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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으로 반(反)박해한 한 차례 경험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8월, 저는 운 좋게 대법 수련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10년 전 두 차례나 기연(機緣)을 놓쳐 대법을 얻지 못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파, 저는 사존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이번에 얻은 귀중한 수련의 기회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졸음마와 사상업(思想業)의 교란을 극복하고자 2016년 3월부터 ‘전법륜(轉法輪)’과 일부 경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20여 회 암기했습니다. 동시에 사부님의 모든 설법을 체계적으로 학습했습니다.

대량의 법공부, 특히 법을 외움으로써 저는 대법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15년간의 수련 길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위대하신 사존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그리고 수련생들의 정념 어린 도움 속에서 대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아래에 제가 2022년 7월에 정념으로 박해에 저항한 경험을 사존께 보고 드리며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고자 합니다. 타당치 않은 부분이 있다면 자비로이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1. 갑작스런 납치, 파출소에서의 반박해

2022년 7월 어느 날, 저는 차를 타고 시골에 있는 수련생들에게 대법 자료를 전하러 갔습니다. 한 수련생 집에 도착해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현지 파출소 경찰들과 마을 종합관리 사무실 직원 10여 명이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평소 저는 진상 자료를 배포할 때마다 엄청난 두려움과 압박감을 느꼈기에, 그 공포심을 순식간에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돌발 상황을 처음 맞닥뜨려 마음이 매우 동요되었지만, 저 스스로 죄를 짓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어서인지 겉으로는 꽤 침착해 보였습니다. 제가 가져온 자료가 수련생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되면서도, 사존께서 사악의 그 어떤 요구에도 협조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를 심문하는 파출소장에게 “당신들 뭘 하는 거예요? 사람을 놀라게 하고 말이에요. 저는 이만 가야겠어요”라고 하며 밖으로 나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소장은 즉시 다른 사람과 함께 제 팔을 꺾어 차 문 쪽으로 끌고 갔습니다. 저에게 수갑을 채우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걸 보고 저는 단호하게 “팔 잡지 말아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수련생 역시 제 팔을 놓으라며 제지했고 결국 그는 더 이상 수갑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파출소로 끌려갔고 소장은 차에서 내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강제로 내리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저는 “전 여자예요”라며 그가 제 팔을 꺾은 것에 항의했습니다. 그제야 그의 말투가 누그러졌고 저는 차에서 내려 복도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파룬따파는 정법(正法)입니다”라고 말했죠. 경찰들도 조용히 듣고 있었고 아무도 저를 막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저는 파룬따파가 정법이며,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중 누구도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잖아요. 저는 대법을 배워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기에 진실을 말할 것입니다.”

그 후 저는 한 방으로 끌려갔고 문 앞에는 젊은 경찰 두 명이 저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재빨리 의자에 앉아 정념을 발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매우 어수선하고 긴장되었습니다. 발정념 수인(手印)을 하면 정념의 위력이 더 클 거라 생각해 입장(立掌) 자세로 정념을 발했습니다. 그런데 힘껏 비틀렸던 오른팔이 심하게 떨리며 제대로 들어 올려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화수인으로 바꿨습니다. 처음에는 경찰들이 저의 발정념을 막을까 봐 걱정했는데 아무도 간섭하지 않아 한 시간 넘게 의자에서 가부좌하며 끊임없이 정념을 발했습니다. 당시 코로나 사태 와중이라 경찰들은 저를 데리고 PCR 검사를 하러 갔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가 나쁜 짓을 한 줄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어 두 의료진에게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한다는 이유로 감금되었습니다. 파룬따파가 좋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의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졌고 소장은 “당신이 그러면 뭐가 달라지나요?”라며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를 무시했습니다.

