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건축은 신을 배척하는 그릇된 길을 걷고 있다(4)

글/ 먀오윈한(邈雲漢)

[명혜망](이전 편에 이어)

3. 모더니즘 건축가의 주장과 작품

모더니즘 건축의 네 명의 대가는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다. 이들 중 라이트만이 미국 토박이였지만, 다른 세 사람이 미국에 미친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는 먼저 앞의 두 사람의 주장과 작품을 분석한다.

1. 미스 판 데어 로에(미스)

일각에 따르면 미스는 1925년 베를린 좌익 그룹에 가입했다. 이듬해 그는 두 명의 피살된 공산당원을 기념하는 카를 리프크네히트-로자 룩셈부르크 기념비(Liebknecht-Luxemburg Memorial)의 설계를 의뢰받았다. 미스의 이 설계는 표현주의 스타일을 따랐으나, 이 혁명 기념 건축물은 나중에 나치 정권에 의해 철거됐고, 나치 분자와 반동 세력은 이를 기회로 삼아 그의 건축 형태 이면에 공산주의가 숨어 있다고 주장했다.

1933년을 전후해 미스는 나치 정권과 접촉한 논란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이로 인해 훗날 누군가 그를 나치 잔당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당시 나치 정권이 들어선 후 바우하우스는 큰 정치적 압박을 받아 1932년 베를린으로 학교를 이전해야 했고, 결국 1933년에 폐쇄됐는데 미스는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이었다. 그러나 미스 본인은 1933년을 전후해 즉각적으로 나치에 대항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신정권하에서도 바우하우스를 계속 존속시키려 시도했고, 나치 정부의 관련 프로젝트에 설계안을 제출하기도 했는데, 1933년 독일 제국은행(Reichsbank) 공모전 설계안이 그 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이 극좌인지 극우인지 겉보기에는 복잡하고 모순돼 보이지만 꽤 간단하기도 한데, 바로 전통적인, 최소한 인간성에 부합하는 도덕적 검열 없이도 정상적인 사회 질서를 전복하려는 정치 운동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37년 미스는 미국으로 이주했고, 1938년 일리노이 공과대학교(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 IIT) 건축학과장으로 임명돼 시카고에 사무소를 열었다.

미스의 건축 신조는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였는데, 사실 이는 원래 신고전주의가 로코코 화파에 반대하며 내세운 예술적 주장이었다. 실제로 다양한 입체적 형태의 현대 건축과 비교할 때, 고전주의부터 신고전주의에 이르는 건축은 매우 제한적인 요소만을 가졌고 외관상으로도 모두 묵직하고 간결하며 대범하다. 예를 들어 고전적 기둥 양식은 몇 가지뿐이고, 평면과 입면의 조합에도 일련의 법칙이 있으며, 평면과 입면 모두 대칭을 중시하기 때문에 설계 노력을 2분의 1, 심지어 4분의 3까지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더욱 믿기 힘든 것은 미스의 엄격하게 단순화된 설계 기법이 수천 년간 이어져 온 건축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 요구를 무시했으며, 심지어 정상적인 기능 사용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그가 설계한 시카고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아파트(Lake Shore Drive Apartments)는 철골 구조에 유리 외벽을 더한 고층 아파트다. 여름에는 철골 유리가 햇빛을 강하게 받아 태양 복사열로 인해 실내에 뚜렷한 ‘온실효과’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실내 온도가 전통적인 건축물보다 크게 높아졌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커튼을 추가하고 에어컨을 설치해 냉방을 최대로 가동해야 했으며, 이는 에너지 소비를 증가시켰다.

그가 설계한 일리노이 공과대학교 건축학과의 교실은 대공간의 탁 트인 분위기를 추구해 낮은 칸막이로 제도, 강의, 사무 등의 구역을 분리했으며, 시청각 측면의 방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1945~1950년에 그가 설계해 완성한 판스워스 하우스(Farnsworth House) 역시 직사각형 대공간의 상자로, 지붕판과 기단 사이의 사방에 모두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는 통유리창을 설치했고, 실내는 낮은 찬장 등 가구만으로 거실, 침실, 욕실, 주방 등의 각 부분을 분리해 생활의 불편함과 불안정함을 초래했다. 최종 건축 비용은 예산의 두 배에 달해 집주인인 여의사가 법적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각형 상자의 장점은 원래 건축이 편리하고 비교적 경제적이며 널리 보급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사실 이런 종류의 건축물을 장기간 사용하려면, 특히 주거용으로 사용하려면 외벽 유리의 생산, 설치 등에 모두 주의해야 할 엄격한 기술 규범과 시공 세부 사항이 있어서 인력의 능력에 대한 요구치가 매우 높다. 또한 사후 유지보수 비용도 많이 들고 처리를 잘하지 못하면 물이 새거나 바람이 새는 등의 사고가 발생하기 쉽다. 이런 기술적 문제는 뒤에서 계속 설명하겠다.

