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한 후, 저는 수련생들과 함께 20여 년간 법을 실증하는 수련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묵묵히 협력하기도 했고, 밖으로만 보며 원망하기도 했으며, 자아를 내려놓고 서로 포용하는 홀가분함도 있었고, 정념정행으로 박해를 반대하는 위엄과 정기(正氣)도 있었으며, 대법제자로서의 영광과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법을 위해 왔기에 모두 수련생 간의 인연을 매우 소중히 여기며 서로 협력하고 함께 정진합니다.
제22회 명혜망 중국 대법제자 법회를 맞아, 제가 오랫동안 수련생들과 함께 법을 실증하며 협력해 온 일부 체득을 써서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려 합니다.
컴퓨터를 배워 진상 자료를 만들다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작은 마을의 대법제자들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수련 환경을 개척해, 모든 방식을 동원해 전면적으로 세인을 구했습니다.
2000년 이전, 우리 지역의 진상 자료는 모두 다른 지역 수련생들이 제공했습니다. 나중에 한 수련생 언니가 외지에서 돌아와 우리 몇몇 수련생과 교류하면서, 명혜망에서 자료점을 곳곳에 꽃피우듯 세워 소형 자료점을 만들자고 제창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컴퓨터를 다룰 줄 몰랐고, 당시 자료를 만드는 데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느 자료점이 가택수색을 당하고 수련생이 경찰에 납치됐다는 소식을 자주 들었기 때문입니다. 언니는 우리와 법에서 교류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직접 명혜망에 접속하고 진상 자료를 만들면, 큰 자료점의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수련생이 오갈 필요도 없어 안전하며, 우리 자신도 필요할 때 쓰기 편하다고 했습니다. 언니의 말을 듣고 우리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때, 우리 30대 수련생 몇 명은 남자 수련생 샤오쥔(小軍, 가명)을 따라 컴퓨터 조작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마우스도 쓸 줄 몰랐고, 막 배우고 나면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샤오쥔이 작은 자료점을 만들었는데, 하루는 저와 다른 수련생에게 진상 자료 제본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때가 제가 처음 자료점에 가본 것이었습니다. 방에 들어서자 방안 가득한 자료와 설비를 보고 저의 두려운 마음이 불쑥 나왔습니다. 잠시 후 저는 ‘내가 하는 일은 가장 바른 일이고, 사부님께서 바로 내 곁에 계시니,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즉시 안정됐습니다. 이후 그곳에 다시 갈 때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우리가 자료점을 만들도록 도와준 수련생 언니가 외지에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경찰에 미행당했는데, 그녀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저는 언니를 샤오쥔의 자료점에 데려다주고, 건물 뒤쪽 작은 길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오후, 저는 언니에게 먹을 것을 좀 사주려고 먼저 마트에 갔습니다. 막 물건을 샀는데, 남편(수련생)에게서 전화가 와서 “빨리 가게로 돌아와요! 거긴 가지 말고”라며 다급하게 재촉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돌아온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집 이웃이 가게로 와서 남편에게, 방금 길가 건물에서 파룬궁하는 사람들이 잡혀갔고 건물 아래서 물건을 큰 차에 싣고 있는데 아직 안 떠났다고 말해줬던 것입니다. 마침 제가 그 시간에 언니에게 줄 물건을 사러 마트에 갔는데, 만약 바로 자료점으로 갔다면 함께 납치됐을지도 모릅니다. 샤오쥔도 경찰이 막 떠난 후에 돌아가서 그 시간을 피했습니다. 당시 언니와 한 여성 수련생이 납치됐습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아직 영향을 받지 않은 소형 가정 자료점 두 곳이 계속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 수련생의 독립된 작은 건물에서 그녀와 함께 자료를 만들며, 우리 구역 수련생들에게 ‘명혜주간’과 진상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당시 쓰던 것은 1020 흑백 레이저 프린터였습니다. 그 시기 많은 수련생이 박해받아 직장에도 영향이 미쳤고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모두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어떤 이는 몇십 위안, 50위안, 100위안, 200위안을 내놓았고, 노년 수련생들은 평소 몇 위안씩 모아둔 돈을 가져오기도 했는데, 모두 수련생이 사람을 구하려는 진실한 마음이었습니다.
