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올해 저는 80세입니다. 젊은 시절 입대해 군 복무를 했고 제대 후에는 시(市) 국영 기업에서 근무했습니다. 1994년 저와 아내는 다행히 대법을 얻었습니다. 저를 고통스럽게 괴롭히던 류머티즘, 신우신염, 장염 등 여러 가지 질병이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 1~2개월 만에 모두 완쾌됐습니다.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약을 먹지 않았으니 직장의 의료비를 수만 위안이나 절약해 준 셈입니다. 우리는 사부님 가르침을 엄격하게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심성을 닦으며 사상 경지를 끊임없이 제고했습니다. 아내의 갑상선종 증세도 사라져 30년 넘게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제 막내아들이 제 일을 갓 이어받았을 때 황달성 간염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병원 주치의는 거액의 의료비를 요구했고 수표도 안 되며 반드시 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완치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구체적인 상황을 말해주고 집에 와서 우리와 함께 법공부를 하고 연공하자고 했습니다. 연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부님께서 아들의 신체를 정화해 주셨습니다. 치아만 하얗고 전신 피부가 겁이 날 정도로 노랗게 변하더니 점차 간염이 나았습니다.
1. 박해 초기, 시련을 겪다
1999년 ‘7·20’ 이후 중공 악당의 사악한 깡패 집단은 파룬궁에 대한 유혈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저와 아내는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으나 가는 길에 현지 정부가 파견한 10여 명에게 붙잡혀 돌아왔고, 이후 11일 동안 심하게 매질을 당했습니다. 파출소는 저를 대상으로 학습반을 열고 보도소장, 부보도소장, 소그룹장, 적극분자 등 온갖 직함을 씌웠습니다. 우리 파룬궁은 조직이 없으며 소위 보도소장이라는 것도 보수 한 푼 없이 자원해 모두를 위해 봉사하는 수련자일 뿐입니다. 저와 우리 가족 자체가 수혜자이자 좋은 증거였기에 제 마음속에는 파룬따파는 좋다는 확신이 확고했습니다.
우리는 여러 차례 불법 감금되고 매질을 당했습니다. 가장 심했던 때는 2001년 10월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경영부에서 씨앗을 판매하며 상담하러 온 농민들에게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610’, 정부 간부, 사회 건달 등 총 10여 명 무리가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저를 꽁꽁 묶어 읍 정부 뒷마당으로 끌고 가 대문을 걸어 잠근 뒤 앞뒤를 가리지 않고 마구 때렸습니다. 나무 막대기, 대나무 장대, 그리고 맞으면 유난히 아픈 가시 대나무 회초리 등으로 사정없이 휘둘렀고 구두 앞코로 차고 주먹으로 마구 쳤습니다. 악한 무리 10여 명이 저를 둘러싸고 때리는데 나무 막대기가 토막토막 부러지고 대나무 장대가 갈기갈기 찢어져 빗자루처럼 될 때까지 구타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 머리는 부어서 커다란 할미새 같았고 눈꺼풀은 주먹 하나 높이만큼 부어올라 앞이 보이지 않았으며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오른쪽 정강이뼈는 높게 튀어나왔습니다. 온몸에 성한 살점이 20%도 남지 않았으며 고통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일주일 동안 눈에서 피가 흘렀고 조금 앞을 볼 수 있게 되자 저를 구류소에 보내 15일간 불법 구류한 뒤, 다시 읍 정부 뒷마당에 가두고 수갑을 채워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가장 악독했던 것은 남녀 수련생을 좁고 캄캄한 방 하나에 모두 몰아넣고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을 안에서 해결하게 한 점입니다. 변기 통이 가득 차도 비우지 못하게 했고 옆방이 화장실이라 구더기와 파리, 모기가 온 방에 가득했습니다. 쥐가 돌아다니고 바닥 잠자리에는 구더기가 기어 다니며 이불 속으로 뱀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온몸은 벌레에 물려 퉁퉁 부었습니다.
불법 감금된 지 두 달여가 지났을 때 제 아내도 이 캄캄한 방에 갇히게 됐습니다. 당시 아내는 돌이 지난 어린 손자를 안고 함께 들어왔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사부님을 욕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시고 ‘진선인’을 수련하라고 가르치셨는데 무엇이 틀렸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이어야 남에게 욕하라고 가르칩니까. 제가 왜 날 가두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그들은 만나주지도 않고 매일 돈을 내라고 압박했습니다. 1만 위안(약 200만 원)을 내야 풀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게 무슨 정부인가? 이게 무슨 공산당 간부인가? 이런 갈취와 겁박은 무법천지이며 헌법 위반이고 인권 침해이자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니 중국공산당(중공)이야말로 진정한 사이비 종교다.’
2000년 한 해 동안 저는 총 세 번 불법 감금됐고 가장 길게는 두 달 넘게 갇혀 있었습니다. 제가 운영하던 수만 위안 가치의 종자 점포는 정부에 의해 망가졌고, 몇 차례 가택수색으로 크고 작은 녹음기 4대를 뺏겼으며 집안의 쌀과 기름까지 전부 가져갔습니다. 그들은 우리 부부를 중점 인물로 간주해 마음대로 가택수색을 하고 잡아갔으며, 구타 후에는 수갑을 채워 대대와 마을로 끌고 다니며 조롱거리로 만들고 높은 의자 위에 강제로 서 있게 했습니다. 밤이면 그들은 술을 마시고 배를 채운 뒤 우리를 발로 차고 주먹질하면서 무릎을 꿇렸습니다. 심지어 사회의 좀도둑이나 강도 같은 인간말종들을 조종해 우리를 때리게 했습니다. 아내는 치아 한 개가 빠지고 여러 개가 흔들리게 됐습니다. 손대기를 꺼리는 공무원들은 월급이 깎이거나 욕을 먹었고 구타에 참여한 자에게는 20~100위안씩 포상금을 줬습니다.
