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루이샤오린 음식물 주입으로 사망, 그의 아내가 장쩌민 고소

[밍후이왕] 안후이성(安徽省) 안칭시(安慶市) 파룬궁수련생 루이샤오린(芮曉林)은 13년 전에 난후(南湖) 노동교양소에서 음식물 주입을 당해 사망했다. 루이샤오린의 아내 장싱시(章興喜)는 파룬궁을 말살하는 박해를 발동한 원흉, 중공(중국공산당)의 전 두목 장쩌민(江澤民)을 고소하는 형사고소장을 최고인민검찰원에 부쳤다.

 芮晓林

루이샤오린(芮曉林)

다음은 장싱시가 고소장에 서술한 내용이다. 장쩌민의 조종으로 ‘610사무실’, 공, 검, 법, 노동교양소, 감옥 등이 그녀의 남편 루이샤오린을 박해한 사실들이다.

내남편 루이샤오린은 1963년 출생했고 대학 전문학교 출신이며 전업 간부로, 안후이성 안칭시 수리국(水利局) 공정기술 간부였다. 그는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파룬궁을 수련하면서 심신이 건강해졌고 담배를 피우는 등 불량한 취미를 고쳤으며 직장에서도 공인받는 좋은 사람이었다. 집에서도 수련하기 전과 비교해 더 차분해졌고 웃어른께 효도하고 나에게도 자상했다. 또 아이를 잘 보살폈으며 예의 바르게 사람들을 대했다.

대법을 얻기 전 그가 장사할 때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 10여만 위안의 돈을 되찾기 위해 그는 머리를 쓸 대로 다 썼다. 대법을 얻은 뒤 그는 다시는 빚을 받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직장에서 그는 건축시공기술 관리인원으로서 성실히 일했으나 그의 집은 박해로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사면의 벽과 바닥을 여태껏 장식한 적이 없었다.

1999년 12월 26일, 나의 남편은 법에 따라 파룬궁을 위해 베이징 민원국으로 청원하러 갔다. 민원국에 도착한 뒤, 경찰은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청원하러 왔음을 알고는 그들을 벽을 향해 세우고 강제로 몸을 수색했다. 그 후 베이징 주재 안후이 경찰에게 통지해 그들을 베이징 주재 안후이사무실로 끌고 갔다. 당시 사무실에는 이미 40명가량이 있었다. 연공을 하려 했다는 이유로, 다른 4명과 함께 경찰에게 복도로 끌려가서 세워두는 고문을 당했고 동시에 5~6시간 동안 가혹한 구타를 당했다. 12월 30일, 현지 경찰에게 끌려 돌아와 안칭 구치소에 1개월 동안 불법 감금당했다.

2000년 4월 초, 주룽지(朱鎔基) 총리가 민원에 대한 담화를 발표된 뒤, 나의 남편은 거듭 파룬궁을 위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 또 불법 체포당했고 안칭 구치소에 감금당했는데 구치소는 위생조건이 극히 나빠 온몸에 농포성 옴이 생겨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게다가 1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해 강제로 후난 노동교양소로 보내졌다. 그 기간, 그는 매일 시간을 초과하는 강제노역을 당했고 여러 가지로 세뇌당했다.

2001년 12월, 루이샤오린은 세 번째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이번에는 톈안먼 파출소와 베이징의 세뇌반에서 온갖 학대와 시달림을 당했고 꼬박 7일 동안 눈도 붙이지 못했다. 그는 단식으로 박해에 저항했다. 그 후 다른 수련생을 알아본 현지 경찰에게 적발돼 불법적으로 안칭으로 붙잡혀 돌아온 뒤, 안칭시 제1구치소에 감금됐다. 그가 계속 20여 일 동안 단식한 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자 경찰은 그가 구치소에서 죽으면 법적 책임을 질까 두려워 그를 석방했다. 파룬따파(法輪大法)의 신기함이 매우 빨리 루이샤오린의 몸에서 나타났다. 이튿날 그는 출근할 수 있었고, 얼마 되지 않아 얼굴색이 좋았으며 일체가 정상적이었다. 석방돼 돌아와 20여 일이 지난 뒤, 경찰은 그의 일체가 정상임을 보자 곧 그가 근무하는 곳에서 그를 난후 노동교양소로 납치해 2년의 불법 노동교양을 시켰다.