박해 초기, 저와 남편은 여러 차례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했고, 남편은 불법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으며 저는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남편은 1999년 7·20 이전에 보도원이었고, 우리집은 또 대규모 단체 법공부 장소였습니다. 현지에서는 제 남편을 중점 박해 대상으로 삼아 끊임없이 우리를 교란하고 감시했습니다. 2003년, 제 남편은 네 차례 납치됐고, 두 차례 불법 구류됐습니다.
중공의 박해로 경제 수입이 끊겨, 물건을 팔아본 적이 없던 우리는 체면을 내려놓고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사탕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수련생들이 우리 생활이 어려운 것을 보고 가게를 하나 열어 생활을 유지하도록 도와줬습니다. 점차 우리 경제 사정도 나아졌습니다.
2005년, 현지 공안국이 파룬궁수련생들을 불법적으로 대규모 체포하면서 일부 수련생이 납치됐고,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 명단이 경찰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경찰의 강압적인 심문으로 삼퇴 명단이 저와 제 남편에게 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시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경찰이 우리 지역으로 제 가게를 찾으러 왔는데, 제가 마침 가게 문을 열다가 경찰이 가게로 뛰어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문을 잠그고 남편과 함께 달아났습니다. 한 달 반 뒤에 우리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남편은 결국 악명 높은 세뇌반으로 납치됐습니다. 그가 불법 심문을 받을 때에야 우리집 전화가 이미 도청되고 있었고, 경찰이 저와 시내 자료점에서 납치된 수련생과 연락한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시아버님께서 병세가 위중하셔서 남편은 세뇌반에 8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이 복직한 후 우리는 운영하던 가게를 넘겼습니다.
그 몇 년간, 우리집은 여러 차례 불법 가택수색을 당해, 저는 감히 프린터를 집에 두지 못했습니다. 수련생 샤오전(小珍, 가명)이 수련하지 않는 남편 몰래 컴퓨터와 프린터를 그녀 집으로 옮겨다 줬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출근했을 때, 우리 둘은 함께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하루는 우리가 한창 자료를 만들고 있는데, 그녀의 남편이 갑자기 연장을 가지러 집에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미처 치우지 못했고 저는 조금 긴장했습니다. 샤오전은 정념이 매우 강해서 “보면 보는 거지, 괜찮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쓱 둘러보고는 아무 말 없이 가버렸습니다.
이후 다른 수련생이 또 프린터를 사서 ‘9평 공산당(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 책자를 대량으로 제작했습니다. 우리가 만든 ‘9평’이 배포하기에 부족해서 시내로 가지러 갔고, ‘당문화 해체’ 책자도 가져와 현지와 인근 농촌에 대량으로 배포했습니다.
하루는 샤오쥔이 와서 제게 “언니, 지금 외지에서는 다들 컬러 진상 소책자를 만들어. 컬러 잉크젯 프린터를 쓰는데, 자료가 아주 참신하고 예쁘게 나와. 언니도 한 대 사”라고 했습니다. 저는 “알았어, 한 대 사다 줘”라고 했습니다. 며칠 뒤, 샤오쥔이 4600 컬러 잉크젯 프린터 한 대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한 대로는 부족해서 한 대를 더 가져왔습니다. 만들어진 진상 자료는 깔끔하고 보기 좋아서 수련생들 모두 즐겨 배포했습니다.
연말에 수련생이 제게 진상 달력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는데, 우리가 진상 달력을 만든 첫해였습니다. 철제 링은 모두 저와 수련생이 손으로 눌러 만들었습니다. 수백 개 달력을 만들고 나니 손가락이 모두 부었습니다. 때로 프린터 헤드가 막히면 저는 수돗물로 씻었습니다. 한번은 샤오쥔이 그것을 보고는, “누가 언니더러 이렇게 하래?! 수돗물에는 불순물이 있어서 정수된 물로 씻어야 해. 프린터 헤드 하나가 얼마인 줄 알아?”라고 급히 소리쳤습니다. 저는 “네가 말 안 해줬잖아. 내가 뭘 알겠어!”라고 했습니다.
