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시간 직접 체험한 베이징 만인 청원

— ‘4·25’의 찬란한 영광을 목격하다

글/ 베이징 대법제자 겸심(謙心)

[명혜망] 베이징 푸유가(府右街)는 당시 중화민국 대통령부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남북 방향으로 뻗은 거리다. 전체 길이 약 1,700미터에 달하는 이 거리는 베이징 시청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은 시창안가(西長安街)에서 시작해 북쪽으로는 시안문 대가(西安門大街)와 원진가(文津街)의 교차로에서 끝난다. 길 서쪽에는 주거지와 각종 행정기관이 있고, 길 동쪽에는 중난하이(中南海) 서쪽 담장이 펼쳐진다. 중난하이 서문과 국무원 청원사무실도 바로 이 거리에 있다. 1999년 4월 25일, 1만 명이 넘는 파룬궁수련생들이 이곳에서 평화적으로 청원했으며, 필자도 그 자리에 함께해 무려 16시간을 보냈다.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인 시각에서 ‘4·25’ 그날 목격한 것들을 최대한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려 한다.

1. 경찰, 사복경찰, 군인

푸유가 북쪽 끝 너머에는 베이징대학교 제1병원이 있고, 그 병원의 부인·아동 응급 진료소가 바로 푸유가 북쪽 입구 맞은편 대각선 방향에 있다. 4월 25일 새벽 6시, 나는 몇 명의 베이징 현지 수련생들과 전날 밤 약속대로 정시에 응급 진료소 앞에서 만났다. 한 여성 수련생이 말했다. “오늘은 짧은 시간에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단단히 준비하고 먼저 뭔가를 먹고 갑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침 식사 가게를 찾아 빠르게 끼니를 때웠다. 일행은 길을 건너 북에서 남쪽으로 푸유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푸유가 북쪽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경찰이 거리 입구에 경계선을 치고 북쪽 입구에서 남쪽 방향인 푸유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당시 6시 40분쯤이었고 날이 막 밝아오고 있어 경찰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노란색 경계 테이프는 눈에 확 띄었다. 일찍 온 수련생 일부가 이미 여기서 막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현지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와 함께한 그 여성 수련생은 두말없이 방향을 바꿔 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시안문 대가를 동에서 서로 걷다가 한 골목 입구에서 남쪽으로 꺾어 들어가고, 동쪽으로 한 번 더 돌아 나오니 바로 푸유가였다. 베이징 골목은 사통팔달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푸유가 서쪽에는 이미 많은 수련생들이 서 있었고,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해 조용히 서 있었다. 잠시 후 대규모 수련생들이 북에서 남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난 직후 북쪽 입구의 경찰이 다시 통행을 허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가 서 있던 위치 맞은편 대각선 방향이 바로 중난하이 서문이었다. 사람이 점점 많아지면서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은 자리가 없어지자, 외지에서 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수련생 몇 명이 길 건너편 붉은 담벼락 쪽으로 건너가려 했다. 그들이 막 도로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경찰 몇 명이 나타나 손짓으로 건너오지 말라고 했다. 그 수련생들은 즉시 물러서서 서쪽 사람 줄의 뒷줄에 섰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도로를 건너 동쪽 붉은 담벼락 아래로 가는 수련생이 없었고, 모두 도로 서쪽에 서 있었다.

아침 8시가 지나자 대규모 경찰들이 수련생 대열 맞은편에 나타나 경계를 서기 시작했다. 당시 경찰복 색깔은 올리브 그린이었는데, 경찰들은 꽤 위풍당당해 보였다. 처음에는 다섯 걸음에 한 명씩, 열 걸음에 한 명씩 배치돼 긴장하며 진지하게 수련생들을 바라봤고, 온몸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었다. 수련생들은 그저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구호도 없고 표어도 없고 그냥 평온하게 서 있었다. 경찰이라는 직업은 사람을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 즉 이 사람이 착한지 나쁜지, 온순한지 폭력적 성향이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이 전문이라 이에 대한 감각이 예민하다. 그래서 경찰들도 나중에는 긴장을 풀기 시작했고, 몇십 미터에 한 명씩, 그러다 더 나중에는 한참 멀어야 겨우 경찰 한 명이 보일 정도가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어떤 이는 수련생들과도 대화를 나누며 완전히 긴장이 풀린 상태가 됐다. 저녁 6시 이후에는 경찰을 전혀 볼 수 없게 됐다.

