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베이성 대법제자
[명혜망] 2025년 5월 28일에 게재된 글 ‘톈진 대학교 그 시절을 회상하며’를 읽고 감회가 무량했다. 나도 그 글에 묘사된 수련생들 중 한 사람으로서, 수십 년 전 톈진 대학교에서 득법하고 수련하며 홍법했던 크고 작은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올랐다. 20여 년의 풍파 속에, 당시 많았던 학생 무리는 이미 뿔뿔이 흩어졌고, 매일 함께하던 수련생들도 중국에 남은 이들 중 많은 수가 인생의 굴곡을 겪었다. ‘5·13’이 다가오는 이때, 당시의 경험을 기록해 대법의 비범함과 위대함을 증명하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왜 이른바 앞날을 내려놓고 광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법 수련을 고수했는지 알리려 한다.
1. 대법에 들어서며 특별한 단체에 녹아들다
글의 작가인 그 수련생과 마찬가지로 나도 1997년에 득법했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일찍 일어나 달리기를 즐겼는데, 과학관 앞에서 연공하는 사람들을 보고 호기심에 걸어가서 앞 사람의 동작을 따라 해봤다. 그때 그들은 마침 두 번째 공법인 ‘파룬장법(法輪樁法)’을 연공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온몸의 털구멍이 일제히 뚫리는 듯하며,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가볍고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다고 느끼던 찰나, 한 남학생이 걸어와서는 새로 온 사람이냐고 물으며 동작을 알려주고 앞으로도 연공하러 오라고 권했다. 그 남학생이 바로 우리의 학생 지도원이자 당시 톈진 대학교의 박사과정생이었다.
연공이 끝난 후 또 몇몇 학생들이 다가왔는데,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박사과정생이었다. 당시 나는 석사과정 중이었고, 톈진 대학교의 여자 석사생과 여자 박사생은 같은 동에 살았다. 그렇게 나는 이 특별한 단체에 들어서게 됐다.
특별하다고 했지만, 사실 자율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매일 아침 6시 이전,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우리는 일찍 일어나 연공 장소에 제시간에 나타났다. 연공 음악을 담당하는 수련생은 매일 자기 집 녹음기를 들고 나와 모두에게 음악을 틀어줬다. 처음에는 연공하는 학생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점차 대학원생 기숙사에서 연공하는 학생이 늘어났다. 나중에는 박사과정생 기숙사 층 거의 모든 방에 연공하는 사람이 생겼다. 수련생 중 학생 간부가 1층 활동실 사용권을 신청해서, 저녁이나 쉬는 시간에는 다 함께 활동실에서 연공하고 녹화 영상을 봤다. 그 시절은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수많은 수련생이 다리 통증을 극복하고 정진하며 착실히 수련하는 모습과 질병이 기적처럼 사라지는 장면을 지켜봤다. 기숙사를 지키는 아주머니도 유리 미닫이창 안쪽에 열쇠를 올려놓아서, 우리가 이른 아침 연공 때 문을 열고 나갈 수 있게 해줬다.
그 시절은 생활 리듬이 참 규칙적이었다. 연공을 마치면 방석 가방을 들고 삼삼오오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는 늘 식당의 첫 번째 손님이었고, 어찌나 일찍 갔는지 식당 반찬이 아직 다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중에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이들이 많아서, 우리가 밥 먹고 교실이나 실험실로 향할 때도 아직 이불 속에 있는 이들이 많았다. 연공은 우리를 부지런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공부와 연구에 쏟을 시간과 에너지도 더 많이 갖게 해줬다.