2. 르코르뷔지에

르코르뷔지에는 입체주의 화파의 영향을 받아 자신을 건축계의 피카소라 칭했고, 1917년에는 순수주의 화파를 최초로 주창하며 입체주의를 극도로 단순화시켰다. 20세기 초 미래주의가 독일에도 전해졌는데, 기계와 공업에 대한 르코르뷔지에의 숭상은 명백히 미래주의의 주장이었으며, 르코르뷔지에의 설계안이 너무 지나치게 신시대의 과학 기술 정신을 표현해 자주 낙선했다는 말도 있다.

르코르뷔지에의 대표작은 파리 교외의 빌라 사보아(Villa Savoye, 1928~1931년 건축)다. 이 주택은 몇 개의 기둥으로 하얀 상자를 떠받친 형태인데, 너무 강한 인공적인 느낌과 공업적인 느낌 때문에 주변 자연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미국 본토 모더니즘과 프레리 스타일 주택의 대표 인물인 라이트조차 참지 못하고 이를 비꼬았을 정도다. 이 건축물은 나중에 심각한 누수와 과도한 에너지 소비 등의 문제가 나타나 사실 사람의 일상적인 거주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하버드 대학교 카펜터 시각예술센터(Carpenter Center, 1963년)도 전통적인 벽돌 외벽 건축물들 사이에 위치해 매우 부조화스러워 보인다.

또한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전후 대형 집합주택 마르세유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 de Marseille)은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푸리에와 오언에게서 영감을 받았으며, 애초에 330여 개의 주거 유닛을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1952년 완공된 후 뉴스 매체와 사회 인사들도 이 아파트에 대해 적잖은 평가를 내렸는데, 어떤 이는 이처럼 고도로 집중화되고 표준화된 단체 주택이 인간의 생활 욕구에 적합한지 의문을 제기하며 이런 단조로운 집단생활이 비인간적이라고 느꼈다. 의사들 역시 정신 질환자를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마르세유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거대한 규모와 투박한 콘크리트 외관은 사람들에게 도시의 전통적인 경관 속에서 너무 튀어 보인다는 인상을 줬고, 르코르뷔지에 본인조차 ‘마르세유의 도시 미관을 파괴했다’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이 건축물의 지면을 떠받치는 기둥은 위가 굵고 아래가 가늘어서 재료역학적으로 보면 기둥 윗부분의 많은 재료가 잉여적이다. 르코르뷔지에는 또한 시멘트 표면에 나무 거푸집의 거친 질감과 이음새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더 이상 미장 장식을 하지 않았다. 마감의 거침은 심리적 야만과 정신의 황폐함도 가져왔다. 그는 또한 건축물에 강렬한 빨강, 초록, 노랑 등의 색을 칠해 부드럽고 조화롭게 어우러지기보다는 색채의 격렬한 대비와 충돌을 추구했다. 이 건축물은 브루탈리즘(역주: 재료 본연의 질감과 구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미학으로 삼는 스타일)의 선구자다.

1970년대 프랑스 파리에 지어진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는 브루탈리즘을 하이테크 건축과 구조주의에 결합시켰는데, 건축물 같지 않은 이 건축물은 색채가 선명하게 노출된 철골, 배관, 이동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당시 평론가들은 설계자가 지나치게 과학기술을 찬송하며 설비를 돋보이게 했다고 여겼다. 현대 건축이 끊임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면서 사람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자, 이러한 목소리들은 서서히 잊히고 말았다.

르코르뷔지에는 새로운 건축을 설계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회의를 추진하고 다수의 헌장을 만들어냈으며 적잖은 협회에 참가했는데, 일부 회의와 소그룹의 내부 투쟁은 매우 심각했다(바우하우스도 마찬가지다). 전반적으로 그의 목표는 아카데미즘 세력에 대항하고 새로운 건축으로 현대 정신을 표현한다고 선전하는 것이었으나, 이런 정신 아래 만들어진 국제주의 건축 양식이 또 다른 아카데미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또한 상식과 신에 반대하는 주장은 비록 논리적이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북돋는 선언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을 향하여’(Vers une Architecture)는 ‘건축이 아니면 혁명이다’(architecture or revolution)라고 주창했고, 모스크바 구성주의자들은 그를 동반자로 여겼다. 르코르뷔지에는 현대 건축 설계를 통해 주거 위기를 해결해 폭력적인 사회 혁명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후 전위 예술 운동에서 신건축 자체는 오히려 전통을 전복하고 인류의 삶을 재구성하는 혁명으로 간주됐다.

