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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난을 지나 이성으로 나가다

글 / 산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1월 18일】 나는 정처없이 떠돌아다닌 후 2~3년의 시간 동안 주로 소책자를 편집하는 항목에 참가하였다. 이는 나의 염원이었다. 세인들이 악당(惡黨)의 매체에 의해 부단히 해로운 거짓말을 주입당하는 것을 보고, 대법이 사악에 의해 끝없이 파괴당하는 것을 보니 나의 마음은 아주 긴박했다. 그리하여 대법의 진상과 아름다움을 세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나는 진상소책자를 편집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나중에 동수의 수요로 인해 나는 전업으로 일하게 되었다……(본문 중)

사부님 안녕하십니까!동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에서 나는 한 동수분과 내가 최근 일년 간 걸어온 마음의 노정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1. 다시 수련의 희망을 견정하게 하다

나는 정처없이 떠돌아다닌 후 2~3년의 시간 동안 주로 소책자를 편집하는 항목에 참가하였다. 이는 나의 염원이었다. 세인들이 악당(惡黨)의 매체에 의해 부단히 해로운 거짓말을 주입당하는 것을 보고, 대법이 사악에 의해 끝없이 파괴당하는 것을 보니 나의 마음은 아주 긴박했다. 그리하여 대법의 진상과 아름다움을 세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나는 진상소책자를 편집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나중에 동수의 수요로 인해 나는 전업으로 일하게 되었다

소책자를 편집하려면 많은 문장들을 훓어봐야 하고 또 도안도 찾아야 한다. 실천중에 그 기교도 풍부해진다. 자료를 만들기 시작한지 일정기간 시간이 지난후 나는 점점 못마땅한 감을 느꼈다. 나는 소책자 편집을 시작하면서 최초에 소망했던 세인들로 하여금 진상을 알게 하겠다는 소원을 잃었다. 그냥 잘하기 위해 잘하고 있는 하나의 항목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변했던 것이다. 어떤 때에는 스스로 자부심에 빠지기도 하면서, 만들어낸 소책자는 언제나 “나”라는 글자가 있는 하나의 국한성이 있었다. 항상 하나의 틀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소책자로 하여금 그다지 순정하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내심의 고초는 나로 하여금 이 항목의 일을 중지하게 하였다. 물론 나도 이는 무책임한 방법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기간에 나의 신변에 있는 현지 주요 협조일을 하는 한 동수가 또다시 불법(不法)적인 노동교양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사건이 발생한 후에도 나는 오히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기타의 동수와 교류 및 조직하여 대책을 세워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느낌이 들었고 자신의 일하는 방법을 찾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뿐만 아니라 다른 동수에 대하여 강렬한 원망감이 들었다. 그리하여 편집공작은 하지 않고 다만 진상자료 배포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방면에서 드러난 두려움이 나를 가로막았다. 발걸음이 힘들었다. 가장 좋지 않을 때에는 심지어 수련을 더 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맞지 않은 생각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제거하였다.

오직 법공부를 강화하여 난관을 넘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법공부는 원래처럼 그렇게 절박하게 마음에 들어가지지 않았다. 법공부할 때 조급한 마음이 산생되었는데, 법공부를 통해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쁜 마음은 마치 뿌리를 내린듯이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없앨 수 없었다.