오전 10시쯤 수련생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소식이 전해졌다. 사복경찰들이 대열 속에 섞여 거짓 소식을 퍼뜨리고 있으니 무시하고 휩쓸리지 말라는 주의였다.

오후 2시쯤 경찰차가 북에서 남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차에 달린 확성기로 ‘베이징시 공안국 통지’를 반복해서 방송했다. 몇몇 경찰이 인쇄된 단면 ‘통지’를 수련생들 손에 나눠줬다. 나도 하나 받아 읽어봤는데, 대강 빨리 해산하라는 내용이었다. 경찰차는 길을 따라 계속 방송을 틀었고, 경찰도 계속 수련생들에게 ‘통지’를 나눠줬다. 모두가 다 들었고 적지 않은 수련생들도 받아 읽어봤지만, 내가 볼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 경찰들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대표들이 중난하이 안에서 국무원 지도부와 협상하고 있는데, 이 일은 당신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오후 3시쯤 사복경찰 몇 명이 다가와 우리를 향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한 사복경찰은 한참 찍다가 의자까지 가져와 그 위에 올라서서 뒷줄 수련생들을 촬영했다. 당시 나는 젊었고 줄곧 첫 번째 줄에 서 있었는데, 누군가 사진을 찍는 것을 보자 본능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잘 좀 찍어줘야 할 텐데.’

우리와 함께 서 있던 사람 중에 군인 수련생이 한 명 있었는데, 어느 노수련생의 사위로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군계급도 낮지 않았다. 사복경찰들이 사진을 찍고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인 두 명이 와서 그를 군중 속에서 불러냈다.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뒤 그를 데려갔다. 그날 저녁 7시 넘어 그가 노수련생에게 전화를 걸어 별일 없다고 했는데, 부대로 불려 가서 경위를 조사받고 다시는 푸유가에 오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날 군복을 입고 군중 속에 서 있던 수련생이 그 만이 아니었고, 경찰복을 입은 수련생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점은 밤 10시 이후 대규모 철수가 시작될 때의 일이다. 많은 버스들이 푸유가로 배치돼 수련생들을 데려다주려 했다. 적지 않은 사복 요원들이 차 옆에서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랑팡(廊坊)에서 온 분들 이리 오세요! 랑팡 분 계세요?” “허베이에서 오신 분들, 허베이!” 그러자 나와 한 수련생은 그들 옆으로 달려가 서서 함께 소리를 질러줬다. 그 순간 우리의 목표는 완전히 일치했다. 자정 전에 수련생들을 안전하게 모두 집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2. 행인, 가족, 허쭤슈

‘4·25’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오전 8시 이후 도로에 행인이 점차 많아졌고, 걸어가는 사람도 있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있었는데, 모두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도로 한복판에는 노선 버스와 승용차가 오가고 있었으며, 당시 푸유가는 양방향 도로였다.

어느 베이징 수련생의 가족이 지나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집에 돌아가 다시 차를 몰고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와서 푸유가를 따라 달리며 당시 현장을 촬영해 영상으로 남겼다. 지나가는 노선 버스 안에서도 창가에서 촬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일부 승용차도 창문을 열고 우리를 찍었다.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수만 명이 도로 한쪽에서 붉은 담벼락을 향해 조용히 서 있었는데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고요함의 힘이 공간 속에서 강렬한 에너지를 형성해 행인들도 말을 하지 않고 모두 빠르게 지나갔다. 노선 버스와 승용차도 고요한 가운데 달렸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그 힘에 영향을 받아 함께 조용해졌다.

