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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수련생 13명 무단장감옥에서 고문치사 (사진)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보도)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다칭시(大慶市) 교사 바이솽(白霜. 50대)은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무단장감옥에 불법 감금돼 고문박해를 당하다가 2011년 6월 20일 사망했다. 동 감옥에서는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12년 동안 이미 12명의 파룬궁수련생을 고문치사 시킨바 있다. 사망자는 위쥔슈(于軍修), 왕지궈(汪繼國), 리루칭(李儒清), 판싱푸(潘興福), 웨이샤오둥(魏曉東), 닝쥔(寧軍), 두스량(杜世良), 장훙촨(張洪權), 쿵샹주(孔祥柱), 우웨칭(吳月慶), 김유봉(金宥峰), 캉윈청(康運誠) 등이다.

1. 다칭시 기술학교 교사 바이솽 무단장감옥 박해로 사망

다칭시 신싼촌(新三村)에 거주하는 다칭시 채유2공장 기술학교 교사 바이솽은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2010년 1월 15일 다칭(大慶) 둥후(東湖)분국에 의해 집에서 납치된 후, 법원의 불법적인 유죄판결로 무단장감옥에 감금됐다. 그 후 감옥에서 고문박해를 당하다가 6월 중순경 뇌출혈 증상이 나타나자, 무단장 제 1병원으로 후송되어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 하고 2011년 6월 20일 사망했다.

白霜
바이솽(白霜)

바이솽은, 중공이 1999년 7월 20일에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 하면서 여러 차례 납치감금을 당했다. 2000년 12월 어느 날, 젠화(建華)파출소의 110체포조와 다칭노동교양소의 악경 등 20여 명이 합동으로 바이솽 집의 문을 부수고 무단침입하여 2층 베란다 유리문을 박살을 내고 방안으로 들어가 바이솽(당시 노동교양소 보석중임)을 납치했다. 그들은 바이솽을 노동교양소로 끌고 가서 감금시킨 후 고문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악인들은 혹독한 구타, 쇠 의자에 앉히기, 끈으로 묶기, 냉수 뿌리기, 잠 안 재우기 등등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다칭 노동교양소에서는 2002년 4월 1일부터 7월 10일까지 이른바 ‘백일안전전향’ 이라는 목표를 설정해 놓고, 납치 감금된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해 온갖 고문박해를 가하며 믿음과 신념을 포기시키는 범죄활동을 전개했다. 노동교양소 1대대 대대장 라이중후이(頼仲輝)는 직속 부하 왕쥔핑(王軍平), 부대대장 왕잉저우(王英洲) 등에 지시하여, 수감돼 있는 죄수들에게 파룬궁수련생을 전향시키면 형기를 줄여주겠다는 조건을 붙이도록 해서, 이들 죄수들에 의해 수련생들이 더욱 혹독한 괴롭힘을 당했다.

2002년 4월 25일, 혹독한 박해를 당하던 다수의 대법수련생들이 중공사당이 파룬궁을 모함하는 유언비어를 날조하며 수련생에 대해 불법적인 고문 박해를 가하는데 대해 단식으로 항의했다. 그러자 4월 26일 관리과장 한칭산(韓慶山), 1대대장 라이중후이, 왕잉저우, 악경 츠(遟)모 등이 합세하여 단식 중이던 수련생 런량(任亮), 바이솽, 좡강샹(莊剛祥) 등을 각각 끈으로 묶어놓고, 같은 수련생 차오징둥(曹景棟), 웨이번성(魏本生), 리둥닝(李東寧) 등에 대해서는 만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무차별 폭력을 가하고는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시켰다. 이에 좡강샹은 악인들의 박해를 단호하게 거부하다가 독방에 감금되어 소위 ‘호랑이의자’ 라는 고문 틀에 꼬박 7일 동안 묶여 있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이른바 ‘백일전향활동’이 본격적으로 감행됐으며, 파룬궁수련생의 전향을 위한 전권을 부여받은 죄수들의 포악행위는 날로 증가해 갔다. 당시 노동교양소 안에서 전해진 말에 의하면, “다만 때려죽이지만 않는다면 누구든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룬궁수련생 한 명을 전향시키는 자에게 3~6개월의 형기를 단축시켜 준다.” 고 지시가 내려졌다고 했다.