이때 나는 한 명의 동수에 의해 도움과 고무격려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 자신이 법공부에서 느낀 것과 깨달은 것을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문제점도 지적해 주었다. 나는 내심으로 큰 진감을 감수하였다. 인터넷에 오른 몇 편의 문장들도 나를 감동시켰다. 이는 나로 하여금 낡은 우주의 사적인 속성이 나의 몸에서 표현된 것임을 인식하게 하였다. 이어서 나는 사부님의 《2008년 뉴욕법회 설법》을 보았다. 사부님께서는 법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련생이 적다고 해서, 혹은 일부 지역에서는 수련생 사이에 줄곧 논쟁이 존재한다고 해서 당신들이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며 심지어 당신 개인 수련의 문제에 있어서 모두 소극적으로 변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다.” 이는 마치 육중한 망치가 나의 심금을 울려준 듯 하였으며 홀연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였다. 나는 자신이 이미 수련의 궤적에서 빗나갔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확실히 엄중하게 미끌어진 것이었다. 신체마저 매우 무거웠다. 나는 끝내 마음을 안정시키고 대량으로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법암송후 사부님께서는 아주 빨리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는데, 내가 정진할수 없었던 원인은 바로 자신을 진정으로 한 명의 수련인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뼈속에는 사람의 물건을 보류하면서 포기하기 싫어했고 대법을 이용하여 사람중의 아름다움을 획득하려는 이러한 더러운 마음이 있었다. 소책자를 만드는 과정중에 가장 선명하게 표현되었던 것은, 많은 문장들을 통해 일부 도리를 알게 되고 보니 마치 아주 당연하게 이런 것들을 운용하여 속인사회에서 속인사회의 그 무엇을 개변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사람 마음을 여기에서 잃고, 사람의 표면은 마치 부처를 수련하려는 소원이 없는 것 같았다. 사실 근본 원인은 자신의 공간장 중 낡은 우주 생명의 요소가 대법 정법을 이용하여 최대한으로 자기들이 원하는 것들을 보류하여 도태의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던 것 같다. 이전에는 자신의 사람 표면이 청성하게 이점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에 이끌렸고, 때문에 덮어 감추려고 하며 회피하려고만 하였다. 사상속에서 아직 인식할 수 없었거나, 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기 싫었던 것이다. 정법홍세가 부단히 표면으로 밀려오면서 회피할 수 없을 때 바로 소침한 표현이 나타난다. 심지어 대법을 배우는 것을 스스로 내켜하지 않는다. 모순과 곤란 앞에서 자신이 수련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부처 수련의 소원을 명확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사람중의 번거로움과 고통 등을 나쁜 일로 간주했으며, 문제에 봉착한 시초에 이것을 좋은 일로 여기고 제고하는 기회로 여길 수 없었으며 안일만 계속 바라면서 법공부를 하는 것을 번거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조용함을 획득하는 경로와 기능으로 생각하였다.

이점을 알게된 후 나는 명백히 부처 수련을 해야겠다는 강렬한 일념을 발했다. 사부님의 진수제자가 되고 대법에 동화하고 사부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여 대법이 조화해낸 무사무아(無私無我)의 대각자가 되겠다. 이 일념을 발한 후 나의 감각으로는 수련의 가장 험한 협곡을 걸어나온 것 같았으며 구세력이 나에게 설치한 거대한 난관을 벗어난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의 사유도 맑아지기 시작했고, 나는 또다시 전심전력으로 중생구도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때 나는, 수련한다는 것은 사람의 제일 표면을 닦아서 이지가 청성하게 승화되어 다른사람을 위한 생명이 되는 것이며 사람의 관념을 철저히 불성(佛性)으로 개변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법이 나에게 도달하라고 한 표준은 “무사무아(無私無我)”이다. 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공부하려는 마음이 사라졌다. 이를 대체하게 된 것은 법에 동화하는 염원이었다. 나는 진정으로 대법의 보귀함을 알게 되었고 대법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2. 두려운 마음과 안전문제에 대한 인식

당시 편집할 때를 돌이켜 보면 노트북을 메기만 하면 갔다. 어디서든지 수시로 일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왕왕 주변의 환경에 나무만 흔들려도 회피하였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아주 중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도리어 깊이 안을 향하여 찾아보지 않았다. 문제의 뿌리를 캐보니 아주 많은 때에 숨어서 일을 하였던 것이었다. 회피할 수 없는 위험에 봉착하기도 했는데, 이때에서야 정념이 나왔다. 그렇게 사부님의 보호하에 평온하게 넘어왔다. 그래서 정체적으로 볼 때 대법제자가 주동적으로 사악을 제거해야 할 정법수련 시기에 아주 피동적인 것으로 같다. 아주 많은 때에 정법시기 대법제자 같지가 않았다.

사부님께서도 이 마땅히 버려야할 두려운 마음을 보시고 동수를 안배하여 동수의 체험과 법리를 나와 교류하게 하였다. -“당신들이 생각해 보라. 인류가 말하는 자신이 원숭이에서 진화해 왔다는 설이 다 우아한 자리(大雅之堂)에 올라앉았는데, 이렇듯 위대한 한 부의 우주대법(宇宙大法)을 당신들은 오히려 그에게 하나의 정확한 위치를 주기에도 쑥스러워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진정한 치욕이다.”(《정진요지》) “세상의 일체는 모두 정법을 위하여 창립된 것이다. 대법제자는 곧바로 오늘날 풍류인물이다. 옛적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계 중생들은 모두 기대하고 바라고[期盼] 있다. 당신들이 구도할 중생을 받아들이고 구원하라. 정념정행하여 일체 장애를 해체시키고, 진상을 널리 전하라. 신은 사람 속에 있다.”(《유럽 스톡홀름법회에게》)

일정한 정도에서 법리를 인식한후 자신의 실천을 통하여 나는 정정당당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문제에 봉착하면 역시 첫 일념에 두려움이 없이 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다시 말하면 두려움의 뿌리를 없애지 못한 것이다. 편집 항목을 중지한 후 나는 단독으로 혹은 동수와 배합하여 자료를 배포해야 했다. 이때에 원래 주의하지 않던 두려운 마음이 돌출하게 드러났다.

