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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해 마음에 희망이 가득해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와 어머니는 모두 대법수련생으로서 거의 30년간 대법 속에서 수련 과정을 걸어왔습니다. 세계 파룬따파(法輪大法)의 날을 맞이하여 저희의 수련 중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처음 알게 된 수련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인도로 대법 수련에 입문했는데, 그때 저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인도 아래 시간이 있을 때마다 법공부 모임에 가서 수련생들과 함께 법공부를 하고 아침 연공을 했으며, 운 좋게도 오래된 수련생들이 조직한 대규모 홍법 활동과 천여 명이 참석한 법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법공부 모임에는 수십 명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나중에는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법공부 때는 각자 ‘전법륜’을 한 단락씩 읽고 한 강의를 다 읽으면 모두 자신의 수련 체득을 이야기했습니다.

수련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번의 소그룹 법공부 후에 제가 알지 못하는 한 아주머니가 자신이 마음 고비를 넘은 체득을 이야기한 것이 기억납니다. 그녀의 남편이 아무 이유 없이 그녀의 뺨을 한 대 때렸는데, 그녀는 그때 자신이 수련하는 사람임을 떠올리고 참으며 남편과 따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어디서 잘못했는지 안으로 찾았습니다. 그때 저는 법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어렸기 때문에 수련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아주머니의 언행은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저는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맞고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어디를 잘못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 보통 사람과는 정말 다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나중에 법공부 시간이 길어지면서 수련생들의 심득 교류를 더 많이 듣고 모두의 선량한 언행을 보면서, 저는 비로소 제가 어떤 단체에 들어왔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진선인(眞·善·忍)’의 원칙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법을 처음 얻었을 때, 저는 수련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수련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책에서 말하는 심오한 법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진선인(眞·善·忍)에 대해서도 단지 어린 마음으로 간단히 이해할 뿐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1학기 때 새로운 기하 선생님이 오셨는데, 이 여선생님은 꽤 엄격하셨습니다. 한번은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규율을 지키고 말하지 말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저는 앞자리 학생과 문제를 토론하다가 선생님께 발각되었고, 선생님은 제가 수업 규율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시어 저를 교실 앞으로 나와 서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큰 수치였습니다. 저는 줄곧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고 평소에 매우 얌전해서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 저는 교실 앞에서 한 교시 내내 서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매우 슬프고 억울하게 울었지만 선생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이미 진선인을 배웠다는 것을 떠올렸고, 선량해야 하며 남을 원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저는 이렇게 수련에 대해 표면적으로만 대하고 진선인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내내 이 기하 선생님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생각이나 원망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선생님은 제가 좋은 아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고 저에게도 매우 잘 대해주셨고, 우리 사제 관계는 계속 매우 화목했습니다.

어머니의 가족은 불연(佛緣)이 깊은 편이었습니다. 외할머니가 어렸을 때 집안에 불교를 믿는 어른들이 계셨고, 나중에 외할머니와 어머니도 불교를 믿기 시작하고 채식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불교 신앙은 어머니의 심신에 진정한 변화를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항상 약을 먹었으며, 신장염과 메니에르병이 있었고, 특히 심장병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이후에 어머니는 대법 수련을 시작하면서 건강이 빠르게 회복되었고, 심장병 치료제도 더 이상 복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신장염도 나아지고 매일 즐겁게 지내셨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직장은 3교대였는데, 예전에는 야간 근무가 되면 사람이 없어져서 어디 가서 잠을 자러 갔었습니다. 어머니는 꽤 영리하셔서 개인적인 이익 때문에 반장과도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대법을 수련한 후 어머니는 진선인에 따라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일에 성실하게 책임져야 하며 타인에게 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내면에서부터 진정으로 자신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야간 근무할 때도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반장이 점검을 나오면 대부분 어머니 혼자서 근무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을 자러 간 것을 보았습니다.

