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에 대한 고찰

글/ 더양(德楊, 유럽 서양인 대법제자)

[명혜망] ‘오디세이’는 서구 문명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 중 하나로, 기원전 7~8세기에 처음 문자로 기록됐다. 그 이전에는 계속 구전됐으며, 원작자는 기원전 12~13세기에 살았던 맹인 음유시인 호머로 알려져 있다.

세대를 거듭하며 사람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 ‘오디세이’가 발휘한 역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작품은 여전히 인류의 사상과 도덕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근대 이후 ‘오디세이’는 30여 편의 영상 작품으로 각색됐으며, 최신판이 현재 영화관에서 상영 중이어서 호머의 원작에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이 영화를 평론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이해를 이야기하고 영화를 관람한 후 내가 법(法)에서 얻은 약간의 깨달음을 나누고자 한다.

호머의 ‘오디세이’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이타카섬의 국왕이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원정해 트로이성을 공격했다.

트로이 전쟁은 10년간 지속됐고, 지략이 뛰어난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목마 계략을 고안해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성안으로 잠입해 성문을 열어 주력군이 성안으로 진격하게 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이 전반부 10년의 이야기는 ‘일리아스’에 기록돼 있고, 후반부 10년의 경험은 ‘오디세이’의 주제를 이룬다. 다시 말해, 오디세우스는 온갖 고난을 겪고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타카로 개선하려 했지만, 역풍에 항로를 벗어나 미지의 해역으로 표류하며 한 번도 탐험하지 않은 바다로 나아가게 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전개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정신적인 여정이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 세상의 모든 고난과 응보는 모두 신에게서 오며, 인간의 행동이 신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지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분명 제우스와 뭇 신들의 보호가 없었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자신을 돕지 않는다면 신이 어찌 우리를 도울 수 있겠는가?

바로 인간의 논리와 신에 대한 신앙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과정에서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온갖 시련을 겪었다. 그중 일부는 극복했지만, 일부는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법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모든 어려움이 집착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식욕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마녀 키르케가 일부 병사들을 돼지로 만들었다.

또 다른 예로,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는 오디세우스 일행의 귀항을 돕기 위해 광풍이 든 신기한 자루를 주었다. 하지만 호기심에 가득 찬 부하들이 몰래 자루를 열어 안에 있던 바람을 풀어버렸다. 호기심이라는 집착은 결국 함대의 침몰을 초래했고, 유일한 생존자가 된 오디세우스는 나무토막 하나에 의지해 다음 목적지로 표류할 수밖에 없었으며, 동시에 다음 시련인 칼립소의 섬을 방문하게 된다.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 곁에서 오디세우스는 또다시 안일함과 색욕이라는 새로운 집착에 빠지고 만다. 이로 인해 그는 망각, 나태, 그리고 정(情)에 빠져 오랫동안 섬에 머물렀다.

이는 동시에 그의 참음[忍]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7년 후, 그가 끝내 돌아가겠다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자 요정은 마침내 그가 이 섬을 떠나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이번에 오디세우스는 더 이상 자신의 지혜나 모략, 혹은 힘에 의지하지 않고 운명에 순응했다. 그는 직접 뗏목을 만들어 타고 자신을 바다에 맡겼다.

마침내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대법제자의 ‘오디세이’

대법제자 역시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올랐다. 사부님께서는 “물질과 정신은 일성(一性)이다”(전법륜)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과거에 다른 법문(法門)을 수련한 적이 있지만, 진정한 수련의 길에 들어선 후 가장 먼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점은 바로 어떠한 표면적인 기교나 방법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그의 능력과 지식은 끝내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비록 그가 저승에 들어가 속죄하는 법을 배웠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그를 도운 것은 오직 바른 믿음뿐이었다.

대법제자로서 나는 수련과 중생구도 측면에서 진정으로 가장 잘하는 사람은 능력이 가장 뛰어나고 지식이 가장 해박한 사람이 아니라,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이런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종종 사부님의 안배를 따르지 않고 사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한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처럼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끊임없이 연장하고 있다. 원래 직선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바다에서 표류하며 언제든 방향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구세력 역시 이 점을 이용해 끊임없이 내게 시련을 더하고 있다. 나는 줄곧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저 한 섬에서 다른 섬으로 항해할 뿐 끝내 육지에 발을 디디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나는 순박한 사람, 착실하고 견실한 사람을 좋아한다”(각지 설법11-2010년 뉴욕법회 설법)라고 말씀하셨다.

한 시련 속에서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요정)의 섬을 지날 때, 선원들에게 밀랍으로 귀를 막게 하고 자신은 배의 돛대에 몸을 묶은 채 세이렌의 오싹한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이 순박하고 착실한 것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남들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인데, 이 또한 일종의 집착인 과시심과 환희심이다.

과시심은 사실 이 10년에 걸친 표류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이 모험이 막 시작됐을 때,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눈을 찔러 멀게 했다. 그가 배를 타고 도망칠 때 득의양양하게 자신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며 상대방에게 모욕을 줬다. 하지만 폴리페모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었고 그는 아버지에게 고충을 털어놓았다. 바로 이 때문에 포세이돈은 끝내 오디세우스의 함대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오디세우스처럼 무의미하게 자신의 귀환 길을 연장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쨌든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왕국을 떠난 것은 불과 20년이었지만, 우리는 아득히 먼 옛날 사부님께 서약을 하고 각자의 천국 세계에서 내려와 이곳에 왔다. 우리의 ‘오디세이’는 어쩌면 수천만 년 동안 지속됐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해보니 이 길은 정말 그렇게 험난한 것일까? 이 마지막 윤회 속에서 우리가 집과 이렇게 가까워졌을 때 설마 또 실패하겠는가?

기나긴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하나하나의 이정표를 남겨주시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밝혀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서의 인식일 뿐이니, 선의로 교류하며 다 함께 제고하기를 바란다.]

 

원문발표: 2026년 9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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