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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을 함께 수련하던 자매, 불법적인 노동교양 당하던 중 여동생이 박해로 세상을 떠나다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충칭 보도) 충칭 파룬궁수련생 쩡퉁윈과 여동생 쩡칭윈은 함께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여 심신으로 많은 수혜를 입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자매는 참혹한 불법 노동교양을 당했다. 여동생 쩡칭윈은 불법 노교 후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압력으로 2015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파룬따파로 두 자매는 새로운 삶을 맞다

쩡퉁윈 여사는 올해 78세다. 1973년, 그는 출산 후유증으로 많은 출혈을 하고 결국 쇼크까지 왔었다. 비록 구급치료를 받고 생명은 유지했지만, 산후 다한증과 산후풍에 걸려 무더운 삼복더위에도 선풍기를 틀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재생 불량성 빈혈, 혈소판 감소증, 백혈구 빈약, 심장박동 불규칙(높을 때 202, 낮을 때 43), 극심한 편두통, 신장염, 신우신염, 위장염, 약물성 간염 등 많은 병증이 나타났고, 곳곳으로 다니면서 많은 치료를 해 봤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1994년, 쩡퉁윈은 다행히 파룬따파를 만나게 되었다. 연공을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병증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때 그는 질병이 없는 가벼운 몸이 어떤 것인지를 처음 느끼게 되었으며, 파룬따파의 신기하고 초상적인 것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바로 파룬따파 사부님께서 그녀를 구한 것이다. 쩡퉁윈은 진선인(真·善·忍)의 원칙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어, 모든 사람과 일에 대해 선으로 행했다. 그의 사상은 부단히 승화되었고 생명은 날이 갈수록 순수해지고 아름다워졌다.

쩡칭윈 여사는 1953년생이며 옛 충칭 창안 공장 퇴직노동자다. 그녀는 1996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하여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파룬따파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혹한 박해를 받았으며, 결국, 2015년 박해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62세였다.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쩡퉁윈은 중공의 박해를 받다

2001년 10월 15일, 쩡퉁윈은 사람들에게 파룬따파의 우수함을 알리기 위해 빠난 지역 시골 마을에 배너를 걸고, 전단을 나눠주어 대법의 박해 진상을 알리는 진상 활동을 하던 중, 진실에 눈이 어두운 마을 촌장의 모함으로 고발당했다(이 촌장은 결국 악보로 2003년에 죽었다.)

2001년 10월 18일, 빠난구 안난 파출소 경찰들은 갑자기 쩡퉁윈 집으로 들이닥쳐 불법 가택수색을 단행했는데 그때, 사부님의 법상과 설법 비디오와 CD, 대법서적, 녹음기 등 개인 물품들을 몰수해 갔다. 그리고 쩡퉁윈은 납치되어 안난 파출소로 끌려갔다. 이틀 후, 쩡퉁윈은 다시 빠난구 구치소로 납치되어 30일 동안 불법 구류 당했다.

2001년 11월 17일, 쩡퉁윈은 불법 노교형을 받고 충칭시 모우쟈산 여자노교소로 이송되었다.

노교소에서 쩡퉁윈은 노예공이 되어 매일 같이 버들의자 짜기, 고추 자르기, 휴대폰케이스 가공, 사탕 포장 등의 일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교도관들은 경문이 숨겨져 있으니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로 몸수색을 하곤 했는데 몇 번이나 쩡퉁윈과 그 외 대법제자들을 대중 앞에서 옷을 벗기고 무릎 꿇게 하면서 괴롭혔다. 그리고 매주 강제로 쩡퉁윈으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상보고서’를 쓰게 하였다.

2007년 11월, 쩡퉁윈의 남편은 심장 우회 수술이 필요했는데 어려운 수술이라 충칭의 유명한 병원들도 할 수 없어서 북경으로 치료받으러 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인 쩡퉁윈이 당연히 함께 가야 하는데 경찰은 인정사정없이 그의 동행을 불허하였다.

2010년 11월 15일, 쩡퉁윈이 지우룽퍼구 법원 맞은편 빠궈성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몇 명의 사복경찰이 달려들어 그녀를 강제로 자동차에 태워 지우룽퍼구 시펑 파출소로 불법 납치했다.

