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창춘 대법제자 춘련(春蓮)
[명혜망] 제 나이는 올해 79세이며 조선족이고 중국어가 서툽니다. 사부님께서는 저처럼 예전에 집착에 빠졌던 사람도 놓치지 않으셔서 1993년에 인연이 닿아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부님을 따라 험난한 여정을 거치며 여러 차례 법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제 일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그해 제 나이는 60세가 채 되지 않았고 남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각해보니 나이가 들어 병이 들면 아들이 돌봐야 할 터였습니다.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몸을 단련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당시는 기공 열풍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기억이 선명한데, 93년 7월 22일 새벽 5시경 아동 공원에 갔습니다. 한 무리 사람들이 기공을 연습하는데 뛰고 달리며 울고불고 난리법석이었습니다. 보니 연마할 것이 못 됐습니다. 더 앞으로 가니 한 무리 사람들이 눈을 감고 조용히 서서 두 손을 머리 앞으로 들고 미동도 않았습니다. 그들 사이에 나무가 있었는데 가지에 깃발이 걸려 있었고 깃발 중앙에는 둥근 도형이 있었습니다. 이건 괜찮다 싶어 저도 눈을 감고 두 팔을 들어올렸습니다. 이때 눈앞에 깃발의 그 도형이 나타나 회전하기 시작했고 저도 모르게 따라 돌았습니다.
이때 누군가 제 오른쪽 어깨를 두드리며 “왜 돌고 있어요?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돌리려는 게 아니라 저 바퀴가 돌고 있어서 따라 돌게 됐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제야 알았는데, 이것이 파룬궁이고 그 도형은 파룬(法輪)이며 파룬이 회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파룬궁’ 책을 구입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고 공을 연마하면서 비로소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부님께서 창춘에서 이미 여섯 차례나 공을 전하고 설법하셨는데도 전혀 몰랐습니다. 아직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날 숭랴오 위원회 강당에서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 보도원들에게 설법을 하신다고 해서 저도 가보았습니다. 도착했을 때 문은 닫혀 있었고 사부님은 이미 설법을 시작하셨습니다. 문밖에 몇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고 의자를 밟고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도 앞으로 비집고 들어가 책상 위에 올라서서 다른 사람들 머리 위로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어느새 문 입구의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저만 남았습니다. 제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고, 문을 지키던 수련생이 “들어오세요”라고 했습니다. 들어가 보니 사부님의 설법은 이미 끝났고 사람들이 사부님을 둘러싸고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사부님을 뵈었는데 키가 크고 매우 건장하셨으며 늘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부님께 사인받는 책은 깔끔했지만, 제게는 손바닥보다도 작은 아주 작은 노트가 있었습니다.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생각날 때마다 메모하던 것이라 페이지도 흩어져 있었습니다. 저도 사부님께 드렸는데, 사부님은 아무 내색 없이 받아 ‘리훙쯔(李洪志)’ 세 글자를 써주셨습니다.
며칠 후 사부님께서 베이징에서 설법하신다는 소식에 저는 베이징으로 갔습니다. 법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였습니다. 베이징 총보도소의 한 분이 며칠 후 안후이(安徽)성에서 설법반이 열린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우리 11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은 푸젠(福建)성에서 온 80대 노인이었고, 가장 어린 사람은 11살이었습니다. 저는 나이순으로 세 번째여서 모두가 저를 ‘셋째 언니’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일행 11명은 기차를 타고 안후이성 허페이(合肥)시에 도착했습니다.
사부님의 설법반이 열리기까지 7일이 남아 우리는 그곳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때는 정말 고생스러웠는데,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전기주전자가 있어서 건면을 사 끓인 뒤 소금을 뿌려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법을 얻기 위함이었기에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기차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하필이면 그날 큰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산이 없었습니다. 어찌할까요? 비닐을 구해 몸에 두르고 끈을 찾아 허리에 묶었으며, 비닐봉지를 머리에 썼습니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볼품없었습니다. 플랫폼에 도착했으나 사부님이 어느 객차에서 내리실지 몰라 의논 끝에 한 사람이 한 객차를 맡아 사부님을 발견하면 소리치기로 약속했습니다.
