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희 집에는 7남매가 있습니다. 어머니와 저(셋째)는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아래에는 파룬따파의 가르침에 따라 ‘진선인(眞善忍-진실·선량·인내)’을 실천하며 바르게 살아가고자 노력해 온 저희 7남매의 이야기를 적어 리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전하고자 합니다.
저희 7남매는 모두 지난 세기 1950~60년대에 태어나, 중국공산당(중공)의 각종 터무니없는 정치 운동을 모두 겪으며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특히 나라와 민중을 파괴한 이른바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당시 겨우 37살이던 아버지가 중공의 날조된 죄목에 몰려 끝내 강요된 죽음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 이후 저희 가족은 농촌으로 강제 이주돼 노동개조를 당했고, 각종 박탈과 차별 속에서 절망적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형제자매 모두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은 전통문화를 철저히 파괴했고, 도덕은 무너졌으며 음란·도박·마약과 폭력이 만연했습니다. 속임수와 부패가 일상이 됐고, 선한 사람은 억눌리고 악한 사람이 득세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던 그때, 파룬따파가 세상에 전해졌고, 그것은 저희 인생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1. 어머니는 67세에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하셨습니다. 글을 전혀 몰라 처음에는 책을 거꾸로 들고도 알지 못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약 반년이 지나자 어머니는 스스로 《전법륜(轉法輪)》을 읽을 수 있게 되셨습니다.
하지만 1999년 ‘7·20’ 중공의 파룬궁 탄압 이후, 어머니는 박해가 두려워 수련을 중단하셨습니다. 그만큼 중공 악당이 저희 가정에 안겨준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85세 되던 해, 다시 파룬따파 수련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수련을 재개한 지 1주일 만에, 거의 90도에 가깝게 굽어 있던 허리가 펴졌고 지팡이를 버리시게 됐습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혈당이 정상으로 돌아와 15년간 사용하던 인슐린을 끊었고, 두 달이 조금 지나서는 얼굴과 팔 가득했던 노인성 반점이 사라져 피부가 깨끗해지셨습니다.
저는 대학 교수로 파룬따파를 29년째 수련하고 있습니다. 저의 마음가짐과 건강 상태는 더없이 좋습니다. 형제자매들은 어머니와 저의 심신 변화를 통해 파룬따파의 신기함과 아름다움을 직접 보게 됐습니다. 또한 두 사람을 통해 일부 대법서적을 읽고 진상 자료를 접하면서, 저희 가족 역시 진선인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저희 가족은 모두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했습니다.
2. 저희 집 맏이는 큰오빠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계를 책임지기 위해 농사일을 해야 했고, 28세가 돼서야 지적 능력이 다소 부족한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두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들 역시 지적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1978년, 아버지가 이른바 ‘복권’되면서 큰오빠는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 공급판매사 판매원으로 일하게 됐고, 이후에는 산림감시원 일을 하기 어려운 한 아가씨를 돕기 위해 직무를 맞바꾸는 선택도 했습니다. 개혁 과정에서 공급판매사가 해체되며 많은 이가 실직했지만, 큰오빠는 임업국에서 정년까지 근무했고 결국 좋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큰오빠는 모든 동생의 생계를 책임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보답받고 싶은 마음이 컸고, ‘동생들 때문에 자신이 희생됐다’고 여긴 적도 있었습니다. 만약 동생들 부담이 없었다면 더 공부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더 나은 가정을 꾸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억울함과 아쉬움을 늘 안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은퇴 후에 저의 권유로 리 선생님께서 설법하신 녹음을 들으며 많은 법리를 이해하게 됐고, 점차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불평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명절이나 생일에 저희가 1~2천 위안을 주어도 큰오빠는 이제 100~200위안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줍니다. 예전처럼 “당연히 받아야 한다”거나, 아무리 받아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게 된 것입니다.
수련 중인 제가 자신에게 배분된 큰 유산을 큰오빠에게 내주려 했을 때도 큰오빠는 받지 않았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받았을 뿐 아니라, 왜 더 주지 않느냐고 서운해했을 사람입니다. 지금의 큰오빠는 매사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냅니다. 비록 수련하지는 않지만 어릴 적 앓았던 뇌수막염의 후유증이 모두 사라졌고, 75세의 나이에 살이 오르고 혈색도 좋아졌습니다.
올케언니는 말했습니다. “남편이 ‘파룬궁은 좋다’고 한 번 마음속으로 외우면 머리가 해처럼 환해져. 정말 신기해. 나도 외워.” 올케언니는 70세이지만 몸이 단단하고 흰머리 하나 없이 건강합니다. 큰오빠는 오래전부터 올케언니를 탓하지 않게 됐고, 밥을 짓고 집을 정리하고 빨래하며 산책을 함께 다니는 등 세심하게 돌보고 있습니다. 큰오빠의 심성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높아졌습니다.