그 결과 파룬궁수련생 두궈총(杜國聪), 런량(任亮), 바이솽, 웨이번성(魏本生), 리둥닝(李東寧), 거전밍(葛振名), 싱촨전(刑全振), 후훙지(扈紅記), 장성후이(張勝輝), 황타이런(黄太仁) 등은 늘 죄수들에 의해 화장실로 끌려가 혹독한 구타를 당했는데, 구타당할 때마다 내장의 급소부위를 가격 당했다. 이런 방법으로 구타를 하는 것은, “외상은 나타나지 않게 하되, 내장 등 내상을 입히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다.” 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구타를 당해 내장의 어느 부위가 상처를 입게 되어 아프다고 하면 그가 병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약을 먹도록 핍박했다. 그래서 후훙지(扈紅記), 쉬빈(徐斌), 리둥닝(李東寧), 좡강샹, 장(張)모 등이 모처로 끌려가 강제로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었다. 그런 후 즉시 토하거나 또는 시간이 경과한 후 토해 내자 또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매일 밤중이 되면,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고 했다.

酷刑演示:上绳
고문시연:끈으로 묶기

酷刑演示:铁椅子
고문시연 : 쇠의자 고문

酷刑演示:毒打
고문시연:혹독한 구타

혹독한 구타와 고문으로 파룬궁수련생에게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가하는데 참여한 죄수는 자오진파(趙金發), 페이칭웨이(費慶威), 디훙하이(翟紅海), 리춘룽(李春龍), 자오쥔민(趙軍民), 싱리둥(邢立東), 루성차오(陸勝超), 훠젠(霍鍵) 등이다.

2003년 6월의 어느 날 젠화파출소 악경(사악한 경찰)은 이미 노동교양소에서 석방돼 돌아와 있는 바이솽의 집을 찾아가 문을 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바이솽은 지혜롭게 그 위기를 벗어났다. 들이닥친 악경은 온 집안을 수색하며 컴퓨터를 찾는다고 말했다. 결국 그들은 대법책 몇 권을 탈취해 갔다. 그 때 바이솽의 아내가 대법책의 탈취를 저지하려 하자, 그들은 그녀까지도 납치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런 후 며칠간을 구역 내의 모든 파룬궁수련생 집과 직장에 전화를 걸어 컴퓨터에 관한 내용을 물으며 협박과 소란을 피웠다.

2010년 1월 15일, 바이솽은 다칭 둥후공안분국의 장리신(姜立新) 등 6, 7명의 악경에 의해 집에서 불법 납치됐고, 동시에 검퓨터 본체 1대, 프린터기(어떤 것은 폐기된 것임) 3대, CD, 다수의 진상자료 등도 탈취되어 다칭 제3구치소(두리툰(獨立屯))에 감금됐다. 둥후공안분국 사회구역 경무1대 대장 장리신, 사회구역 부국장 쉬전빈(許振斌), 둥후분국 국장 마신커(馬新科) 등이 모의 하여 바이솽을 무고로 법원에 기소, 유죄판결을 받게 한 후 무단장감옥에 감금시켰으며, 그런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가해 6월 중순경 뇌출혈 증상이 나타나자, 무단장제1병원에 후송해 응급처치를 했으나 소생하지 못 하고 2011년 6월 20일 사망했다.

牡丹江监狱
무단장감옥

2. 무단장에서 박해로 사망한 13명의 파룬궁수련생

이미 파악된 자료에 의하면, 무단장감옥에서 고문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생은 위쥔슈, 왕지궈, 리루칭, 판싱푸, 웨이샤오둥, 닝쥔, 두스량, 장훙촨, 쿵샹주, 우웨칭, 진유펑, 캉윈청, 바이솽이다. 그중 판싱푸, 닝쥔, 장훙촨, 쿵샹주, 우웨칭, 캉윈청, 김유봉 등은 무단장감옥에서 석방된 뒤 고문후유증을 앓다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왕지궈(남. 40)는 무단장 사범학원의 직원이다. 그는 3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고 감금돼 박해로 생명이 위급하자 병보석으로 풀려나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 겨우 고비를 넘기고 퇴원 하여 집에서 요양 중 이었는데, 당시 혈뇨를 하면서 거의 실명에 가까워 제대로 앞을 보지 못 하는 상태이었다. 그러나 노동교양소 측은 보석 3개월 만에 완치되지 않은 그를 다시 납치해가 감금시켰다. 그 후 왕지궈는 다시 법원에불법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게 하여 무단장감옥에 감금시켰으며 계속되는 박해로 생명이 위독해져 병원에 보내져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결국 2003년 9월에 세상을 떠났다.

