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끈에 이끌려 대법으로 돌아와 다시 정진하다

글/ 중국 산둥성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4년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대법제자이며 당시에는 매우 젊었습니다. 그해 저는 지난(濟南)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부모님께서 많은 고향 분과 함께 지난에 오셔서 기공 학습반에 참가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이 기공이 매우 훌륭해서 많은 사람이 배운 후 가정이 화목해지고 학생들은 공부도 잘하게 됐다며 저에게 배울 의향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저는 듣자마자 흥미가 생겨서 기꺼이 배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께서 저의 등록을 도와주셨는데, 나중에야 이것이 사부님께서 지난에서 개최하신 제2기 학습반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그때 학습반 장소는 황팅(皇亭) 체육관이었는데, 처음 입장했을 때 상황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체육관이 매우 크다고 느꼈으며(나중에 다시 가봤는데, 체육관 중앙은 농구장 하나 정도 크기였습니다), 바닥은 나무 마루였고 체육관 전체가 금빛과 푸른빛이 어우러져 다소 눈부시게 빛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운 좋게 체육관 중앙 마루에 앉았는데, 그때 많은 수련생이 사부님께서 우리 고향 제자들을 특별히 배려해주셔서 사부님과 가장 가까운 구역에 앉아 법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었는지 지금이야 알게 됐습니다!

당시 저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입장하시자 장내에는 환영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사부님께서 미소 지으시며 수련생들에게 손을 흔드셨습니다. 사부님을 처음 뵌 순간 저는 신성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 드디어 기공사를 직접 뵙는구나, 정말 좋다!’ 체육관도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저는 사부님 목소리가 매우 소박하고 친절하게 느껴졌고, 이어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사전문화(史前文化)에 관한 설법을 들었습니다.

비록 그때 나이가 어렸지만 저는 사전문화를 진실이라고 생각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마치 설법장과 하나가 된 것처럼 사부님의 설법을 흥미진진하게 들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선생님께서는 왜 몇 분만 설법하시지? 아직 충분히 듣지 못했는데 왜 안 하시는 걸까?’ 사실 사부님께서는 이미 거의 1시간 30분을 설법하셨는데 저는 마치 5분처럼 느꼈던 것입니다.

나중에 쉬는 시간에 아버지께서 다른 분에게 “이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강의하시는데 물 한 모금도 안 드시네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야 저는 이렇게 더운 날씨에 선생님께서 한 강의를 이렇게 오랜 시간 설법하시면서 물 한 모금조차 드시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어진 며칠 동안, 매일 사부님께서 미리 입장하셔서 수련생들의 질문에 답해주시고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정말 대단하시다고 느꼈습니다.

마지막 두 강의에서는 저를 매우 당황하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공법이 매우 좋다고 생각해서 친한 친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는 돈을 쓰는 것이 아까웠고 곧 끝나리라고 생각해서 잔꾀를 부려 친구에게는 수강증을 줘서 정문으로 슬쩍 들어가게 하고(수강증에는 사진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수련생증을 들고 뒷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애써 뒷문을 찾아 그 작은 문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을 때, 앞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천둥소리 같은 사부님의 음성이 제 이마 위에서 울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수강증을 줘서 정문으로 들어오게 하고, 자신은 수련생증을 가지고 뒷문으로 들어오는데, 우리는 여기서 당신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데도 당신은 오히려 우리 직원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저는 마치 ‘방할(棒喝-수행자의 깨달음을 위해 머리를 때림)’을 받은 듯했고, 온몸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는 나를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또한 아주 엄숙하게, 이렇게 들어와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이것이 저의 잔꾀에서 나온 요행 심리였고, 사부님을 이렇게 노하게 하실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10회 강의를 통해 저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수많은 문제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봤던 라오산(嶗山) 도사의 벽 통과술은 그의 심성이 나빠져서 효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어떤 드라마에서 결혼하자마자 스승을 따라서 산에 들어가 도를 닦던 수련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좌선 중에 신혼 첫날밤의 장면이 나타났는데 색욕의 고비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스승이 왔고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보니 꽃 화분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지만 스승은 그가 더는 수련할 수 없다고 하시며 집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저는 ‘그의 사부는 왜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 사부가 물건을 변화시켜(지물화물-指物化物) 그를 시험하신 것이었고, 색욕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더는 수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도를 닦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이제야 도를 닦는 것이 얼마나 엄숙한 일인지 알게 됐습니다!

사부님의 설법을 들으면서 저는 제가 어릴 때부터 찾고 싶었던 장생(長生)의 도를 마침내 찾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또 한번은 강의 중에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것처럼 저는 마침내 제가 찾던 것을 찾았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손오공처럼 흥분돼 무의식중에 바닥에 있던 플라스틱병을 발로 차서 뒤쪽 벽에 부딪히게 했습니다. ‘쾅’ 소리가 나서 저도 놀랐고 주변 사람들도 놀랐습니다.