그때 진상 CD, 션윈 공연 CD를 민중이 즐겨 봐서 우리는 CD 복사기도 구매했습니다. 정법 노정이 앞으로 추진됨에 따라 수련생들은 모두 인식이 높아져서, 연세 많은 수련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컴퓨터를 구매해 제때에 명혜망에 접속할 수 있게 됐고, 인쇄 용지도 절약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진상의 감로를 곳곳에 뿌리다
20여 년간, 수련생들은 우리 작은 마을에서 대면하고 진상을 알렸고, 진상 자료를 거듭 배포해 진상을 듣지 못했거나 진상 자료를 보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으며, 기업 사무실에도 대부분 대법 진상 달력이 놓여 있습니다. 대법제자들이 끊임없이 진상을 알리자 지도층과 노동자 등 많은 이가 대법을 인정하고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믿게 됐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일을 잘하려면 정체(整體) 협력이 관건입니다. 초창기에 수련생들은 모두 걸어 나와 자료를 배포할 수 있었습니다. 자료를 배포할 때 우리는 사전에 조율해, 각자 구역과 아파트 단지를 나눠 중복 배포를 피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택시 기사 수련생이 둘 있는데, 시 외곽의 마을들을 훤히 꿰뚫고 있었고, 심지어 마을마다 몇 가구가 있는지도 대략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상 자료를 배포하는 데 많은 편의를 제공해줬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데리고 자료를 배포한 적 없는 외진 공백 지역에 많이 가줬습니다.
한번은 기사 수련생이 “오늘 밤 내가 자료 배포 안 한 곳으로 데려다줄게요. 길이 외지고, 어떤 곳은 10여 가구밖에 안 돼서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가시겠어요?”라고 물었고, 몇몇 수련생이 모두 가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간 길은 정말 구불구불했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서니 10여 가구뿐이었는데, 집집마다 키우는 개들이 맹렬하게 짖어댔습니다. ‘어떡할까?’ 우리는 정념을 사용해 신속하게 한 집도 빠짐없이 자료를 배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주인이 나왔을 때 우리는 이미 차를 타고 떠난 뒤였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아주 외진 마을 몇 곳에 진상 자료를 전달해, 그들이 대법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한 달에 몇 번씩 차를 몰고 아주 먼 외딴 마을로 가야 했습니다. 하루는 한 읍[鎭]내의 수련생이 우리에게 와서 책임자 수련생에게 “우리 쪽은 수련생이 적어서 많은 마을에 진상 자료를 배포하러 갈 사람이 없어요”라며, 우리에게 차를 몰고 그 마을들에 가서 진상 자료를 한 번 배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차를 배정해 때로는 두 대, 때로는 세 대가 가서 현지 수련생의 안내를 받아 그 읍내의 크고 작은 마을들에 몇 차례 진상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자료 배포가 순조로운지 아닌지는 우리 마음가짐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우리가 큰 마을에 자료를 배포하러 갔는데 두 사람이 한 조였습니다. 저와 한 수련생이 집집마다 문에 자료를 놓을 때, 가게에서 마작을 하던 사람들이 마침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우리 뒤를 따라오자 수련생이 제게 “저 남자가 우리를 신고하려고 전화하는 것 같아요, 우리 빨리 옥수수밭으로 도망가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도망가면 안 돼요. 그가 정말 신고하면 우린 도망 못 가요. 우리 빨리 다가가서 진상을 알려요”라고 했습니다. 그 남자가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이야?”라고 묻기에, 저는 “우리는 물건 훔치러 온 게 아니라, 여러분께 복음을 전하러 왔어요. 전염병이 이렇게 심각한데 역병을 피할 좋은 처방을 전해주러 왔어요”라고 했습니다. 수련생이 “당신은 선량한 분이니 우리를 신고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자료를 전하면서 당신들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대법을 배우는 사람들이고 그저 당신들이 평안하길 바라는 거예요. 