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정법이 곧 끝나가는 시점인데도 나는 아직 수련생이 갖춰야 할 정념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을 꾸준히 잘 해내지 못하고 있다. 아래는 내가 여러 방면에서 스스로를 찾아본 과정이다.
1. 일을 하는 출발점
수련생들의 교류를 들으면서 자신의 근본 집착을 진지하게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도 찾아본 적은 있었지만, 지금 보면 그것은 여전히 매우 표면적인 것이었다. 처음으로 진심 어린 일념을 일으켰던 때를 기억한다. 진상 DVD에서 어떤 수련생이 자신과 다른 수련생들이 베이징으로 가서 법을 수호했던 경험을 묘사하는 장면을 봤을 때, 나는 마음속 깊이서 ‘나도 저 사람들 중 한 명이 되고 싶다’는 굳은 일념을 일으켰다. 한동안은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그것은 법리를 명확히 이해한 뒤에 생긴 인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련생들이 보여준 정념정행과 표면적인 고상한 인품에 대한 동경이었다. 그것은 수련생의 경지가 나타나는 표현이지(내가 추구하거나 집착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속인들 속의 영웅호걸도 아니다), 내가 배워 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나는 안으로 찾는 법을 몰랐다. 수련생들이 어떻게 안으로 찾는지 배우고, 스스로 이해한 뒤에 직접 찾아보려 했다. 진상을 알리고 법을 실증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랐다. 나는 진상을 말할 줄 몰랐지만, 진상 자료를 보고 나서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그래서 우선 자료를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점차 자신도 모르게 상태에 집착하게 됐다.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고 나면 마음이 안정됐고, ‘내가 했으니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하지 못하면 불안해졌다. 수련생들의 교류에서 어떤 수련생이 무언가를 했다는 말을 들으면 나도 그것을 하고 싶었다. 수련생의 경지와 마음가짐은 배울 수 없는 것인데, 내가 배운 것은 표면적으로 하는 행동들이었다. ‘나는 자료를 배포했다, 나는 진상을 알렸다, 나는 누구에게 진상을 알렸다, 나는 어떤 수련생을 도왔다, 나는 수련생 구원 활동에도 참여했다, 나는 이것도 할 줄 알고 저것도 할 줄 안다, 나는 법을 실증하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등 여러 방면에서 그랬다. 표면적으로는 수련생이 하는 일을 나도 했는데, 효과는? 어떤 일은 절반쯤 하다 보면 더 이상 잘 못하게 됐다. 그 결과 일부 상황이 발생하고 심지어 박해까지 일어났다. (일을 할 때의 출발점, 과정 중의 심성 표현, 최종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이를 수 있는가 — 지금은 이것들을 그대로 베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수련생들의 교류를 들으면서, 수련생이 박해에 직면했을 때 보여준 선량함,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도 수련생처럼 생각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다 보면 박해의 환경 속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사적이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나와 사람들의 관계가 구원과 피구원의 관계임을 잊어버리고, 다시 자신이 박해를 부정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 박해와 피박해의 관계 위에 자신을 다시 올려놓고 철저히 방어하기 시작했다. 사실 현 단계에서 내가 이해하기로, 사부님께서 사악한 자들의 안배와 명령, 지시에 협조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구세력의 안배를 부정하고 사부님이 안배하신 수련의 길을 걷기 위해서다. 구세력은 오직 개인의 수련만 중시한다.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법을 실증하고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는 사명이 있다. 대법의 아름다움을 실증하고 대법의 초범성을 실증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세력의 안배를 인정해서는 안 되고, 사악한 박해에 협조해 박해가 이루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법의 아름다움과 초범성을 실증할 수 없게 된다. 사부님께서 우리 스스로를 찾고 박해를 부정하라고 하신 것은 그것이 사악하고 사람을 망치며 중생을 망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련인의 경지는 저마다 다르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에게 깨달음을 줘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만큼 잘 못한 것은 격차이니, 사심과 사념을 내려놓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며, 부정적으로 문제를 보거나 수련생과 비교하면서 결과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나도 선해졌으니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추구하는 마음을 품고서 대가를 바라는데, 심지어 ‘최소한 나를 박해하지는 않겠지’라는 조건부의 마음까지 갖게 된다. 그래서 늘 자신의 상태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항상 내가 남에게 선하게 대했는데 또 상처받았다고 느끼며 많이 베풀었다고 여겼다. 나는 사심·추구하는 마음·비교하는 마음의 각도에서 문제를 보고 있었다. 남이 그렇게 하니 나도 해봤다는 식으로 자신을 실증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매 단계마다 이런 심리 상태가 나타나며, 자신의 상태에 집착하면서 정진하는 수련생들과 비교하면서 왜 나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잘 수련하면 격리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때는 나 자신이 꽤 잘 수련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때는 ‘내가 정말 잘 수련하고 있는 건가? 사부님이 격리하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느슨해져 내려간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2. 정에 미혹됨
수련을 시작할 때 나는 하는 둥 마는 둥 했는데, 가족이 강하게 떠밀고 나서야 비로소 굳건히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고, ‘정(情)은 믿을 수 없다’는 강한 일념을 일으켰다. 마음속으로 ‘이제부터 수련을 잘 해야겠다’고 조용히 다짐했다. 사부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이 심성을 지키지 못해 가족이 대법과 사부님에 대해 죄업을 짓게 한 것에 대해 보상하고 싶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시초이기도 했다.
