하기만 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이미 상당히 심각하다.’ 처음에는 나도 ‘나는 수양이 좋아서 참을 수 있다. 이법은 다른 사람에게 말한 것이지 나에게 말한 것이 아니다. 누구누구를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나는 단지 참을 수 있는데 그쳤을 따름이지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단지 집착을 강제로 눌러 표현되지 않게 했을 따름인데 이것이 수련자의 참음인가?

나는 나에게 존재하는 문제는 바로 사람의 관념으로 법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한 단락의 법을 읽을 때 ‘아, 사부님은 정말 말씀을 잘하셨다. 이 구절은 정말 너무 맞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왜 그 구절이 그렇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강렬한 감수가 없는가? 왜 《전법륜》을 읽을 때 주의력이 분산되기가 쉬운가?

그것은 내가 자신의 관념으로 법공부를 하고 있으며 나의 생생세세(生生世世) 장기간 형성된 사유관습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진정으로 법에서 법을 인식할 수 없게끔 하고 장기간 집착하는 사람의 마음을 제거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동수들과 교류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정황이 있다. 체득(體得)을 교류할 때, 내가 인정하는 부분은 진지하게 듣고 공감하면서 수련생이 정말 잘 깨달았고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 외 내가 그다지 인정하지 않거나 체오(體悟)하지 못했고 깨닫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집중하지 못하면서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화제를 바꾼다. 이런 경우 나의 사유습관은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것을 찾고 있는데 이는 나 자신이 아니라 관념인 것이다.

이럴 때가 바로 우리가 장기간 형성된 사람의 관념을 개변하기 원하지 않을 때이며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집착을 감출 때이다. 이 한 부분은 또한 우리가 감히 직시하지 못하고 그러길 원하지도 않는 사각지대이다.

만약 우리들이 완전히 순수하고 깨끗한 본성으로 법공부를 하지 못한다면 어찌 씬싱(心性)을 수련하고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완전히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하고, 법의 매 한글자 배후에 있는 신성한 내포를 깨닫지 못하며, 때로는 심지어 법을 곡해하기도 하는 근본 원인이다.

요컨대, 매 사람마다 모두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부분을 고수하고 있다. 이 부분이 건드려지기만 하면 그 마음은 바로 끓어오르기 시작하는데 표현되든지 여부를 막론하고 ‘자신의 우매한 견해로 그어놓은 틀 속에서 기어 다니’고 있는 것이다. (《논어》 중)

때문에 나는 건의한다. 아직 각종 각양의 마난(魔難) 중에 처해있거나 각종 곤혹 중에서 사부님과 법을 믿지 못하는 동수들은 법에 비추어 자신의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찾고 집착의 뿌리를 파 보아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찾아야 한다.

동시에 세가지 일을 모두 열심히 했는지도 보아야 한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요구 표준은 일반 수련자보다 높다. 어느 한 부분을 잘못해도 깨닫기 어렵다. 우리 함께 사람에서 걸어 나와 다시는 정법을 방해하지 말자.

문장완성: 2007년 1월2일
문장분류: [제자절차]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7/1/3/1460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