이 전체적인 고요함은 오후 3시 이후 한동안 깨졌다. 갑자기 많은 행인들이 나타나 수련생 대열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걸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큰 소리로 계속 외쳤고, 한 무리가 지나가면 잠시 후 또 한 무리가 왔다. 알고 보니 베이징의 각 기관과 많은 파룬궁수련생들의 가족들이 빨리 푸유가로 가서 자기 기관 직원이나 가족을 데려오라는 통지를 받은 것이었다. 이들이 와보니 인산인해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위에서는 재촉하고,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걸어 다니며 이름을 부르며 운 좋게 찾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후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맞은편 붉은 담벼락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걸어왔다. 키가 매우 작고 약간 등이 굽어 있는 이 사람은 걸으면서 이쪽을 힐끔 보더니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고 매우 어색하게 수상쩍어 보였다.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수만 명이 도로 이쪽에 서 있었고 맞은편 붉은 담벼락 아래는 원래 아무도 없었는데, 이 사람이 벽을 따라 걸어오자 수만 쌍의 눈이 그를 바라봤다. 그는 매우 빠르게 걸었고 조금 겁먹은 것 같았으며, 황토색 옷까지 입고 있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눈빛이 수상하고 족제비 같지?’

그때 한 수련생이 그를 알아보고 말했다. “저 사람이 허쭤슈(何祚庥)야!” 모두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이 바로 톈진 교육대학 사건의 주범이었던 것이다! 바로 내 옆의 수련생이 내가 아는 베이징 보도원에게 물었다. “사람을 보내서 그에게 따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 모두 이 사람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 보도원은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우리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와 주변의 몇 수련생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허쭤슈가 중난하이 서문 경비와 몇 마디 교섭하고 등록 절차를 마친 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아마 수련생 대표가 안에서 상황을 설명한 뒤, 국무원이 허쭤슈를 불러 사실 확인을 한 것 같았다.

3. 수련생 무리

오전 9시가 좀 지나 10시쯤이 될 때, 내 남쪽으로 약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박수 소리와 소란이 일었다. 잠시 후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국무원 총리 주룽지(朱鎔基)가 서문에서 나와 수련생들을 만났고, 무작위로 3명의 수련생을 대표로 선발해 중난하이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설명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는 전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연구회 책임자들도 안으로 불려 들어가 협상을 진행했다.

오후에는 담당 직원이 서문에서 나와 수련생 몇 명을 더 안으로 불러들여 협상을 진행했다. 이때 지도자급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먼저 수련생들에게 다가와 대화를 청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직접 내 옆에 있는 대학교수를 찾아왔다. 알고 보니 대학 동창이었다. 이 교수는 자신의 동창에게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톈진 교육대학 사건, 수련생들이 왜 왔는지, 우리의 세 가지 요구사항, 그리고 자신이 수련 후 몸과 마음이 좋아진 현황 등을 이야기했다. 역시 교수답게 그녀는 침착하고 조리 있게 근거를 갖춰 설명했다. 그녀의 동창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듣더니 마지막에는 매우 만족한 듯 자리를 떴다.

수련생 대표들이 안에서 협상하는 동안, 모두들 밖에서 조용히 서서 기다렸다. 아침부터 밤까지 수련생들이 끊임없이 하나둘씩 도착해 합류했다. 내가 아는 수련생 중에는 대학교수, 중학교 선생님, 병원 의사가 있었고, 서점 주인, 해외 귀국 박사, 기관 간부, 재학 학생, 퇴직자, 현역 군인도 있었다. 부부가 함께 온 경우도 있고, 어머니와 딸,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온 경우도 있었으며, 임신부와 어린아이도 있었다. 그 임신부 수련생은 임신 7개월이 넘어 배가 많이 불렀는데, 오래 서 있다가 힘들어지면 앞줄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미소를 띠고 가벼운 걸음으로 걸었다. 마치 한가롭게 정원을 거니는 것 같았다.