우린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리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가세요. 다음부턴 오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우리 지역에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상 플래카드를 거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남자 수련생이 둘 있습니다. 플래카드에 쇠갈고리를 매달아 몇 미터 길이의 신축성 있는 낚싯대로 나무나 구조물에 거는데, 거의 실패가 없을 정도로 매우 능숙했습니다. 그들은 매년 많은 진상 플래카드를 걸었고, 여러 마을 길가에서 ‘파룬따파하오’ 플래카드가 펄럭이며 바른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차량과 행인 모두 볼 수 있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한번은, 우리가 현지에서 많은 진상 자료와 스티커, 전시판을 만들었습니다. 읍 정부에서 대법제자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수련생들은 읍장과 다른 사무실에 진상 자료를 보내기로 상의했습니다. 하지만 곳곳에 카메라가 있었는데 누가 갈 수 있을까요? 저와 한 수련생이 이 일을 하기로 준비했고, 다른 수련생들은 집에서 정념을 발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진상 자료를 준비해 예쁜 봉투에 담았습니다. 우리 둘은 평상복을 입고 모자와 마스크를 썼습니다. 우리는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도록 정념을 발했습니다. 정오쯤, 우리는 정부 사무실 건물로 가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3층과 2층의 각 사무실 문손잡이에 진상 봉투를 걸어두고 순조롭게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정부 직원의 가족에게 듣기로, 정부 청사 안이 발칵 뒤집혔고 읍장이 카메라를 돌려보며 자료를 놓고 간 사람을 찾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둘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구원받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부님의 보호가 있기에 아무도 감히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우리집이 가게를 운영하던 3년 동안, 저와 남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게에 오는 손님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아주 먼 곳의 손님들도 우리집에 물건을 사러 찾아오곤 했는데, 사실은 모두 사부님께서 진상을 듣도록 안배하신 것이었고, 남편은 그들에게 모두 삼퇴를 해줬습니다.
음성 전화로 진상을 알리다
하루는 외지 수련생이 우리 지역에 교류하러 와서 요즘 많은 수련생이 휴대폰 음성 전화로 진상을 알리는데, 구하는 사람의 범위가 넓고 누구나 할 수 있다며 전화할 때의 안전수칙을 자세히 알려줬습니다. 우리는 듣자마자 너무 좋고 편리하다고 생각해 그 수련생에게 음성 전화 프로그램 설치와 전화번호 설정 방법을 배웠습니다. 전용 전화기와 전화 카드를 모두 갖췄고, 수련생마다 한두 대의 휴대폰을 구매했습니다.
막 음성 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무작위 전화번호로 진상 음성을 틀었습니다. 명혜 라디오의 진상 음성은 매우 포괄적이어서 많은 사람이 끝까지 들었고, 버튼을 눌러 삼퇴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매일 수련생들이 받아낸 삼퇴 명단은 꽤 많았습니다. 때로 음성이 재생되는 중인데 상대방이 전화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맙다는 사람, 욕하는 사람, 돈 달라는 사람, 심지어 잡으러 가겠다는 경찰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과 대화하고 싶었지만 음성이 재생 중이어서 소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 일부 수련생들은 직접 전화를 걸어 말하기로 했습니다. 평소 음성을 틀 때는 전화기에서 아무리 소리치고 협박해도 저는 마음이 동하지 않았습니다. 하늘과 땅 차이로 멀리 떨어져 있어 저에게 닿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화를 들고 진상을 알리려 준비할 때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긴장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몇 차례 전화를 걸고 나니 마음이 안정됐습니다.