한번은 정부 인원들이 이곳의 대법제자들을 줄로 엮어 각 마을로 끌고 다니며 모욕을 주고 사람들을 겁박했으며, 다시 읍 정부 마당으로 끌고 와 폭행했습니다. 당시 박해 가담자가 40여 명에 달했습니다.
박해 초기 몇 년 동안 우리집은 단 하루도 평온할 날이 없었습니다. 때로는 한 무리 사람들이 도적 떼처럼 한밤중에 담을 넘어 들어왔고, 때로는 잠복 감시하다가 수시로 납치했습니다. 아내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강제로 약을 먹어야 했고 밥에도 몰래 약을 섞었는데, 이는 그녀가 직접 귀로 들은 사실입니다. 그 몇 년간의 박해 속에서 우리는 여러 차례 벌금을 물어 현금만 4만 위안 이상 지출했습니다. 불법 감금돼 있는 동안 3만 위안어치의 씨앗이 모두 썩어버렸습니다. 경제적 수입이 끊기고 사회적 압박이 심해지자 막내아들의 아내도 떠나갔습니다. 우리의 심신과 명예는 극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들은 제 큰형님 집에 가서 억지로 밥을 얻어먹으며 형님을 협박하고 “동생이 어디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당시 읍 정부 뒷마당에 불법 감금돼 있었는데도 뻔뻔하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물어본 것입니다.
읍 정부 뒷마당에 7개월 넘게 불법 감금돼 있던 어느 날 우리는 마침내 탈출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집을 떠나 유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읍 정부는 곳곳에 우리 사진을 붙여 수배했고 친척들을 괴롭혔습니다. 여러 번 우리 아들을 파출소로 끌고 가 뺨을 때리며 박해하고 우리 행방을 캐물었습니다. 집을 몰수하겠다거나 큰아들의 장사를 막겠다고 위협했으며 제 월급 1년 치를 강제 압류했습니다.
2. 사부님과 법을 믿으며(信師信法) 서약을 실현하다
사악이 아무리 미친 듯이 박해해도 우리는 시종일관 확고하게 사부님과 법을 믿었으며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기 위해 우리는 가는 곳마다 대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현수막을 걸고 자료를 배포하며 진상 스티커를 붙이는 등 주변 마을과 읍치고 안 해본 곳이 거의 없습니다. 당시 곳곳에 대법을 비방하는 사악한 현수막과 표어들이 자주 등장했는데, 매번 한밤중에 긴 대나무 장대와 낫을 들고 가서 그것들을 베어내고 폐기했습니다. 당시의 마음가짐은 대법을 실증하는 일이라면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기에 병업(病業)을 겪는 수련생을 돕고 현지 수련생들을 협조하는 등의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한번은 어느 곳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하려는데 거리에 보조 경찰들이 많이 서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제가 손을 흔들며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신들 움직이지 마세요. 우리는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정말로 그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우리가 진상 알리기를 마쳤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또 다른 큰 시장에서는 현지 정부가 대법과 사부님을 모함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해독을 끼치는 사악한 전시판들을 많이 세워두었습니다. 경찰 4~5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밤 11시 넘어서도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처음엔 페인트를 준비해 새벽 4시경에 가서 그 전시판들을 모두 칠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유성 재질이라 그들이 닦아내고 다시 복구해 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튿날 다시 행동에 나서서 칼로 그것들을 찢어버렸습니다.
한 성(省) 정부 소재지에서 세 칸 방 너비에 1.5층 높이의 거대한 사악한 광고판을 제거한 적도 있습니다. 아주 멀리서도 보이고 작은 전시판 7~8개가 함께 있어 사람들을 심각하게 중독시키고 있었습니다. 너무 눈에 띄고 경찰차까지 감시하고 있어 수련생들이 걱정하며 쉽게 손을 대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한밤중에 주변 환경을 살피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그것들을 찢어 없앴습니다. 찢을 때 ‘좌르륵’ 소리가 나서 사실 좀 긴장되기도 했습니다.
유랑생활을 한 3년 동안 우리는 10여 개의 현과 시를 다녔고 어느 곳에서든 자기 집에서처럼 대법의 일을 했습니다.
수련 환경이 변함에 따라 저와 아내도 집으로 돌아와서 정상적인 생활을 시작했지만 사악은 여전히 수시로 괴롭힙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대법을 알리고 대법제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는 채소를 가꾸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는데, 이는 사람을 구하는 데 더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정법(正法) 노정에서 사부님께서는 한시도 빠짐없이 저희를 보살피고 보호해주셨습니다. 두 번 정도 수련생의 자료점에서 사악에게 납치될 뻔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그 자료점은 외지 수련생 몇 명이 공동 임차한 곳으로 이미 사악의 표적이 되어 몇 달간 잠복 감시를 당하던 중이었습니다. 우리가 자료를 챙겨 막 내려오자마자 잠복하던 사복 경찰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납치된 수련생에게 “그 삼륜차 탄 사람이 누구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또 한번은 우리가 전날 방문했던 자료점이 다음 날 가택수색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사악이 이미 잠복하며 노리고 있었기에 많은 수련생이 연루되고 자료점 여러 곳이 파괴되는 등 손실이 매우 컸습니다. 아마도 휴대폰이 도청당했던 것 같은데 다행히 저희는 밖에서 절대 휴대폰으로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의 수련 길에서 제자는 반드시 정진실수(精進實修)하여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원문발표: 2026년 2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2/6/5059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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