2. 어려움을 겪으며 올바른 믿음을 굳건히 하다

저와 어머니가 즐겁게 대법 속에서 수련하고 있을 때, 1999년 7월 20일, 악의 우두머리 장쩌민(江澤民)이 주도한 파룬궁(法輪功)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피비린내 나는 박해로 우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정치운동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저는 그 당시 소년의 순박함과 천진함이 남아 있어서 두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부가 왜 파룬궁 수련을 허락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진선인(眞·善·忍)이 매우 좋고 사부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람됨의 도리가 틀리지 않은데, 옳은 일을 왜 포기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자 지역사회와 경찰이 자주 우리 집을 ‘방문’했고 어머니의 신분증과 책을 가져갔습니다. 한번은 두 명의 지역사회 주임이 다시 와서 어머니에게 ‘수련하지 않겠다는 보증서’에 서명하라고 했는데, 마침 어머니가 집에 없어서 저에게 대신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나이가 어려서 수련을 포기하는 것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고 그냥 서명해서 그들을 속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펜을 들자마자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저는 즉시 이 서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그 종이를 찢어버렸습니다. 나중에 우연히 그중 한 주임을 만났는데, 저에게 “네가 그 종이를 찢은 것은 옳은 일이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어머니가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서 경찰이 항상 집과 어머니의 직장에 와서 괴롭혔습니다. 어머니는 또한 여러 차례 불법 구금을 당했고 지역 파출소에는 이미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해 겨울, 아마도 설날 전후에 우리가 모두 잠들었을 때, 한밤중에 경찰들이 담을 넘어 우리 집에 침입했습니다(그때 우리는 단층집을 세내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강제로 어머니를 데려가 불법 구금했습니다. 중공 통치하의 공안은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어머니는 진선인(眞·善·忍)의 원칙에 따르는 사람이 되어 직장에서 평판이 매우 좋았으며, 지도자에게 진상을 알리자 지도자는 어머니의 처지를 매우 동정했습니다. 매번 어머니가 납치되어 구금될 때마다 직장 지도자가 나서서 사람을 요구했지만, 나중에 지도자는 상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어머니가 조기 퇴직하게 했습니다. 본래 어머니의 직장은 성과가 좋고 각종 복지 혜택도 좋았는데, 조기 퇴직 후에는 월급이 몇백 위안에 불과했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저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저와 두 눈이 실명한 외할머니를 데리고 집을 세내어 살았기에 생활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되실 겁니다. 어렵게 철거 보상을 받아 정착 주택을 얻었고 우리는 기쁘게 이사했지만, 뜻밖에도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을 거의 졸업할 무렵 몇 개월 전에 우리 시에서 대법제자들에 대한 대규모 납치가 있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수천 명이 납치되었고 여러 사람이 맞아 죽거나 다쳤으며, 중공 악당의 오만함과 잔혹함은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대규모 체포가 발생한 바로 그날 밤, 경찰이 우리집에 와서 어머니를 찾았고 어머니가 없는 것을 보고 저를 파출소로 데려가 심문했습니다. 그들은 어머니가 평소 누구와 연락하는지, 집에서 시간이 있을 때 연공을 하는지 등을 물었는데, 저는 모두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모른다고 둘러댔습니다. 나중에 경찰은 제게 ‘수련하지 않겠다는 보증서’에 서명하라고 했지만 저는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몇 시간 동안 심문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고, 이미 늦은 밤이라 저를 풀어주었습니다. 저는 그날 밤 집을 떠나 어머니를 찾으러 갔고 우리의 유랑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가 풀려난 다음 날 밤 경찰이 다시 집에 와서 저를 납치하려 했는데, 저를 데려가 실적을 올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미리 떠났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고 친척 집에 임시로 머물렀으며, 외할머니는 일시적으로 친척에게 부탁해 돌봐드리게 했습니다. 경찰이 학교에 와서 괴롭힐까 봐 두려워 저는 어쩔 수 없이 사립 고등학교로 전학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박해를 피하려고 저는 세 번이나 학교를 옮겨야 했고, 결국 이 사립 고등학교에서 졸업했습니다.

그 시절 중공 악당의 박해로 우리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고, 어머니는 저와 외할머니를 데리고 불안정한 생활을 했으며, 생활은 가난하고 궁핍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따라 몇 번이나 이사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여서, ‘집’이라는 친근한 단어에 대해 더 이상 따뜻한 그리움과 감정이 없었고, 그저 잠자는 곳일 뿐이며 저는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라고 느꼈습니다.

3. 진선인(眞·善·忍)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 되다

나이가 들고 사회 경험이 쌓이면서 수련에 대한 저의 이해는 더 이상 어린 시절처럼 얕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몇 년간 저는 시간을 내어 진지하게 ‘9평 공산당’(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을 읽었고 사악한 공산당에 대해 비교적 명확한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오랜 세월 박해받은 경험과 사부님의 가르침을 결합하여 왜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켜야 하는지를 더 깊이 생각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선인(眞·善·忍)은 보편적인 가치로서, 이런 보편적 가치에 따라 자신의 도덕을 향상하고 선량하게 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들과 예수의 성도들이 이전에 경험했던 것과 같은 바른 믿음의 길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부님을 따라 가장 바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비록 이 길이 매우 걷기 어렵고 가시덤불로 가득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굳건히 걸어갈 결심이 있습니다.

