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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박해 당한 랴오닝 펑청 취산린 억울하게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파룬궁수련생 취산린은 2010년 9월 5일에 납치당해 2010년 12월에 3년의 불법 판결을 받아 선양 둥링감옥으로 납치당했다. 그는 위암에 걸려 대수술을 받을 때까지 선양 둥링감옥에서 줄곧 각종 수단으로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취산린은 위장의 3분의 2를 절제당해 2011년 말 생명이 위독해졌다. 선양 둥링감옥에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를 병보석으로 집에 돌려보냈다. 그는 결국 2012년 5월 16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취산린(남, 67세, 퇴직 노동자)은 랴오닝성 단둥 펑청시에서 살았다. 취산린은 여러 가지 병을 앓다가 파룬궁 수련에 들어섰다. 수련한 후 온몸의 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몸이 가벼워졌다. 그는 대법 사부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취산린은 중공(중국공산당) 사당에게 광적인 타격과 박해를 당하고 중공이 파룬궁에 대해 유언비어를 날조해 모함하는 동안에도 파룬궁을 굳건히 수련하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파룬궁을 수련해서 직접 이로움을 본 상황과 파룬궁이 중공 사당에게 박해당한 진상을 수많은 세상 사람에게 알려주었다. 펑청의 악당 불법분자는 이 때문에 그에 대해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며 박해를 공모했다.

2004년 4월, 펑청시공안국 불법분자는 610의 직접적인 조종 하에 불법으로 취산린의 집에 들어가 가택수색을 감행했고 그를 납치해 구치소에 감금했다. 펑청시공안국은 또 비열한 수단으로 단둥시공안국, 단둥노교위원회와 공모해 그를 불법으로 단둥노동교양원으로 보내 박해를 감행했다. 취산린의 아내는 극심한 정신적 타격과 공포적인 압력을 감당하지 못해 몸져누웠다. 아내는 임종에 직면하여 취산린을 한 번 보기를 갈망했다. 가족은 단둥교양소에 가서 취산린이 그의 아내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가 단둥교양원의 악도에게 거부를 당했다. 게다가 악도들은 취산린의 아내가 병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취산린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서야 아내가 슬픔 속에서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취산린은 박해를 당해 몸이 아주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딸이 모두 외지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그는 장기간 혼자 생활했다.

2010년 9월 5일, 취산린과 자오린, 량윈청, 우쥐안, 쑨중친 등 4명의 파룬궁수련생은 차를 타고 바이치진 민주촌과 자유촌으로 가서 진상을 알리다가 진상을 잘 모르는 촌민 캉칭둥에게 악의적인 신고를 당해 바이치파출소 악경에게 납치당했다. 바이치 파출소 소장 장쥔, 부소장 판시주와 장위하이, 그리고 악경 차오더쥔(여러 차례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납치와 구타에 참여하고 파룬궁사부님에 대해 욕설을 퍼부었음) 등은 국가보안대장 왕정진, 천빈의 지시 하에 취산린 등 5명의 파룬궁수련생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해 하룻밤 동안 혹독하게 구타했고 이튿날에 펑청시 얼룽산구치소(펑청구치소)에 가뒀다. 그들은 자오린의 자가용을 강탈했다.

펑청시공안국은 완전히 날조한 사실과 죄명으로 취산린 등 5명의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불법기소를 했다. 펑청법원은 2010년 11월 23일 오전에 5명의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불법 법정심리를 열었다. 펑청시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은 서로 작당하여 사실과 죄명을 위조하여 그들에 대해 3년의 불법 판결을 내렸다.

취산린은 박해에 항의해 단둥중급인민법원에 상소했다. 단둥중급인민법원과 펑청시 법원은 한패가 되어 새롭게 개정심리를 거부했다. 게다가 2011년 4월 10일에 불법으로 판결을 내려 억울한 재판을 유지했다. 취산린은 4월 11일에 다른 몇 명의 펑청시 파룬궁수련생과 함께 선양감옥성으로 납치당했고 그 후 선양둥링감옥으로 이감되어 박해를 당했다.

취산린은 선양 둥링감옥에서 잔혹한 박해를 당해 결국 위암에 걸려 대수술을 받았고 위장의 3분의 2를 절제당해 생명이 위독해졌다. 2011년 말, 선양둥링감옥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를 병보석으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취산린은 피골이 상접했다. 2012년 5월 16일, 그는 아들의 집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둥링감옥은 선양시에 위치했고, 선양시사법국에 귀속되어 있다. 둥링감옥 안에는 8백 여 명의 사람이 감금되어 있는데 경찰은 5백여 명이나 된다. 지금 랴오닝성 각지 감옥의 많은 파룬궁수련생은 둥링감옥으로 이송되어 타향 감금을 당하고 있다. 또 현지 몇십 명의 파룬궁수련생이 그곳에 감금당해 있는데 이곳은 중공 사당이 파룬궁수련생을 감금 박해하는 가장 사악한 소굴 중의 하나이다. 중공 사당은 명리를 이용하여 감옥의 불법분자가 끊임없이 나쁜 짓을 하도록 자극하여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지게 하고 전혀 인간성이 없는 정도에 도달하게 했다.