사악의 박해를 저지하기 위해 루이샤오린은 붙잡힌 날에 다시 단식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단식 기간에 경찰에게 강제로 묶여[사람을 ‘대(大)자형’으로 침대에 묶어 24시간 동안 움직일 수 없게 함]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악독한 경찰은 굵기가 손가락만큼 되는 의약용 고무호스를 그의 코에 꽂아 넣고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했다. 그의 고통을 크게 하려고 음식물을 주입한 뒤에도 호스를 여전히 콧구멍과 위장에 남긴 채 뽑지 않았다. 그는 호흡하기가 어려웠고, 침도 삼키지 못해 밖으로 흘러나왔으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기간 악독한 경찰은 또 그를 감시하는 노교인원에게 지시해, 그가 눈을 감기만 하면 곧 발로 사납게 침대를 걷어차 휴식조차도 할 수 없게 했다. 또 몇 명의 흉악한 체격이 우람한 노교소의 죄수들이 강제로 그의 입을 비틀어 열고 쇠 국자로 입안에 죽을 쏟아 넣었다.

장기간 박해당했던 까닭에, 루이샤오린은 대량으로 각혈했고 사경을 헤맸다. 가족이 여러 차례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치료받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난후 악독한 경찰은 오히려 “상부에는 노교소에서 죽더라도 석방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습니다.”고 말했다.

예전에 안후이 난후 노교소에서 박해당한 적이 있는 안후이 대법제자가 2010년 1월 22일 밍후이왕에 발표한 문장에서 언급했다. 그는 부대대장 마뱌오(馬骉)가 “그해에 안칭의 루이샤오린도 바로 이렇게 무참하게 음식물을 주입당해 죽었습니다. 그의 가족이 달려와서 루이샤오린의 전신의 옷을 벗기고 수건으로 세밀하게 닦아주었는데, 사실은 그의 몸에 상처 흔적이 있는지를 보려고 한 것이었겠죠. 그러나 무참하게 음식물주입으로 사망했음을 그녀가(가족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당신도 만약 전향하지 않는다면, 역시 루이샤오린과 마찬가지 결말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악독한 경찰 류양(劉楊)은 또 옆에서 따라 말하며 “맞습니다. 당신에게 주입해 죽이는 것도 역시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한 것이므로, 우리는 어떠한 책임도 감당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도 했다. (밍후이왕 문장 ‘안후이 난후 노교소의 악독한 경찰의 폭행’을 참조하시기 바람). 이로써 볼 때 나의 남편은 그들에게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당해 사망했음을 볼 수 있다.

내 남편의 병세가 위급한 기간, 지금까지 난후 노교소로부터 전화 받은 적도 없다. 남편이 박해로 사망했는데 그들은 또 실정을 알려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 난후로 와서맞이해 집으로 돌아가라고 속였다. 난후에 도착한 뒤, 그들은 곧 우리를 감금해 활동을 제한하며, 거듭 나에게 루이샤오린이 ‘정상적으로 사망했다’고 쓰라면서 위협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시신 보는 것도 허락지 않으며 직접 화장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재차 강력하게 요구하자 그들은 어디에서 가져왔는지는 모르지만 ‘병세가 위중하다는 통지서’와 ‘사망 증명’을 가져왔다. 이상한 것은 두 장의 가족 서명에는 모두 ‘장췬펑(章群峰)’이란 사람이 대신해 서명했는데 우리 집에는 이런 사람이 없다! 게다가 두 장에 쓰인 ‘장췬펑’이라는 서명의 글씨체가 같지 않았다!

2002년 6월 11일 아침 장의사로 갔는데, 우리는 각 길목 입구와 길가에도 작은 가방을 겨드랑이에 낀 사복 경찰이 지키고 있음을 발견했다. 장의사에는 이미 많은 사복 경찰이 모였고, 주차장에는 10여 대의 중형 버스 경찰차가 정차해 있었다. 분위기는 매우 공포를 느끼게 했다! 우리가 거듭 강력하게 요구해서야 그것도 난후 노동교양소 관계자의 감시하에 나와 가족이 루이샤오린의 옷을 바꿔 입힐 수 있었다. 그들이 루이샤오린이 사망한 뒤 많은 간계를 꾸몄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루이샤오린의 왼쪽 귀 전체, 왼쪽 손등의 절반 부분이 모두 자색임을 발견했다. 이런 모든 의문점과 윗면에서 언급한 그 안후이대법제자가 말한 것처럼 루이샤오린은 음식물 주입으로 사망한 것이다!

앞서 말한 내용을 종합해, 고소인은 사법기구에서 장쩌민의 형사 책임을 추궁해 법률에 근거하여 제재를 가하도록 제청한다.

문장발표:2015년 6월 1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6/16/31088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