이 몇 년간 우리의 일상생활과 직장에서, 자신이 파룬궁수련생임을 자주 상기하며 사부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최대한 진선인의 원칙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저는 A 직장에서 6년간 일했습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일 경험이 많지 않아 문제가 생기면 사장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한번은 고객을 응대하던 중 꽤 까다로운 문제가 생겨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평소처럼 저는 사장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고객과 다른 동료들 앞에서 저를 심하게 꾸짖었고, 고객마저도 미안함을 느껴서 오히려 사장님에게 말했습니다. “잘못했으면 다시 하면 되죠, 괜찮아요.” 사장님의 갑작스러운 꾸짖음에 저는 당시 좀 당황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원망이나 억울함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장님은 저에게 일부러 화를 낸 것은 고객에게 우리가 책임감 있게 대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이해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오스트레일리아법회 설법’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어떤 일에서든지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고 나중에 자신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바로 당신들이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나중에 자신을 생각(先他後我)하는 정법정각으로 수련하여 원만을 이루게 하려한다.”

사장님이 이 직장을 이끌며 여러 관계를 조율하느라 정성과 노력을 들이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을 것이기에 그녀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법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해야 했고, 잠시의 억울함은 아무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저는 이 직장에서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책임을 떠안았지만,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것들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이런 일들은 머릿속에서 점차 잊혀졌습니다.

나중에 저는 이 직장에서 가장 오래되고 직함이 가장 높은 직원이 되었지만, 사장님은 저에게 직함과 경력이 저보다 낮은 동료들과 같은 급여와 대우를 주었는데, 저는 이것에 대해서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사장님은 처음에 제가 대법을 수련한다는 것을 알고 저를 해고하고 싶어 했습니다. 사장님의 남편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게 어때서? 그 사람은 훔치지도 않고 강도질하지도 않는데, 그렇게 좋은 사람을 왜 내보내려고 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직장에서 6년 동안 일하며 사장님과 함께 꽤 어려운 시간을 보냈고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이곳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후에도 사장님은 친구를 통해 저에게 말을 전했습니다. 만약 제가 돌아오고 싶다면 더 좋은 급여와 대우를 해주겠다고 했지만 저는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저는 B 직장에서 6개월 동안 있었는데, 시간은 짧았지만 사장님과 사모님과의 관계는 매우 화목했습니다. 제가 이곳에 왔을 때 막 중급 직함을 취득했고 일 경험이 이미 풍부했습니다. 사장님은 제 업무 능력을 매우 인정했고 고객들의 평가도 매우 좋았습니다. 파룬궁수련생으로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디서든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기에, 저는 직장에서 일이 생기면 사장님이나 고객의 입장에서 더 많이 생각하고 자신의 이해득실을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고객이 가격을 흥정할 때 어떤 업체들은 돈을 벌기 위해 품질을 떨어뜨리지만, 저는 대법제자로서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사람이 되어야 했기에, 비록 고객이 주는 보수가 적더라도 정상적인 절차대로 진행하며 품질과 양을 보장하면서 일을 완성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더 고생하더라도 일을 최대한 잘하려고 노력했고 대충 하지 않았기에, 사장님과 고객들 모두 저를 인정했습니다.