그날 오후 3시경, 저는 현(縣) 공안국으로 인계되었습니다. 이송 도중 D 소장에게 물었습니다. “저를 감시하고 있었나요? 어떻게 제가 아주머니 댁에 도착하자마자 당신들이 나타났죠?” 그가 대답하길 “Y는 우리가 이미 전향(수련 포기)시켰지만, 당신 둘은 미혹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Y가 전향한 건 당신들이 강요했기 때문이죠. 누가 진심으로 전향하겠어요”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는데 그래도 선한 마음이 남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경찰로서 대법 박해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자신도 모르게 나쁜 짓을 하며 스스로를 해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2. 현 공안국서 반박해하며 대법 진상을 알리다

공안국에 들어서자 국보(국내안전보위대) 소속의 여경이 절 맞이했습니다. 그녀가 대법을 모독하기에 저는 즉시 바로잡았습니다. “파룬따파는 바른 법입니다.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널리 전해지고 있고, 홍콩과 마카오, 대만에서는 공개적으로 수련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가 다른 경찰에게 “맞아, 내가 홍콩에 갔을 때 봤어. 공개적으로 연마하더라고”라며 동의를 표했습니다. 그 뒤로 국보 대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우리 집을 수색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제가 길 안내를 해주기를 바랐지만 저는 거절했습니다.

가택수색 후 D 소장과 여자 경찰이 절 심문하며 기록을 남겼습니다. D 소장은 저에게 “공산당이 주는 밥을 먹으면서 공산당을 비난하다니”라며 큰소리로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제가 벌어서 밥을 먹고 있어요. 제 일은 사회에 봉사하고 이 지역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것입니다. 월급을 받는 것은 사회에서 인정한 제 노동의 대가입니다. 어디에서 일하든 보수를 받지 않나요? 공산당은 그저 집사일 뿐입니다. 하늘과 땅, 만물과 생명은 공산당의 소유가 아닙니다.”

이때 40대쯤 되어 보이는 간부 같은 남자 경찰이 심문실로 뛰어 들어와 “가방 내놔!”라고 윽박지르더니, 제 손에 들린 작은 가방을 낚아채 바닥에 내팽개쳤습니다. 그러고는 사나운 눈길로 저를 노려봤습니다. 저는 화내거나 겁먹지 않고, 조용히 “제 가방을 함부로 던지면 안 됩니다. 거기에 휴대폰이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저 평온하게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습니다. 제 눈동자에 악의나 공포가 전혀 없다는 걸 보고 그의 눈빛에서 흉악함이 서서히 가셨습니다. 그는 결국 말없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어서 저는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은 조작극이며, 중공이 각종 날조된 거짓말로 파룬따파를 모함하고 박해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경찰이면서 왜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온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지 조사하지 않나요?” 그러자 여경이 다급히 “우린 당신을 심문하는 중이에요. 지금 누가 누굴 심문하는 거죠?”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제가 쟁투심이 있다는 걸 깨닫고 더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의 심문에서 그들은 다시는 흉악한 태도를 보이지 못했고 저는 그들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심문이 거의 끝날 무렵, D 소장이 집으로 돌아갔고 국보 대장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그는 기록을 훑어보며 “이 부분 당신이 한 말 맞죠?”하고 물었는데, 저는 즉시 “전 아무 말도 안 했어요”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국보 대장은 “그럼 삭제하지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D 소장이 날조해 넣은 부분도 지워달라고 하자 그는 정중하게 그 부분도 삭제해주었습니다. 심문이 끝나고 그들은 조서에 서명하라고 했지만 저는 거부했습니다.

