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린성 대법제자
[명혜망] 정법이 진전됨에 따라 조사정법(助師正法)하는 대법제자들은 수많은 비바람을 겪었고 무수한 격류와 험난한 여울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은 사부님의 일깨움과 자비로운 보호 덕분이며, 또한 제자들의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혼자서 어린 아이를 데리고 힘겹게 살아왔다. 생활 속의 고통은 자세히 말하지 않겠지만 한마디로 ‘어려웠다’. 힘든 불행 속에서 나는 다행히도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얻어 생명의 본원으로 돌아가는 수련의 길을 걷게 되었고, 가장 운 좋은 대법제자가 되어 점차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셋째 동서가 부정한 방법으로 시부모님의 유산을 차지했다는 이유로 남편은 셋째 시동생 부부와 크게 다퉜고, 셋째 동서네 집 문을 발로 차서 큰 구멍을 냈다. 시누이들도 이익을 봤기에 셋째 동서 편을 들었다. 그래서 시부모님의 유산을 우리는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시댁 식구들과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수련을 시작한 후 법공부를 통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부님의 가족이며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기회를 찾아 시댁 식구들과 인연을 이어갔고, 서로간의 벽을 허물어 예전처럼 시댁 식구들을 대했다. 남편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다. 그들은 모두 다섯 남매인데 형제 중에서 내 남편이 장남이었고, 누나 한 명과 여동생 한 명, 남동생 두 명이 있었다. 형님(큰시누이) 가족은 남방에 살았는데, 아주버님(시매부)은 젊었을 때 공군 지상근무 인사간부여서 머릿속에 중공 악당의 독소가 가득 찬 고참 당원이었다. 셋째 동서는 매우 속물적이고 사람을 무시하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가족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는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나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댁 식구들과 접촉할 수만 있다면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형님 부부는 매년 한 번씩 오셨는데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시댁에 가서 여전히 맏며느리처럼 모두를 대했다. 나는 담소를 나누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으면서 묵묵히 모두를 챙겼다.
셋째 동서네에서 밥을 먹고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 셋째 동서는 여러 형제자매에게 택시를 불러주고 차를 구해주었지만, 나와 아버지 없는 아이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셋째 동서가 온 가족 여행을 주선하여 차 좌석을 배정할 때도 다른 친척들에게는 친절하게 좋은 자리를 찾아주었다. 소외당한 나와 아이는 구석자리를 찾아 앉았고, 아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없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부모님은 생전에 재산을 시동생과 시누이들에게만 주어서 우리 몫은 없었다. 지금은 더더욱 바랄 것이 없었다. 나는 시댁 식구들과 연락할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그들은 구원받아야 할 중생이었고 나는 그들을 구할 책임이 있었다.
한번은 형님이 둘째 동서에게 옷감을 주었는데 둘째 동서가 탐탁지 않아하며 거절했다. 할 수 없이 형님은 그것을 나에게 주었고 나는 매우 감사히 여겼다. 나는 남들이 거부한 것을 나에게 준다고 생각하지 않고 형님의 신뢰와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한 가지 일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른 처리방법이 있고 또 다른 결과가 있는 법이다.
또 한번은 형님이 광시(廣西)로 여행 가서 장신구 몇 개를 사왔다. 형님이 먼저 작은 시누이에게 하나를 주었는데 작은 시누이는 “줄 거면 진짜 금이나 은으로 된 걸 주세요. 이건 보기만 해도 가짜네요, 전 안 가질래요”라고 말했다. 형님은 매우 난처해했다. 둘째 동서를 만나서 또 하나를 건네자 둘째 동서는 “제겐 금으로 된 것도 있는데 안 하고 다녀요. 이런 건 하기 싫어서 안 가질래요”라고 했다. 형님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나를 보고는 더욱 난처해했다. 주지 않자니 불공평한 것 같고, 주자니 내가 거절할까 봐 작은 시누이와 둘째 동서가 한 말을 내게 전했다. 나는 웃으며 “형님, 이건 광시의 공예품이라 그 지역의 생활특색이 담겨있고 형님이 여행했던 곳의 기념품이라 의미가 있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여행 가서 기념품을 사오는데 그건 매우 소중한 거예요”라고 말했다. 형님은 이 말을 듣고 한숨을 돌리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라고 했다.