한번은 전화가 연결되자 한 남자가 “당신, 사람이 말하는 거요, 아니면 기계가 말하는 거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음성 전화를 받아본 듯했습니다. 저는 평화롭게 “사람입니다. 당신에게 안부를 묻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사람들은 모두 평안하길 바라는데 어떻게 해야 평안할 수 있을까요? 제가 평안의 비결을 알려드릴게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아홉 글자를 진심으로 염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위급한 순간에 이 아홉 글자를 염해 위험에서 벗어났어요. 당신은 파룬궁을 아시나요? 삼퇴를 하면 평안이 보장된다는 것을 아시나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런 건 나와 상관없소. 당신들은 때도 없이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내 생활을 방해하고 있소”라고 했습니다. 저는 “서민이 돈 벌기 쉽지 않고 다들 자기 돈을 손해 보지 않으려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돈으로 전화비를 내가며, 당신들에게 큰 재난이 닥쳤을 때 평안히 남을 방법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대법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소중한 중국인들을 구하라고 하셨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또 파룬궁 진상을 좀 더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고위 관리들도 다 당을 탈퇴하고 있어요. 누구도 중공의 순장품이 되길 원치 않아요.” 그의 태도는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가 벌써 30분이나 이야기했네요. 당을 탈퇴할지 말지는 당신 자신의 선택이고, 이건 당신의 생명과 관련된 일이에요. 기회를 놓치면 나중에 후회해도 늦어요. 이제 전화를 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누님, 저 탈퇴시켜주세요. 저는 당원입니다. 저에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해줘서 고마워.”라고 말했습니다.
명혜망과 소통하며 박해 정보를 수집하다
2006년 이전, 명혜망에 보내야 할 일부 정보는 우리가 모두 현(縣)에 있는 수련생에게 가져다줘야 했습니다. 이후 수련생이 제게 사이트 내 메일함을 만들어줘서, 저는 명혜망에 소식을 보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엄정성명, 법회 교류 원고, 그리고 납치된 수련생을 구출하기 위해 수집한 박해 기관 및 개인 전화번호 등이 있었습니다. 일부 경찰과 박해 기관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전화가 불통이 될 지경인데, 전부 해외에서 걸려온 전화라고 했습니다. 해외 수련생들이 중국 수련생을 구출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매번 명혜망 중국 대법제자 법회 마감이 임박하면 원고가 산더미처럼 쌓여, 저는 수련생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원고를 타이핑했습니다. 그때 저는 타자가 빠르지 않았고 문장 정리도 미숙해, 정말 피곤해서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침침할 정도였습니다. 원고를 정리하는 것 역시 마음을 닦고 인내력을 기르는 과정이었습니다. 어떤 수련생의 이야기는 매우 좋아 보였지만, 시간과 장소가 빠져 내용이 불완전했습니다. 어떤 것은 10여 쪽을 빽빽하게 썼는데, 틀린 글자가 수두룩하고 앞뒤 문장이 맞지 않았으며, 어떤 것은 병음으로 대체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또 어떤 문장에는 문제가 좀 있었는데 수련생이 잘 인식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왕 모두가 나를 믿어주니, 그럼 내 층차에서 관문을 지키자.’ 저는 ‘나도 수련인이니 분명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거나 부적절하게 삭제한 부분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정리한 것을 다시 수련생에게 돌려주면, 가끔 수련생이 “그건 내가 고친 건데 왜 수정했어요?”라고 말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안으로 찾으며 많은 문제가 존재함을 알게 됐습니다. 자아가 강하고, 남 가르치기를 좋아하며,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심각한 당(黨)문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자신을 수련하는 것을 중시했고 다시 수련생의 문장을 정리하자 제 마음가짐이 변했습니다. 저는 마음을 다해 정리하고 수련생의 문장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마음을 다해 쓴 속마음이고, 글자 하나하나에 진심이 배어 있으며, 사부님께 보고드리는 답안지였습니다. 때로 저는 문장 속의 이야기에 감동해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고, 수련생이 고비를 넘기면서 사부님을 굳게 믿고, 정념정행을 하며, 사심 없고 아량 있는 경지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저는 저 자신과 수련생의 차이를 보았고 저의 부족함을 찾았습니다.
