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사부님께서는 늘 내 곁에 계시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8년 말부터 대법을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20여 년의 수련 과정을 되돌아보면 저는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사부님께서 제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험난한 길을 만날 때마다 사부님께서는 미리 저를 일깨워주시고 깨우쳐주시며 어느 길이 올바른 길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제 수련 과정을 돌이켜보면 사부님과 대법을 믿는 과정이었습니다. 저는 사부님을 직접 뵌 적도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사부님께서 항상 제 곁에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1. 눈보라 속에서 진상자료를 나르다

2000년, 저는 법공부가 깊지 못했고 개인적인 강한 집착심 때문에 세뇌반에 3개월 넘게 불법 감금된 후 사악에게 타협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법공부를 하고 수련생과 교류하면서 저는 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것은 수련생으로서 가장 큰 치욕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맹세했습니다. ‘실제 행동으로 나의 잘못을 보충할 것이다.’

아마 사부님께서 제 결심과 염원을 보신 것 같습니다. 얼마 후 한 수련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수련생은 몇 명의 수련자와 함께 자료점을 세웠다고 말했습니다(당시 저희 시에서 처음 설립된 자료점이었습니다). 당시 사악이 가장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으므로 자료점의 안전을 위해 단선으로만 연락했습니다. 저에게 진상자료를 가져오는 일을 맡아달라고 하면서 제가 시내 몇 군데에 있는 수련생들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대량의 진상자료를 인쇄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이제 더는 손으로 진상자료를 베껴 쓸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진상자료 한 부에 담긴 정보량이 매우 많으므로 우리 대법제자가 정념이 강하고 잘 협력하기만 하면 아주 많은 인연 있는 사람들이 대법 진상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습니다. 수련생이 저를 보며 웃으면서 농담했습니다. “두렵지 않나요? 우리 앞으로 목숨을 걸고 살아야 할 텐데요.” 저도 웃었습니다. 저는 이미 성인이 됐지만 그 수련생 눈에는 아직 어린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상을 알리는 것은 대법제자의 사명이므로 나이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부님께서 계시고 대법이 있으므로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전법륜)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그들이 외출한 후 점심때 집에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을 마쳤습니다. 반나절 동안 자료를 전달하는 것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지만 자료를 가져오는 시간은 늘 촉박했습니다. 30여 킬로미터의 거리를 저는 자전거를 타고 3킬로미터를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탄 후 버스에서 내려 약 2킬로미터를 걸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왕복하는 데 최소 3~4시간이 걸렸습니다.

여름에는 햇볕에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습니다.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화장실로 달려가 몸을 식혔습니다. 종종 제가 막 들어가면 아버지가 바로 집에 도착하시곤 했습니다. 진상자료 전달을 맡았던 기간에 저는 매번 가족들보다 먼저 집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족 중 아무도 제가 무엇을 하는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매번 저와 가족들의 시간을 아주 절묘하게 배치해주셨습니다.

저는 아는 사람을 마주치지 않도록 일부러 단층 주택들이 밀집한 작은 골목들을 다니며 자전거를 탔습니다. 당시 중국 북방 도시들은 겨울이 되면 눈이 몇 번 내렸는데 골목길의 눈은 행인과 차량에 밟혀 얼음 능선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골목길에는 낮에도 햇볕이 잘 들지 않아 눈이 한번 내리면 녹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울퉁불퉁한 얼음 위에서 자전거를 타면 온몸에 힘을 줘도 바퀴가 계속 미끄러져서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키가 작은 여성이고 어릴 때부터 힘쓰는 일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정상적인 도로에서 4~5천 장의 자료를 싣는 것은 조금 힘이 들었고 핸들이 항상 흔들렸습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맞은편에서 차가 올 때였습니다. 좁은 얼음판에는 피할 곳이 전혀 없었으며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가다가는 넘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길이 좋지 않고 맞은편 차와 가까워질 때마다 그 차는 방향을 틀거나 길 양옆의 흙길로 들어가 멈춰 섰습니다. 늘 아슬아슬했지만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고 항상 지켜보고 계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한번은 한 남자 수련생이 저와 약속한 장소에서 물건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만난 후 그는 물건으로 가득 찬 큰 여행 가방을 제 자전거에 올렸습니다. 그 가방은 80~90년대에 유행하던 지퍼가 달린 낡은 캔버스 천으로 된 여행 가방이었습니다. 그 수련생은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수련생이 떠난 후 저는 자전거를 타려고 했는데 물건이 너무 무거워서 핸들을 잡고 끌고 가는 것도 휘청거렸습니다. 저는 가까운 수련생 집에 물건을 잠시 맡겨둘까 생각했지만 그곳도 거리가 좀 있었고 무엇보다도 점심때 가족들이 돌아오기 전에 집에 도착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를 악물고 온몸에 힘을 주어 자전거에 올라탔습니다. 자전거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간신히 그 수련생 집 아래층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두 손으로 가방을 안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두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 한 걸음 한 걸음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마음은 매우 조급했습니다. 혹시라도 복도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하다가 이웃들에게 들켜 그 수련생에게 안전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됐습니다. 저는 이를 악물고 한 계단씩 힘겹게 올라가며 끊임없이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를 외치면서 동시에 사부님께 도움을 부탁드렸습니다.