기차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사부님께서 제가 기다리던 객차에서 내리셨습니다. 한 번 뵈었지만 정말 사부님인지 잠시 주저했습니다. 키가 크고 항상 미소 지으시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사부님이셨습니다. 제가 다가가 “리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사부님은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저는 창춘에서 온 수련생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 사부님께서 아신다고?’ 저는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창춘에서 온 할머니입니다.” 사부님께서는 또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중국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사부님이 잘못 들으셨을까 걱정되어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창춘에서 선생님의 설법을 들으러 왔습니다.” 사부님께서 다시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기뻐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잊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머리의 비닐봉지를 벗고 힘껏 외쳤습니다. “선생님이 오셨어요! 여기예요!” 모두가 달려왔고 사부님은 한 분 한 분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가장 연로하신 푸젠 수련생은 사부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베이징 보도소 사람들도 도착했고, 우리는 사부님을 강당이 있는 곳으로 모셨습니다. 당시 사부님께서 허페이시에서 설법하시며 공을 전하신 것은 1993년 11월 21일부터 12월 1일까지였습니다.
설법 중에 사존께서는 수련생들의 몸을 정화해주셨습니다. 한 남자 수련생이 단상에 오를 때는 몸이 90도로 구부러져 있었는데, 내려올 때는 똑바로 펴졌습니다. 단상에서 사부님이 그의 굽은 등을 펴주신 것입니다. 참석한 수련생들이 모두 목격했습니다. 박수를 치는 사람, 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하셨을까요? 사부님께서 단상에 계셨지만 우리는 자세히 볼 수 없었고, 정말 불가사의했습니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수련생들에게 두 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 후 파룬을 보내주시며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손에 파룬이 있는 것을 보았고, 어떤 이는 손바닥이 뜨거웠으며, 또 어떤 이는 손바닥이 차가웠습니다. 차가움은 신체에 병이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또한 한 수련생은 전수반에 참가하기 전 몸에 부체(附體, 사람 몸에 붙는 동물, 귀신 등의 영체)가 있어서 ‘탕탕탕’ 소리를 내며 단상으로 올라가 자신의 부체를 사부님께서 제거해주시길 청했습니다. 사부님은 손으로 그의 부체를 제거해주셨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또 수련생들에게 자신의 병을 생각한 후 한쪽 발을 구르라고 하셨는데, 그러자 병이 사라졌습니다. 사부님은 여러 방법으로 우리의 몸을 조절해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우리의 사부님은 정말로 무한한 자비를 베푸셨고 못 하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까지 기공을 접해본 적이 없어서 반응이 느렸고, 단지 사부님의 설법이 좋고 대법이 좋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1994년 4월, 설법반을 따라 랴오닝성 진저우(錦州)시로 갔습니다. 그곳은 바다에 인접한 도시라 시장 곳곳에서 살아있는 새우를 팔았습니다. 처음 보는 광경에 겁이 나서 만질 수 없었습니다. 상인이 맛있다며 요리법도 알려주었습니다. 듣고 나니 용기가 생겨 2.5kg을 구입했고, 가게 주인이 그 자리에서 삶아주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함께 한 사람들과 나눠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살생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생에서 좋은 사람으로 살았고 다른 이를 해치지 않았으니 살생으로 업을 짓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깨닫지 못하자 사부님께서는 꿈으로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꿈에서 하늘에 새우들이 빼곡히 줄을 서서 제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중앙에는 세 마리의 큰 수탉이 머리를 기울이고 목을 내밀며 분노한 눈으로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그제야 알아차렸습니다. 줄지어 선 것은 제가 사서 삶은 2.5kg의 새우였고, 그 큰 수탉들은 작은아들이 결혼할 때 제가 죽인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닭을 잡을 사람이 없어서 제가 수탉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것들이 제 길을 가로막고 통행을 막았습니다. 꿈에서 깨어나 저는 깨달았습니다. 살생으로 생긴 업력이 제 수련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며, 살생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습니다! 업이 커졌고 갚아야 했기에 온몸 여기저기가 아팠습니다.