3. 저희 집 둘째는 큰언니로 자립심이 강하고 총명한 인물입니다. 1970년대 말, 큰언니는 사립 초등학교 교사에서 정식 교사로 전환됐고, 독학으로 영어를 익혀 한 고등학교로 발령받아 외국어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이후 학업에서도 뛰어난 성적으로 모 대학에 입학해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큰언니는 단정한 글씨와 뛰어난 수업 실력을 인정받아 교육국의 발탁으로 중점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으며, 퇴직 후에는 노인대학에서 전통문화와 고전 시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2년 만에 수준 높은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됐습니다.
큰언니는 파룬따파를 수련하지는 않지만 진선인의 가치를 깊이 존중합니다. 그녀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해요. 누가 뭐라고 한다고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진선인에 대해, 누가 그중 하나라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나요? 진선인이 없다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요? 가정이 평안할 수 있을까요? 사회가 안전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큰언니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사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선량함’이에요. 학생을 먼저 생각하고 학생에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한 번의 진심 어린 도움은 학생의 평생을 바꿀 수도 있어요.”
그녀는 수년간 자신의 월급을 담보로 학비를 낼 수 없는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고 정상적으로 졸업해 대학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여러 차례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학교 관계자들에게 연락해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 감면이나 면제를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과 교통비가 부족한 여러 학생이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녀는 항상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형부 역시 매우 선한 사람입니다. 그는 늘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선량함”이라고 말합니다. 형부가 가르치던 반에 성적이 매우 뛰어난 남학생이 있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자 형부는 자전거를 타고 수십 리를 달려 그 집을 찾아가 부모를 설득했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몇 해만 고생해 주세요. 아이를 키워내면 집안이 달라집니다. 아이를 평생 농사만 짓게 해서는 절대 형편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 학생은 결국 명문대에 합격했고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학업을 마쳤으며, 지금은 가족 모두가 안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희 집 넷째는 의사입니다. 그녀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형제자매들을 돌보는 마음은 마치 어머니와도 같아, 누군가 어려움이 있으면 돈으로 도울 수 있으면 돕고, 힘으로 도울 수 있으면 기꺼이 나섭니다. 저와 자매들이 외출할 때도 식사는 거의 늘 그녀가 챙깁니다. 직장 동료나 친구는 물론, 길에서 만난 사람이라도 도울 수 있으면 서슴없이 돕는 사람입니다.
4. 저희 집 다섯째는 공안 계통에서 치안·정치보위를 담당하던 경찰관으로, 곧고 책임감이 강합니다. 그는 《전법륜》을 일부 읽고 파룬따파와 진선인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고 수련 중인 저를 보호하려다 시(市) 공안국에서 전출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국에서 회의를 열어 “철저히 감시해 파룬궁수련자의 베이징 상경을 막고 사고가 나면 면직된다”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자 다섯째가 즉시 말을 끊고 말했습니다. “제 관할에 수련자가 74명입니다. 제가 지켜볼 수 있는 건 3~5명뿐이고 나머지는 지킬 수 없습니다. 면직하려면 지금 하십시오.” 그 한마디로 회의가 흐트러졌습니다.
2000년 가을, 다섯째는 운전기사와 함께 베이징 천안문(天安門)에 가서 호법(護法)하다가 납치된 농민 형제 두 명을 데리러 갔습니다. 그는 직접 풀어주지는 못했지만 이동 중 수갑을 채우지 않았고 세 차례나 도망칠 기회를 줬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섯째가 책임질 수 없을까 봐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다섯째는 몹시 안타까우면서도 감동을 받아, 결국 그들을 국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은 파룬궁에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그의 순찰차에는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천멸중공(天滅中共, 하늘이 중공을 멸한다)’ 문구가 붙어 있곤 했는데, 그는 떼지 않거나 떼더라도 다른 순찰차에 다시 붙였습니다.
7남매는 위챗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데, 다섯째가 저를 만나면 첫마디가 늘 “파룬따파는 좋아, 리 선생님은 안녕하시지?”였습니다. 해마다 남매가 모이는 자리에서 그가 건배를 맡으면, 축사는 언제나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리 선생님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다섯째는 그의 아내와 함께 한 병원 외과 입원실에 있다가 한 남자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 계속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전날 오후 교통사고로 입원한 환자인데 수술비가 2천 위안 모자라 병원에서 수술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섯째가 작은 올케에게 “2천 위안 있어? 저 사람 고통을 더 겪게 하지 말자”라고 했을 때 작은 올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곤 “덕을 쌓자”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작은 올케는 일면식도 없는 그 환자에게 2천 위안을 건넸습니다.
