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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 신경문 두 편을 배운 체득

글/ 해외 대법제자

[명혜망] 오늘은 사부님의 신경문 두 편을 공부하고 얻은 체득을 교류하려 한다.

1. 신경문이 준 충격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경문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머릿속에 즉시 겸허, 감사, 경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1) 겸허

사부님과 법을 공경하고 겸허하게 따르는 것은 대법제자의 필수적인 태도와 심성일 뿐만 아니라, 홍대한 우주의 모든 생명이 갖춰야 할 기본 특성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주의 모든 좋고 나쁜 생명과 크고 작은 입자의 존재와 특성은 모두 대법에 의해 창조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사부님께서는 두 차례 연속 경문을 발표하시어 제자들의 사람 마음, 사람 생각, 원망과 질투, 거만을 엄숙하게 지적하셨다. 이는 사부님에 대한 존경심과 대법에 대한 겸허함이 부족한 문제가 극단적인 몇몇 수련생에게 그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전반에 나타난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대법과 사부님에 대해 늘 겸허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유지했는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돌아보게 됐다.

2) 감사

진정으로 수련하는 대법제자라면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苦度)에 깊은 감사를 느낄 것이다. 이번 신경문은 수련 과정과 대법을 실증하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시련은 우리가 생생세세에 빚은 업력에서 비롯됐으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사부님께서 대신 묵묵히 감당하시고 또 “온갖 방법을 대어 당신의 죄업을 상쇄해 주고 있다”(험악을 멀리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명시하셨다.

이에 대한 법리도 이미 말씀해주셨다. “당신이 아무리 큰 마난(魔難)으로, 아무리 큰 고통으로 여기든지 간에 모두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수련했기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마난 중에서 업력을 없애버릴 수 있고, 마난 중에서 사람 마음을 제거할 수 있으며, 마난 중에서 당신으로 하여금 제고하여 올라오게 할 수 있다.”(각지설법8-2008년 뉴욕법회 설법) 다시 말해, 우리를 위해 조용히 모든 것을 배치해주시고, 업력을 감당하시고, 온갖 희생을 하시고, 법의 힘으로 우리를 정화시켜주시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주시는 분이 바로 사부님이시다.

따라서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들에게 빚진 것이 없으시며, 제자들만이 사부님께 빚을 졌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노고와 고통에 대해서는 여태껏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수련 정진하라고 격려해주시고,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하라고 신신당부하실 뿐이다. 동시에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마다 바로잡아주시어 구세력이 배치한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셨다.

3) 경외

불법(佛法)에는 자비도 있지만 위엄도 있다. 사부님께서는 두 편의 신경문에서 엄숙한 말투를 사용하셨고 여러 군데에 느낌표를 사용해 어투를 강조하셨다. 나는 사부님께서 표면 공간에서 제자들의 잘못과 부족함을 엄숙하게 지적하시는 동시에, 다른 공간에서는 자비롭게 진정으로 수련하는 제자들의 이 부분 업력과 마(魔)의 물질을 제거하시어 장래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없애주셨을 것으로 깨달았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신경문에 최근 혼란상이 나타나게 된 배후 원인을 밝혀주셨는데, 이는 이 시련을 없애주신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된 수련생들 배후의 업력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사부님께서 묵묵히 감당하셨다. 구할 수 있는 수련생들을 위해 거대한 업력을 없애주신 것이다.

그러나 사부님의 이처럼 크나큰 은혜에도 제자들이 제때 자신을 바로잡지 못하고, 불법(佛法)의 위엄을 경외하지 못하며, 사부님의 자비에 감사하지 못하고, 정법 표준을 따라가지 못하면 구세력의 거센 탁류에 휩쓸려 사라질 수밖에 없다.

2. 신경문에 대한 깨달음

나는 신경문을 통해 이런 것을 깨달았다. 첫째, 우리가 수련하든 법을 실증하든, 겉으로는 모두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부님께서 일찍이 묵묵히 배치하신 질서 정연한 궤도와 각본에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우리가 자발적으로 사람에서 벗어나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부님께서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주고 깨끗이 씻어주고 하늘로 갈 수 있게 밀어주고 계신다.

