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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아커쑤시 셰즈잉 10여 년간 박해받아 억울하게 세상을 뜨다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신장보도) 셰즈잉(謝志英)은 신장 아커쑤시 지방세 징수 세무서 간부로, 1959년에 출생했으며, 본적은 허난이다. 셰즈잉은 파룬따파 수련을 견지하다가 두 번이나 중공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혔다. 정신에 손상을 입어 실언한 상황에서도 현지 ‘610’은 아커쑤시 지방세 징수 세무서의 직원에게 그녀의 집을 밖에서 문을 잠그도록 지시해그녀가 7년 동안 가족과 만나지 못하게 했다. 2011년 8월 6일, 갑자기 셰즈잉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가 전해졌는데 아커쑤시 지역 ‘610’은 인성이 없이 가족들을 탐문하고, 셰즈잉의 시신을 보여 달라는 가족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610’은 중공이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조직으로, 나치 게슈타포와 흡사하며 죄악은 산더미처럼 크다.

1. 진선인(眞善忍)을 따르는 좋은 사람이 되다

셰즈잉은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에 직장에서 일을 잘했고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가정도 화목했고, 이웃과도 사이좋게 지냈는데, 갑자기 질병에 걸려 그녀는시달림과 충격을 받았다.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신장의 큰 병원을 다 찾아 다녀도 원인을 찾을 수 없어서 가족들은 걱정을 하였다. 양의와 중의를 찾아 문의해도 방법이 없었고,다시 일어나서 스스로 생활을 할 수 있는 희망이 없었다. 부모님, 형제, 자매, 남편, 아이는 모두 그녀의 병 때문에 절망했다. 그녀는 생활에 신심을 잃었다.

그런데 1997년에 모든 것이 좋아졌다. 그녀의 모친 위안징윈이 랴오닝성 다롄에서 대법을 얻어서 질병으로 앓고 있는 딸에게 파룬궁을 연마하라고 권했던 것이다.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셰즈잉은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한 달 후에 기적이 발생했다.스스로 걷고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쁨 속에서 그녀는 파룬궁이 그녀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었음을 알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확고하게 파룬궁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고, 끊임없이 자신을 승화했는데, 그 기간의 생활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세월이었다.

2. 정신병원에 두 번 납치당하고, 불법 노동교양 3년을 받다

그녀가 자신감에 차서 아름다운 미래를 동경할 때, 중공은 뜻밖에 질풍노도처럼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모함과 탄압을 시작하였다. 근무하던 직장의 책임자와 동료는 거짓말과 속임을 당하고 강압적인 정치세도의 부추김으로 인해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대했고, 그녀를 고립시켜 정신적으로 극심한 압력을 주었다. 이런 열악한 정치 환경에서 그녀는 여전히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켰고, 계속해서 파룬따파를 수련했다.

각급 독재 정치기관의 지시 하에, 직장 책임자는 심신이 건강한 그녀를 강제로 신장 아라얼시 정신병원에 가둬 넣어 이른바 건강회복 치료를 받게 했다. 정상적이던 그녀를 정신병 환자로 취급하여 강제적 ‘치료’를 감행했다. 전기곤봉으로 충격을 가하고, 장기간 동안 격리시켜 묶인 채로 강제로 대량의 독극물을 주사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의 정신을 모욕하고 손상시켰으며, 친척과 친구의 왕래를 금지시켰다. 그리고는 ‘폐쇄식 치료’라는 명목으로 이른바 각종 정치이념을 강제로 주입하고는 그럴듯하게 ‘심리치료’라는 좋은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그렇지만 이 일체는 그녀의 믿음과 의지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고문시연: 전기곤봉으로 전기충격 가하기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셰즈잉은 대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품고 베이징에 청원의 길에 올랐다. 거짓말은 진상을 덮어 감출 수 없음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악경에게 붙잡힌 그녀는 다시 한번 여위고 허약한 몸으로 사악에게 고난을 당했다.

2001년, 셰즈잉은 신장 아커쑤시 국가보안국에 의해 3년의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고 신장 우라보노동교양소로 보내졌고, 2002년 11월에 새로 건립된 신장여자노동교양소로 이송되었다.

셰즈잉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신장 우라보노동교양소와 신장여자노동교양소에 있는 동안에 비인간적인 폭력적 전향, 전기몽둥이 충격, 잠재우지 않기, 장시간 세워두기 등의 시달림을 당했다.교도관에게 지시받은 마약범은 장기간 동안 욕설과 혹독한 구타를 가했고,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했으며, 굶주리는 등의 사악한 박해를 감행했다. 그러나 셰즈잉은 사악의 어떠한 지시에도 협조하지 않고 박해에 반대했다. 대법을 모독한 사악의 글과 영상을 보기를 거부했으며, 인원을 보고하지 않았고, 명찰을 달지 않았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노동교양소의 규칙과 규율을 보지도 외우지도 않았고, 노동을 거부했고, 단식으로 체벌과 구타를 반대했다.

