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네이멍구 대법제자
[명혜망] 얼마 전, 수련생 A가 제 집을 찾아와 함께 교류를 나눴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수련생 B에게 상처를 줬던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뒤늦게 사과를 했지만, 상대방의 마음속 응어리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A가 고민스럽게 말했습니다.
“저는 성격이 외향적이고, B는 내향적인 편이에요. 그래서 마음속에 담아두고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죠. 저는 최근에 제 과시심, 독단적인 마음, 강한 자아를 깨달았고, 공개 교류 자리에서 다 같이 있는 앞에서 폭로하기도 했는데, B는 여전히 예전의 눈으로만 저를 보는 것 같아요.”
A의 말에는 원망이나 불만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B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하게 제 생각을 나눠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A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금 본인 성격이 ‘외향적’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도 외향적인 성격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는데, 그런 분들은 사람을 대할 때 활달하고 따뜻해서, 함께 있으면 봄바람 같은 느낌을 줘요. 그런데 A씨가 말하는 ‘외향적’은, 아무런 준비나 배려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해버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상대방이 불편하거나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아요.
얼마 전에, 제가 가장 바쁠 때 A씨가 교재를 빨리 써달라고 재촉하셨잖아요. 그 말투가 마치 제가 하던 일을 다 내려놓고 당연히 당신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나중에 A씨 본인이 교재 자료를 준비해보고 나서야 얼마나 많은 작업량인지 아셨잖아요. 물론 A씨의 본심이 그런 게 아닌 줄 알아요. ‘우리 사이인데 뭘, 그냥 편하게 얘기하면 되지’라는 친근함이었겠죠. 하지만 받아들이는 제 입장에서는 분명히 불편함을 느꼈어요. 그것도 A씨가 저에게 부탁하는 상황, 즉 자세를 낮춰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랬어요.
그런데 예전에 A씨와 B가 같이 일할 때는 어떠셨어요? A씨는 스스로를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일들을 B에게 설명하거나 상의할 필요를 못 느끼셨을 거예요. ‘내 방식대로 하면 돼, 그게 번거로움을 줄이는 거야’라고 생각하셨겠죠. 하지만 A씨와 B는 협력 관계였잖아요. B는 함께 일하면서 평등함도, 존중도 느끼지 못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 B의 마음속에 A씨에 대한 인상이 ‘나를 무시하고 내 감정을 늘 무시하는 사람’으로 굳어버린 거예요. 그렇게 되면 사람이 예민해지게 돼요. A씨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 특정 표정, 아니면 그냥 팔을 휙 젓는 행동 하나에도 B는 상처를 받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모든 걸 그냥 ‘외향적인 성격’이라는 말 하나로 덮으실 건가요? 이건 사람을 대할 때 배려와 역지사지를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자아의 표현이고, 예의의 부족이며, 개인 수양의 미흡함이에요.”
A는 제 말을 듣고 크게 마음이 흔들렸는지,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맞아요, 저는 정말 수양이 부족해요. 평소에 아이를 가르칠 때도, 말을 안 들으면 겁을 주거나 위협적인 말을 내뱉곤 했어요. 그런데 한번은 남편도 아이한테 화가 많이 났는데, 30분을 옆에서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더니, 아이에게 차분하게 왜 규칙을 지켜야 하는지, 부모가 계획을 세우는 게 아이의 어떤 부분을 키워주기 위한 건지, 그리고 방종하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는지를 조목조목 이야기해줬어요. 아이는 한마디 한마디를 마음에 새기듯 들었고, 옆에서 지켜보던 저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그 순간 남편의 수양이 저보다 훨씬 높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저는 A가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을 보고 이어서 교류했습니다.
“바로 그게 이유예요. 결혼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남편이 A씨와 어머니의 수련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요. 남편은 수련인이 큰 시비 앞에서 정의를 지키기 위해 생사도 초월할 수 있다는 것,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보여주는 고상한 도덕을 깊이 접해본 적이 없어요. 매일 같이 생활하면서 마주치는 건 이런 자잘한 일상의 모습들뿐이에요. A씨와 어머니의 사소한 행동들을 보면서 ‘수련을 그렇게 오래 했는데 일상적인 수양이나 처신은 오히려 내가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 A씨가 말하는 수련의 아름다움이나 초월적인 것에 관심을 가질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거예요.”