다만 미혹을 깨지 않는 동시에 우주 층층의 법리에 어긋나지 않게 하여 구세력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하려고 사부님께서는 이 모든 위대함을 제자들에게 직접 부여하실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우리를 다양한 항목에서 ‘법을 실증하게’ 배치해주셨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업력을 제거하고 심성을 높여 더 높은 생명으로서 갖춰야 할 심성과 본질을 되찾을 수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부님께서 마련하신 각종 영광을 얻고 천체의 중생을 구할 수 있다. 이는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전법륜(轉法輪)]는 법리에 부합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대법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우리를 가련히 여기어 베푸신 은혜일 뿐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으시며, 우리가 사부님께 무한한 은혜에 빚을 지고 있다. 이 점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항목에서 무엇을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거나 무엇을 얻었다고 득의양양해하지 않을 것이며, 수련생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만심이 부풀어 오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다른 수련생을 제멋대로 부리거나 무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와 다른 수련생은 모두 사부님께서 동시에 지옥에서 건져주셨는데 누가 누구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모든 능력과 대법을 실증하는 일에서 우리가 얻은 성과는 모두 사부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인데, 어찌 감히 비판하고 서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둘째, 신경문은 극단적인 몇몇 사람을 지적했지만, 정도만 다를 뿐 비슷한 문제가 있는 수련생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체 항목의 경우 업무가 많고 늘 긴장 속에 있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갈등과 시련에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매번 냉정하고 침착하게 법리와 정념으로 대해 고비를 잘 넘기가 매우 어렵다.

심지어 어떤 때는 심성을 닦고 관을 넘는 데 공을 들이지 않고 흐지부지하다가 잊어버리거나, 사람 마음, 사람 생각, 사람의 정으로 대한다. 그 결과 제거해야 할 업력이 제거되지 못하고, 닦아버려야 할 사람 마음도 그대로 있어, 오히려 더 많은 갈등과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또 불평불만이 갈수록 커져서 원망과 질투까지 나오는데 시간이 오래되면 증오심이 생긴다.

그런데 ‘증오’라는 이상한 안경을 쓰면 우리는 일방적으로 밖만 보고 밖에서 구할 뿐, 안에서 찾고 안에서 잘못을 수정할 줄 모르게 되어 새 우주의 법리에서 점점 더 벗어나게 된다. ‘증오’는 또 공산악령의 물질이기 때문에 우리 공간장에 쌓이면 마귀를 불러오게 되어 수련과 정념에 대한 교란이 커지게 된다.

증오는 공산악령이 중생에게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도록 선동하는데 필요한 불쏘시개다. 따라서 증오심이 있으면 마음이 평온을 잃고 툭하면 폭발하게 되며, 비이성적인 상태와 악령의 교란에 이끌려 더 큰 마성이 나오면서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악마화하고 다른 수련생의 수련과 성과를 질투하게 된다.

‘증오’는 또 길을 잃은 사람을 더 거만해지게 만들어 ‘모두 틀렸고 나만 맞다’, ‘온 세상이 나에게 빚을 졌다’라고 생각하게 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극단적인 말과 행동으로 분풀이하면서 신불(神佛)에 대한 경외심, 대법과 사부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마저 잊고, 결국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하게 한다. 이렇게 되면 구세력에게 꼬투리를 잡혀 마도(魔道)로 끌려가 천만년의 기다림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신경문은 또 구세력의 박해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했다. 중국에서 박해는 사악한 중국공산당이 국가기구를 동원해 폭력을 휘두르고 정신적 고문을 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해외에는 이 같은 직접적인 박해가 없지만 구세력이 사람 마음, 사람 생각, 사람의 정이라는 또 다른 매우 은밀한 박해 기제(機制)를 배치했음을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법을 통해 사부님의 전법(傳法)에 구세력이 억지로 끼어들어 좋지 않은 것들을 수없이 배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개인적인 깨달음인데, 구세력은 수천만 년의 윤회와 역사 과정에서 모든 인체에 사람 마음, 사람 생각, 사람의 정을 강제로 주입해, 이러한 후천적 관념과 물질이 우리의 골수와 유전자에 깊이 침투되게 했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항상 맑은 주이스(主意識)로 법에 따라 갈등을 대하고 자신을 정화하지 못하면, 그 즉시 구세력이 배치한 사람 마음과 사람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문제와 갈등을 커지게 하고, 더 많은 업력과 사람 마음이 쌓여 심성 제고를 위한 사부님의 배치에서 더 멀어지게 된다.