르코르뷔지에의 이 선언은 또 건축을 기계에 비유하며, 주택은 기계처럼 간결하고 명확하며 합리적이고 쓸모 있어야 하며 대량 생산이 가능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기술과 기능의 관점에서 건축을 인식해 인간성을 무시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그가 설계한 주거 건축 역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적인 측면에서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국제주의 건축 양식에 의해 더욱 두드러졌고, 지난 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이미 광범위한 비판을 받고 있다.

르코르뷔지에는 또한 근대 건축의 5원칙을 제시했는데, 그중 필로티, 골조 구조, 가로로 긴 창문 등은 많은 지역의 전통 건축에 이미 존재하던 것이라 사실 새롭지 않았다. 르코르뷔지에는 왜 예전의 전통 건축에 나타나지 않은 특징을 현대인들이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 전통 건축은 수천 년 동안 지역의 환경, 기후, 문화, 풍습 등과 장기간 조율해 온 산물이기에 한눈에 알아보기 힘든 합리적인 점이 존재하며, 이러한 합리성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신건축의 5원칙이 정치적 진보와 유토피아를 불합리한 것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포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르코르뷔지에는 또한 스페인 산악 지역에서 간편한 자가 건축 주택의 방안을 연구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그 본인의 일부 주장과 서로 충돌한다. 예를 들어 르코르뷔지에의 일부 설계는 간결하지 않고, 옥상 정원은 구조와 조립 면에서 매우 높은 요구치가 있으며, 곡선 조형 역시 직선보다 인력과 재료가 더 든다. 게다가 자가 건축 주택은 사회의 일부분일 뿐이어서, 문명의 성과와 수준을 구현하는 중요한 공공 건축물과 같은 기준이나 스타일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절 규범을 잃은 공공 생활은 원시적이고 야만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는 대중을 위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전통적 미학에 반대하고 사회 도덕을 파괴하며 결국에는 대중을 멸망시키려는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르코르뷔지에의 중요한 제자이자 협력자이며 공산주의자인 오스카르 니마이어(Oscar Niemeyer)는 파리의 프랑스 공산당 본부(French Communist Party Headquarters)를 설계했는데, 이 건축물은 르코르뷔지에의 신건축 5원칙을 적용했다고 한다.

4. 모더니즘 건축의 전파와 포스트모더니즘

1932년, 헨리 러셀 히치콕(Henry-Russell Hitchcock)과 필립 존슨(Philip Johnson)이 공동 저술한 ‘국제주의 양식: 1922년 이후의 건축’(The International Style: Architecture Since 1922)이 출판됐고,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같은 해 ‘현대 건축: 국제전’(Modern Architecture: International Exhibition)을 개최했다. 이로부터 국제 스타일 또는 국제주의 양식이라는 명칭이 마침내 확립돼 널리 전파됐고 점차 신건축의 주류가 됐다. 1930년대에는 신건축을 추구하는 많은 건축가에게 뚜렷한 개인 스타일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천편일률적이 되고 너무 표준화되고 기계화됐으며, 게다가 인간미가 결여될 정도로 추상화됐고 다른 지역의 기후, 재료, 문화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건축적 차이도 무시됐다.

이러한 건축물은 정상적인 사용에도 많은 문제가 존재했다. 순수파의 빛나는 흰 벽면은 오염에 약하고 평지붕은 비가 새기 쉬우며, 대면적 유리는 보온에 불리할 뿐만 아니라 빛 공해를 유발하고, 대공간 역시 인체의 실제 요구에 위배되며 기술적인 사고도 있었다. 이를 마주하고도 아직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과거의 오래가고 튼튼하며 체구에 알맞고 에너지 절약과 환경 보호가 되던 건축물을 그리워하게 됐다.

(계속)

1946년에 지어진 미스 판 데어 로에가 설계한 시카고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아파트. 건축물을 마주하면 철골 구조와 하중을 받지 않는 유리 외벽을 볼 수 있는데, 여름철 태양 복사열이 실내에 뚜렷한 ‘온실효과’를 발생시켜 거주자들은 어쩔 수 없이 직접 에어컨을 설치하고 냉방을 최대로 가동해 에너지 소비를 늘려야 했다.

 

원문발표: 2026년 9월 21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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