둘째 동서는 성격이 좀 고집스럽고 셋째 동서는 속물근성이 있어서 둘은 여러 해 동안 왕래하지 않고 서로를 원망했다. 과부가 된 맏며느리인 나는 누구 집에 일이 있어도 가고 누구와도 가깝게 지냈다. 셋째 동서 친정의 남동생들, 여동생들 결혼식에도 모두 갔고 둘째 동서의 딸 결혼식에도 직접 찾아갔다. 아주버님은 “그들은 서로 왕래도 끊었는데, 처남댁만 여전히 모두와 연락하고 지내는군!”이라고 말했다.
작은 시누이는 살림살이가 헤퍼서 계획성이 없었고 때로는 돈이 모자라면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녔는데 남매들은 모두 그것을 못마땅히 여겼다. 모두가 내가 형편이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작은 시누이는 내게 돈을 빌리러 왔고 나는 빌려주었다.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왔고 도울 수 없을 때는 선의로 시누이에게 검소하게 살라고 일깨워주었다. 한번은 모두가 모였을 때 내가 다시 시누이에게 생활을 잘 꾸려서 아이에게 돈을 좀 남겨두라고 권했다. 아주버님이 이를 보고 감탄하며 “이것이 진정한 가족이구나!”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댁 식구들은 내가 따지지 않고 이해심 많고 배려한다며 나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다양한 기회를 통해 시댁 식구들에게 진상을 알렸고 대부분이 삼퇴(중공의 당, 단, 대 조직 탈퇴)를 했으며 가장 속물적이었던 셋째 동서도 탈퇴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사람이 가장 고집이 셌는데 하나는 아주버님이고 다른 하나는 둘째 동서로, 무슨 말을 해도 탈퇴하지 않았다.
아주버님은 퇴직 전 공군 지상근무 인사간부여서 중공 악당의 세뇌를 깊이 받았고 성격도 접근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형님 부부는 오랫동안 손자를 봐주었는데 어느 해 갑자기 일이 생겨서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 했고 손자를 돌볼 사람이 없었다. 형님이 작은 시누이를 찾아갔지만 시간이 없다며 거절했고, 둘째 동서는 남방은 더워서 못 가겠다고 했다. 형님은 할 수 없이 나를 찾아와 손자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작은 시누이와 둘째 동서가 가지 않은 진짜 이유는 형님의 며느리가 까다로워서 모시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속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누구든 구원의 대상이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아무리 상대하기 힘들더라도 모두 내가 수련해서 없애야 할 사람 마음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승낙하자 형님은 매우 감사해했다. 특히 아주버님은 형님에게 “처남댁이 가니 정말 안심이 되네. 처남댁이 가야만 해”라고 말했다.
나는 남방에 있는 형님의 아들 집, 즉 남편의 조카네 집에 갔다. 조카는 나를 큰외숙모라고 불렀고 나는 조카를 위해 두 달 동안 아이를 봐주었다. 마지막에 조카며느리가 내게 “우리 시댁과 친정 가족 중에서 외숙모가 최고예요. 저는 둘째도 갖고 싶은데 큰외숙모가 또 오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조카며느리와 그녀의 어머니는 진상을 이해하고 삼퇴를 했다. 나중에 아주버님은 “우리 며느리가 자네를 정말 좋아하더군!”이라고 했다.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나는 조금씩 대법으로 나 자신을 바로잡고 남을 위해 생각했다. 이것은 나를 수련하는 것이면서도 내 수련으로 진상을 알리는 것이었다. 나의 언행을 아주버님은 매우 인정하며 나와 집안일이나 사회현상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차츰 아주버님과 대화가 많아졌고, 나도 아주버님의 입장에서 그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예전에 내가 아주버님에게 진상을 알렸을 때의 그의 마음속 응어리를 생각해서 나는 성급하게 성공하려 하지 않고 그를 많이 이해하고 배려했다.