이처럼 사람 마음, 사람 생각, 사람의 정은 사실 구세력이 인간을 망치기 위해 사람 몸에 배치한 기제로, 쉬지 않고 작동하면서 수련자를 수시로 아래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이 기제는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사람 마음으로 문제를 보게 하고 문제 뒤에 있는 진상과 해결책을 보지 못하게 해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사부님께서는 이번 신경문에서 또 다른 천기(天機)를 제시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이것은 말후에 중생들이 서로 구하는 것이다”(험악을 멀리하라)라고 하신 말씀이다.

개인의 제한된 층차에서 보면 이는 적어도 세 가지를 의미한다. 우선 대법제자들이 진상을 전해 중생을 구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구원받은 중생의 기쁨과 정념이 대법제자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수련하고 대법을 실증하도록 격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설사 중생이 반감을 품어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진정으로 수련하는 대법제자에게 안으로 찾아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게 하고 심성을 제고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봤을 때 중생도 어느 정도 대법제자를 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대법제자들은 법에서 서로 교류하며 서로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서로 정념을 연마하는 것인데, 이것도 서로 구하는 데 속한다.

그래서 나는 사부님의 이번 말씀은 사부님의 무한한 지혜의 또 다른 표현임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미혹을 깨뜨릴 수 없고, 대법제자와 세상 모든 중생을 직접 구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제자들에게 인간 세상에서 법을 배우고 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리게 하셨는데, 신의 사자(使者)와 모든 중생이 미혹 속에서 자신과 서로를 구하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배치하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이 과정의 모든 영광과 위덕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는 우주 일체 생명을 초월한 사부님의 홍대한 지혜이자 자비이다.

사부님께서는 묵묵히 제자들에게 모든 영광과 혜택을 주셨고, 구세력이 배치한 수많은 위험에서 묵묵히 제자들을 보호하셨으며, 무한한 우주를 묵묵히 정화하고 무한한 중생을 구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보상을 구하지 않으셨으며 불평 한마디 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사부님의 자비이자 제자들에게 행동으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 것이기도 하다.

3. 법을 배우고 안으로 찾다

신경문을 통해 이 부분에서 깨달은 점은 첫째, 대법 수련 형식에 대한 나의 이해가 아직 깊지 못하고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고생을 겪고 난을 당하는 것은 업력을 제거하고 죄를 없애 버리며 인체를 정화(淨化)하고 사상경지를 제고하며 층차를 승화시키는 아주 좋은 기회로서, 이는 대단히 좋은 일이며 이것이 바른 법리(正法理)이다.”(정진요지3-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쁜 매체 항목에서 항상 침착하게 정념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람 마음, 사람 생각, 사람의 정으로 문제를 대할 때가 많다. 그래서 불평불만이 점점 깊어지고 쟁투심이 점점 더 강해져 갈수록 다른 사람이 눈에 거슬리게 되거나 항목을 그만두려는 마음이 생긴다.

나의 경우 원래 속인 매체에 있다가 대법제자들의 매체로 옮겨와 11년 간 풀타임으로 일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뼈를 깎는 시련과 마음의 갈등을 수도 없이 겪었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가끔 도저히 심성 고비를 넘지 못할 때면 사람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인생의 황금기를 모두 여기에 바쳤다. 빚진 것이 없으니 이제 졸업해도 된다.’