밤 9시 넘어서야 가족들이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들은 다음 날 다시 와서 조서를 작성하라고 했습니다. 가족들은 제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줄곧 지지하지 않았기에 저는 가족들이 공포에 질려 저를 매우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집에 가는 내내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즉시 발정념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공간에서 경찰들을 박해에 가담시키는 사악한 생명들을 모조리 해체하고, 그 어떤 사악도 경찰들을 조종해 대법에 죄악을 저지르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정념을 발했습니다. 비록 감옥에 가게 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로 사악에 굴복하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했습니다. 오직 사부님 말씀대로, 대법과 사부님을 확고하게 믿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온종일 정사(正邪)간의 대전을 치르느라 발정념을 끝내고 나니 너무나 지쳤습니다. 하지만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내일 다시 악을 해체하기 위해 반드시 잘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저를 감옥에 보내더라도, 절대 어떤 것도 써주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어떤 잡념도 없이 누워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저는 먼저 수련생들을 찾아가 저를 위해 발정념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가는 길에 줄곧 정념을 발하면서 법을 외웠고, 사부님께 제자의 정념을 강화해 주시길 청했습니다. ‘사존께 간청드립니다. 사악의 박해를 철저히 해체하여 대법의 위덕을 떨치게 해주세요. 우리 고향 사람들은 구원받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제자의 빈틈은 대법으로 바로잡을 수 있으나, 사악의 박해로 인해 이곳 중생들이 구원에 걸림돌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경찰이 정한 시간에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최대한 끌어 수련생들이 협력해 발정념할 여유를 많이 주고 싶었습니다.

좀 뜻밖이었던 건, 제가 차멀미 때문에 전날 공안국에서 심문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잊었다는 겁니다.(저는 그 지역 태생이라 현지 지리는 훤히 꿰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을 잘못 들어 구치소로 가는 바람에 1시간 넘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법을 1시간 넘게 외울 수 있었습니다.

국보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국장과 대장을 비롯한 5~6명의 경찰들이 저를 기다리다 못해 초조한 기색이었습니다. 제가 오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장이 말했습니다. “어제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밤새 곰곰이 생각하고 오늘은 할 말이 있겠죠?” 저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 뭘 생각하겠어요”라고 대꾸했습니다. 제 손에 물컵을 든 걸 본 국장은 “물컵까지 갖고 오셨네?”하며 비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파룬따파는 중국에서 합법적입니다. 14종의 사이비 종교에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거만하게 “좋아, L, 뭐라 하시는지 다 받아 적어”라고 지시하는데, 저는 그제야 L 경찰이 제 옛 동료였다는 걸 알아보았습니다.

L은 저를 아주 존중하며 줄곧 ‘OO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친절하게 물을 따라주기도 했습니다. 심문실로 가는 중에 다른 사람이 없자 그는 국장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하는 심문이라며 원래는 이런 일을 맡고 싶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박해에) 가담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자신을 보호하는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조서를 작성하기 시작하면서 L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댁에 또 파룬궁을 수련하는 분이 있나요?” 저는 다른 수련생들이 연루될까 봐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족 얘기는 하지 마세요. (사실 가족 중에는 수련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손을 너무 뻗지 마시죠!” (당시 제 마음이 그리 바르지는 못했고 좀 사납기도 했습니다.) L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코끝이 찡해지는 듯하며 말했습니다. “그들이 선생님을 해고하려 하던데 퇴직금도 없이 어떻게 살아가실 건가요?” 하지만 저는 그 말에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말에 의하면 우리집에서 압수한 물건이 파룬궁 서적이 60여 권, USB 3개, 파룬궁 진상이 담긴 노트북이 2대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어떤 잡념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L은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뭐라고 하시든 그대로 적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여경은 콧방귀를 뀌며 L이 저를 돕는 것에 불만스러워했습니다. 그러자 L이 손을 내저으며 “됐어요. 상관하지 마세요”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렇게 심문실 분위기는 평온해졌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첫째, 1999년 장쩌민 깡패집단이 박해를 발동했을 때 그 어떤 법적 근거도 없었습니다. 파룬궁을 X교라고 말한 것은 장쩌민 개인의 거짓말이지 법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 2000년 공안부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지정한 14종 사이비 종교에 파룬궁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파룬궁은 중국에서 완전히 합법적이며, 이는 2005년에도 재차 공포되었습니다. 셋째, 2012년 3월 1일, 류빈제 국가신문출판광전총서 서장이 서명한 50호 문건의 제99조, 100조에서는 1999년의 파룬궁 서적 출판 금지령을 폐기했습니다. 이는 중국 내에서 파룬궁 서적과 자료를 소지하는 것이 합법이라는 얘기입니다. 넷째, 제가 수련 전에는 요통, 경추병, 관절염, 위장병, 심장병, 저혈압(45~75), 불면증, 코피(26년) 등 10여 가지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룬따파를 배운 지 두 달 만에 온 몸이 가벼워지면서 병이 다 나았죠. 이는 파룬따파가 진정한 과학이며 더 높은 차원의 과학임을 입증한 겁니다.”