나중에 정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가 잘해주면 좋다고 하더니, 내가 잘 못해주면 금세 돌변해서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나쁘다고 하네.’ 이것은 여전히 정 안에서 정을 보는 것이다. 지금은 안다. 사람이 진상을 알게 된 뒤에도 선택하고 분별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게다가 ‘정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정념인가? 나는 사방팔방으로 의존심이 있다. 수련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 없고,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추구함 없어야 저절로 얻는 것이다. 현실에서 나는 남녀 간의 정과 행복한 생활에 대한 집착이 있어서 그런 좋은 생활을 추구했다. 수련 중에는 또 수련생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수련생에게 의지하려 했다. 수련은 속인 속의 도움과는 다르다. 도와주면 좋고 안 도와주면 나쁜 것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협조하고 원융하는 것이며, 선의로 일깨워주는 것이지, 대신 수련해 주는 것이 아니다.
또 속인 사회의 상태에 부합하는 수련 방면에서도, 나는 속인 속의 ‘좋음’에 집착하고 있다. 내가 모든 면에서 잘했다고 해서 속인과의 갈등에 예외가 생기거나 조건을 내걸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갈등은 수련하고 인식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나는 당신을 해친 적이 없잖아요!’ 또는 ‘나는 어떤 일을 얼마나 잘했고, 당신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속인의 일이 아니다. 속인의 이치로는 당연히 이해가 안 된다.
수련에서 속인의 시비나 ‘당신이 틀렸다, 나는 잘못이 없다’는 식의 판단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속인 속의 좋음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일종의 ‘욕망’, 정에 대한 집착이 아닌가? 그래서 항상 스스로 교란과 끌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사실 갈등은 심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수련에는 고비와 어려움이 있어야 하고, 평온하게 지나올 수 있는 것은 착실하게 수련한 결과이며, 사람 마음을 내려놓는 과정이다.
3. 숨어 있는 질투심
일상생활에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속인과 비교하고 수련생과 비교했다. 다른 사람들도 서로 비교하고 평가한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비교하는 마음이 생겨, 자신의 장점과 남의 단점을 비교하면서 남의 장점을 직시하지 않았다.
사람으로서, 수련인으로서 착실한 기초가 있어야 한다. 출발이 탄탄해야 하는데, 나는 이 부분이 부족하고 착실하지 못했다. (현 단계의 이해: 착실함은 부지런함을 포함하는 것이지 발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착실함은 현상에 안주하는 편안함이나 게으름과는 다르다. 발전하려는 마음과 탐욕은 다르다. 탐욕은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것을 비현실적으로 원하는 것이고, 발전은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다.)
속인들도 오랜 노력의 축적, 인맥·기술·헌신이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올바른 이치다. ‘비교’로 시작하지 않으면 질투심도 자라나지 않는다. 이것이 일상 수련 속에서 내 자신에게서 찾은 질투심이 드러난 일부분이다.
해외에서 발생한 법난에 대해서도 나의 질투심을 발견했다. 해외에서 법난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계속해서 해외로 나가는 그 수련생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들이 반드시 심하게 박해받아서 부득이 출국한 경우는 아니더라도, 그런 사람들과 그런 방식을 겨냥한 것이라고 봤고, 당시 나의 마음가짐은 냉담했다. 일부 글에서 해외 지도자들이 초기에 중공을 변형적으로 도운 것을 보며 몹시 분개했다(그것은 어쩌면 천상의 변화나 안배일 수도 있다). 전에는 내 안에 속인이 박해를 끝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마음속으로는 해외가 좋고, 해외 사람들이 좋고, 해외 환경이 좋다고 여겼다. 경문 ‘법난(法難)’이 나에게 법난은 결코 지역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지만, 나는 법리에서 이해하고 집착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집착할 것이 없어진 것처럼 느꼈을 뿐이었다. 시련 속에서 가족은 항상 출국 같은 화제를 꺼냈는데, 어떤 때는 그들이 그냥 말만 해보는 것임을 알았고 내 머릿속에서도 그냥 한번 생각해보는 정도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중국 악당 관계자에게 “앞으로 아이를 해외로 내보내 여기에 있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까지 했다.
해외로 나간 수련생들에 대한 나의 마음은 질투였다. 현실적으로 나는 여러 방면에서 해외로 나갈 능력이 없을 뿐이었는데, 그들이 자신이 담당해야 할 것을 회피했다고 여겼다. 그들이 나간 만큼 나는 더 많이 헌신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국내에서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교류문을 쓰는 과정 속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마음을 정리했다. 이것은 진정으로 자신을 진지하게 찾는 과정이었다. 이로써 스스로를 독려해 서둘러 제고하고, 바르게 법을 수련하는 길을 걸으며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
원문발표: 2026년 6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6/6/511049.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6/6/511049.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