그러나 이번 경문을 읽고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진상은 완전히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체 항목에 빚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부님의 호탕한 은혜에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나는 11년 동안 매체에서 힘들게 버텨왔지만, 실제로는 사부님께서 11년간 날 포기하지 않으시고 한번 또 한번 자비롭게 일깨워주시고, 매체 항목에 머물게 하시고, 업력을 제거해 주시고, 심성을 제고하게 해주시고, 사명을 완성하게 해주셨다. 내가 목숨으로 맹세한 서약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것이다.

속인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고생한 건 알아줘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진상을 알리는 매체에서는 정확히 말하면 세운 공도 없고 인정받아야 할 고생도 없다. 모든 것이 사부님의 노심초사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사람 마음에 이끌려 홧김에 매체를 떠났다면 영원한 후회와 비극이 되었을 것이다.

둘째, 신경문은 나를 반성하게 했다. 내가 장기간 매체에 있으면서 점차 사람 마음, 사람 생각, 사람의 정으로 진상을 알리는 이 항목을 대하고, 속인의 일로 대한 것이 아닌지, 의도적이거나 자신도 모르게 이 항목에서 명예와 이익을 추구한 것은 아닌지, 이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며 끊임없이 불평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봤다.

특히 나는 원래 속인 매체에 있었고 가족들도 속인이다 보니 종종 속인 회사 월급, 복지, 시스템과 비교할 때가 있는데, 나도 따라서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았는지, 근속 기간을 세어 보며 급여와 직급을 따지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봤다. 솔직히 말해서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다행히 사부님의 보호 아래 이러한 사람 생각은 모두 잠깐 나오는 데 그쳤다.

셋째, 신경문을 통해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음을 알려주셨다. 이에 나는 깨달았다. 진상을 알리는 매체 항목과 법을 실증하는 우리의 길은 모두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것으로, 매체 항목도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다. 우리가 여기서 부딪히는 모든 불평과 불만, 고민과 갈등은 모두 사부님께 우리의 정화와 제고를 위해 배치하신 것이며, 우리가 사람 마음과 사람 생각으로 대하는지, 아니면 법리와 정념으로 대하는지 보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항목에서 갈등과 원망이 생기면 그 항목은 자신에게 빚진 것이 없고, 항목 책임자도 자신에게 빚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대법의 세심한 배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수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대법을 실증하는 형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사부님의 호탕한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부족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넷째, 신경문을 통해 나는 내가 항상 자신의 각도에서 정법을 이해했으며, 정법의 각도에서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았음을 깨닫게 됐다.

사실 우리는 정법의 각도에서 생각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구하려고 얼마나 고심하셨을까? 그러한 배치를 우리는 감사히 여기고 경외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정법에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어떻게 해야 그것을 잘 원융할 수 있을까? 그러면 남을 위하는 자비심과 협력을 잘하기 위한 지혜가 나오게 되며, 법을 실증하는 과정의 정화와 시련을 바르게 대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만 최후 단계에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평온하게 걸을 수 있고, 이로부터 정념과 위덕이 나올 수 있다.

다섯째, 신경문을 통해 나는 수련자는 생명의 근원이 아무리 높다 해도 대법 앞에서는 우주의 보잘것없는 중생에 불과하므로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겸손, 감사,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이 우주에서 누가 존귀하고 누가 비천한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점을 아는 생명이야말로 층층 우주에 존재하는 법리에 부합되고 자신의 품격[신격(神格)]을 유지할 수 있으며, 거만하게 사부님과 대법을 공경하지 않는 허튼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감히 천법을 함부로 말하고 사부님을 무시하는 생명들은 구세력이 사람 마음, 원한과 질투심을 이용해 배치한 함정에 빠지게 되고, 망언을 멈추지 않는다면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을 훼멸하는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4. 반성

신경문에 언급된 인물과 앞서 명혜편집부의 글에서 언급한 대만 신수련생이 바로 이 방면의 사례인데, 두 사람이 가진 유사점은 날 돌아보게 했다.