나이가 들수록 아주버님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하지만 아주버님은 매년 와서 날 볼 때마다 내 몸이 매우 건강하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좋은 것을 보고 깊이 감탄했다. 특히 어느 해에는 우스운 일이 하나 있었다. 형님 부부와 작은 시누이, 그리고 나, 우리 몇 사람이 함께 둘째 동서네 집에 놀러 갔다. 식사 후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예쁘게 나오려고 그들이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을 마치고 사진 찍을 준비를 하는데 둘째 동서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소리쳤다. “저는 언니 옆에서 사진 안 찍을래요. 언니는 너무 하얘서 제가 까맣게 보여요.” 작은 시누이도 “저도 언니 옆에 안 설래요. 저도 까맣게 보여요”라고 했다. 형님도 연신 “어쩜 이렇게 하얗지? 어쩜 나이가 안 들어 보이지?”라고 말했다. 한바탕 웃음 속에서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매년 모두 모일 때마다 작은 시누이와 둘째 동서는 “피부가 어쩜 이렇게 고와요? 어쩜 이렇게 하얗죠?”하며 떠들었다.
매년 모두가 둘째 시동생 집에서 며칠씩 묵으면서 며칠 동안 가깝게 지냈다. 하지만 매년 둘째 시동생이 밥을 할 때면 곤란해했다. 형님과 작은 시누이, 둘째 시동생은 모두 당뇨병이 있어서 밥을 많이 먹지도 못하며 단 것도 못 먹었다. 아주버님도 혈압과 혈중 지질이 높아서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없었다. 둘째 동서는 여러 가지 병에 시달렸는데 특히 건조증후군과 비위가 좋지 않아서 매운 것도 짠 것도 먹지 못했고 자극적인 음식은 전혀 먹지 못했다. 게다가 식사시간도 맞추기가 어려웠다. 둘째 시동생은 식사 전 정해진 시간에 인슐린을 맞아야 했고, 형님은 식사 전 정해진 시간에 혈당강하제를 먹어야 했으며, 작은 시누이는 식사 후 정해진 시간에 혈당강하제를 먹어야 했다. 약 복용 시간이 각자 달랐지만 상태는 다 비슷했다. 식사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저혈당이 되기 쉽고 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든 다 먹을 수 있었고 일찍 먹든 늦게 먹든 상관없었으며 싱거워도 짜도 괜찮았다. 모두가 다 먹고 나면 얼마 남지 않은 음식, 보관하기 힘든 반찬들은 밥과 함께 모두 먹어치웠다. 양이 많든 적든 다 괜찮았다.
매번 사람들은 과일을 많이 샀지만 먹을 때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형님과 작은 시누이, 둘째 시동생은 모두 당뇨병이 있어서 수박을 먹을 때도 껍질에 가까운 부분만 먹을 수 있었다. 이 부분이 당분이 적어서였는데 그마저도 몇 입만 먹을 수 있었고 당분이 높은 과일은 전혀 먹을 수 없었다. 둘째 동서는 비위가 좋지 않아서 과일을 많이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되고 설사를 했다. 날씨가 더워 과일을 오래 보관할 수 없었는데 과일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나는 맘껏 먹었다. 담소를 나누다가 형님이 나를 가리키며 또 모두에게 말했다. “올케는 어쩜 뭘 먹어도 괜찮지? 어쩜 아무 탈이 없을까?”
아침에 일어나면 매우 시끌벅적했다. 형님과 작은 시누이는 늘 변비가 있어서 아침에 일어나면 방안을 몇 바퀴 걸어야 했다. 걸으면서 아랫배를 손으로 두드리다가 겨우 변의가 느껴지면 즉시 화장실에 가야 했는데, 늦으면 또 볼일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화장실 문 밖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더더욱 볼일을 볼 수 없어서 한번 들어가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둘째 동서는 비위가 좋지 않아 자주 설사를 했는데 매우 급하고 시간도 불규칙했다. 이리하여 아침의 화장실은 ‘쟁탈’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연공을 마치고 바로 화장실에 가서 빨리 볼일을 보고 나오면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이렇게 되자 형님과 작은 시누이는 어떻게 하면 나처럼 배변이 순조롭고 건강할 수 있을지 간절히 알고 싶어 했고, 두 사람은 나를 본받아 연공을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을 아주버님도 지켜보며 깊이 생각에 잠겼다.