또 한번은, 다섯째가 아는 취객 두 명이 벽돌을 휘두르며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러 나섰습니다. 두 사람은 그를 알아보고 모 대대장님이라 부르며 인사를 하더니, 그중 한 명이 갑자기 벽돌로 그의 얼굴을 내리쳤습니다. 그 충격으로 다섯째는 콧대가 골절되고 한쪽 부비동이 파열됐으며, 앞니 네 개가 빠졌고 뒤로 넘어져 머리 뒤가 크게 부었습니다. 이는 음주 상태라도 형사 책임과 민사 배상이 면제되지 않는 중상해의 공무집행 방해였습니다. 가해자는 겁에 질려 2년 동안 집에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다섯째는 그 가족에게 “돌아오게 하세요. 이 일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라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다섯째는 아울러 “그 사람은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지만,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먹고 입을 것도 부족해요. 형을 선고하고 배상을 요구하면 그 집은 아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곤 덧붙였습니다. “이게 대법에서 말하는 ‘선(善)’과 ‘인(忍)’이겠지요. 저도 그 가르침대로 하는 겁니다.”
5. 저희 집 여섯째도 의사입니다. 《전법륜》을 읽은 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수련하지는 않지만, 늘 진선인을 기준으로 나 자신을 요구해 왔어.”
의사는 양심으로 일하는 직업으로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녀는 불필요한 처방이나 과도한 검사를 하지 않고, 남들보다 수입이 조금 적더라도 마음이 편한 길을 택합니다. 환자를 진심으로 아끼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과 직접 관계없는 환자라 해도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오전 진료가 막 시작됐을 때, 한 노인이 자신의 등에 업다시피 끌다시피 한 남성을 진료실로 데려왔습니다. 온몸과 얼굴이 피투성이였고 의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맞은편 의사는 급히 환자를 넘겨받아 각종 검사를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여섯째는 보호자의 “얘기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저혈당일 가능성을 판단했습니다. 담당 의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즉시 혈당을 측정했는데 이미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즉각 증상에 맞는 처치를 하자 환자는 서서히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만약 정해진 절차대로 검사부터 했다면 검사가 끝나기도 전에 환자는 사망했을 것입니다. 여섯째는 한 생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중대한 의료사고도 막아냈습니다. 환자는 평소처럼 아침에 인슐린을 맞고 산책 후 식사하려다,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다가 시간을 놓쳐 사고가 난 것이었습니다.
또 하루는 퇴근 무렵, 진료실 문 옆 벽에 기대 쪼그리고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을 보았습니다. 몹시 괴로워 보였고 얼굴과 입술은 창백했습니다. 하루 종일 진료를 봤지만 호전되지 않았고, 집은 수십 리 떨어진 농촌이라 남편이 차를 구하러 갔다고 했습니다. 여섯째는 그녀를 진료실 침대에 눕히려 했지만 어지러워서 일어설 힘조차 없었습니다. 여섯째는 즉시 산부인과 내출혈이라고 판단하고 휠체어에 태워 급히 산부인과로 옮겼습니다. 그때 돌아온 남편이 “내 아내를 어디로 데려가느냐!”며 소리쳤지만, 여섯째는 “당장 산부인과로 가야 합니다. 생명이 위험합니다”라고 말하며 이미 산부인과에 연락을 취해 두었습니다. 알고 보니 자궁외임신으로 인한 대출혈이었고, 여섯째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했을 상황이었습니다.
또 한번은 내시경실을 지나던 중 50대 남성이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채 심정지가 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위내시경 도중 심장마비가 발생한 상황이었습니다. 여섯째는 심폐소생술을 하는 방식과 압박 강도가 잘못된 것을 보고 즉시 무릎을 꿇고 직접 가슴 압박을 시작했습니다. 한여름이라 머리카락과 옷이 물에 젖은 듯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임상적으로 15분 이상 심폐소생술에 반응이 없으면 사망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여섯째는 포기하지 않고 1시간 40분 동안 계속했습니다. 결국 그 남성은 살아났습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여섯째 혼자 압박을 했고, 당시 여러 사람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반년쯤 지나 여섯째가 신발 가게에 들렀을 때, 가게 주인은 돈을 받지 않고 신발을 그냥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여섯째가 필사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고 꼭 알고 지내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족 중 누가 아프면 반드시 여섯째에게 진료를 받게 하겠다고 했지만, 여섯째는 끝내 어떤 선물도 받지 않았습니다.