2. 연공과 법공부, 단순하고 행복한 생활
1997년은 톈진 대학교 학생들이 수련에 대거 입문하던 때였다. 처음에는 과학관 앞 하나의 연공 장소만 있었다. 톈진 대학교 사람들만이 아니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난카이 대학교 학생과 교사들도 톈진 대학교로 연공하러 왔다. 이후 사람이 점점 많아지자 학생들은 따로 나가 독립적인 연공 장소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치리타이, 이후엔 도서관 뒤 공터, 그다음엔 화공대 건물 앞으로 옮겨갔다. 아침에 연공하고, 오후 과외 활동 시간에도 연공했다. 젊은 얼굴들이 줄지어 서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겨울이든 여름이든 흔들림이 없었다.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 속에 우리는 굳건히 서서 손이 얼어 감각이 없어도 아무도 손을 내리지 않았고, 누구도 그 때문에 불평하거나 빠진 적이 없었다. 여름에는 모기가 귓가에 속닥이듯 달려들어도 모두 견뎌냈다. 신기한 것은, 앉아서 정공을 할 때는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서서 동공을 할 때는 손이 아리도록 시렸다.
그 시절 홍법 활동도 많았다. 매주 말 정기 홍법 외에도 톈진 시 전체의 대규모 홍법 활동이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한번은 하이허(海河) 강변에서의 홍법이었다. 사람이 매우 많았고, 맨 앞줄에는 어린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다리를 결가부좌 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신화 속 어린 선동을 연상케 했다. 장난기 많은 아이들 중에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주위를 살짝 훔쳐보기도 했는데, 그 생기 있고 천진난만한 모습은 내 평생의 아름다운 기억이다. 또 한번은 다 함께 톈진 방송국을 찾아갔는데, 그곳은 사부님께서 일찍이 전화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셨던 곳이었다. 넓은 스튜디오가 방송국 수련생들의 법공부와 연공 장소였으며, 예민한 사람은 강렬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단체 법공부도 우리의 필수 과정이었다. 두 명의 박사과정 지도원은 같은 대학 소속이 아니었는데도 같은 기숙사 방으로 배정됐다(박사과정생은 2인 1실). 주말이면 다 함께 사부님의 설법 녹화 영상을 보고, 깨달음과 체험, 수련 중 겪는 어려움을 나눴다. 졸업한 선배 수련생들이 모교로 돌아와 함께 대법을 배우기도 했다. 동기들은 수련 후 심성이 향상된 이야기, 또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마음을 전환해 이기심을 극복했는지를 나눴다. 그 자리는 화목하고 따뜻했으며, 사회의 소란함 대신 마음의 고요함과 평온한 마음가짐, 그리고 생명 본질의 변화가 그 자리를 채웠다.
당시 파룬궁 서적은 이미 공식 판매권을 박탈당한 상태였지만, 톈진 대학교에 자주 출장하는 수련생이 있었는데 온 가족이 오래된 제자였던 그분이, 출장이 없는 날이면 외지에서 사온 책을 연공 장소로 가져와 원가에 공급해줬다. 당시 우리는 넉넉하지 않았지만, ‘전법륜(轉法輪)’을 기꺼이 사서 친지나 인연 있는 이들에게 선물했고, 득법하는 사람의 수는 날마다 빠르게 늘어났다.
3. 풍파가 몰려와 평온한 연공에 교란이 생기다
1999년 4월, 유서 깊은 도시 톈진에서는 허줘슈(何祚庥)가 ‘나는 청소년이 기공을 배우는 것에 반대한다’는 글에서 사실을 무시하고 파룬궁을 폄훼하면서, 수많은 파룬궁수련생들이 톈진 교육대학을 찾아 상황을 설명하고 사실을 해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많은 사람이 갔고 톈진 대학교 학생들도 일부 참여했다. 처음에는 잡지 편집인이 수련생들의 설명을 듣고 사태의 진상을 이해해 다음 호에 정정문을 싣고 사과하겠다고 했다. 그것으로 사태가 해결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튿날 완전히 말을 바꿨다. 위에서 개입해서 더는 그들이 결정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나도 사태 진전이 궁금해서 오후 수업이 끝난 뒤 자전거를 타고 교육대학으로 갔다. 각지에서 온 수련생이 많았지만 질서정연했다. 다들 최대한 공간을 좁혀 통로를 비워두려 했지만, 교육대학은 결국 수업을 중단했다.