한번은 전 노동교양소에서 사악이 대회를 열고 있을 때 전체 노동교양소의 인원은 셰즈잉이 구타당하면서도 사악의 회의 장소에 오지 않고, 단식 중에 인성이 없는 사람에 의해 노동교양소 식당으로 가는 길에서 잡아끌리고 채이면서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 기간에 박해를 반대한 그녀의 행동은 사악을 최대한도로 진섭시켰다. 그리고 같이 불법 노동교양을 받으면서 두려운 마음 때문에 마음을 어기는 말을 한 대법수련생들을 격려했다.

셰즈잉이 노동교양소에서 신장 아커쑤시로 돌아온 뒤에 사악은 끊임없이 교란했다. 오래지 않아 다시 그녀를 신장 아라얼정신병원으로 보내 몇 개월 동안 비인간적인 학대를 감행했고, 가족들에게 면회를시켜주지 않았다. 마음이 아픈 것은 정신병원을 떠날 때 사악한 박해 하에서 그녀가 언어능력을 잃은 것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교류할 수 없게 되었다.

3. 7년 동안 밖에서 문을 잠궈 신체의 자유를 속박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커쑤시 지방세 징수세무서의 불법감시로 신체의 자유를 잃었다. 2004년 이후, 그녀의 월급은 불법으로 압수당했고, 직장에서는 전문인원을 파견해 그녀의 일거일동을 감시했다. 셰즈잉은 대문을 드나드는 것마저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고, 사악은 불법으로 7년 동안 밖에서 문을 걸어 잠궈 놓아 그녀가 세상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게 했다. 집은 감옥 아닌 감옥으로 변했고, 사람은 죄수 아닌 죄수가 되었다.

이 7년의 기간동안 셰즈잉의 남편은 주변의 압력으로 그녀와 따로 살았다. 그녀를 만나고 싶었지만 정법위의 방해로 소원을 이룰 수 없었다. 셰즈훙의 남편은 전에 셰즈잉의 오빠가 노동교양처분을 받고 돌아온 뒤에 오빠에게 셰즈훙이 집안에 가두어져 통제 당했다고 들었고, 그녀의 아들도 환경의 원인 때문에 모자가 만날 수 없었던 상황을 하소연 한 적이 있다. 그녀의 모친 위안징윈은 파룬궁을 연마해 장기간 동안 ‘전향’하지 않고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는 이유로 원래 직장이었던 신장 우선현(烏什縣) 국세국으로 보내져 10년 동안 감시당했고, 딸과 만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 셰즈밍도 파룬궁을 연마했다는 이유로 두 차례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았다. 한번은 수감된 직장에서 여덟 달 동안이나 대문을 나서지 못하게 했고, 세뇌반에 보냈다. 이 기간 셰즈밍은 각종 노력을 기울이고, 셰즈잉을 감시하는 인원을 자주 만났다. 그는 여동생이 집안에 잠겨져 통제 당한 것은 아커쑤시 지방세 징수세무서가 아커쑤시 ‘610’과 아커쑤 지역 ‘610’의 지시에 근거해서 행사했음을 증명했다.

2011년 5월 말, 연로하고 체질이 약한 어머니 위안징윈은 부주의로 넘어져서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고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되었다. 셰즈밍은 가까스로 어머니를 아커쑤시의 자기집으로 모셔와 보살필 수 있었다. 모친 위안징윈은 절박한 마음으로 급히 딸의 생사를 알아보려 했다. 6월 23일, 위안징윈과 아들 셰즈밍은 새로 부임한 아커쑤 지역 ‘610’ 주임 바오리췬(包立群, 지역 정법위 부서기)에게 자신이 낳은 딸, 여동생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도록 요구했고, 불법으로 박탈당한 인신의 자유, 재산권, 친정(親情)권, 인격 존엄권 등의 기본권을 회복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2011년 6월 28일, 위안징윈과 셰즈밍은 세즈잉을 만날 수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 아커쑤지역 ‘610’, 시 610’, 지방세 징수 세무서, 국가보안대대, 사회구역 등 10여 명 사람들이 포위한 가운데 모녀와 오누이는 만났다. 30분도 되지 않아서 그들은 모친과 오빠에게 그만 떠나라고 재촉했다. 모친이 딸의 집에서 밥을 먹고 머물 수 있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자, ‘610’과 사회구역 인원들이 모두 위안징윈을 공격했다. 지역 ‘610’의 양징(楊靜)은 “당신은 바오서기에게 보고를 써서 올리지 않았는가? 그럼 당신은 우선현으로 가서 문제를 해결하라. 지금 당신을 우선현으로 보내겠다.”라고 말했다. 모친은 아들과 함께 딸이 지어주는 밥을 먹게 해달라는 요구를 견지했다. 이렇게 시간을 끌면서 딸과 함께 있으려고 했다.