전에 몇 달 동안 혼자 스스로 항목일을 하던 그 시기에 사부님께서 점화해 주셨다. 무신론은 나의 두려움을 조성한 근원중의 하나이다. 사람의 진정한 생명은 원신(原神)이다. 원신은 불멸이다. 역사상 일찍이 여러 번의 윤회를 거쳤다. 사람의 생과 사는 마치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것과 같다. 정말로 겁날 것이 없다. 그러나 무신론은 사람의 관념을 변이시켜 신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는 것은 마치 불이 꺼지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변이된 관념하에 왕왕 죽음에 대한 공포로 충만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공포는 바로 공산사령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고대인에 대비하면 고대에는 보편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는다. 윤회도 믿고 선악 보응도 믿는다. 그래서 고대인은 왕왕 자신의 말 한마디를 위해 생사를 내려놓는것으로 자신이 사람으로서의 이념을 성취한다. 혹은 자신이 맹세한 말을 실현한다. 심지어 소설, 평론서 중에 장사, 사내대장부 등이 죽음의 위협하에 이런 한마디 말을 한다. “머리에 사발만한 상처가 생겨도, 20년이 더 지나면 그래도 사내대장부이다.” 그때 생사윤회는 하나의 상식이었다. 그래서 사람들도 이렇게 큰 두려움이 아주 적다. 오늘날 무신론에 변이된 인류는 살기를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익과 육신이 살기 위하여 도의와 양지를 팔아먹기도 한다. 일정한 층차에서 말하면 무신론은 두려운 마음의 근원이라 할지라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다. 내가 실제로 체험하여 깨달은 한층의 관계인데 두려움은 나를 멀리 떠났다. 당연히 두려운 마음은 더 깊은 래원이 있다. 그것은 구세력의 사(私)를 위한 근본 속성이다.

이전에 내가 봉착한 정황은 나는 내가 제일 바른 일을 하고 있는 줄 안다. 천상의 변화에 순응하여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사부님의 보호를 믿는다. 그래서 내가 가서 하는 것은 안전하다. 표면상으로 볼때 어떻게 위험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신사신법의 각도로 말할 때 이것은 의심할바 없이 맞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볼때 그래도 이는 안전하고 보장이 있을 때 한 일이기 때문에 그래도 그 근본적인 사심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사부님이 우리들에게 도달하라고 한 표준은 “무사무아”이다.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을 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법(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 (《정진요지》)

생각되는 것은 오직 법의 표준만 거기에 있고 안전한 요소가 없을 때 내가 그래도 법의 표준에 따라할 수 있을까? “무엇이 부처인가? 여래(如來)란 진리를 딛고서 여의롭게 왔다는 이런 하나의 세상 사람의 호칭이지만, 진정한 부처인 그는 우주의 보위자(保衛者)이다. 그는 우주 중의 일체 바른 요소를 위하여 책임질 것이다.” (《도항》)

신불(神佛)은 그들의 경지의 표준대로 할 것이다. 그들이 인정한 길은 기어코 걸어나갈 것이다. 그래서 사악의 환경에 직면하여, 위험에 직면하여 우리는 생사를 내려놓고 법이 수요하는 표준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렇게 중생을 구도할 수 있는지, 법을 실증할 수 있는지 이것은 우리 사람의 일면이 명백하게 법리를 깨닫고 해내야 한다.