초창기에 명혜망은 중국 수련생들에게 공안·검찰·법원·사법 부문과 기업 및 공공기관에서 대법제자 박해에 가담한 악인들의 악행을 수집하고 사진을 첨부하라고 건의했습니다. 저는 안전한 상황에서 현지의 대법제자를 박해한 악인의 정보를 수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몇몇 수련생과 절충한 후, 우리는 이 일을 하는 목적을 명확히 했습니다. 수련인에게는 증오심이 없으며, 악인의 악행을 폭로하는 것은 박해를 제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단 그들이 잘못된 명령을 집행해 자신과 가족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마 깨어날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참 신기하게도, 이 정보들을 수집하는 것은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수련생들은 금방 당시 소속 기업의 지도부와 각 부서, 파출소의 박해 책임자 정보를 수집해왔고, 어떤 것은 사진도 첨부됐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회의 중에 우연히 회의실에 있는 박해자의 사진을 보고는 지혜롭게 휴대폰으로 찍었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여러 차례 대법제자를 박해한 파출소 소장을 보고는 얼굴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저와 수련생은 자전거를 타고 농촌의 촌위원회로 가서, 정오에 창문 너머로 대법제자를 박해했던 촌장의 사진을 찍었고, 구치소 악질 경찰의 정보도 입수했습니다.
한번은 몇몇 지역 책임 수련생이 함께 교류하는데, 시내 수련생이 우리에게 현지 20여 년간의 대법제자 박해 상황을 종합보고서로 작성해 명혜망에 올리라고 제안했습니다. 이전에 저는 명혜망에 발표된 시, 현의 박해 종합보고서를 보고, 현지 수련생들의 박해 사례를 통계내고 싶다는 생각이 진작에 들었지만 막상 하려니 난도가 너무 큰 것 같아 포기했었습니다.
아마 제게 그런 바람이 있어서인지 현지 책임 수련생이 이 항목을 우리 세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수련생이 이전에 수집했던 박해 정보를 모두 제공해줬고 그것을 분류하고 정리했습니다. 제가 보니, 이 항목은 작업량이 매우 방대했습니다. 수백 명이 박해를 당했고, 한 사람 한 사람 대조하고 확인해야 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해본 적도 없는데, 잘해낼 수 있을까요? 시내 수련생이 우리를 한차례 격려해줬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됐습니다. 시에서 종합 보고서를 작성해본 적이 있는 수련생이 우리가 방향을 잡도록 돕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도해줬습니다. 게다가 요구 사항이 아주 세세하고 엄격했습니다.
이후 저와 함께 종합보고서를 만들던 두 수련생이 일이 많아 모두 빠지고 저 혼자 남게 됐습니다. 종합보고서를 만드는 일은 정말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지만, 저는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끝까지 해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매일 단체 법공부에 참가하고, 연공, 발정념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시내 수련생이 끊임없이 저를 격려해줬습니다. 1년의 시간이 걸려 우리는 현 전체에 속한 향, 진의 20여 년간 박해 종합보고서를 정리해냈습니다. 다시 수련생의 검토, 보충, 수정을 거쳐 명혜망에 발표했습니다. 그 과정의 어려움은 단련이었고, 초조할 때는 인(忍)을 닦는 과정이었으며, 뿌리 깊게 박힌 적당히 얼버무리는 당문화의 것들이 많이 깎여나갔습니다. 돌이켜보면 사부님께서 저를 이끌어 위로 올려주신 것이었습니다. 박해 사례를 정리하면서 이후 글을 쓸 때 저는 좀 더 성숙해졌습니다. 저는 무엇을 하든 모두 자신을 성취시키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지역의 종합보고서 작성을 계속 도와주던 시내 수련생이 제가 이 방면에서 경험이 생긴 것을 보고는, 시내 수련생들의 박해 사례를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제 막 한숨 돌리려 했는데 또 일이 생겼구나’ 싶어 조금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가짐을 바로잡았습니다. ‘이왕 수련생이 나를 찾아왔으니 어쩌면 사부님의 안배일 수 있고, 내게는 이 책임이 있으니 피할 수 없다.’ 저는 한 번 해본 경험이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기에 정리 작업이 좀 더 수월했습니다.