학습반이 끝날 무렵 사부님께서 모두에게 심득 체험을 쓰게 하시고, 한 편도 빠짐없이 다 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비록 체험한 것이 많지 않고 단지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것만 느꼈지만, 사부님의 말씀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한 페이지를 썼고, 사부님께 제가 모든 것을 알게 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또한 수련의 길이 분명히 매우 고되리라고 알고 있었지만 제가 끝까지 견지할 수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심득 체험 마지막에 ‘저는 어떻게 해야 연공인(煉功人)이 되는지 알았습니다’라는 한 문장을 썼지만, 속으로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반드시 수련을 성취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내 생각에, 내가 공을 전하고 설법하는 것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장래에 당신은 알게 될 텐데, 당신은 이 시간이 매우 보람찼다고 여길 것이다.”(전법륜) 이러한 인연은 정말 언어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학습반이 끝난 후 저는 속인사회로 돌아왔는데 비록 자신이 연공인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심성은 별로 제고되지 않았습니다. 문제에 부딪히면 대부분 잘 넘기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있을 때 저는 시간을 내어 연공하고 다리 누르기와 가부좌를 했습니다.

1995년 졸업하고 집에 돌아온 후 저는 연공장을 찾아 어머니와 함께 단체 연공에 참가했고, 단체 법공부 팀에도 참가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18, 19세로 그저 큰아이였습니다. 그때는 나이가 많은 수련생, 특히 노년층이 많았고 저와 같은 연령대는 매우 적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제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단체 연공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을 보고 인연이 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저도 어른들을 따라 홍법(洪法) 활동을 했습니다. 때로는 법회를 열거나 9일 학습반을 개최하여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방영했고, 대형 단체 활동에도 따라다녔습니다. 이 기간에도 역시 잘할 때와 못할 때가 있었으며 자신의 심성이 별로 제고되지 않았다고 느꼈습니다. 단체 연공과 단체 법공부 환경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때로는 법공부와 연공 환경을 벗어나기도 했지만 때로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만약 사부님께서 남겨주신 단체 법공부 및 연공 환경이 없어서 서로 격려할 수 없었다면 아마 많은 사람이 뒤처졌을 것입니다.

우리 현(縣)에 연공인들이 비교적 많고 발전도 빨랐는데 아마 사부님과 인연이 깊었을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사회에 나오신[出山] 지 얼마 되지 않아 초청을 받고 우리 현에 오셔서 법을 전하셨고 많은 신기한 이야기를 남기셨습니다. 또 사부님께서 과거 한 생에 우리 현 사람이셨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때로는 우리를 “고향 제자”라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에게만 주어진 편득(偏得-의외로 얻음)이라고 생각하며 이 인연을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이렇게 1999년 ‘7·20’ 이전까지 사부님께서 발표하신 신경문과 사부님의 해외 설법 비디오가 우리 지역으로 빠르게 전해질 수 있었고, 저도 운 좋게 모두 빨리 얻어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7·20’ 이전의 그 기간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모두가 정말 비학비수(比學比修)했습니다. 우리 법공부 팀은 법을 배울 때 가부좌를 견지했는데, 정말 1초씩 시간을 늘려나가서 마지막에는 가장 길게 2시간을 견지했고 때로는 연공장에서도 2시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전국적으로 홍법하는 형세도 매우 좋았고 우리 지역에서는 심지어 수천 명이 참가하는 단체 연공 활동도 조직했는데 정말 너무나 좋았습니다.

1999년 7월 20일, 모두가 수련 중에서 용맹정진하고 있을 때 갑자기 형세가 급변했습니다. 장쩌민(江澤民)과 중공 악당이 파룬따파와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를 일으켰고, 하룻밤 사이에 파룬따파와 대법제자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가 시작됐습니다. 연공장과 법공부 팀은 모두 공개적으로 운영할 수 없게 됐고 우리 팀도 잠정 중단됐습니다. 박해가 시작된 후 저는 감옥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제가 고문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사부님께 죄송한 일을 저지르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절대로 사부님과 파룬따파에 죄송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저는 반드시 계속 수련할 것이고 훗날 언젠가 사부님께서 반드시 돌아오실 것이며, 저도 반드시 그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나중에 직장에서 수련 포기 각서를 쓰라고 해서 저는 사교(邪敎)에 참가하지 않고 일체의 사교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썼습니다. 그 후 직장에서는 다시 저를 찾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엄정성명(嚴正聲明)을 발표하여 이 각서가 무효이며 수련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성명했습니다.

