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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인도해 법을 얻고 마난에서 걸어나오게 한 수련 경험

글/ 베이징 대법제자 웨이천

[밍후이왕] 모든 대법제자는 수련의 길에서 사부님의 보호와 가지에서 떠날 수 없다. 오늘 나는 사부님께서 아들의 성장과 함께해 주신 몇 가지 일을 말하려 한다. 사존의 자비롭고 위대함을 목격하고 초상적인 대법을 목격했다!

아들 후후(虎虎, 가명)는 사부님의 보호로 오늘이 있다. 현대 의학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난치병을 앓고 있던 아들이 파룬궁을 수련해 돈 한 푼 쓰지 않고 약 한 알 먹지 않고 나았다. 소중한 사람들이 대법의 진상을 알고 구도 받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병마에 시달린 어린 시절

후후는 태어나자마자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태어난 후 이튿날, 황달에 걸려 의사는 입원시켜야 한다고 아이를 데려갔다. 나는 “아기가 지금 모유를 먹고 있는데 데려가서 뭘 먹이나요?” 의사는 “분유를 먹일 거예요.” 나는 “그럼 모유는 어떻게 해요?” 의사는 귀찮아하며 말했다. “짜서 버리거나 혹은 저장해 놓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의사는 내게 서명하라고 했다. 그 뜻은 문제가 생기면 병원에서는 책임지지 않고 모든 결과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서명했다. 황달과 온몸에 빨간 뾰루지가 났고 눈에 눈곱이 끼었다. 간호사는 아기가 열이 있다고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주 아기를 물로 닦아주었다. 이틀이 지나자 빨간 뾰루지는 사라졌다.

나는 제왕절개로 출산해 3일을 지나야 퇴원한다. 3일 후 나와 아기는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듣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많이 암송하고 ‘보도(普度)’와 ‘제세(濟世)’ 음악을 들었다. 일주일 후 아기의 황달은 사라졌다.

37일 후 아기는 늘 밤낮으로 울고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때로 우는 소리가 커서 이웃까지 영향을 줬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아기가 항상 우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어디가 아픈지 모르니 병원에 가서 한번 진찰해 보자.” 나는 좀 난처했다. 아직 산후조리(40일 지나야 함)도 끝나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병원에 가는 것이 좋겠다. 산후조리도 거의 끝나 가잖아.” 이튿날 우리는 병원에 갔다. 의사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찾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검사 항목을 제시했다. 나는 검사해야 할 리스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도 여태까지 이렇게 전면적인 검사를 한 적이 없었는데, 비용은 그렇다 하더라도 관건은 매 검사 항목이 갓난아기로서는 너무 버거운 것이었다. 이번에 아기는 더 심하게 울었다. 아기는 이 모든 검사로 한바탕 시달렸다.

검사 결과를 본 의사는 전문가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또 전문가를 찾아갔는데, 전문가는 특별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놀랐다! “아기가 어떻게 된 거예요? 왜 특별치료를 받아야 하나요?” 전문가는 더는 말하지 않고 “다음 환자?”를 불렀다.

하는 수 없이 특별치료를 받았다. 특별치료 의사는 아주 친절했다. 모든 검사 결과를 보고 말했다. “처음으로 애 엄마가 되는 것이죠?” 나는 끄덕였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나는 놀라 마음을 가다듬었다.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그녀는 말했다. “아기가 정신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마음을 진정하고 아기를 안고 진찰실에서 나왔다. 나오자마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은 내가 나온 것을 보고 의사가 어떻게 말했냐고 물었다. 나는 의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상관하지 말고 집에 돌아가자고 했다. 남편은 내게 그만 울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불편해할까 봐 눈물을 참았다. 조용한 곳에 가서 의사가 한 말을 알렸다. 남편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나는 “집으로 가요! 의사가 어떻게 말하든 저는 믿지 않아요. 저는 아기를 사부님께 맡기겠어요!”라고 했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더 세심하게 아기를 돌봐주었다. 아기와 함께 사부님의 설법을 듣고, 말을 많이 하고, 노래도 들려주었다. 아기가 울려 하면 나는 더 재미나게 놀아주었다. 남들에겐 유치해 보일지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아기가 울지 않고 많이 웃게 했다. (아기가 웃을 땐 아주 귀여웠다) 그래도 안정적으로 잠은 자지만, 예민해 조그마한 소리에도 자주 깨고 깊게 자지는 않았다.