그 과정 역시 마음을 닦는 과정이었습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정보를 몇 시간이 지나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인터넷에 보고된 정보도 완전하지 않아서, 찾다가 저는 수련생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보도할 때 왜 정보를 다 쓰지 않은 거야? 어디서 잡혔고, 어디서 판결받았는지, 시간은? 어떤 건 딱 한 줄인데, 이걸 어떻게 정리해.’ 그러다 문득 다시 생각했습니다. ‘당시 박해 상황에서 수련생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알아내, 인터넷 봉쇄를 뚫고 명혜망에 올린 것만 해도 이미 매우 어려운 일이었어. 수련생은 이미 대단한 일을 한 건데 내가 어떻게 트집을 잡을 수 있지?’ 또 저의 원망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몇 달의 시간을 들여 수백 명의 박해 사례를 분류하고 정리해냈습니다.
제가 억울한 감옥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시내 수련생이 와서 제게 박해받은 경위를 폭로하는 글을 쓰라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박해를 폭로하는 자술서 한 편을 써서 명혜망에 발표했습니다. 하루는 수련생이 현지판 ‘명혜주보’를 들고 우리집에 와서 제게 물었습니다. “이번 주보에 당신의 박해 자술서가 실렸어요. 방금 우리 몇몇이 이걸 배포하기로 교류했는데, 먼저 당신에게 걱정되는 점이 있는지 물어보려고요. 현지 사람들이 다 당신을 아니까요.” 저는 “제가 감히 박해를 폭로한 이상 두렵지 않아요. 대량으로 배포해도 문제없어요. 사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폭로예요”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세 곳의 현지판 ‘명혜주보’에 제가 쓴 박해 폭로 자술서가 실렸습니다. 우리가 납치됐을 때 명혜망은 끊임없이 국보 대대의 악행을 보도했고, 어떤 수련생들은 국보 대장과 판사에게 전화를 걸거나 진상 편지를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듣자 하니 그 국보 대장이 쉬지도 못할 정도로 압박감이 매우 크다고 했다고 합니다. 제가 집으로 돌아온 후 그 국보 대대에 불법 압수된 물건을 돌려달라고 찾아갔지만, 그 국보 대장은 자리에 없다고 거짓말을 하며 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함께 성스러운 인연을 맺다
저는 주위의 수련생들에게 깊은 인연이 있음을 느낍니다. 역사의 윤회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부모, 형제, 자매, 친척, 친구였을지도 모릅니다. 법을 얻은 초기, 우리는 함께 단체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했습니다. 외지에 가서 법을 널리 알리고 법회를 열었습니다. 사악이 미친 듯이 박해할 때, 누군가 넘어지면 하나하나의 따뜻한 손들이 그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누군가 미혹됐을 때 수련생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고 사부님의 법으로 거듭 그(그녀)를 일깨웠습니다. 누군가 박해받으면 모두가 전체를 이뤄 정념을 발하고, 법률을 이용해 박해에 항거했습니다.
법을 실증한 이 세월 속에서 저는 몇몇 수련생과 자주 함께 일했습니다. 수련생 샤오위(小玉, 가명)는 정념이 강하고 법리가 명확했습니다. 그녀는 사악의 소굴에서 정념으로 박해에 맞서며 타협하지 않았고, 박해로 병업 가상(假相)이 나타나자 경찰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우리 둘은 한 팀에서 10여 년간 법공부를 했고, 서로 묵묵히 협력하며, 함께 밖에 나가 진상을 알리고 진상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저와 샤오위는 좋은 파트너여서 자료를 만들 때도 빠르고 순조로웠습니다. 평소 상대방의 문제를 보면 솔직하게 지적해도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녀는 외지로 떠났지만 우리 둘이 함께 법을 실증했던 시간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수련생 훙(虹) 언니(가명)는 저보다 세 살 많았는데, 저와 가장 많이 호흡을 맞췄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을 조율하고, 함께 기술을 배우고, 소모품과 설비를 사며, 수련생이 자료점을 만들도록 돕고, 함께 밖에 나가 진상 자료를 배포하는 등, 공동으로 협력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법을 실증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훙 언니는 마음가짐이 좋고 책임감이 있으며 조율도 매우 잘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종종 갈등이 생겼습니다. 저는 입으로는 안으로 찾는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일에만 매달려 밖으로 찾았습니다. 