리루칭(남.66)은 전 솽야산(雙鴨山) 광무국(礦務局) 기계전기공장(機電廠) 직원으로 역시 무단장감옥에 불법 감금됐다가 혹독한 고문 박해로 2003년 10월 9일 전후에 사망했다. 그는 불법으로 감옥에 감금당한 지 겨우 2개월의 기간도 지나지 않아서 사망하므로 얼마나 가혹한 고문박해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판싱푸는 솽야산시 파룬궁수련생으로 덕과 재능을 함께 갖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다. 1998년에 헤이룽장성 전신계통의 최고의 인재로 평가받았다. 그후 솽야산시 전신국 교환센터 부주임겸 유이현(友誼縣)전신국 부국장을 역임했다. 그는 믿음을 견지해 확고하게 대법을 수련하다가 여러 차례 불법 체포되었다. 2002년 초 불법 판결을 선고받은 후 2003년 5월 무단장감옥 16감구역으로 이송돼 고문학대를 당하면서 강제로 노역에 처해졌다. 2003년 말 두 다리에 부종이 생겨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몸은 극도로 허약해졌지만 감옥 측에서는 어떤 조치도 해 주지 않았다. 병세가 더욱 심하자 2004년 5월 감옥 병원으로 보냈는데, 폐결핵과 흉막에 물이 고이는 증세라는 진단을 받았다. 감구역 교도원 정위허(鄭玉和)는 그의 생명이 위독해진 기회를 틈타서 끊임없이 속임수를 쓰면서 보증서를 쓰도록 기만했다. 보증서를 써야 병보석될 수 있고 그러면 밖에서 치료를 받게 할 수 있다고 했다. 2004년 7월 그가 사경을 헤매게 되어서야 석방하여 가족에게 인계했다. 그러나 2005년 1월 31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겨우 31세였다.

웨이샤오둥(남,34)은 전 헤이룽장 81농지개간대학 공정학원의 강사다. 2002년 4월 26일, 지시(鷄西) 지관구(鷄冠區) 보위과 악경에게 불법 납치돼, 수갑에 채워져 공중에 매달려 손목이 조여져 선혈이 낭자한 상태에서 매질을 하는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했다. 그런 후 제1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이런 고문박해가 장기화 되자 그의 몸은 갈수록 피골이 상접하고 머리털은 거의 전부 빠져 버리는 등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 졌다. 그는 결국 2003년 12월 지시구치소에서 무단장감옥으로 이송됐다. 입감신체검사 때 몸 상태가 온전치 못하자 악경은 건강한 다른 죄수로 하여금 대신 신체검사를 받도록 하기도 했다. 무단장감옥에서는 1개월 동안에 파룬궁수련생의 강제전향서를 받도록 기간을 설정하고 박해를 시작하자, 부감옥장 롼징허(欒景和)는 각 감구역의 대대장과 교도원 등 교도관과 수감된 일반 죄수 들을 중에서 선발한 다수의 악인들을 지휘하며 수련생들에 대해 혹독한 구타, 과중한 노역, 잠 안 재우기, 등등 온갖 잔혹한 수단으로 광적인 박해를 가했다. 웨이샤오둥의 폐결핵 병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2005년 3월 20일 그는 이미 가망이 없을 정도로 병세가 위중했지만 악인들은 박해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파룬궁을 포기하도록 핍박했다. 동시에 속임수를 쓰기도 했다. “당신이 파룬궁을 연마하지 않겠다는 한 마디만 하면 즉시 석방하여 집으로 돌려 보내겠다.” 그러나 웨이샤오둥은 확고하게 생명 중의 맨 마지막 한 마디 말을 했다. “나는 파룬궁을 수련한다!” 3월 20일 오전, 그는 결국 박해로 사망했다. 그가 감옥에서 사망하자, 무단장검찰원에서는 사망 원인을 알기위해 검시 하겠다면서 가족들의 단호한 반대를 묵살하고 시신을 해부했다.