이렇게 3개월이 지났다. 병원에서 산후 재검진을 할 때 의사는 아기 건강검진을 하면 각 방면의 발육상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회진을 본 의사는 “발육에는 문제가 없지만, 체중이 미달이고 예민하네요. 잠은 잘 자나요?” 나는 의사가 말한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아기 상황을 의사에게 알려줬다. 그녀는 “알레르기 검사를 해 보는 것은 어때요?” 나는 이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병원에 가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내게 소개장을 써 주며 어느 병원 어느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라고 알려줬다. 나는 의사에게 감사드리고 나왔다. 의사 선생님이 소개한 병원에 가서 검사받느라 아기가 고생했다. 2주 후 결과가 나왔는데 우유 단백질 알레르기라는 것이다. 모유가 부족해 고가 분유를 먹여야 했다. 나중에 점차 아기에게 이유식을 늘리면서 나아졌다. 이렇게 후후는 한 살이 됐다.

돌이 지난 후 후후는 유아 발진에 걸렸다. 전에 동료가 유아 발진은 아이들이 거의 다 걸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고 병원에 가지 않았다. 3일 후 열이 내리고 발진은 없어졌다. 하지만, 후후가 18개월 때 난이 또 왔다. 한번은 근무 중에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와야 한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버지는 오면 안다고 했다. 나는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추측하고 급히 조퇴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는 내게 아기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기가 심하게 열이 나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면서 눈이 사시가 되고 의식이 없는 상태로 1분쯤 지나 서서히 돌아왔다고 했다. 너희 엄마와 나는 깜짝 놀랐다.” 빨리 아기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방법이 없어 나는 다시 아기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아기가 고열이 나 놀라 기절했다고 했다. 이럴 땐 어떻게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듣고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더는 아기가 병원에 드나들며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병을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돌아온 후 나는 후후에게 설법을 들려주고 그에게 ‘파룬따파하오, 쩐썬런하오’를 들려주며 세심히 돌봐주었다. 아기는 빨리 회복됐다.

그 후 2년 동안 후후는 몇 번 열이 나고 기절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가 열이 나면 몹시 긴장된 나는 휴가를 내고 집에서 아기를 돌봐줬다. 내가 아무리 세심히 돌봐줘도 그는 놀라 기절했다. 한번은 온몸이 딱딱해지고 입에서는 거품을 뿜었다. 나는 매우 놀라 끊임없이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웠다. 사부님께 아기를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사부만이 아기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매번 사부님께서 죽음의 문턱에서 아기를 구해주셨다. 사부님께서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하셨는지 모른다. 사부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아기를 인도해 법을 얻게 하다

나는 몇십 년을 수련했다. 출산할 때 병원에 간 것을 제외하면, 몇십 년 동안 약 한 알도 먹어 본 적이 없다. 아기는 다재다난(多災多難)하다. 속인의 일생은 너무 고생스럽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속인의 일생은 무상(無常)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그의 일생을 개변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유일한 방법으로서, 바로 이 사람이 이후부터 한 갈래 수련(修煉)의 길을 걷는 것이다.”[1] 나는 아기를 인도해 법을 얻게 했다. 당시 아들은 3살이 좀 넘었다.

‘홍음’부터 시작했다. 내가 한마디 읽으면 아들도 따라 했다.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엄마가 3번 읽으면 외울 수 있는지 봐. 어때?” 아들은 말했다. “외우는 게 뭐야?” 나는 말했다. “외우는 것은 책을 보지 않고 말하면 돼. 한 글자도 틀리면 안 돼.”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해 보겠어요.” 나는 책을 보고 한번 읽고 그도 책을 보고 한번 읽었다(그는 글을 모른다) 한번 읽고 나는 “한 번”이라고 말하고 다시 책을 보고 두 번째 읽고 두 번 말하고 세 번째 내가 읽은 후 그는 스스로 시도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마주 보고 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 외울 때 두 글자가 틀렸다. 속으로 나는 놀랐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틀린 것을 바로잡아 주고 칭찬해 주었다. 그런 후 말했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아야 외운 것이야. 엄마가 한 번 더 읽어줄게.” 결과 그는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외웠다.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두 번째 시를 읽자고 말하자는 아들은 다그쳐 말했다. “엄마도 외워요. 우리 누가 잘 외우는지 비겨요. 어때요?” 나는 속으로 웃었다. 나는 이미 외웠다. 책을 그에게 주자 그가 책을 잡고 나를 흉내 내며 점검했다. 내가 외우자 아들은 기뻐하며 다음 시를 외우자고 했다. 우리는 누가 빨리 외우는지 보자고 했다.

이렇게 즐거운 법 외우기가 시작됐다. 매일 3~5수를 외우면서 ‘홍음 3’까지 외웠다. 모르는 사이에 아이는 반년 넘게 열이 나지 않았다. 이 일념이 옳지 않았다. 무엇을 구하면 무엇이 온다. 얼마 후 아이는 또 열이 났다. 나는 단번에 또 긴장했다.