잠깐 보고 돌아가려 했는데, 30분 후, 1시간 후에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와 그렇게 계속 기다리게 됐다. 기다리는 사람들 중 어떤 이는 고개 숙여 책을 읽고, 어떤 이는 결가부좌 하고 앉아 있었으며, 어떤 이는 조용히 서 있었고,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 “파룬(法輪)을 봐요!”라고 외쳤고, 많은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떤 이는 묵묵히 합장했다. 하늘에 많은 파룬이 나타났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많은 것을 느꼈다.
저녁 무렵, 마침내 결과를 기다리나 싶었던 그 순간, 갑자기 확성기에서 소리가 나더니 빨리 해산하라는 요구가 나왔다. 다들 어리둥절했다. 미련이 남아 그 자리에 서서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어했다. 그런데 갑자기 진압 경찰이 대거 쏟아져 나오더니 떠나지 않으려는 수련생들을 끌고 들어 올려 밖으로 끌어냈다. 정부로 가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도 들려왔다. 그렇게 일부 파룬궁수련생들이 톈진시 정부로 향했고, 나도 따라갔다. 이미 많이 늦은 시각이었고 나는 잠시 기다리다 학교로 돌아왔다. 사실 간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정치를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합법적인 연공 환경을 원해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 곳을 찾아갔을 뿐이었다.
‘4·25’ 천안문 푸유가 만 명 청원은 나중에야 들었고, 당시에는 정부의 처리 결과가 안심이 됐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단체 연공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평소 한 번도 늦은 적 없던 녹음기 담당 학생이 연공 시간이 됐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수련생이 구령을 외쳤다. 그러다 녹음기를 든 그 학생이 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학교 선생님이 길목에서 막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의 사상은 앞서가면서도 순진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에는 ‘각급 정부는 각종 연공 건강 활동을 금지한 적이 없으며, 다른 견해와 의견을 가지는 것은 허용된다’는 내용이 실렸고, 기공에 대한 ‘삼불(三不)’ 정책(선전하지 않고, 죄를 씌우지 않으며, 탄압하지 않는다)도 재천명됐다. 일부 학생들이 신문을 들고 학교 지도부를 찾아갔다가 그제야 깨달았다. 그 번지르르한 말들은 사람들을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고, 뒤에서는 이미 별도의 통지와 배치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정치 운동을 겪어본 일부 노교수들은 당시 상황을 보고 ‘문화대혁명’과 수법이 판박이라며 학생들에게 주의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순진한 학생들이 어찌 이것이 폭풍 전야의 짧은 고요함임을 알았겠는가.
그로부터 거의 30년의 풍파가 흘렀다. 캠퍼스에서 노동수용소와 감옥으로 이어지는 험난한 길을 걸었고, 한창 젊던 나이에서 이제 50대 중반의 퇴직을 앞둔 아주머니가 됐다. 다 함께 연공하고 법공부하며 비학비수(比學比修)하던 환경은 이제 거의 혼자 수련하는 상태가 됐다. 그 아름다웠던 시절, 젊고 행복이 넘치던 그 얼굴들은 이미 생명 속 가장 소중한 영상으로 고정돼, 거짓말이 하늘을 뒤덮는 속에서 우리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지탱해주고 있다.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탄압은 사회 도덕의 급격한 추락을 초래했고, 대법의 진상이 가려짐으로써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도덕 향상과 건강 회복, 가정의 화목, 사회 공헌의 기회를 잃어버렸는가. 우리는 행운아다. 중공의 탄압 이전에 직접 파룬궁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말이다. 우리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선전과 날조에 속지 않게 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부디 많은 중국 민중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파룬궁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중공의 거짓말에 희생자나 전파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원문발표: 2026년 5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5/7/5092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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