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루런(路人, 중국)
[명혜망] “천하 사람들이 붐비는 것은 모두 이익을 위해서 오기 때문이고, 천하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것은 모두 이익을 향해 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의 상식 속에서 이익은 사람이 일을 하게 만드는 유일한 원동력인 듯하다. 이익을 도모할 수 있으면 앞다투어 몰려들고 이익을 도모할 수 없으면 물러선다. 그러나 세상에는 언제나 고착화된 이러한 인식에 행동으로 도전하는 사람과 일들이 있다. 이익을 초월한 그런 선행을 대할 때 어떤 이는 큰 사랑을 보았고, 어떤 이는 습관적으로 의심하기도 한다. ‘이것은 겉으로는 선행이지만 배후에 무슨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백 년을 뛰어넘은 ‘협화(協和)의 수수께끼’
시간을 100여 년 전으로 돌려보자. 1917년 9월 미국 록펠러 재단은 베이징에서 베이징 협화의학원 착공식을 거행했다. 이후 이 미국 석유 재벌은 4천만 달러 이상을 연이어 투자해 중국이 현대화된 협화병원을 설립하도록 도왔다.
상식적으로 상인은 이익만 도모한다. 록펠러가 이처럼 아낌없이 돈을 낸 것은 지난 1세기 동안 무수한 의문과 까닭 없는 추측, 심지어 욕설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이는 그가 위장된 자선을 통해 중국인의 사상을 통제하려는 악독한 속셈이 있다고 단언했고 심지어 어떤 이는 그가 서양 의학을 지원해 세운 것은 ‘중의학 멸절’을 위해서라고 여겼다.
록펠러에게 정말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동기가 있었을까?
사실은 웅변보다 낫다. 그가 재단을 설립한 초심은 극히 순수했는데 즉 “인류의 이익을 위해 거대한 부를 마지막으로 처분한다”는 것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그는 단지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고 있었을 뿐이다. 100년이 지나 록펠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당시에 협화병원이 배출한 세계적인 의료 인재들은 무수한 중국인의 생명을 구했고 빈곤한 서민들에게 병원은 무상 치료와 무료 약품 증정도 한 적이 있었다.
이처럼 국적을 초월하고 원망을 묵묵히 참고 견뎌낸 헌신은 고의적인 음모가 아니라 큰 사랑의 구원이었다.
시대의 격변과 변치 않는 ‘세상을 구제하는 마음’
세월이 흘러 상전벽해가 되고 역사가 새 세기로 접어들어 상품 경제가 더욱 발달하고 인간관계가 더욱 현실적인 듯한 지금, 여전히 당시 록펠러처럼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오해를 무릅쓰며 세상을 구제하고 사람을 구하려는 이가 있을까?
대답은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당대 중국에는 거대한 대가를 치르면서 동일하고 순수한 헌신을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1999년 전면적인 탄압을 당한 이래 파룬궁수련자들은 장기적인 적색 공포와 피비린내 나는 폭풍우 속에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을 전하는 것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불가(佛家) 문화에서 인과응보는 예로부터 천리로 여겨져 왔다. 역사상의 ‘후주 세종 채영(柴榮) 훼불’ 사건이 그러하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채영은 일찍이 도끼로 구리 관음상의 가슴 부위를 내리쳐 훼손했는데 4년 후 그는 가슴에 난 부스럼이 짓무르면서 한창나이에 급사했고 후주(後周)도 곧이어 멸망했다.
오늘날의 수련자들은 많은 평범한 민중이 일방적인 먹칠 선전에 귀를 기울여 무지 속에서 불법(佛法)과 수련자에 대한 박해에 가담했음을 깊이 알고 있다. 전통 신앙으로 볼 때 이는 생명에게 깊고 무거운 재앙을 가져다줄 ‘부처를 비방한 죄’이다. 고향 어르신들이 거짓말 속에서 위험한 기로로 나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이들 수련자가 나선 것이다.
그들은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고 이익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 한 장 한 장의 진상 자료를 인쇄하기 위해 많은 이가 먹고 입는 것을 아끼며 모아둔 돈을 다 썼고 더 많은 사람이 시비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거리를 누비고 골목을 누볐다. 이를 위해 어떤 이는 납치됐고 어떤 이는 감옥에서 구타를 당했으며 심지어 어떤 이는 생명의 대가를 치렀다.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는데 이들을 지탱하는 배후의 힘은 무엇인가?
2009년 여름 후난성 란산현의 파룬궁수련자 궈후이성(郭會生)과 아내 리쥐메이(李菊梅)는 현지 공안국장에게 선(善)을 권하는 진상 자료 한 통을 보냈다. 그러나 선의의 행동이 불러온 것은 도리어 폭력적인 수색과 납치였다. 같은 해 8월 부부는 잇달아 납치됐다. 궈후이성은 경찰에게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바닥에 짓눌려 구타당해 머리와 얼굴 전체가 피투성이가 됐고 불과 두 달 뒤 52세의 나이로 심장 박동을 멈췄다. 그리고 그의 아내 리쥐메이는 6차례의 납치, 2차례의 부당한 강제노동을 겪으며 감옥에서 무수한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당했다.
사람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도모하는 것인가? 만약 이 배후에 ‘의도’가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사실 그들은 타인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어떠한 개인적 소득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궈후이성은 생명을 잃었고 리쥐메이는 자유와 가장 소중한 남편을 잃었다. 그들이 헌신한 것은 금전만이 아니라 가정과 생명이었고 감수한 것은 외부의 의심과 비웃음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신적 공갈과 육체적 학대였다.
도대체 어떤 힘이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모든 것을 쏟아붓게 하는가?
진정으로 신앙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대답이 매우 간단하다. 이는 불성에 따른 것이고 선량함에 따른 것이며 수련자의 양심과 책임이다.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에 눈이 멀어 재난을 향해 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수수방관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비와 선량함이 아닐 것이다.
맺음말
당시 바다를 건너 중국인을 위해 병원을 지어준 록펠러이든 아니면 지금 생사의 압박을 무릅쓰고 진상 알리기를 굳게 지키는 평범한 파룬궁수련자이든 그들을 지탱하는 것은 모두 같은 한 가지, 즉 신앙의 힘이다.
이러한 힘은 사람의 마음을 혼탁한 현실 속에서도 순수하고 투명하게 유지하게 한다. 이러한 선의에 직면해 우리는 어쩌면 습관적으로 비좁은 편견으로 추측하고 음모론으로 먹칠하기보다는 더욱 관용적이고 이성적인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복잡한 시대에 선의의 경청을 하나 늘리고 맹목적인 배척을 하나 줄이는 것이 어쩌면 바로 우리 각자가 미래로 나아가는 희망의 길일지도 모른다.
원문발표: 2026년 6월 4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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