닝쥔(남. 50대)은 시안구(西安區) 시얼탸오로(西二條路)에 거주하며 방송통신대학을 수료한 참신한 사람이다. 그는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았으며, 그럴 때마다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했다. 2002년 9월 9일 지명수배를 받은 지 반년 뒤에 무단장시 훙치(紅旗)병원에서 진상을 알리다가 진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 한 한 환자의 악의적인 무고로, 무단장시 아이민(愛民)공안분국에 납치돼 고문 박해를 당하고 생명이 위급해졌다. 2003년 말 구치소에서 아이민공안분국에 2회에 걸쳐 그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보고를 했지만 아무런 조치를 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에게 5년의 불법판결을 받게 한 후 2004년 설 전에 무단장감옥으로 이송했다. 감옥에서 계속되는 박해를 받으며 병세가 더욱 위중해지자 2004년 9월 감옥 측은 가족에게 병세가 위중하다는 통지를 하여, 가족들이 돈을 차입(差入) 시켰으나, 11월이 돼서야 밖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조치로 병보석으로 가족에게 인계했다. 귀가 후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고문 박해로 망가져 병든 몸을 회복하지 못 하고 2005년 8월 12일 오후 세상을 떠났다.

두스량(남. 50대)은 헤이룽장성 하이린시(海林市) 파룬궁수련생이다. 그는 과거 심각한 심장병과 위암 증세로 오랜 기간 치료를 받으며 병고에 시달렸으나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으로 그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치료의 효과도 없는 위험한 시기에 운 좋게 파룬따파(法輪大法)수련을 시작하게 되어 단 몇 달 사이에 난치병이 완쾌되어 오랜 세월 사용했던 약탕관을 던져버렸다. 2002년 1월 말, 하이린시 국가보안대대의 대대장 쑹위민(宋玉敏)과 악경 장윈타오(姜雲濤), 진하이주(金海珠)는 불법으로 두스량의 가택을 침입하여 수색, 진상자료제조기기를 찾아내고 두스량 부부를 납치해 끌고 갔다. 2007년 7월 두스량은 법정에서 진상을 이야기하고, 동시에 대법을 굳게 믿으며, 수련함을 당당히 밝혀 6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고 무단장감옥으로 이송됐다. 2002년부터 2003년 사이, 무단장감옥 3감구역의 교도관은 그의 강제전향을 위해 낮에는 과도한 노역을 시키고, 밤에는 잠을 재우지 않으며 죄수 선푸정(沈福政)을 교사하여 혹독한 구타의 박해를 가하며 괴롭혔는데 그 수단이 비열했다. 두스량은 죽는 날 까지 과부하의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2006년 1월 13일 그의 아내가 두스량의 면회를 왔을 때만해도 몸 상태는 그런대로 정상이었다. 그러나 2006년 1월 20일 갑자기 두스량이 사망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가족이 시신을 인수하기위해 감옥에 도착하자, 무단장의 ‘610’을 우두머리로 한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공검법(공안, 검찰원, 법원)과 감옥측은 전례 없는 긴장감을 나타냈다. 20, 30개 부서의 각종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가족을 에워싸며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는데, 가족들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점차 공간을 터주었다.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겠다며 시신을 요구하자, 감옥 옥정과장 리샹둥(李向東)이 감옥을 대표하여 답변하기를, “두스량은 수감 중에 사망하였으니 여전히 수감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죽었다 해서 시신을 가족에게 내줄 수는 없다.”고 했다. 그 후 하이린시 공안국 국보과의 장윈타오와 나융성(那永生) 등이 참관 하에 강제로 화장시켰으며, 현장에 도착한 가족에게 강제로 서명하도록 했다.