이어서 4월 29일 창춘 제7회 파룬궁 전수반이 시작됐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저는 ‘타 지역 수련생 접대팀’에 들어가 창춘 기차역에서 팻말을 들고 교대로 당직을 섰습니다. 당시 봄바람이 불어 온몸이 먼지투성이고 얼굴도 먼지로 시커멓게 변해 사람들은 눈만 깜빡이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수련생들을 맞이하고 안내했습니다. 이때 사부님께서 오셔서 친절하게 “수고하십니다!”, “식사는 하셨나요?”,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날씨가 좋지 않으니 건강에 유의하세요!”라며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난로처럼 뜨거워졌고, 날씨가 추워도 바람이 차가워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제7회 반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수련생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신장(新疆)에서부터 헤이룽장(黑龍江)성 최북단까지, 해안지역에서 비행기로 온 이들도 있었고 짐을 짊어지고 온 이들도 있었습니다. 대법을 찾아 만 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팀은 기차역에서 맞이했고, 다른 팀은 전용차량으로 이송해 숙소에 배치했습니다. 지린(吉林)대학 명방궁(鳴放宮) 강당은 자리가 부족해 주야로 나누어 진행했고, 모두 3천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그 기간에 일어난 신기한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설법반에 참가한 많은 수련생들이 이미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기록했습니다.
6월 하순에 사부님께서는 지난(濟南) 제2기 설법반을 여셨는데, 몇 가지 일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당시는 한여름이라 수천 명의 수련생이 황팅(皇亭) 체육관 위아래층에 가득 앉아 무척 더웠습니다. 사람들은 사부님 설법을 들으며 끊임없이 부채질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손의 부채를 내려놓으면 어떨까요? 시원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장내 사람들은 즉시 부채를 내려놓았습니다. 사부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느끼셨나요?” 수련생들이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느꼈습니다!” 흥분의 박수 소리가 귓전을 울렸습니다!
설법이 끝난 날, 사부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참석자들에게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내일 다롄(大連)으로 설법을 들으러 가는 수련생들은 절대 주의하세요. 비행기를 타지 마십시오. 기억하세요! 기차나 배는 괜찮습니다. 오늘 밤 열차와 버스 표를 구한 분들은 기사님이 역까지 태워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사부님은 계속 문 입구에 서서 기사에게 지시해 그날 밤 차로 다롄에 가는 수련생들을 역으로 데려다주게 하셨습니다. 그날 큰비가 내려 무릎까지 차올랐습니다. 우리 7명의 수련생은 즉시 30일 비행기 표를 취소하고 기차나 배 표를 구입해 안전하게 다롄에 도착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날 밤 비행기는 폭우를 만났고 사부님께서 우리를 사악이 설치한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그 행복했던 나날을 회상할 때마다 마음은 어찌해도 진정되지 않고 눈물이 또다시 흘러내립니다.
7월 1일 다롄 제2회 설법반이 시작됐습니다. 그때 다롄 보도소장이 저에게 사진 한 장을 주셨습니다. 바로 사부님과 그들의 기념사진이었는데, 사람들 뒤 하늘에는 두 마리 용이 나란히 나타났고 머리, 코, 눈의 윤곽이 매우 선명했습니다. 또한 두 자루의 보검도 보였습니다.
사부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셨지만, 수련인에 대해 우리에게 “공능은 본디 작은 재간이요 대법만이 근본이로다”(홍음-정법문을 구하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사부님께서 다롄 해변 백사장에서 쓰신 시구로, 나중에 ‘홍음’에 실렸습니다. 7월 7일 다롄 설법반이 끝나기 전, 사부님께서 격려의 글귀를 주셨습니다. “진정으로 대법을 수련하나니 오로지 이것만이 큰 일이로세 대법에 동화하나니 언젠가는 기필코 성취하리라”(홍음-법을 얻다). 이 시구도 사부님께서 나중에 ‘홍음’에 발표하셨습니다.