그 수련생은 3층에 살았습니다. 그의 집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가방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수련생이 문을 열었을 때 저는 숨을 헐떡이며 온몸에 땀을 흘리고 있어 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바닥에 놓인 가방을 한 손으로 들고 방 안으로 옮기려다가 가방을 들자마자 무거워 떨어뜨렸습니다. 남성 수련생은 의아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며 두 손으로 가방을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제게 “누가 도와줬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무도 안 도와줬어요, 제가 혼자 가져왔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왔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도와주셨죠!”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가방을 열어보니 안에는 아직 자르지 않은 인쇄소에서 막 나온 스티커 용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8시경, 수련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집 앞의 작은 길에서 수련생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수련생은 시 공안국이 제가 한 일을 알아냈고 사악이 저를 잡으려고 하니 빨리 떠나야 한다며 이미 거처를 마련해두었다고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저는 즉시 그가 오기 전에 읽고 있던 『명혜주간』의 한 글을 떠올렸습니다(오랜 시간이 지나서 글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수련생과 철저히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고 떠돌이 생활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나에게 시험 정답을 알려주시는 것 아닌가?;

2. 정념으로 사악의 박해를 깨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떠돌이 생활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되며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집을 떠나면 반드시 가족에게 고통과 압력을 주고 걱정하게 하며 동네 이웃들이 대법에 대해 오해하게 하여 대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의 어머니도 대법제자이므로 어머니의 수련 환경에 압력을 가하게 될 것입니다. 대법제자는 대법의 이미지를 수호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야 하며 세인들이 대법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제가 잘하지 못해서 인연 있는 사람들이 대법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자 저는 매우 확고하게 수련생에게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걸으면서 저의 생각을 수련자에게 말했고 마지막에 그 수련생은 제게 “정말 잘 생각하세요. 만약 가지 않으신다면 제가 돌아가서 수련자들에게 당신을 위해 발정념 해달라고 알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련생이 떠난 후, 밤에 침대에 누워 창밖에서 부는 찬 바람 소리를 들었습니다. 칠흑 같은 밤에 큰 개는 계속 짖어대고 사악한 물질이 저의 온 공간장을 짓누르는 것 같아 질식할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사부님의 법을 외우고 끊임없이 발정념 했습니다. 그래야만 숨을 조금 편하게 쉴 수 있었고 심장 박동도 조금 느려질 수 있었습니다. 점차 공간장에 가득했던 두려움의 물질들이 조금씩 제거됐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고 저는 평소처럼 제가 해야 할 일들을 했습니다. 이 일은 흐지부지 끝났습니다.

몇 달 후 어느 날 아침, 저는 수련생 집에 갔다가 돌아올 때 이웃들이 저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께서 경찰들이 순찰차를 타고 저를 찾아왔다가 방금 막 돌아갔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제게 어떻게 할 것인지 물으셨고 저는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만약 떠나면 스스로 죄를 인정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떠돌이 생활은 앞으로의 삶과 진상을 알리는 일에 많은 불편을 가져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다른 수련생들처럼 사악의 고문을 견뎌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른 수련생을 팔아넘겨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일념을 가졌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가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위해 발정념을 할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아버지가 저에게 물건을 하나 사 오라고 하셔서 저는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받지 않도록 자전거를 타고 다시 외출했습니다. 물건을 사서 돌아왔을 때 경찰차가 이미 저희 집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경찰차에 앉아 어머니께 “걱정 마세요. 금방 돌아올게요”라고 말했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세 명의 경찰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진술서를 작성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두 명은 저를 심문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자 저는 문득 예전에 떠돌이 생활을 하던 한 수련생이 저에게 말해준 정념으로 고비를 넘어선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사악한 경찰들에게 붙잡혔는데 당시 그녀는 전국 수배 대상이었습니다. 사악한 경찰 무리가 그녀를 둘러싸고 사진을 들고 이리저리 오가며 사진과 본인을 대조했습니다. 그녀는 표정이 자연스러웠고 눈빛에는 흔들림이 전혀 없었습니다. 갑자기 한 경찰이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수련생은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봤습니다. 결국 그 경찰들은 사람을 잘못 잡았다고 판단했고 그녀는 당당하게 마굴을 걸어 나왔습니다. 그녀는 제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입니다. 경찰이 사람을 심문할 때 상대방의 눈을 보는데 절대로 당황하면 안 됩니다.” 제 마음은 마치 안정제를 먹은 것처럼 편안해졌습니다. 사부님께서 이미 수련생을 통해 이번 고비를 넘길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눈빛을 확고히 하고 세 명의 경찰을 똑바로 응시했습니다. 그들이 묻는 질문에 저는 “모릅니다, 알지 못합니다”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경찰이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할 때 저는 오히려 당당하게 큰 소리로 그들에게 되물었습니다. 결국 저를 심문하던 세 명의 경찰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진술서를 들고 모두 나갔습니다. 잠시 후 한 경찰이 들어와 “가셔도 좋습니다. 별일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경찰서를 걸어 나왔을 때 주머니에 돈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어떻게 집에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동생이 차를 몰고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제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때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도 돌아오셨고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제게 살짝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경찰에게 잡혀간 후 어머니는 근처 수련생들을 찾아가 저를 위해 발정념을 해달라고 부탁하셨다고 했습니다.