오전 10시쯤 앞에 서 있던 일부 수련생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기 시작했다. 가부좌에 익숙한 사람도 있었고, 오래 서 있어서 다리가 지친 사람도 있었으며, 전날 밤부터 외지에서 달려와 피로가 쌓여 도저히 서 있을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아는 수련생이 나에게 말했다. “이러면 안 돼요. 사람들이 우리가 연좌 시위하러 온 줄 오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 둘이 역할을 나눴다. 그는 남에서 북으로 걸으며 수련생들에게 주의를 주고, 나는 북에서 남으로 걸으며 앞줄에 앉아 있는 수련생을 보면 말했다. “앞줄에 계신 분들은 앉지 마시고, 피곤하신 분들은 뒤로 가서 쉬세요! 우리는 연좌 시위하러 온 게 아닙니다.” 이렇게 걸으며 계속 말했고, 앉아 있던 수련생들은 그 말을 듣고 문제를 인식하며 즉시 일어섰다. 그렇게 저녁까지 긴 대열의 앞 몇 줄은 전부 서 있는 수련생들로 가득했고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줄곧 걸어 거리 남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때 수련생이 나에게 창안가에도 수련생들이 줄지어 서 있으며 신화문(新華門)까지 이어진다고 했고, 북쪽 원진가 방향으로는 베이하이 공원(北海公園)까지 서 있다고 했다. 나중에 어떤 수련생이 당시 베이징 공안이 집계한 수련생 수가 11만 3천 명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인원수에 관해서는 사실 간단한 추산 방법이 있다. 중국 북방인의 평균 어깨 너비는 39센티미터이고, 푸유가 전체 길이는 1,700미터다. 수련생들이 5줄로 서 있다고만 해도 2만 명이 넘는다. 게다가 골목 안에, 창안가에, 원진가에 있는 사람은 포함하지도 않은 것이다. 외지에서 온 수련생들은 톈진, 랑팡, 바오딩(保定), 라이수이(淶水) 등 주로 베이징 인근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멀리서 오는 수련생들도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지만, 상당수가 중간에 막혀 오지 못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오후 1시 반에 함께 서 있던 수련생에게 전화가 왔다. 톈진에서 잡혔던 수련생들이 전부 석방됐다는 소식이었다. 이 수련생의 친척이 톈진에 가서 톈진 교육대학에서 톈진 수련생들과 함께 잡혔는데, 나온 뒤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락해 온 것이었다. 우리는 이때 청원에서 제기했던 세 가지 요구사항 중 첫 번째가 이미 달성됐다는 것을 알았다. 나머지 두 가지, 즉 파룬궁 수련자들에게 합법적이고 너그러운 수련 환경을 주는 것과 파룬궁 서적 출판을 허용하는 것은 수련생 대표들이 아직 협상 중이었다.

한 수련생의 아이가 나와 함께 있었다. 오후가 되자 아이는 다리가 아프고 배도 고팠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골목 안에 있는 구멍가게에 가서 컵라면을 사 먹었는데, 많은 수련생들이 그곳에서 물을 사고 있었고 화장실에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푸유가 서쪽에는 골목이 많았는데, 거리에 자리가 없어지자 골목 안도 수련생들로 가득했다. 이 골목에 사는 베이징 수련생도 있어서 우리 몇 명은 골목 안 수련생 집의 사합원(四合院)에 가서 잠시 앉아 쉬며 물을 마시기도 했다.

골목을 걷다가 앞에서 한 노인이 얼굴이 벌게져서 수련생들을 향해 무언가를 소리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련생 몇 명이 그에게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는 수련생들이 청원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 흥분해 거친 말로 수련생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련생들이 설명하려 해도 그는 전혀 듣지 않았고 몇몇 행인들도 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 수련생들에게 말했다. “상대해 줄 필요 없어요, 가요!” 수련생들이 자리를 떠나자 구경꾼들도 흩어졌고, 어안이 벙벙한 노인만 그 자리에 남아 어쩔 줄 몰라 했다.

4. 대철수

밤 9시 반쯤 전 연구회 책임자 등이 중난하이 서문에서 나왔다. 나는 그와 같은 법공부 큰 모임 출신이라 반겼다. 그가 우리에게 말했다. “수련생들에게 세 가지를 전해야 합니다. 첫째, 톈진에서 잡혔던 수련생들이 전부 석방됐습니다. 둘째, 내일 우리 대표 몇 명이 계속 협상하러 올 것입니다. 셋째, 수련생들은 자정 전에 전원 철수해야 하며, 외지에서 온 수련생 중 돌아가기 어려운 분들은 베이징 수련생들이 숙박을 도울 것입니다.” 말을 듣자마자 우리는 즉시 사방으로 흩어져 수련생들에게 알리기 시작했고, 대철수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먼저 함께 온 수련생들에게 달려가 알리고 각자 흩어져서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뒤, 나 역시 길을 따라 계속 알리며 다녔다.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어떤 수련생들은 통지 자체를 의심했고, 세 가지 요구가 달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떠날 수 없다고 하는 수련생도 있었으며, 본능적으로 이 결과를 믿고 싶지 않아 떠나려 하지 않는 수련생도 있었다. 특히 외지에서 온 수련생들 중에는 망설이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전달하는 수련생이 점점 많아지면서 전체적으로 움직임이 시작됐다.