한번은 한 고객의 문제가 꽤 까다로워서 제가 여러 번 처리해도 큰 진전이 없었는데, 사모님이 다른 지점의 직원에게 전화해 저와 그 동료가 소통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매우 화목하게 소통했습니다. 그 후 사모님이 저를 불러 대화를 나눴는데, 제가 어떤 생각을 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저는 바로 살면서 끝까지 배우는 것이며,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군가 조언해주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면 매우 좋은 일이라고 말하며, 사모님과 그 동료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사모님은 매우 기뻐하며 “나는 당신과 대화하는 것이 좋아요. 모든 일을 다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마침 설날이 다가왔는데 우리 지점은 고객이 적어 수익이 많지 않아 사장님이 미리 휴가를 주었습니다. 설날 후 급여를 받을 때 사장님은 저에게 전액을 주었는데, 저는 전년도 연말에 수익이 높지 않아 사장님이 돈을 벌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리 휴가를 준 그 며칠간의 급여는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초과한 부분을 자발적으로 돌려주었습니다. 사모님은 매우 기뻐했고 제가 그렇게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며, 제 인품을 매우 인정한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대법 수련생으로서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첫 달에 원래 있던 두 명의 조수가 모두 떠나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일하는 시간 외에도 원래 조수들이 하던 일을 사장님을 위해 도왔고, 사장님은 이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나중에 새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은 경험이 별로 없어서, 저는 성심성의껏 그들을 가르치고 화목하게 지내며 능력 내에서 사장님의 근심을 덜어드렸습니다. 약 6개월 후 이사 때문에 퇴직하게 되었는데, 사장님은 아쉬워하며 “나는 당신과 충분히 지내지 못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를 배웅할 때 사모님은 정중하게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당신이 다시 돌아오길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4. 대법의 은혜

우리가 수련에서 마음 경지를 높이면서 주변 환경도 조용히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대략 2008년, 우리는 친척 집을 봐주기 위해 이사 갔고, 이후 10여 년 동안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 아래 우리의 생활은 계속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며 큰 교란을 받지 않았습니다. 2017년까지 저는 친지들의 도움으로 집 한 채를 샀습니다.

당시는 집값이 최고점이었고 저는 돈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집주인이 급히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집은 거의 원가로 직접 주인에게서 샀고 중개 수수료도 절약했습니다. 집의 면적은 크지 않았지만 구조와 형태, 위치와 교통, 가격 등 모든 면에서 제 기대에 부합했습니다. 전체 집 구매 과정이 매우 순조로워서 이 집은 마치 일찍부터 저를 위해 준비된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집이 사부님의 은혜와 선물임을 알고 있습니다.

집을 사면서 저는 10여만 위안의 외상을 지게 되었는데, 2019년까지도 다 갚지 못했습니다. 당시 직함 승급을 위해 퇴직하고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이후 코로나 상황으로 약 1년 반 동안 일을 하지 못했고, 2021년 7월이 되어서야 다시 정상적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코로나가 있었던 몇 년간 중국의 경제는 침체하고 각종 산업이 어려워져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기도 힘들었는데, 돈을 벌어 빚을 갚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신기하게도 제가 일을 시작한 후 짧은 4년 만에 저는 남은 빚을 다 갚았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저축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몇 년간 우리의 생활은 점점 좋아졌고, 우리는 특별히 돈을 모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생활에 필요한 것과 사람들과의 교류도 모두 평소와 같이 했는데도 은행 계좌의 돈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모두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많은 돈을 가지게 될 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건강한 몸과 안정된 수입을 가지고 있으며, 친지와 친구들 눈에는 어머니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며 선량하고 평화롭게 먹고 입는 걱정 없이 살고 있습니다.

한때 사악한 박해는 우리를 거의 무일푼으로 만들었지만,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보호와 인도 아래 대법의 법리가 조금씩 우리의 어리석음과 미혹을 지워냈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 우리가 견고한 의지와 아름다운 품성, 넓은 마음을 수련해 내도록 했습니다. 이익과 욕망의 유혹을 담담히 바라보며 우리는 수련인의 마음 경지와 지혜가 무엇인지, 생명의 진정한 초탈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길을 돌아보니 우리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고 오히려 더 좋고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당초 장쩌민(江澤民)은 “3개월 내에 파룬궁을 소멸시키겠다!”라고 외치며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적으로 무너뜨리며, 육체적으로 소멸시켜라’는 소멸 정책을 내세워 파룬궁 제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26년간의 검증을 통해 진정으로 수련하는 대법제자는 꺾을 수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악은 결코 선을 바꿀 수 없으며, 이 사악한 박해는 완전히 실패했고 완전히 잘못되었으며 즉시 중단되어야 합니다!

맺음말

과거를 돌이켜보며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이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셨고, 대법의 법리는 우리가 자신만을 위하는 것에서 남을 위하는 생명으로 변화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내면 경지의 승화와 탈바꿈은 우리에게 생명의 본질이 향상된 후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깊이 체득하게 했습니다. 더 많은 인연 있는 사람이 우리처럼 불법(佛法)의 인도와 구원을 얻어 말세의 혼란 속에서 생명이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기를 희망합니다.

(명혜망 2025년 세계 파룬따파의 날 응모작)

 

원문발표: 2025년 5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5/17/4940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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