L은 제 말을 하나하나 기록하면서, 어떤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때 저는 진지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L 선생님, 온몸에 병이 들었는데 파룬궁 연마로 다 나았다면 대법을 믿으시겠어요?” 그랬더니 L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만약 파룬궁으로 병을 다 고쳤다면 저도 믿을 겁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을 겁니다.” 저는 감동받았고 L이 여경 앞에서도 이렇게 정의감 있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 전염병 시기에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를 꼭 기억하세요”라고 하자, 그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여경에게도 “당신도 기억하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좀 난처한 듯 “절 저주하지 마세요”라고 하기에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인생에 어려운 일 한두 번쯤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죠”라고 하자 그제야 미소를 보였습니다. 심문은 거의 끝나 갔고 저는 여전히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마침 심문 종료와 동시에 Y 수련생이 있는 곳의 D 소장이 밖에서 “벌써 끝났어?”하고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 방금 마을에서 급히 달려온 것 같았습니다.

국보 대장이 저에게 “선생님, 이제 집에 가셔도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경찰들은 친절하게 복도 벽의 버튼을 눌러 문을 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도 진심을 담아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이렇게 사부님의 신묘하고 세심한 배치 속에 저는 떳떳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공안국 문을 나서자마자, 저는 곧장 Z 수련생을 찾아가 일의 경과를 알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 집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는데 세 갈래 길에서 우연히 다른 수련생들에게 저를 위해 발정념을 해달라고 전하러 가는 Z와 마주쳤습니다. Z를 보자마자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녀에게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하면서 사부님 말씀대로 하지 못해 사악이 빈틈을 타고 들어와 박해하는 바람에 대법 서적이 모조리 압수당했다고 말했습니다. Z도 눈가에 눈물을 맺히며 많은 수련생들이 저를 위해 정념을 발하고 있다며 위로해주었습니다. 정체가 한마음으로 협력하는 힘을 느낄 수 있었고 저는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3. 법률로써 반박해, 사법국에 행정재심 신청으로 불법구금 결정 철회시켜