장훙촨은 전 다칭 석유관리국 처징(測井)회사 계산소(計算站)의 엔지니어다. 2004년 7월에 하얼빈감옥에서 무단장감옥 16감구역으로 이송돼 교도관 정위허(鄭玉和)에 의해 17일 동안 독방에 감금됐다. 독방에 갇혀 단식으로 항의를 하자 단식 11일 째 되던 날 감옥 병원에 보내져 소금을 섞은 음식물을 호스로 강제주입 당하고 나서 끊임없이 구토했다. 그 후 또 3감구역에 이감돼 박해를 당하다가, 가족이 집으로 데려온 후 2007년 2월 24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쿵샹주(39세)는 솽야산시(雙鴨山市) 젠산구(尖山區) 주민이다.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에 그는 여러 질병에 걸려 혈뇨를 보는 등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온종일 누워만 있었다. 여러 방면으로 병치료를 해 봤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는 28세에 파룬궁수련을 시작한 후 몸이 건장해졌고 부모님께도 효성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2002년 5월 1일 저녁, 솽야시 형사경찰대의 악경은 쿵샹주가 유선텔레비전 네트웍에서 파룬궁이 박해당한 진상을 방송프로그램 사이에 삽입 방송했다는 이유로 쿵샹주를 공사장으로 유인 납치했다. 이튿날 쿵씨 가족들은 쿵샹주가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족이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수술실에 있었다. 온몸은 구타로 시퍼렇게 멍들고, 등은 전기봉 충격으로 검게 탔으며, 목 부위는 구타로 뼈와 살이 갈라졌다. 쿵샹주는 무단장감옥에 감금된 뒤에도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신념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자, 610 리옌(李琰)에 의해 농구장 시멘트 바닥에 쓰러트려 뜨거운 여름 볕을 쪼이게 했고, 비닐주머니에 겨자가루를 뿌린 다음 그의 머리에 씌웠다. 숨이 막혀 얼굴이 자색을 띠었고 온몸이 고통으로 비틀리는 참혹한 정경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게 했다. 이런 저런 박해가 계속되어 피골이 상접해져 60kg이던 그의 체중이 35kg밖에 되지 않았다. 인사불성이 될 때 까지 발에 족쇄를 채우기도 했다. 2006년 6월, 쿵샹주는 무단장감옥 10감구역의 박해로 폐결핵성 뇌막염에 걸려 한 때는 정신이 혼미해져 상황이 매우 위독해진 적이 있다. 가족이 여러 차례 감옥 측에 석방을 요구했으나 몇 달이 지나도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가족이 10개월 동안 백방으로 노력을 해서야 무단장감옥은 5천 위안을 갈취한 후 가족에게 인계해 주었다. 집으로 업혀왔으나 이미 그는 인사불성으로 몸은 뼈만 앙상했다. 그는 2개월 넘는 고통의 시달림을 겪은 뒤, 결국 2007년 6월 23일 저녁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우웨칭(30대)은 솽야산시 파룬궁수련생이다. 파룬따파를 수련해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했다가, 오히려 여러 차례 납치, 감금, 불법 판결, 고문학대를 당했다. 2002년 1월, 12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아 무단장감옥에 감금 되었다. 2004년 고문박해로 심각한 폐결핵과 심장병 증상이 나타나고 피골이 상접해졌다. 생명의 위험이 나타나자 감옥 측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도록 허락했다. 병원에서 무슨 약을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병세는 점점 심각해졌다. 2006년 10월 폐장에 이미 큰 주먹만큼 크기로 화농이 됐고, 체중은 겨우 35kg밖에 되지 않았으며,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그래도 무단장감옥은 여전히 사람을 풀어주지 않으면서 온갖 방법으로 난처하게 만들었다. 결국 가망이 없어서야 가족에게 집으로 데려가라고 통지를 했다. 우웨칭은 12월 23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을 때 겨우 13세 어린애인 우인치(吳音奇)가 있었는데, 그 애는 자무쓰(佳木斯)고아원에 맡겨져 기르고 있다.