A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신이 버릇처럼 하는 말인 “저 원래 말 직접적으로 하는 편이에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라는 말이 나오자, 그제야 눈물 속에 웃음이 번졌습니다.
저는 그 말을 실마리 삼아 이렇게 이어갔습니다.
“사실 ‘저 말 직접적으로 해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라는 말, 이게 일종의 도덕적 강요 아닌가요? 속뜻은 이런 거잖아요. ‘내 말이 듣기 싫어도 참아야 해. 못 참으면 네가 속 좁은 거야.’ 그러면서 자신은 그 면책 선언 덕분에 솔직하다는 이름 아래 마음껏 말할 수 있는 거고요. 상대방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굳이 그렇게 하는 건, 솔직함 뒤에 자아뿐 아니라 ‘악(惡)’까지 숨어 있는 거 아닐까요?
예전에 저도 예의범절을 쓸데없는 격식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사회적 거리와 경계가 필요해요.
어릴 적에 친척집 열쇠를 하나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 집 식구들이 외출할 때 저희가 가서 화분에 물도 주고 환기도 시켜주라고요. 그런데 한번은 친척이 저희 가족을 집에 초대했을 때, 저희가 그냥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버린 거예요. 노크도 안 하고요. 친척 가족들이 거실에 앉아 있다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어요. 친척 아들이 직접적으로 말하더라고요.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해야 한다고, 자신들에게도 사생활이 있다고요.
수년이 지나서야 그 행동이 얼마나 실례였는지를 깨달았어요. 저희는 ‘현관에서 거실까지 완충 공간이 있으니까 준비할 시간이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자기 집 구석구석이 모두 사적인 공간인 거잖아요. 우리가 그냥 들이닥친 건, 마치 그 집 침실에 쑥 들어간 것과 다름없는 거예요.”
A는 박장대소를 하며 오늘 교류가 정말 값졌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집에 돌아가면 가족과 지인들에게 자신이 또 이런 실수를 하면 바로 지적해달라고 부탁하겠다고 했습니다.
A를 배웅하고 나서, 오늘 나눈 대화를 되새기다가 문득 머릿속에 번쩍이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오랫동안 마음 한켠에 걸려 있던 의문 하나가 그제야 풀렸습니다.
A가 저에게 일을 재촉했던 것처럼, 저도 예전에 그 친척 아들에게 똑같은 짓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였는데, 그 동생이 손글씨를 잘 써서 전화를 걸어 청첩장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동생은 금융 업계에서 일하는, 말 그대로 시간이 빡빡하고 압박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의 요즘 근황이나 바쁜 상황은 물어보지도 않고, 마치 명령을 내리듯 말했습니다. ‘신부가 제일이고, 결혼 앞에서는 모든 게 비켜서야 한다’는 듯한 태도로요. 그때 그 동생이 반농담처럼 원고료가 있냐고 물었는데, 그게 완곡하게 불만을 표현한 거였다는 걸 오늘에야 비로소 알아챘습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노크도 없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든, 상대가 바쁜지도 확인 않고 멀리서 일을 시킨 것이든, 이 배려 없고 예의 없는 제멋대로인 행동들이 바로 수양 부족의 표현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그런 줄도 몰랐고 별것 아니라고 여겼던 이런 작은 일들이, 상대방과 지내온 세월 동안 반복해서 일어났을 수 있습니다. 상대가 말하지 않는 건 수양과 인내심 때문이지만,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 그 사람 마음속에 부정적인 인식과 인상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뚜렷한 예가 바로 이것입니다. 십여 년 전, 그 친척이 제 부모님을 베이징 여행에 데려갔을 때, 어머니에게 “너무 호들갑 떨지 마세요”라고 특별히 당부했고, 아버지에게는 “열쇠를 벨트에 달고 다니면 딸랑거리니까 가방에 넣어서 다니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월 동안, 저와 어머니가 어떤 방식으로 진상을 이야기해도 그 친척은 콧방귀를 꼈습니다. 