수련생들은 우리가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고 늘 외출하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 일 욕심이 존재하고, 법에 관한 일을 도맡아 하며, 수련생들의 칭찬을 즐기는 등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듣고도 수련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저와 훙 언니가 수련생을 따라 자료를 배포하러 나갔다가 납치됐습니다. 저는 뼈아픈 반성을 했습니다. 평소 일만 하고 착실히 수련하지 않아 정체와 수련생에게 매우 큰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저와 훙 언니는 몇 차례 진솔하게 교류하며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을 바로잡고, 계속 책임을 다하며, 앞으로의 길을 바르게 걸어가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수련생 무춘(木純, 가명)은 법 암기를 잘하고 책임감이 있습니다. 그는 박해를 받아 퇴직금이 적었는데, 아내가 다른 도시에서 월급 많고 편한 일자리를 찾아줬지만 그는 가지 않고 수련을 중요하게 여기며 현지의 항목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는 오토바이, 삼륜차를 타다가 지금은 승용차가 생겼는데, 도시와 농촌을 분주히 오가며 줄곧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이 있을 때 대부분 무춘의 차를 이용했고, 자주 함께 일하다 보니 부딪힘이 있었습니다. 저와 훙 언니가 자기주장을 고집할 때가 많았는데 무춘은 여러 차례 겸손하게 우리에게 양보했습니다.
한번은 구치소에 불법 감금된 수련생을 변호사와 접견하러 가는데,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데 길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훙 언니는 마음이 급해 동서남북을 마구 가리키며 무춘이 가는 길이 틀렸다고 우겼습니다. 무춘이 감정이 상했는지 차를 매우 빨리 몰았고, 구덩이를 만나도 속도를 줄이지 않아 제 몸이 펄쩍 튕겨 머리를 차 천장에 부딪쳤습니다. 저와 훙 언니는 길을 잘못 알려준 것을 알고 무춘에게 사과했습니다. 지난날의 협력 과정에서 저는 제 입장을 고집할 때가 너무 많았고, 늘 무춘이 틀렸다고 질책하며 언어가 날카로웠는데, 이는 명백한 당문화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반성했습니다. ‘나는 수련을 안 했구나. 머리를 부딪치고 나서야 안으로 찾다니.’ 다음 날 무춘을 만났을 때, 제가 그에게 사과하자 그는 허허 웃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했습니다.
수련생 메이(梅) 언니(가명)는 이성적이고 지혜로우며 조직력이 있습니다. 2001년, 제가 베이징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우리 둘은 협력해, 직접 천을 사서 작은 ‘파룬따파하오’ 플래카드를 만들고, 양 끝에 작은 모래주머니를 매달아, 밤에 나가 나무 위로 던져 걸었습니다. 우리 둘은 또 진상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 스티커를 붙이러 다녔습니다. 그녀는 일찍이 장사를 시작해 시간이 매우 빠듯했지만, 법을 실증하는 일로 제가 그녀를 찾아가면 그녀는 매번 가게 일을 제쳐두고 우리를 따라나섰습니다. 메이 언니는 수련생들이 법공부 팀에 참가하도록 합리적으로 안배하고, 밖에 나가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며, 진상 편지를 쓰고, 박해받는 수련생을 구출하는 일을 매우 잘했습니다. 우리도 협력하는 과정에서 자주 마음 닦는 일이 생겼지만, 지나고 나서는 모두 안으로 찾으며 해소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늘 수련생이 제게 잘해준 것, 저를 도와준 것이 기억돼 있으며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수련생들은 제게 사심 없는 도움을 줬습니다. 제가 사악의 소굴에 있을 때 수련생들이 제 가족을 도와줬습니다. 가족들은 대법제자의 경지를 보았고 대법제자들이 정말 훌륭하다고 거듭 칭찬했습니다.
20여 년 법을 실증하는 길에서 우리는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왔으며, 어떠한 어려움과 험난함도 우리의 수련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계속 잘 협력하고 정념정행으로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닦아주신 신이 되는 길을 함께 잘 걸어갈 것입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명혜망 제22회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11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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