3일 후, 경찰은 쩡퉁윈을 집으로 압송하고 불법 가택수색을 단행했다. 그들은 사부님의 법상, 녹음테이프 및 현금 900위안(약 16만 4천 원)을 몰수하고 다시 그를 지우룽퍼구 화앤 구치소로 압송하여 1개월간 불법 감금했다.

1개월 후, 쩡퉁윈은 또다시 불법노교 일 년을 당했는데 입소 전 건강검진에 불합격하여 결국 경찰은 그를 집으로 되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가택 연금 격인 감시도 빈번하였다. 2002년 쩡퉁윈이 노교소에서 풀려 나오자 일 년 동안 감시하고, 2010년 쫜윈 센터에서 돌아와서도 3년을 감시당했다. 그 외에 세타이즈 파출소 측은 강제로 쩡퉁윈에게 매달 ‘사상보고서’를 제출하게 했다.

2010년 12월, 쩡퉁윈이 외손자를 돌보느라 딸이 사는 집에 있을 때, 3명의 세친(경찰 용병)이 와서 강제로 그를 세뇌반에 끌고 가려 했으나 가족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결국 실패로 끝났다.

2011년, 보시라이, 왕리쥔 일당이 충칭에서 대거 파룬궁을 박해하면서 일명 “사람마다 관을 넘어야 하고, 백 분의 백 ‘전향’을 이룬다”라는 운동을 벌였다. 2017년 7월, 주거위원회는 그녀의 남편에게 쩡퉁윈을 딸 집에서 불러오게 하였는데 목적은 쩡퉁윈으로 하여금 ‘삼서’에 서명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그들은 몰래 촬영까지 하였다.

다년간의 박해와 괴롭힘에 그녀의 남편은 전화벨 소리, 노크 소리만 나도 불안에 떨었다. 중공의 박해는 실로 쩡퉁윈과 그의 가족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극심한 정신적 박해를 가했다.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동생 쩡칭윈이 박해로 죽다

2010년 11월 16일, 쩡칭윈이 빠궈성 버스터미널에서 나오자마자 지우룽퍼구 국가보안은 바로 그녀를 납치하고, 동시에 불법 가택수색을 하여 집에 있던 사부님의 법상, 설법 CD, 컴퓨터, 컬러 프린터, 교통카드 등 개인 물품들을 몰수하여 갔다. 그때 그녀는 불법으로 납치되어 30일 동안 지우룽구 구치소에 감금되었고, 일 년 동안 불법 노교도 당했다.

충칭시 싸보 여자노교소에서 쩡칭윈은 참혹한 박해를 받았다. 경찰은 매일 강제로 사부님과 대법을 능욕하는 TV를 보게 하고 그들을 세뇌교육했다. 낮에는 노예공이 되고, 밤에는 강제로 ‘사상보고서’를 쓰게 하였다. 그리고 강제로 사부님을 욕하고 대법을 욕하라고 강요했다. 조금만 협조하지 않아도 악인들을 시켜 폭력을 가했다. 그리고 경문이 숨겨져 있으니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로 몸수색을 하곤 했는데, 대중 앞에서 옷을 벗기고 무릎 꿇게 하는 박해를 가했다.

투옥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쩡칭윈은 하지 부종이 오고, 걸음에 장애가 왔다. 그런데도 매일 강제로 노예노동을 강요했다. 경찰은 일방적으로 고혈압 때문이라면서 강제로 투약을 시도했다. 경찰과 옥내 반장은 매번 강제로 그녀의 입을 벌려 약을 삼키게 하거나, 몰래 밥에 약을 섞어서 먹게 했다.

쩡칭윈이 석방되어 집에 돌아온 후, 반응이 둔하고, 심한 빈혈, 가슴 울렁증과 무기력했다. 온몸의 부종으로 사지를 구부릴 수 없고 걸음걸이가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거위원회는 늘 전화로 괴롭히고 감시했다. 그녀가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 궁금하여 그들은 돌본다는 핑계로 집에 찾아왔는데, 그의 심각한 상황을 보고 깜짝 놀라 바로 도망갔다. 한치의 양심도 없는 그들은 꾀를 부려 쩡칭윈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감시를 종용했고, 연좌 죄로 아들의 간부 진급 자격을 박탈함으로써 가족 간 증오를 유도하였다.

2015년 4월 12일, 쩡칭윈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엄청난 정신적 압박의 시달림으로 결국 세상을 떠났다.

 

원문발표: 2021년 9월 1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9/15/43080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