지난해 형님 부부가 또 오셨는데 아주버님은 눈에 띄게 노쇠해 보였다. 우리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인연이 무르익었다고 느껴져서 나는 말했다. “아주버님, 공산당은 인간이 하늘을 이긴다면서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잖아요. 아주버님이 보시기에 하늘과 땅을 이길 수 있을까요? 특히 전염병이 발생한 이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요? 파룬궁 수련은 건강에 정말 좋아요! 그 당에서 탈퇴하세요!” 아주버님은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탈퇴하지, 탈퇴해야지”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고집 세던 아주버님이 기꺼이 탈당에 동의하셨다. 아주버님에게 진상을 얼마나 오래 알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진상이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고집 센 둘째 동서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온몸에 치료하기 힘든 병이 있었다. 한번은 베이징에 가서 힘들게 명의를 찾아 많은 돈을 썼지만 차도가 없었다. 게다가 불면증도 자주 있어서 편히 자려고 수면제를 많이 샀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몇 년 동안 모두가 모이는 자리에서 그녀는 내 건강상태를 보고 매우 깊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내 마음가짐을 그녀는 매우 이해할 수 없어서 자주 물었다. “언니는 어쩜 항상 이렇게 즐거워요?” 내가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게 매우 힘들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게서 그들은 불행한 기색이나 건강상의 문제를 본 적이 없었다.
올여름에는 둘째 동서의 딸이 외지에서 돌아와 모두가 다시 모였다. 식사 때 둘째 동서의 딸이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음식을 조금밖에 먹지 못했고, 모두들 몸을 어떻게 보양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째 시동생이 내게 물었다. “형수님, 형수님은 정말 아무 병이 없으시네요. 어떻게 약을 전혀 안 드시는 거예요?” 둘째 동서의 딸은 더욱 궁금해하며 물었다. “큰고모, 어떻게 피부가 이렇게 좋으세요? 제 피부보다도 더 고운 것 같아요!” 그녀는 겨우 서른 남짓인데 나는 이미 일흔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연공을 하니까 그렇지!” 이렇게 해서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또 진상을 알렸다. 고집 센 둘째 동서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중공의 공청단과 소선대 조직에서 탈퇴하는 데 동의했다. 아무것도 믿지 않던 그녀가 이제는 둘째 시동생을 쫓아다니며 “빨리 단에서 탈퇴해, 재앙을 피할 수 있대”라고 말했다.
나는 깨달았다.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이 바로 진상이며,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은 수련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상태로서 밥 먹고 잠자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생활의 모든 세세한 부분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점점 나 자신을 바로잡으면서 주변의 모든 것도 바로잡고, 주변의 공간장을 깨끗이 정화했다.
형님의 남편과 둘째 동서, 이 두 사람에게 진상을 알린 것은 몇 년이나 걸렸다고도 할 수 있고, 또 몇 년 동안 전혀 알리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을 쫓아다니며 입으로 알리지 않고 묵묵히 나 자신을 수련하면서 몸과 마음으로 알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내 말을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가짐과 상태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이다. 그들은 수련인이 발산하는 장이 평범하고 조용하면서도 그토록 특별하다는 것을 느꼈고, 파룬따파의 위대함과 비범함을 느꼈다. 아마도 그들이 모두 진상을 알았거나 내 역사적 사명이 완수된 것 같다. 형님은 내년에는 오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다시 만날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여러 해에 걸쳐 시댁 식구들에게 알려야 할 진상을 모두 알렸다.
아주버님과 둘째 동서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은 정말 어려웠고, 나는 포기할 생각도 했었다. 시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미 진상을 알렸고 그들 둘만 듣지 않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그건 그들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법공부를 통해 나는 깨달았다. 수련인은 자비를 닦는 것이고 정법이 끝나지 않는 한 기회가 있으며,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생활 속에서 중생과 만나는 인연은 모두 사부님의 질서 정연한 안배다. 나는 바로 견지하고 굳게 믿고 인내하면서 결과를 바라지 않고 모든 생명에게 기회를 주어야 하며, 또한 나 자신에게도 정념을 가지(加持)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원문발표: 2024년 11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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