3. 사부님께서 집착을 내려놓도록 도와주시다

4년 전, 저와 남편은 사악에게 납치됐습니다. 당시 제 딸은 9살이었습니다. 집을 떠난 첫 며칠 동안은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가 엄마를 그리워하고 생활과 공부는 잘할지 걱정됐습니다. 어릴 때부터 출근 시간 외에는 제가 줄곧 아이를 돌봤기 때문에 아이도 저를 매우 따랐습니다. 이번에 사악에게 납치된 후에야 비로소 제가 아이에 대한 정이 얼마나 무거운지 진정으로 깨달았습니다. 매일 아이의 등하교 시간, 특히 밤에는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아이에 대한 정이 올라올 때마다 법을 외웠지만 잠시 후 다시 올라왔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외우고 또 외웠지만 아이에 대한 집착심은 여전히 강했습니다.

아이와 떨어진 지 사흘째 되던 날, 마음이 매우 힘들 때 문득 사부님의 한 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사부님께서 아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깨우쳐주셨고 저의 집착을 제거해주셨습니다. 순간 제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사부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아이를 돌봐주시고 많은 수련생이 저 대신 아이를 보살펴주고 있으므로 아이는 잘 지낼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치소에 불법 감금되어 있을 때, 하루는 경찰이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 머릿속에 사부님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관건적일 때, 내가 당신들에게 사람과 결별하라고 하면 당신들은 나를 따라오지 않는데, 기회는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다.”(정진요지-뿌리를 캐다) 제가 심문실로 걸어갔을 때 1년 넘게 보지 못했던 남편을 만났습니다. 경찰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스쳐 지나갈 때 그는 제게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알고 보니 검찰원이 와서 저에게 형량을 정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받으면 형량을 30% 감형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경찰이 제게 말한 바에 따르면 저는 10년 또는 그 이상의 형량에 처할 것이었고, 30%를 감형받으면 최소 3년은 일찍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왜 이 구절을 저에게 알려주셨는지 깨달았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제가 인간과 결별해야 할 순간이며 사부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사악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결정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저처럼 정진하지 않는 제자가 이 고비를 잘 넘기지 못할까 봐 중요한 순간에 다시 한번 깨우쳐주시며 제가 잘못된 길을 걷지 않도록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대법제자로서 대법을 수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며, 사부님께 누가 돼서도 안 되고 대법의 명예를 더럽혀서도 안 되며 절대로 사악에게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됩니다. 저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이 열린 다음 날 밤,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구치소 마당의 잔디밭에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서 있었습니다. 눈이 크고 둥글며 온몸은 알록달록한 깃털로 덮여 있었습니다. 마치 죽은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아름다운 새는 분명 다른 공간에서 온 것일 텐데 아쉽게도 카메라가 없어서 사진을 찍을 수 없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새가 살아나더니 날개를 펼치고 날아갔습니다. 결국 사악은 제 재판이 열린 지 6개월 후, 저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개인적인 결혼 문제에 대해서 저는 한때 갈등했습니다. 당시 나이가 적당한 남성 수련생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저보다 나이가 많았고, 다른 한 명은 저보다 어렸습니다. 어머니와 수련생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저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법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밤, 저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잠들기 전에 사부님께 이 일이 더는 저를 교란하지 못하도록 제자를 깨우쳐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날 밤 저는 아주 선명한 꿈을 꾸었습니다. 고대 어느 왕조에서 제 아버지는 요직을 맡은 문관이었는데, 태자가 권력을 잡으려 아버지에게 접근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온 가족이 태자에게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어린 남자 수련생은 그 전생에 무장이었고, 이번 생의 체격과 비슷했습니다. 그는 갑옷을 입고 허리에 칼을 차고 서둘러 저희 집으로 왔습니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그는 저를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한 절에 숨어 있다가 그가 저를 데리고 한적한 곳을 찾아갔습니다. 우리는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숨겨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습니다.

깨어났을 때, 꿈속에서 가족들과 이별하며 울었던 눈물 자국이 아직 얼굴에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답을 알았고 더 이상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이가 어린 남자 수련생과 결혼했습니다. 그가 바로 지금의 남편입니다. 이번 생은 분명히 제가 은혜를 갚으러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한 왜 제가 남편을 만난 그날부터 이유 없이 계속 그를 챙겨주고 보살펴주고 싶었는지도 깨달았습니다.

자비롭게 제도해주신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를 도와주셨던 수련생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7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7/20/4972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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