그로부터 10일 후, 제가 거주하는 지역 파출소로부터 5일간의 행정 구금 처벌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저는 국보 대장을 찾아가 “파룬궁과 연관된 사건은 모두 억울하고 잘못된 판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대장은 어찌 된 영문인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당신은 행정재심을 신청할 수 있고 기소도 할 수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받아 “좋습니다. 그럼 행정재심을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공안국에서 돌려준 컴퓨터를 열어 보니, 인터넷 봉쇄돌파 프로그램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너무 감격스러워 두 손 모아 사부님의 자비에 감사드렸습니다. 재빨리 명혜망에 접속해 사부님 사진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사부님은 제가 무사할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고난을 감내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Z의 제안으로 공의포럼(公義論壇)에 가서 방대한 양의 법률 관련 문서들과 수련생들이 법을 운용해 박해에 맞선 사례들을 탐독했습니다. 다른 수련생들의 이타적이고 순수하며 고결한 경지에 감화됐고, 동시에 저 자신과 그들의 격차를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행정재심 신청서를 작성해 포럼에 올렸더니 수련생들이 즉각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 후 두 달여 동안 학교와 교육청, 마을 종합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쉴 새 없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수차례나 대법을 포기하라고 윽박지르면서 급여마저 끊어 버렸습니다. 저는 그들과 이치를 따지며 (두려움과 다투려는 마음을 아직 제거하지 못했음) 대법이 박해받는 진상과 수련을 통해 몸과 마음이 얻은 혜택을 설명했지만 그들은 마치 귀가 먹은 듯 했습니다. 심지어 아들과 가족들의 앞날을 빌미로 저를 위협하기까지 했죠. 교직에서 파면은 물론, 생계 수단을 모조리 끊어 놓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례 없는 압박감에 시달렸지만 대법에 대한 정념만큼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만일 아들과 남편의 신변을 핑계로 악에게 굴복해 사부님을 배신한다면, 오히려 가족을 극히 위험천만한 상황에 밀어 넣고 그들에게 엄청난 죄업을 지어주는 꼴이 될 테니까요. 그래서 그들이 요구한 그 어떤 문구도 써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늘 명심하며, 식사와 집안일, 출퇴근 외의 모든 시간을 대량의 법공부와 법 외우기, 안으로 찾기에 투자했습니다. 집착심, 특히 두려움을 하나씩 벗겨 냈습니다. 종종 감옥이나 세뇌반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수련생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참혹한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악에게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뭘 그리 무서워하는 걸까요? 이 새로운 생명은 사부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비록 겁내는 건 진정한 제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 두려움은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법국에 가는 것만 생각해도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안으로 깊이 살펴보니 어떤 사람마음이 절 가로막고 있는지 똑똑히 보였습니다. 행정재심을 통해 저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에 연연하고 있었는데, 사실 모든 것은 다 사부님께서 주관하시고 결정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대법은 중국에서 합법적’이라는 진상을 현지의 더 많은 정부 기관에 전달하고, 고향 동포들이 깨어나 대법에 구원되길 바랐습니다. 이는 다른 이를 위한 것이며 대법의 요구에도 부합됩니다. 하지만 행정재심을 하다 경찰들의 미움을 사서 박해가 가중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이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심이며, 해를 입을까 봐 겁내는 것은 사악의 박해를 인정하는 태도이기에 반드시 제거해야 했습니다. 6, 7차례 정사(正邪) 대결 속 동요를 거듭하다가, 행정재심 신청 마감을 앞둔 마지막 싸움에서 결국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법국으로 직접 찾아가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이 전 과정에서 현지의 모든 수련생들이 협력해 정념을 발해주었습니다.

재심 담당 직원이 막 제출한 서류를 접수해 등록하려는데, 다른 두 명이 와서 과자를 건네며 먹으라며 방해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저의를 간파하고 계속 정념으로 악을 해체하면서 말했습니다. “사실 파룬따파는 사람들에게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병 치료와 몸을 건강하게 하는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은 공산당원이라며 듣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 직원은 접수할지 말지 확실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서면으로 답변해 주셔야겠네요”라고 했더니 그녀는 명쾌한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사법국 대문을 나서는 순간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홀가분함과 평온함이 밀려왔습니다. 사부님께서 저의 두려움을 크게 제거해주신 거였습니다. 어릴 적 학교 교육의 세뇌로 공산당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머릿속은 당을 변호하고 두둔하려는 사악한 생각들로 가득했습니다. 비록 수련을 시작하면서 중공의 사악함을 인식하고 삼퇴(三退: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탈퇴)를 했지만, 내면 깊숙이 당과 완전히 결별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번 박해를 겪으면서 생사를 내려놓고 굳건히 악에 저항하는 가운데, 대법에 대한 확고부동한 정념은 사부님의 가호 속에 끝내 사악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공산당과 철저히 결별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당은 더는 제 머리 위에서 저를 감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제 발밑에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공안국에 막 도착했을 때 국보 대장이 계속 힐끔힐끔 저를 쳐다보더니 “사태가 얼마나 엄중한지 모르시는군요”라며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습니다. 저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지만 그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내가 잘못한 일도 없는데 뭐가 그리 대수라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도 그는 저보고 여러 번 앉으라고 했는데, 제가 계속 서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훗날 깨달았습니다. 저는 160cm도 안 되지만 제가 꼿꼿이 앉아 있자 그에겐 훨씬 더 큰 존재로 보였던 겁니다. 이는 저의 정념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법국에서 명확한 답변을 주진 않았지만 3개월 후 인력자원사회보장국은 제 급여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파출소의 5일 구금 결정서 역시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단 하루도 감금당하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발표: 2024년 4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4/27/4695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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