나는 의심하는 수련생들을 많이 만났고 한 명 한 명 설명해 줬다. 친숙한 수련생들도 의심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해외 귀국 박사는 듣더니 멍하니 굳어서 물었다. “정말인가요?” 나는 반문했다. “자네까지 믿지 않는 건가?” 법공부 모임에서 그의 오성은 정말 뛰어났기에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수련생들에게 뛰어다니며 알리는 중에 어떤 사람이 달려와 나를 붙잡고 말했다. “저 분들 좀 설득해 주세요. 저는 정말 못 하겠어요. 저분들이 도무지 안 움직여요!” 나는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따질 겨를도 없었다. 어쨌든 수련생들을 떠나게 할 수만 있으면 됐다. 그가 나를 골목 깊숙한 곳으로 데려가자 외지에서 온 수련생 상당수가 땅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가서 철수 소식을 전했다. 한 여성 수련생이, 둥그스름한 얼굴로 아마 그들의 보도원인 것 같았는데, 직접 나에게 따졌다. “당신이 특무(스파이)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그제야 이해가 됐다. 온종일 사복 특무들이 수련생 사이에 섞여 갖은 방법으로 수련생들을 떠나게 하려 했으니,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낯선 곳에서 경계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겠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논어(論語) 한 단락을 외워봐요.” 내가 물었다. “외울 수 있으면 가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바로 외우기 시작했고 매우 유창하게 나왔다. 몇 구절을 외웠을까, 그녀가 말했다. “됐어요 됐어요, 믿을게요!” 그러자 ‘와’ 하는 소리와 함께 20~30명이 동시에 일어나 짐을 챙겨 자리를 떴다.

이렇게 해서 밤 11시쯤이 되자 대부분의 수련생들이 거의 다 떠났다. 나는 푸유가를 따라 먼저 남에서 북으로 걸으며 도움이 필요한 외지 수련생이 있는지 살폈다. 북쪽 입구까지 걸어가 원진가로 돌아서자 아는 보도원을 만났는데, 그도 대열을 이끌며 철수하고 있었다. 이후 나는 다시 북쪽 입구에서 남쪽으로 걸어 내려오며 곳곳에 배치된 대형 버스와 노선 버스를 봤다. 외지 수련생들이 조용히 하나둘씩 버스에 올라탔고, 한 대가 가득 차면 출발했다. 길을 걷다 베이징 수련생 몇 명을 만났는데, 비닐봉지를 들고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대부분의 쓰레기는 행인과 경찰이 버린 것이었는데, 그들은 하나하나 찾아 모두 봉지에 담았다. 쓰레기는 이미 그다지 많지 않았다. 외지 수련생들이 떠나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이미 다 챙겨갔기 때문이었다.

모든 버스가 다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남쪽 출구로 걸어가 지하 통로를 통해 집에 돌아가려 했다. 지하 통로 입구에 이르자 전 연구회와 베이징 지도 총부의 책임자 몇 명이 거기 서서 푸유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련생들이 전부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뜰 참이었던 것이다. 수만 명이 한 시간 남짓 만에 전부 조용히 철수했고, 땅에는 종이 부스러기 하나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 마음이 바르게 돌아온 힘의 발현이었다.

책임자들이 떠나길 기다린 후, 11시 반쯤이 됐을 때 나는 지하 통로 입구에 발을 들이기 전 뒤를 돌아 푸유가를 바라봤다. 거리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때 거리에는 이미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이 도로를 비추는 가운데 거리 전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세례를 받은 후 왕성한 생명력을 발산하는 것처럼, 에너지가 담긴 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문득 두 글자가 떠올랐다. ‘휘황(輝煌)!’ 이 하루는 영원히 빛날 것이다.

 

원문발표: 2026년 4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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