어떤 제자는 말한다. “뭐가 겁나는가. 머리가 날아가도 몸은 아직도 가부좌하고 있다.” 대법제자는 반드시 이런 경지가 있어야 한다. 이런 한층의 법리를 정오(正悟)해야만 절저히 이 한차례의 박해를 끝낼수 있고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만약 한 수련자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생사의 생각을 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사악한 것은 틀림없이 두려워한다. 만약 모든 수련생들이 모두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사악한 것은 바로 자멸(自滅)할 것이다. 당신들은 이미 상생상극(相生相克)의 법리(法理)를 알고 있고, 두려움이 없다면 또한 당신으로 하여금 두려워할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강제로 행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탄연(坦然)하게 내려놓으므로 도달한 것이다.”(《정진요지2》〈최후의 집착을 제거하자去掉最后的执著〉)

사실 수련인으로 말하면 더 한층 높은 법리에 직면하여 아직 완전히 동화되지 않았을 때 이 한층의 법리로 자신의 일언일행을 요구한다면 긍정적으로 압력이 있다. 어떤 때에는 마치 위험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안전한 것이다. 사부님이 말씀하신 이 방면의 법을 핑계로 삼는 것은 사람의 관념을 버리기 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지적이지 못할때는 확실히 안전 문제가 존재한다.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안전문제를 고려하는 기점은 응당 “다른 사람을 위해서”여야 한다. 대법제자의 정체적인 평온을 위하여 그리고 친구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하여, 진정으로 법을 실증하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응당 안전문제를 고려해야 하며 이지적이고 청성하게 대법제자의 부동한 층차에서의 법리요구에 부합되게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 법을 많이 배우고 법리를 알면 문제에 봉착했을 때 안을 향해 찾고, 법중에서 해야 하며 인위적으로 안전을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안전한 것이다.

3.안을 향해 찾는 것에 대하여

사부님께서는 《스위스 법회에서의 설법》중에 말씀하셨다: “사람이 만약 생사 이 관을 넘지 못하면 그는 원만할 수 없다. 그러나 절대로 당신으로 하여금 기필코 그 한번 아프게 해야만 생사를 내려놓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은 다만 하나의 형식일 뿐으로 나는 중하게 보지 않으며, 나는 당신의 마음을 보고 진정하게 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그래서 우리는 꼭 사악을 직면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관건적인 시각이 되어서야 생사를 내려놓을 것이 아니라 평소에 조금조금씩 자아를 내려놓는 과정중에 자연적으로 도달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에 봉착하면 안을 향해 찾고 자신의 문제를 찾고 자신의 관념, 사적인 생각과 목적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위해 먼저 생각해주는, 대법이 수요하는 “무사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관건적 시기에 자연스럽게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다. 안을 향해 찾는 자체가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법속에서 찾는다면 제고도 바로 그중에 있다. 물론 네가 제고를 하고 싶던 어떻던 간에 모두 제고된다. 그런데 이전에 나는 언제나 안을 향해 찾는 것을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이나 수련제고하는 방법으로 간주했기에 수련은 언제나 사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다. 사적인 것을 위한 일념을 뛰어넘지 못했다. 이전에 문제의 해결과 경지의 제고도 역시 법공부를 하는 과정중에 마지막에 무의식 중에 그 마음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도달된 것이다. 사부님의 설법중에서 우리에 대한 요구는 “무사무아”이다. 만약 참말로 법의 요구에 따라할 수 있다면 제고되고 안 되고는 나로 말하면 중요할게 뭐가 있는가. 내가 수련하는 것은 다른 생명을 위해 고려하는 것이다. 이 표준에 도달되었을 때는 내가 어디에 있던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디에 있어야 되는지는 대법이 결정한다. 때문에 나는 오로지 대법이 나에대한 요구에 따라 하면 되는 것이다.

결속어:

사실 제자의 제고와 제자의 안전 등등 일체는 모두 사부님이 관리하신다. 어느 하루 일초도 안 되는 한순간에 사부님은 나로 하여금 법리상에서 이점을 깨닫게 하셨다. 내가 일할 때 자아를 실증하는 심리상태를 제거해 주셔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게 되었다. 물론 아직 완전히는 도달되지 못했어도 사부님은 나로 하여금 응당 준수해야할 표준을 알게 하였다.

제5기 대륙 서면 교류회가 곧 다가올 무렵 이 문장을 사부님께 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동수와 자신의 심득체험을 나누고 부족한 점은 동수분께서 지적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동수와 함께 사부님이 《홍음》중 를 복습해보고자 한다.

높은 계단 천척 길을 오르나니 구비구비 가팔라 발길이 어렵네 고개를 돌리니 마치 정법수련을 보는 듯 허공에 머무르면 제도받기 어려워라 결심코 발을 들어 만근 다리를 옮기거니 고생을 참고 정진하여 집착을 버리노라 대법제자 천백만 공성원만하여 높은 곳에 있네

사부님 감사합니다! 동수 여러분 감사합니다!

문장완성 : 2008년 11월 17일
문장발표 : 2008년 11월 18일
원문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8/11/18/1899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