첫째, 한 수련생이 평소 매우 정진하고 정념이 충족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항상 법리로 그들의 말과 행동이 법에 부합하는지 판단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누가 진정으로 이 수련단체를 파괴할 수 있는가? 대법을 파괴했는가? 누구도 하지 못했는바, 실천으로 증명되었다. 나는 바로 이렇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집착이 있는 사람을 교란하지, 법은 파괴할 수 없다. 나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자는 오로지 내부인이다.”(2014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나는 법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흔히 처음에는 바르게 행동하다가 갈수록 나쁜 것을 드러내거나(先正後邪), 바른 모습과 나쁜 모습이 섞여 있음(正邪交雜)을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법리로 다른 사람과 자신의 일언일행, 일사일념을 가늠해야 한다.

둘째, 다른 수련생에게 아첨하지 말며 치켜세우지 말아야 한다. 이는 상대방의 사람 마음, 사람 생각, 사람의 정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고, 부풀어 오른 마음에 교란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며, 다른 수련생을 교란해 업을 짓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셋째, 수련에서 법을 스승으로 삼아야지 다른 사람을 따라 가면 안 된다. 스스로 법에서 착실히 깨달아야지 다른 수련생의 교류나 천목으로 본 것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수련생에 대한 의존과 숭배는 구세력에게 그 수련생을 교란하고 박해할 구실을 찾기 쉽게 만든다.

넷째, 다른 수련생의 불만이나 원망을 보면 제때 선의로 일깨워줘야지 사람 마음이나 사람의 정으로 맞장구를 치고 조장하지 말아야 하며, 동병상련으로 뭉치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다른 수련생의 하소연을 이성적으로 들어주고 선의로 상대방을 도와 공산악령의 ‘증오’와 질투를 제거해 틈을 타게 하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심각하게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하고 호기심으로 알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행동이나 사상에서 철저히 시장을 주지 않아야만 스스로 소멸되게 할 수 있다. “하나가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만 가지 움직임을 제약할 수 있다(一個不動能制萬動)!”(각지설법5-2005년 캐나다법회 설법)

맺음말

이번 신경문을 읽은 후, 나는 대법의 박대함과 오묘함 및 사부님의 무한한 지혜와 자비를 깨닫게 됐고, 대법제자들의 진상을 알리는 매체의 신성함과 비범함을 더욱 깨닫게 됐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두 마련해주셨는데,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으셨다. 이 밖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사한 일들이 매우 많다. 여기서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법리에 비추어 매체 항목을 되돌아보니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첫째, 우리는 이번 생에 법을 얻고 법을 실증하는 만고의 기연을 얻었는데, 향후 이를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

둘째, 난관에 직면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후천적 사람 마음과 사람 생각에 따라 사고하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리로 난관을 마주하고, 갈등과 시험을 우리를 정화할 수 있는 성스러운 샘물, 속세를 벗어나게 해주는 사다리로 여겨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항상 정법의 각도에서 자신을 가늠해야 한다. 왜 사부님께서 날 이곳에 배치하셨을까? 정법을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대법 일에서 원융과 균형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동시에 우리는 사부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흔들림 없이 하루하루 수련의 길을 잘 걸어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변 수련생들과 함께하는 신성한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들은 과거에 전쟁터에서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였을 수 있다. 지난날의 은혜와 원한이 어떠했든, 이번 생에서 같이 일하며 어떤 갈등이 있었든, 중생이 서로 구원해야 하는 오늘날 다시 모여 사부님을 따라 매체를 이용한 성전에 뛰어든 것은 전무후무한 일로서 그 영광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이상은 신경문에 대한 나의 제한된 체득이다. 층차가 제한되어 있으니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바로잡아주시길 바란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에 따라 작성된 것이므로 수련생 여러분께서 서로 교류하고 ‘비학비수(比學比修)’ 하는 데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3년 9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9/12/4652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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