수련 환경을 잃은 후 법공부와 연공이 점차 해이해져서 거의 수련을 벗어난 상태에 놓였습니다. 오랫동안 한 번도 연공하지 못했고 한 번도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늘 정진하고 싶었지만 늘 정진할 수 없었습니다. 수련하다가 멈추고 거의 속인과 다름없이 술도 마시고 색(色) 문제에서도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다행히 사부님께서 저를 포기하지 않으셔서 매번 사부님의 신경문과 설법을 얻을 수 있었고 대법제자와도 연락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1996년에 직장에 다닌 후부터 입당(入黨)하고 싶었고 2004년 말에 마침내 입당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심사 며칠 전에 한 수련생이 저를 찾아왔는데, 그는 막 불법적인 강제노동을 끝내고 나와서 저의 현재 상태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제가 입당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왜 거기에 입당하려 합니까? 공산당이 지금 우리를 박해하는데 우리가 아직도 거기에 가입해야 하나요? 지금 많은 수련생이 더는 가입하지 않고 있으니 잘 생각해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떠난 후 저도 이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입당할까, 말까? 결국 입당하지 않기로 했고 그래서 심사 당일에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모두 준비를 마쳤기에 가기만 하면 입당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아예 안 갔는데 결국 입당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2005년 초, 명혜망에서 9평 편집부의 ‘9평 공산당(九評共産黨)’(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을 발표했고 ‘삼퇴(중공 3대 조직인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탈퇴)’의 물결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그때 입당하지 않은 것을 속으로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또 ‘삼퇴’해야 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저는 고향을 떠나 다른 현의 도시로 와서 살았습니다. 이 낯선 도시에서 저는 현지 수련생과 연락하고 싶었습니다. 아마 사부님께서 저의 이 마음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후에 박해로 인해 유랑생활을 하던 고향 수련생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녀는 이 몇 년간 이곳에서 계속 진상 자료 관련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연락한 후 저는 먼저 NTD TV를 설치했고 NTD TV 설치 기술도 배웠습니다. 그 이후로 션윈(神韻) 공연은 매년 빠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그녀에게 인터넷 사용, 자료 제작, 컴퓨터 시스템 설치 등도 배웠습니다. 저는 또한 션윈을 다운로드하여 이미지 자료로 만드는 법도 배웠습니다. 또 그녀를 통해 현지의 한 나이 드신 수련생과 협력했는데 제가 자료를 만들면 그분이 밖에 나가 자료를 배포하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협력했습니다. 현지의 다른 수련생들도 알게 됐습니다.

저는 현지 수련생과 연락하면서 자료점 수련생 한 분을 알게 됐는데 그분은 나이가 비교적 많으셨고 박해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 진상 자료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만든 진상 자료의 양이 비교적 많고 종류도 완전했으며 주변 지역 일부를 맡았습니다. 또 유랑생활을 하는 수련생들을 보호하고 도왔으며 외지 수련생들과도 모두 연락했습니다.

이 나이 드신 수련생은 제가 직업이 있어서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아셨고 또한 저의 안전을 위해서도 기술적인 일, 즉 션윈 디스크 다운로드 및 제작, 진상 USB 제작 등만을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또 10여 년을 협력했습니다. 이후에 자료점이 두 번 파괴됐고 현지에서 작은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나이 드신 수련생은 불법적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아 지금도 여전히 감옥에서 박해당하고 계십니다. [우리처럼 그분의 도움을 받은 대법제자들은 마땅히 더 주동적으로 법률, 발정념(發正念) 등의 방식으로 그분을 도와 부담을 나누고 박해를 반대해야 합니다.]

이처럼 저도 수련생과 협력하여 자료를 만들고 진상 알리는 일들을 했지만 이 몇 년 동안 법공부와 연공을 따라잡지 못했고, 수련의 길에서 멈췄다가 걸었다가를 반복하며 계속 정진하지 못했습니다. 속인 중에서 자주 친구들과 술 마시고 음식을 먹었으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속인에게 해명할 수 없다고 생각해 맥주도 자주 마셨습니다. 2024년 설 기간에 저는 제대로 수련을 시작하기로 결심했고 어쨌든 술은 절대로 더는 마시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사부님의 안배 하에 저는 한 법공부 팀에 참가하여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했습니다. 반년 후 집 문제 때문에 모두 저의 두 칸 방으로 이사했고 작년 10월경부터 한 수련생의 격려로 우리는 법 암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움을 두려워하는 감정을 극복하고 외우기 싫어하던 것에서 외우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비록 진도는 빠르지 않지만 우리는 매주 네 번의 단체 법공부에서 두 번은 읽고 두 번은 외웠으며, 지금은 이미 제4강 중의 ‘心性(씬씽) 제고’라는 작은 장까지 외웠습니다. 아마 법을 외우는 것 때문일 겁니다. 저는 최근 자신의 색욕(色慾)에 대한 마음이 많이 작아져서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정도가 됐다고 느낍니다. 연공할 때도 자신이 연공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고요한 느낌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모두 법을 외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일찍 외웠어야 했는데 이렇게 많은 세월을 지체했습니다!