이번에는 기절하지 않고 비위가 좋지 않아 뭘 먹으면 뭘 토하고 물을 마셔도 토했다. 나는 적게 여러 번 먹였다. 몇 번을 토하고 나서 열이 내렸다. 토한 것은 먹은 밥이 아니고 끈적끈적한 하얀색 솜털 같은 물질이었다. 많이 토할수록 열은 더 빨리 내렸다. 사부님께서 후후의 신체를 정화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후후의 인생 길은 지금부터 변할 것이다. 그의 일생은 수련의 일생이기 때문에 그를 속인으로 대하지 않고 어린 수련생으로 대해야 한다. 나는 “후후, 이제부터 더는 무서워 하지 마 사부님께서 너의 신체를 정화해 주시는 거야. 더러운 것을 토하면 좋아질 거야. 하지만, 조금 괴로울 텐데 너는 확실히 잘 견뎌낼 수 있을 거야.” 후후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런 정화과정은 두 번 더 있었다. 그런 후 아기는 완전히 건강한 아이로 변했다. 이전에 후후는 음식을 가렸다. 감자와 토마토 외 기타 채소는 모두 먹을 수 없었다. 고기도 몇 점 먹고 먹지 않았다. 거의 모든 음식이 그에게 맞지 않아 아이는 많이 마르고 허약해 영양실조에 걸린 것 같았다. 그 후부터 내가 무슨 음식을 하든지 그는 관심을 가지고 맛을 보았다. 그런 후 맛있다고 하며 먹었다. 나는 단번에 음식을 하는 재미가 생겼다. 날마다 아기에게 음식을 바꿔가며 해주었는데 모두 다 잘 먹었다.

점차 아이 몸은 갈수록 좋아지고 알레르기도 나아졌다. 몸에 근육도 붙어 송아지처럼 튼튼해져 이전처럼 허약하지 않았다. 키와 몸무게는 발달상태의 상에 속했다. 사부님께서는 아이가 한 번에 감당하기 힘들어 여러 번 나누어 신체를 정화해 주셨다. 얼마나 많은 것을 사부님께서 감당하셨는지 모른다.

심성제고

사부님께서 후후의 신체를 정화해 주신 것이 이미 10년이 넘었다. 더는 열이 나지 않고, 약 한 알도 먹지 않았다. 물론 수련의 목적은 병을 치료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반본귀진(返本歸真)이다! 아이가 몸이 좋아진 후 심성에서 고험이 왔다. 아이의 심성제고 몇 가지 사례를 이야기하겠다.

후후가 4~5살 때 유치원에 다닐 때 늦게 데리러 갔다. (회사가 집과 멀다) 밤에 목욕을 시키는데 팔에 멍이 든 자국이 있었는데 누군가 아이를 문 자국이었다. 후후에게 누가 물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의 아이가 물었다고 했다. 나는 “선생님께서 말리지 않았니?” 아이는 “선생님은 계시지 않고 우리 둘이 놀고 있었어요. 선생님께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 애를 엄마가 욕하면 어떡해요? 내가 오빠인데 그 애를 봐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심하게 물었다니?” “그 애가 물고 놓지 않았어요.” 나는 놀라 마음이 아팠다. “아프지 않았어?” “아파서 ‘파룬따파하오’를 외웠더니 얼마 후 아프지 않았어요. 그 애는 처음에는 화를 냈지만, 나중에 웃으면서 놀았어요.” 나는 아이를 위해 기뻐했다. 그는 참을 수 있고 남을 위해 생각했다. 이 관을 넘겼다. 고통은 사부님께서 그를 위해 감당하셨다! 나는 선생님을 찾아가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후후(4, 5살 때)를 데리고 KFC 어린이 구역에서 놀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그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때 한 남자애가 한 여자애에게 말했다. “너 쟤(후후) 때려!” 그 여자애는 말을 듣고 후후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 두 아이는 후후보다 크고 여자애는 좀 통통하고 힘이 세 보여 아플 것 같았다. 후후는 갑자기 발생한 일에 놀라 움직이지 못하고 맞기만 했다. 그 여자애는 기뻐하며 때렸다. 마치 북을 치는 듯했다. 남자애는 우쭐하며 한쪽에서 웃었다. 그의 엄마에게 보라고 말했다. 그 애 엄마도 보고 그의 아들이 능력이 있다는 듯 웃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았다.”[2] 나는 1분을 참았다. 후후도 어떤 반항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입을 열어 “멈춰! 왜 애를 끝없이 때리는 거야?” 나는 후후를 오라고 해 신발을 신겨주고 가려 했다. 이때 남자애 엄마가 말했다. “당신이 우리 아이를 놀라게 했어요!” 그녀는 그 여자애(그 아이는 우리를 보고 표정이 없었다)를 가리켰다. 그 여자애는 놀란 것이 아니고 부모가 없기에 어떻게 할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때린 사람을 질책하지 않고 반대로 맞은 사람을 질책하다니.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 그러기에 남을 업신여기는 아들로 키운 것이다! 나는 그녀와 다투지 않고 한마디 했다. “ 당신 아들이 저 여자애를 시켜 우리 아들을 때리게 했잖아요.”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보고 나를 한번 노려보고 아무 말 없이 갔다.