여섯째는 말합니다. “진선인 가운데서도 ‘인(忍)’이 제게 가장 큰 도움이 됐어. 환자도, 보호자도 정말 별의별 사람이 다 있잖아. 욕부터 하는 사람, 손부터 드는 사람,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 참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어. 예전에는 겉으로 다투지는 않아도 속이 너무 상했는데, ‘인’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 점점 마음이 풀렸어. 인과응보의 이치로 보면 내가 빚진 게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 거야.”
여섯째 부부는 시부모를 끝까지 봉양했습니다. 시부모의 연금은 모두 그들의 막내아들이 사용했고, 집 두 채도 모두 그에게 주었습니다. 막내아들은 소아마비 후유증이 있었고 결혼해 아이를 낳은 뒤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제부는 불만을 표했습니다. “그래도 우리한테 한 채쯤은 남겨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자 여섯째는 말했습니다. “그걸 따져서 뭐 해요. 우리는 집이 없어도 잘 살잖아요. 설령 우리에게 준다 해도, 당신이 그 동생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마음 편한 게 제일이에요. 동생은 병으로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응석받이로 컸잖아요.”
여섯째는 명(命)에 있으면 있는 것이고, 명에 없으면 아무리 바라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며 담담하고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녀는 은퇴 후에도 다시 초빙돼 계속 의료 현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6. 저희 집 일곱째는 직장 내 한 부서의 책임자로 고위 전문직 직함을 갖고 있으며 월급이 1만 2천여 위안이 넘습니다. 강의 요청도 자주 받아 1년 강의료 수입도 적지 않습니다. 그녀는 대법서적을 일부 읽었고, 파룬따파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박해를 피해 떠돌던 시절, 저를 받아준 사람도 바로 일곱째였습니다.
그녀의 시부모가 간병비를 부담했고, 시골에 사는 큰아주버니 가족이 간병을 도왔습니다. 둘째 아주버니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일곱째는 시아버지를 직접 모셔왔습니다. 남편과 아들, 며느리는 모두 성도(省都)에서 근무하고 있어 일곱째는 80대가 넘은 시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직장에서 제공되는 하루 세 끼 식사를 포기하고, 시아버지의 입맛과 생활 습관에 맞춰 집에서 직접 음식을 해드립니다. 주말이면 차로 시아버지를 모시고 근교의 관광지로 나들이를 가곤 합니다.
둘째 아주버니는 아직 몇 년 후에야 은퇴를 앞두고 있습니다. 석탄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한 달 생활비가 1천 위안 남짓에 불과했습니다. 2024년, 둘째 아주버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전혀 자립이 불가능한 상태가 됐습니다. 젊었을 때 방탕하게 살며 3~4차례 이혼했고, 자녀는 한 명도 키우지 않았습니다. 늙고 병들자 찾아오는 자식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었으며, 함께 살던 여성도 떠나버렸습니다.
일곱째 부부는 외지에 있던 둘째 아주버니를 데려와, 치료와 요양이 모두 가능한 요양원에 안치해 의료와 생활이 보장되도록 했습니다. 요양원의 난방이 좋지 않자 새 이불을 마련해 주었고, 시설 문제 해결을 위해 비용도 부담했습니다. 몸을 뒤집거나 앉을 수 없어 1천여 위안을 들여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침대도 구입해 주었습니다. 매주 찾아가 과일과 간식, 약을 챙겨주고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주며 각종 비용을 납부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제수씨’라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놀랐습니다.
일곱째는 또 여러 해 동안 농촌의 한 빈곤 가정을 지속적으로 돕고 있으며 매년 적지 않은 비용을 부담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딱하잖아요. 1년에 조금씩 보태줘도 생활에 큰 지장은 없어요.”
그녀의 선량함은 작은 데서도 드러납니다. 집을 정리하다 바늘 하나를 주워도 쓰레기봉투에 함부로 버리지 않습니다. 폐지를 줍는 사람이 손을 다칠까 봐서입니다.
지난해, 7남매가 함께 여행을 갔을 때 무더운 날씨에 사장이 수박을 내놓아 손님들을 대접했습니다. 넷째가 큰오빠에게 한 조각 더 주려 하자 일곱째는 말렸습니다. 나중에 돌아오는 손님이 못 먹을까 걱정됐기 때문입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그녀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줍니다. 그녀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선인은 개인에게도 너무나 소중하지만, 국가와 민족에게도 마찬가지야.”
이상은 저희 집 7남매가 파룬따파의 가르침 아래 진선인을 기준으로 살아온 소소한 이야기들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어 산다는 느낌은 참으로 좋습니다.
저희 가족은 진심으로 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12월 2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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