아직 노동교양소의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셰즈잉은 7년 동안 감금당한 공포 때문에 사악이 집안에 모여들었을 때 설거지를 반복하면서 모친과 오빠가 사악들과 대치하고 있는 것을 긴장하면서 바라보았다. 모친이 그녀를 안았을 때 그녀는 입은 벌렸지만 소리를 내어 어머니를 부르지 못했다. 모친은 떨고 있는 딸을 안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모친이 자신이 지은 밥을 드시려 하자 셰즈잉은 빨리 어머니와 오빠에게 간단하게 식사를 올려 조용히 반찬을 집어드리면서 어머니와 오빠가 자신이지은 밥을 드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위안징윈이 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자 지역정법위 ‘610’의 양징은 다섯 명을 파견해 당신들을 감시하고, 위안징윈을 우선현으로 되돌려 보내겠다고 위협했다. 마지막에 지역 ‘610’의 양징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셰즈잉의 직장인 지방세 징수 세무서의 책임자에게 “이후부터 이들 일가족이 만나는 것을 허락을 받아야만 만날 수 있고, 여러 방면의 감시 하에서만 진행될 수 있다.”고 선포했다. 사악한 ‘610’의 인원은 셰즈잉과 그녀의 가족이 함께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7년 동안 집안에 가두어 놓은 이유는 그녀가 도망가면 그들이 통제할 방법이 없고, 그녀가 사람들에게 그녀의 상황을 알려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 셰즈잉의 일가족은 모두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정신이 비정상적이라고 모함하면서 그녀가 가족과 함께 있으면 가족을 죽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본 어머니는 더욱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녀는 아들 셰즈밍과 함께 끊임없이 다시 한번 딸을 만나기를 요구했고, 일반적인 사람 사이의 단란한 모임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셰즈밍과 위안징윈이 여러 차례 아커쑤지역 ‘610’, 아커쑤시 ‘610’, 사회구역의 사람과 끊임없이 논쟁하는 도중에 아커쑤시 ‘610’의 왕지훙이 말했다.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보증서’를 써야 한다. 어머니가 진상자료를 배포하지 않고 수련생들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보증을 해야 한다.” 셰즈밍과 위안징윈은 거듭 요구했지만 모두 무시당했고, 그들은 시간을 끌었다.

4. 갑자기 별세했다는 부고와 함께 공안 법의는 가족의 감정을 회피하다

한달 반만인 2011년 9월 6일, 셰즈잉이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부고가 전해졌다. 셰즈잉은 남편, 아이(타향에 멀리 있음), 어머니, 형제의 보살핌이 없는 상황에서 아침 8시경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가족이 현장에 없는 상황에서 공안 법의가 단독으로 감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 결과만 셰즈잉의 남편에게 통지 했을 뿐, 어머니와 오빠의 의혹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머니는 딸의 시신을 보지 못한다는 통지를 받았는데, 살아서도 만날 수 없었고 죽어서도 만날 수 없었다. 울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빠 셰즈밍은 아커쑤지역 ‘610’에 가서 자세히 따졌다. 당직 인원은 그에게 “‘610’에서 통지를 내렸는데 셰씨를 윗 층으로 올려 보내지 말라고 했다”고 그에게 알려주었다.

정정당당하고 착실하게 직장에서 근무하던 간부,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는 수련자가 이렇게 각 방면의 이유 없는 박해로힘든 인생 역정을 걸었다. 중공은 각급 독재정치 기관을 동원해서 고문, 모욕, 비난하는 등의 각종 깡패수단으로 국법을 짓밟고, 인간성을 상실한 채, 선량하고 무고한 대법수련생을 끊임없이 핍박했다. 양심을 팔아 명리를 얻은 온갖 못된 짓을 일삼은 이들 악도는 반드시 역사의 치욕을 받을 것이다.

문장발표 : 2011년 08월 12일
문장분류 : 박해진상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8/12/2452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