한 달 후인 8월 5일부터 12일까지 사부님의 하얼빈 설법반에 저도 참가했습니다. 이번에는 여러 면에서 교란이 너무 컸습니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실 때 기침을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느라 너무 고생이 많으시구나! 매일 이렇게 설법하시니 목이 견딜 수 없으실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부님은 신이신데, 신께 무슨 병이 있겠습니까! 그때 저는 사람의 생각을 바로잡았습니다. 바로 우리의 업력을 사부님께서 감당하신 것이었습니다. 제 깨달음이 너무 부족했음을 알고 그런 생각이 들자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법공부를 잘해 내 흑색물질을 백색물질로 변화시켜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감당하시는 것을 줄이자.’
대법은 너무나 빠르게 전파됐습니다. 연변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법을 얻었고, 수련생들이 조직해 사부님께 설법반을 열어달라고 요청드렸습니다. 저도 노력해 힘을 보탰습니다. 전 직장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좋은 대법이고 좋은 기회가 너무나 소중하다고 말해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1994년 8월 20일부터 27일까지 사부님께서는 연길시에서 파룬궁 전수반을 여셨습니다. 연변은 소수민족 지역으로 조선족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조선족 수련생들은 사부님께서 설법하시는 날을 민족의 명절로 여기고 민족 의상을 입었습니다. 알록달록 꽃이 핀 듯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가장 정중한 예의로 사존의 설법을 맞이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매우 기뻐하셨고, 수련생들은 더욱 기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모두 민족 의상을 입고 사부님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중국에서 유일하게 소수민족 지역에서 설법하신 것입니다. 이후에 유일하게 조선족 문자로 된 ‘전법륜’도 출간됐는데, 조선족 수련생들은 정말 행복해했습니다!
저 역시 조선족으로, 연길은 오랜 기간 생활했던 곳이며 오랜만에 돌아와 사부님의 설법을 듣게 되니 느낌이 남달랐습니다! 사부님과 너무나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사부님께서 우리집에 오신 것 같았습니다.
사부님 설법이 끝나기 전 간단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연길에서 설법반을 개최하며 받은 7천 위안(약 140만 원)의 입장료 전액을 연길 적십자회에 기부하셨습니다. 연길시를 떠날 때 몇몇 보도소장이 택시로 사부님을 기차역까지 모셨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정말 자가용으로 사부님을 기차역에 모실 수는 없었을까?’라는 원망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택시비는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저는 수련생에게서 한 푼도 받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부님께서 택시비를 직접 내셨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진 후 연변 수련생들은 깊이 감동했습니다. 모두 “사존께서 이렇게 하시니 제자들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은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고 연변 수련생들의 영원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1993년 말 안후이성 허페이시 사부님 설법반부터 시작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따른 것은 사부님이었고, 찾은 것은 대법이었습니다. 매번 법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고, 사부님과 함께할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95년에 ‘전법륜(轉法輪)’이 정식으로 출판됐고, 사부님께서는 해외로 설법하러 떠나셨습니다.
95년 겨울, 사부님께서 귀국하셨습니다. 저는 다른 지역 수련생 두 명과 함께 사부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은 건설광장 근처의 낡은 주택이었습니다. 사부님 집은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집으로 매우 소박했지만 깨끗했습니다. 벽에는 사부님께서 직접 그리신 불상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도(道), 여불(女佛), 손오공 그림이 있었으며 매우 섬세했고 신성함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황금색 귤을 우리 세 명에게 하나씩 주셨습니다. 두 명의 수련생은 어느새 귤을 다 먹었지만, 저는 귤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가 집에 돌아온 후 사진을 찍어 불단에 공양하며 영원한 기념으로 남겼습니다. 사부님의 자비와 제자에 대한 격려는 그 황금빛 귤에서 발산되는 부드러운 빛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건, 그날 너무나 기뻤다는 것입니다. 사부님 집에서 나왔을 때 이미 날이 어두워졌고, 방금 내린 눈으로 땅이 아주 깨끗했습니다. 우리 셋은 서로 밀고 당기며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사부님 집 아래 눈밭에서 뒹굴며 웃고 서로 밀며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모두 50~60대였지만, 그 기쁨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마치 아이들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사부님과 사모님께서 창문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 후로 몇 년간 사부님을 뵐 수 없었고 무척이나 그리웠습니다!