둥링감옥은 폐쇄식 관리방식으로 파룬궁수련생이 외계와 연계함을 엄격하게 봉쇄했으며 박해소식을 알릴 수 없게끔 했다. 게다가 모든 파룬궁수련생은 석방되는 날 다시 ‘610’에 붙잡혀 갔다. 불법 감금당한 파룬궁수련생에 의하면 해마다 박해로 사망하는 파룬궁수련생이 있는데 그가 직접 눈으로 본 사람만 해도 약 10명이 박해로 사망했다고 한다. 특히 중공 18기 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하기 전 둥링감옥은 감옥내의 모든 파룬궁수련생을 강제로 전향시키고 잠을 재우지 않았는데 여러 사람이 구타로 부상을 입고 불구가 되었다. 그 사악한 정도는 치가 떨리도록 사람을 분노하게 한다.

취산린과 함께 납치당해 불법판결을 당한 랴오닝 단둥 펑청시 파룬궁수련생 자오린도 선양 둥링감옥에 감금당해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자오린은 올해 56세이다. 그는 전 랴오닝 펑청 압축기공장 판매원으로 직장 업무에서 아주 뛰어났다. 2010년 9월에 납치당해 펑청구치소에 갇힌 뒤 자오린은 박해로 허리부위가 구부러져 곧게 펼 수 없게 되어 걷기도 어려워졌다. 또한 아주 많이 수척해졌고 얼굴색은 누렇게 되었으며 오른 눈은 충혈되고 눈언저리는 시퍼렇게 부어올랐으며, 또 아래턱과 입가에는 담배에 지진 상처가 있었다.

자오린은 불법 판결을 선고받은 뒤 선양 둥링감옥으로 납치당했다. 처음에는 2감옥에서 4~5명의 바오자와 대장에게 방안에서 혹독한 구타를 당했고, 생명이 위독해지자 병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몇 번이나 두 사람에게 부축을 당하며 구타를 당해 폭 고꾸라졌다. 제2감구역의 악경 리룽화는 상당히 사악했다. 대대장 리룬빈, 부대장 옌정위안은 예전에 자오린을 24시간 동안 수갑에 채워놓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자오린은 박해로 인해 몸에 심각한 부종 증상이 나타났다.

2011년 11월 17일, 자오린의 가족이 선양 둥링감옥으로 자오린을 면회하러 갔을 때 학대로 피골이 상접해진 자오린은 수갑을 찬 채로 가족과 대화했다. 수갑을 찬 자오린의 두 손은 아주 굵게 부어올랐고 걷는 것도 매우 힘들어 발마저 들지 못했다. 가족과 면회할 때에도 엄밀한 감시를 당해 마음대로 말할 수 없었고 약간만 요구에 부합되지 않으면 곧 제지당했다. 가족이 경찰에게 자오린에게 족쇄를 채웠는지를 묻자 경찰은 부인했다. 그러나 가족은 자오린의 몸에서 ‘큰 괘에 올리기’ 고문을 당한 것과 같은 흔적을 보았다.

리룬빈은 ‘10.1국상일’ 전후에 법제 심리학자를 데려다가 자오린을 세뇌한 것을 고백했다. 매번 8명이 한 팀으로 하루 24시간 동안 윤번으로 자오린을 전향시켰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자오린은 대법을 끝까지 굳게 수련하려 했다. 이전에 선양 둥링감옥은 줄곧 가족이 자오린을 면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종 수단을 사용해도 자오린을 전향시킬 수 없게 되어서야 가족이 면회하는 것을 허락했고 가족이 협력해 자오린을 권고하기를 바랐다. 리룬빈 등은 자오린의 가족에게 만약 자오린이 이번에 가족을 만난 다음에도 전향하지 않는다면 곧 독방에 가둘 것이며, 또 생명위험이 나타나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협박했다.

자오린이 잔혹한 박해를 당한 상세한 보도는 ≪랴오닝 펑청 파룬궁수련생 자오린이 다시 고문당해 가족이 고소하다≫란 문장과 2011년 11월 23일에 발표한 밍후이왕의 ≪자오린이 선양 둥링감옥에서 고문학대 당해≫란 문장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박해부서 인원의 전화는 원문을 참조하기 바람.

문장발표: 2013년 3월 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3/2/27053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