친척의 아내는 어머니(수련생)에게 “당신이 뭘 알아요?!”라고 비아냥거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바로 이 일상의 사소한 예절과 수양의 부족이 그들로 하여금 ‘이 사람들은 수양도 부족하고 인식도 제한적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 것이고, 그것이 진상에 대한 거부감과 우리에 대한 오해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사소한 일에 너무 집착한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수양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속에서 이것은 ‘예(禮)’라고 하며, 전통문화의 일부입니다. 인(仁)·의(義)·지(智)·신(信)·온(溫)·양(良)·공(恭)·검(儉)·양(讓)과 나란히, 하늘을 공경하고 덕을 중히 여기며 대대로 전해온 가르침이지요. 온 세상이 넓어 수많은 민족이 멀리 변방에도, 물가에도 살았지만, 중원으로 들어오면 예외 없이 화하(華夏)의 문명에 동화되었고, 날것을 먹고 머리를 풀어헤친 야만적인 풍습을 스스로 버렸습니다. 옛 사람들의 눈에 예를 모르는 자는 곧 오랑캐였습니다.
오늘날, 특히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중국공산당의 여러 차례 운동을 거치며 “진흙투성이가 되고, 굳은살이 박이고, 몸에 혁명의 이를 키우라”는 사악한 공산당 당문화에 물들어, 전통적 관념을 쓸데없는 격식으로 여기게 된 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무례함을 ‘스스럼없음’이라 하고, 목소리 큰 것을 ‘시원시원함’이라 하며, 직설적인 것을 ‘꾸밈없음’이라 불러 자신의 무례한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수련인 중에도 그런 분들이 없지 않습니다.
사부님께서는 “큰 뜻을 품고서도 작은 일에 소홀하지 않다”(정진요지-성자)라고 하셨습니다. 젊을 때 그 말씀을 가볍게 읽고 지나쳤는데, 지금은 천근처럼 무겁게 다가옵니다. 대법은 지극히 미세하고 지극히 광대하여 무량한 홍궁(洪穹)과 가장 미시적인 입자까지 관통합니다. 그렇다면 대법에 동화되는 수련인으로서,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세 가지 일부터, 하나의 생각, 한마디 말, 하나의 행동까지, 모두 법의 기준에 부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월 동안 저는 적지 않은 수련생들을 보아왔습니다. 말할 때는 늘 거시적인 이야기를 즐겨 합니다. 올해 삼퇴를 몇 명 도왔는지, 《전법륜》을 몇 번 읽었는지 같은 이야기요. 하지만 일상적인 행동의 작은 부분을 바로잡고 살피는 것은 소홀히 합니다. 밥 먹을 때 크게 꿀꺽거리거나 쩝쩝 소리를 내고, 말할 때 싸우는 것처럼 큰 소리를 치고, 별다른 급한 일도 아닌데 낮잠 시간에 수련생 집을 방문해 그 집 가족의 낮잠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소해 보이는 문제들 뒤에는 사실 당문화와 예의범절의 결여가 숨어 있습니다. 이것들이 세인에게 남기는 첫인상을 결정짓고, 오래도록 고치지 않으면 결국 사람을 구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A가 찾아온 것은 사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경험을 거울삼아 제 자신의 과거를 비추어 보게 하시고, 여러 해 수련 속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문제들과 외부 형상 및 개인 예절의 중요성을 체득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또한 저는 이것도 깨달았습니다. 진상을 여러 번 이야기해도 꿈쩍 않는 분들에게는, 자신의 언행을 바로잡는 것 자체가 진상을 전하는 방식이 된다는 것을요. 그리고 말보다 훨씬 더 깊이 와닿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상은 최근의 깨달음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이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6년 4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4/16/5088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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