1998년 7월 26일 사부님께서 창춘으로 돌아오셔서 샹그리라 호텔에서 보도원들에게 설법하셨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저는 당시 소장을 찾아가 법회에 참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소장의 허락을 받은 후 보도원들을 따라 강당에 들어가 가장자리 자리에 앉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오셨고, 사람들은 열렬히 박수를 쳤습니다! 뜻밖에도 사부님께서 제가 앉은 자리 쪽으로 걸어오셨습니다. 저는 두 손을 모으고 “사부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드렸습니다. 사부님께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악수하시고 왼손으로 제 어깨를 다독이셨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기쁘게 “오셨군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 행복했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마치 꿈만 같았습니다. 만약 꿈이라면 정말로 깨어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날 사부님께서는 5시간 동안 설법하셨는데, 이것이 박해가 시작되기 전 중국 수련생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설법이었습니다.
설법하신 다음날, 사부님께서는 한 식당에서 식사하셨고 함께한 10여 명의 수련생들이 사부님의 오른쪽에 앉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웃으시며 “고기를 안 드시나요?”라고 물으시며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주셨습니다. 제가 먹자 사부님도 웃으셨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최대한 속인사회에 부합하여 수련하라고 하셨고, 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마음도 버려야 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주 대법을 우리에게 전해주셨고, 사부님의 생활 방식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부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사부님의 일상생활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사부님께서 식사를 마치실 때면 항상 접시가 깨끗했고 음식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깊이 감동받아 사부님을 본받아 이후로는 식사할 때 음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이러한 사부님의 생활 방식을 자녀들에게 전해주었고, 절대 낭비하지 않았으며, 다 먹지 못하면 남은 음식을 집에 가져가서 먹었습니다.
그날 식사 중에 사부님께서 싱가포르에서 설법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족 노인인 나는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다른 이들은 사부님의 설법을 들으면 쉽게 깨닫는데, 나는 매번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여러 차례 설법반을 따라다녔지만 여전히 깨달음이 부족하구나.’ 그래서 저는 싱가포르에 갔습니다. 1998년 8월 22일과 23일, 이틀간 설법을 듣게 됐습니다.
그 후로 더 이상 사부님을 뵙지 못했고 어느새 16~17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80대 노인이 되어 많은 일을 잊어버렸지만, 설법반을 따라다니던 그 시절의 기억은 소중하게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내 생각에, 내가 공을 전하고 설법하는 것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장래에 당신은 알게 될 텐데, 당신은 이 시간이 매우 보람찼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연분(緣份)을 중시하는데, 여러분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도 연분이다.”(전법륜)
오랜 기간의 박해 속에서 어려울 때마다 사부님과 함께했던 나날들을 회상하며 빨리 ‘진선인(眞·善·忍)’에 동화하도록 스스로를 격려했습니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사존의 노고를 덜어드릴 수 있고 우주의 생명들에게 더 많은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자주 사부님의 법상 앞에서 “사부님,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항상 안으로 찾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안으로 찾으니 정말로 사부님께서 ‘싱가포르 법회 설법’에서 하신 말씀과 같았습니다. “자기가 받은 고통과 당한 불행을 자신에게서 찾고, 자신의 어느 곳이 잘못되었는지를 찾는다는 것은 정말로 하기가 매우 어렵다. 만약 누가 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길에서, 수련하는 이 길에서,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서, 당신을 가로막을 어떠한 것도 없다고 말한다.”(싱가포르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5년 10월 3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나의 사부님
원문위치:
正體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5/10/31/318185.html
简体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0/31/3181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