김유봉(40여세)은 전 무단장 사범학원 체육학과 교수로 조선족이다. 그는 파룬궁진상을 알리려고 청원하러 갔다가 직장에서 억울한 해고를 당했다. 2003년 10월 25일, 무단장에서는 대량으로 파룬궁수련생을 불법 체포하여 중형판결을 내렸다. 당시 김유봉은 무단장 형사경찰2대에서 ‘호랑이의자’ 고문틀 등으로 고문학대를 당했다. 그는 13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아 무단장감옥에 감금돼 박해를 당했다. 그곳에서 독방에 갇히기, 혹독한 구타, 야만적인 음식물주입 등 고문을 당했는데 그로인해 폐결핵 말기증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감옥에서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믿음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병든 그에게 아무런 조치도 해주지 않다가, 10개월이 지난 2008년에 병보석으로 나왔다. 2009년 1월 21일 오후 9시 김유봉은 응급처치를 받고도 회생치 못하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캉윈청은 전 무단장시 부동산 총회사의 사장이었으며, 파룬궁 의무보도소 소장이었다. 1999년 파룬궁이 박해를 당한 이후 수차례 악경에게 납치와 감금을 당했다. 2004년에 캉윈청과 우웨룽(吳躍榮), 장타오(張濤), 류쥔(劉軍), 왕신쥔(王新軍), 진유펑(金宥鋒), 쑨덩차오(孫登超), 뤼전장(吕振江), 허우룬중(侯閏忠), 야오궈차이(姚國才), 가오윈샹(龎士興, 하이린), 팡스싱(龎士興, 치타이허(七臺河), 장더원(張德文), 류즈위안(劉智淵) 등 10여 명 파룬궁수련생들은 무단장감옥 집중훈련대로 감금돼 인성을 완전히 상실한 괴로움을 당했다. 2006년 1월 18일, 캉윈청은 독방에 갇혀 박해를 당했다. 이전에 이미 수차례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심각한 고혈압 증상이 나타나서 감옥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 당시 가족은 병보석을 요구했지만 감옥측은 거부했다. 2007년 1월 13일 병세가 위독해지자 감옥에서 현지 병원으로 옮겨서 두 차례나 수술을 받았으나 혼미상태에 빠졌다. 두 번째 수술을 할 때 집도의사는 온전하게 수술대에서 내려올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 후 가족들이 감옥 측에 석방을 요구했으나 허락 하지 않다가 늦은 4월에 병보석을 해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2010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위쥔슈(남)는 저장(浙江)사람으로, 원래 무기징역형을 받고 신자오(新肇)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사람이다. 1997년에 교도관의 소개로 파룬궁수련을 시작했다. 2000년에 감옥이 합병되어 위쥔슈는 무단장감옥으로 이송됐다. 어느 해 겨울, 그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라고 쓴 종이쪽지를 복도 벽에 붙이었다. 그는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믿음을 견지했다는 그런 이유로 2004년 4월부터 6월까지 14감구역(지금 9감구역) 독방에 갇혀 지환(地環)이 채워진 채 잔악무도한 박해를 당했다. 독방의 감시자인 교도관 린리밍(林黎明)과 류핑(劉平)은 그를 다시 수갑과 족쇄를 채우고, 또 쇠사슬로 그의 등 쪽에서 수갑과 족쇄를 함께 지환 위에 채워놓았다. 그리고는 늘 흰색 플라스틱 봉으로 그를 때렸다. 융악한 교도관 쉬수쥔(許樹軍)은 전기 봉으로 전기충격을 가하는데, 한 번 시작하면 거의 한 시간씩 충격을 가했다. 이렇게 고문이 계속돼 생명이 위독해 지자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런 다음 다시 독방에 반 년 동안 감금 됐다가 일반 감방으로 돌아온 후 며칠이 지나서 세상을 떠났다. 감옥 측에서는 위쥔슈가 독방에서 병에 걸렸는데도 파룬궁만 믿고 병치료를 거부하여 사망했다고 모함했다.

◇ 무단장감옥 전화:

무단장감옥453-829-9101、453-829-9102、453-829-9106

감옥장 판전위(範振宇):0453-6404715에서 8888로 전환하세요.

부감옥장 왕젠(王健): 13904833666

감옥장 조리 두잉춘(杜應春: 13836352345

교개과(教改科):453-829-9105、453-829-9104

◇ 감옥 ‘610’ 장궈민(張國民):사무실 453-829-9103

◇옥정과:453-829-9106、453-829-9107

문장발표: 2011년 07월 11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7/11/2437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