나는 후후를 데리고 나온 후 아프냐고 물었다. 처음에 좀 아팠지만, 나중에는 느낌이 없었다고 말했다. 또 ‘파룬따파하오’를 외웠다고 말했다. 그가 ‘바보’가 된 것은 진언을 외웠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후후를 위해 감당하셨다!

초등학교 2학년 첫 학기 때 이런 일에 부딪혔다. 무용수업을 할 때 후후가 다른 아이에게 걸려 넘어져 강당 계단 돌출한 가장자리에 허리를 부딪쳤다. 그때 일어는 났지만 걷기가 좀 힘들었다. 반 주임(반 주임은 때로 수업을 함께 한다)에게 넘어져서 아프다며 앉아 쉬겠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엄숙하게 그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그 뜻은 쉬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후후는 억울했지만, 절뚝거리며 돌아갔다. 하지만, 선생님이 요구하는 동작은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수업을 마쳤다. 후후는 돌아와 내게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후후는 정말로 아팠다고 했다. 결코, 아픈 척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피부에 멍이 들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알려주고 싶어 메시지를 보내 아이가 수업할 때 걸려 넘어져 아파 좀 쉬고 싶었다고 알렸다. 다른 것은 더 말하지 않았는데 선생님의 메시지가 왔다. 한마디로 후후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우리 아이는 왜 이런 선생님을 만났을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연 아이는 그 후부터 학교생활이 악몽이었다. 선생님은 고의로 아이를 비평하고 아이가 물을 마시고 화장실 가는 것을 제한했다. 또 다른 아이를 부추겨 후후를 업신여기게 하고 후후가 다른 아이를 업신여긴다고 이간질했다. 후후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고 점심때도 쉬지 못하게 하고 벌을 씌웠다. 아이가 물을 못 마셔 열이 나고 코피가 나도 화장실에 가서 씻지도 못하게 했다.

후후는 반 친구들에게 왕따가 되고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누구도 그와 말하지 않았다. 이때 후후는 아직 7살 반도 되지 않았다. 그동안 후후를 매일 학교에 보내는 것이 매우 불안했다. 어린 후후가 이런 일은 감당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나는 마음이 쓰렸다. 처음에 나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견지했다. 법에서 어떻게 말했는가를 보고 법의 요구에 따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서히 나는 마음이 트였다. 후후도 집에 돌아온 후 나와 법공부를 했다. 우리는 서로 어떻게 법의 요구에 따라 해야 하는가를 교류했다. 그것은 우리는 참아야 한다. 그녀는 속인이고 우리는 수련인이다. 수련인은 속인보다 높게 수련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3] 후후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엄마,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어요. 저는 마음에 두지 않겠어요.” 나는 말했다. “그래, 우리 함께 노력해 이 관을 잘 넘기자. 어때? 한 달이면 방학이니 한 달만 견지하자. 문제없지?” 후후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달은 4주죠?” “그래” 이 말을 듣자 나는 마음이 쓰렸다.

기말 생활통지표에 선생님은 후후의 인품을 왜곡하고 낮게 평가했다. “전학할 때 생활통지표를 가져가세요.”라고 썼다(그녀가 후후를 이렇게 만들었기에 반드시 전학할 거로 생각했다) 사람을 때려놓고 한 번 더 짓밟는 셈이다! 나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다. ‘당신은 근본적으로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는 수련인이다. 당신은 속인인데 어찌 수련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당신이 한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에게 많은 업을 지었다. 장래 당신은 갚아야 한다.’ 후후는 2학년 2학기 반을 옮겼다. 그 후 이런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다. 그 선생님은 학부모들의 불만이 많아 다른 반을 맡게 됐다.

이번 단련을 통해 후후의 심성은 제고해 올라왔다. 후후는 수련에서 더 성숙해졌다. 후후는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선하고, 신체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잘 자고, 잘 먹는다. 우리는 매일 즐겁게 이런 일을 심성 제고로 보고 층차를 제고하는 계단으로 본다. 우리는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갈수록 접근하고 마음이 비할 바 없이 충만하고 기쁘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何爲忍)’

 

원문발표: 2021년 10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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