지금 저는 단체 법공부에 참가한 지 1년 6개월이 넘었습니다. 수련 중에서 저의 심성은 줄곧 별로 제고되지 않았고, 마음속의 일부 고집스러운 관념은 넘어서기 어려웠으며 온갖 종류의 사람 마음을 놓아버릴 수 없었습니다. 또 성격상 이유도 있어서 지난 2년 동안 저는 일부 동료, 이웃과 잘 지내지를 못했습니다. 갈등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아 갈등은 더욱더 커졌고 어려움을 두려워하는 감정까지 있어서 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직위로 조정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에서 중대한 타격을 겪어 한동안 저는 마음이 늘 평온하기 어려웠습니다.

법공부 팀에서 수련생들이 저와 교류했고 저는 인터넷상의 교류 글을 통해 저의 질투심, 쟁투심, 체면, 원망심, 억울한 마음, 과시심, 명리심 등의 마음이 너무 강렬하고 자연스럽게 형성됐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마음들을 이야기할 때는 마치 농담하는 것 같지만 진정으로 이 마음들에 부딪히고 이 마음들을 내려놓을 때는 정말로 고통스럽습니다. 제가 겪은 이 일들은 바로 저의 이러한 마음들이 초래한 것입니다. 저는 이 기회에 깊이 ‘안으로 찾아(向內找)’ 봤고 이 제거하기 싫은 마음들도 철저히 제거해야 할 때가 됐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기간 저는 ‘공산주의 유령은 어떻게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가’를 한 번 읽었고 ‘당문화 해체(解體黨文化)’를 한 번 들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나와 중공 악당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공산사령(共産邪靈)은 증오와 낮은 층의 부패된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의 쟁투심은 증오에서 비롯됐고 억울함에서 비롯됐으며, 공을 과장하여 뽐내고, 남을 비난하기를 좋아하고, 맞서기를 좋아하며, 우위를 차지하면 우쭐해지고, 마음에 들면 기뻐하고, 마음에 들지를 않으면 기뻐하지 않는데 속인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저는 정말로 이 마음을 잘 제거해야 합니다. 제가 이 일들을 겪는 동안 마침 전법륜(轉法輪) 제4강을 외우고 있었는데 많은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번 심성 고비는 여전히 통과하지 못하고 크게 넘어졌지만 또한 제가 도를 잘 깨닫고 자신을 잘 반성하며, 어떻게 해야 수련인으로서 수련인의 상태와 표준에 도달하는지 알게 된 좋은 기회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 대해주지 않고 화낼 때 그것은 나를 도와 업을 없애주는 것이며, 사납고 험악한 모습은 그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이다.’ 만약 제가 다른 사람과 갈등이 발생할 때 이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면 여전히 그와 같을까요? 여전히 그에게 화를 낼까요?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에게 잘 감사해야 합니다! 사부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진정한 연공인이 되고 진정한 수련인이 되라고 요구하셨는데 저는 왜 이제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됐을까요? 이 몇 년 동안 제가 너무 많이 뒤처졌고 너무 못했고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줄곧 저를 보살펴 주셨습니다. 수련길에서 비록 제가 잘하지 못했지만 사부님께서 보호하심으로 다시 수련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사부님의 홍은(洪恩)은 참으로 광대하십니다! 이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저는 분발하여 뒤쫓아 정진하고 법공부와 연공을 많이 하고 법을 잘 배우며,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서 돌아갈 것입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법회 투고 공지가 발표된 후 수련생들 모두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저도 사부님께서 매번 수련반 마지막에 신수련생들에게 심득 체험을 쓰게 하셨고, 사부님께서 모든 문장을 친히 보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저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 수련길에서 잘했든 못했든, 잘 썼든 못 썼든 저는 반드시 써서 사부님 말씀을 잘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체험 글을 쓰고 나니 저는 제가 파룬따파를 얻은 때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본 것 같습니다. 제가 줄곧 법 속에 있었고 모든 것이 사부님의 안배였으며 줄곧 사부님의 보살핌이 있었고 마치 파룬따파를 한 번도 떠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과거를 정리하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잘 걸으며,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분발하여 뒤쫓아 정진하고 이전의 과실을 만회하며 마지막 길을 잘 걸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苦度-괴로움 속에서 제도하심)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고 무수한 중생이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서약은 반드시 실현돼야 합니다!

적절하지 못한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지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허스(合十)

 

​원문발표: 2025년 12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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