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갑과 족쇄부터 감옥의 고문까지: 수란시 수련자 쉬훙위가 겪은 일

[명혜망](지린성 통신원) 수란(舒蘭)시 파룬궁수련자 왕즈강(王志剛), 쉬훙위(徐洪玉), 리펑링(李鳳玲) 등 6명은 2018년 7월 18일 납치, 감금돼 모함을 받았다. 2019년 5월 21일과 22일, 수란시 법원은 그들에 대해 불법 재판을 진행했다. 재판 당시 왕즈강은 무거운 수갑과 족쇄를 차고 있었으며 몸을 계속 떨었다.

법정에서 왕즈강과 쉬훙위는 공안국이 법을 집행하면서 법을 위반해 자신들을 고문하고 자백을 강요했다고 지적했으며, 법에 따라 공안국이 고문하며 자백을 강요할 당시의 CCTV 영상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 합리적인 요구를 거부했다. 동시에 법원은 그들의 변호사가 법에 따라 무죄 변호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쉬훙위는 법정에서 스스로 변호하며, 파룬궁은 사람의 도덕을 향상하고 마음을 정화하며 뚜렷한 병 치료와 건강 증진 효과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수련을 시작한 이유는 중병을 앓던 어머니가 파룬궁 수련을 통해 건강을 회복한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파룬궁이 국가와 국민에게 백 가지 이로움만 있을 뿐 한 가지 해로움도 없다고 강조하며, 신앙은 무죄임을 법에 따라 거듭 밝혔다.

결국 쉬훙위는 불법적으로 2년 10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항소했지만 2019년 11월 4~5일경 여전히 궁주링(公主嶺) 신성 감옥으로 납치돼 감금당하고 박해받았다.

다음은 쉬훙위가 궁주링 신성 감옥에서 겪은 박해에 대한 진술이다.

내 이름은 쉬훙위이고 남성이며 1957년생이다. 지린성 수란시 바이치진(白旗鎭) 바오안촌(保安村) 2사의 주민이다. 나는 1999년 ‘7·20’ 이전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다. 중국공산당(중공)이 대법과 대법제자를 박해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는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창춘(長春) 성정부에 청원을 갔고, 지금까지 사악에게 여러 차례 납치, 가택수색, 괴롭힘, 구류, 수용, 강제노동, 징역형을 당했다.

2018년 7월 18일, 지린시에서 온 공안국장의 지휘 아래 수란시 공안국은 대규모 경찰 병력을 동원해 바이치진, 파터진(法特鎭)에서 여러 수련자를 납치했다. 나를 중점 목표로 삼았기에 밤 10시경 여러 명의 경찰이 우리집을 포위해 나를 납치하고 가택수색을 했다. 그들은 우리집의 행사 장비들을 뒤집어엎고 컴퓨터 세 대와 프린터를 강탈했는데, 그중 컴퓨터 두 대는 행사용이었다. 또 대법서적, 진상 자료와 현수막을 빼앗아 갔다. 공안국에 도착해 나를 ‘호랑이 의자’(고문 도구)에 앉히기에 나는 범죄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야간 심문 때 내가 협조하지 않자 둥(董) 씨 성을 가진 경찰이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네가 감옥에서 평생 썩게 만들겠다”라고 소리쳤다.

다음 날 9시가 넘자 나를 심문하던 고위 관리가 왔고, 지린시의 그 국장과 수란시 공안국장이 내 앞으로 왔다. 나와 눈을 마주친 후 돌아서서 심문하던 경찰에게 다 자백했느냐고 물었다. 경찰이 아직 안 했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돌아서서 회의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떠난 후 경찰 몇 명이 또 왔는데, 그중 한 명은 키가 크고 흉악하게 생겼다. 그와 나를 심문하던 자는 손가락으로 내 앞가슴 갈비뼈를 직접 찔렀다. 나는 “나에게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지 마세요.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대장 둥치밍(董奇明)이라도 내게서 어떤 정보도 얻어내지 못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구치소에서 여러 차례 불법 심문을 받았지만 모두 묵비권을 행사했다.

나는 불법적으로 2년 10개월형을 선고받고 지린시 궁주링 감옥으로 납치돼 박해받았다. 감옥에 들어갔을 때는 오전 11시가 다 된 시간으로 마침 감옥의 식사 시간이었다. 신입 감방 경찰 중대장 리카이(李凱), 지도원 선쉬둥(沈旭東), 행정과 리밍양(李明陽)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리밍양은 “너 이 XX 똑바로 서 있어. 밥 먹고 나서 가죽을 벗겨주마”라고 욕을 퍼부었다. 신입 감방의 감시조는 모두 사형 유예수들로 매우 흉악했는데, 범죄자 마타오(馬濤)가 옆에서 입을 열며 “똑바로 서 있어”라고 말했다.

그들이 식사를 마친 후, 마타오는 죄수복을 가져와 내가 입고 온 옷을 갈아입혔고, 리카이는 신앙 포기를 뜻하는 이른바 ‘5서(五書, 다섯 가지 수련 포기 각서)’를 가져와 나에게 서명하라고 했지만 나는 서명하지 않았다. 경찰 세 명이 고압 전기충격기를 들고 한꺼번에 달려들어 나를 쓰러뜨렸다. 얼굴이 땅을 향한 상태에서 마타오가 내 상의를 걷어 올려 등을 드러내게 한 뒤 천으로 된 신발 밑창으로 세게 내리쳐 등을 온통 때렸다. 피부가 부어올랐고 세 개의 전기충격기로 내 머리를 지지며 땅에 부딪히게 했다. 20분 후 세 개의 전기충격기로 나를 세게 때렸지만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경찰 리밍양이 고환을 전기 충격기로 지지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똑똑히 들었다. 이때 전기충격기 하나가 내 뒷덜미를 지졌고 이마가 땅에 심하게 부딪혀 눈가에 달걀만 한 혹이 생겼다. 경찰은 그제야 악행을 멈추고 죄수를 시켜 나를 엄격 관리 감방으로 데려가게 했다.

酷刑演示:电棍电击

고압 전기충격기 고문 시연

범죄자 관나이유(關乃友)는 나를 보자마자 전기 충격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벽을 향해 똑바로 서 있으라고 말했다. 한 시간여 뒤 관나이유는 나를 불러 ‘집중 훈련’을 시켰다. 저녁 식사 시간에 범죄자 리젠양(李建陽)은 나에게 가장자리에 앉으라고 하면서 반찬은 먹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마타오가 배식하는 죄수에게 시켜 바닥에 소금이 든 옥수수죽 한 그릇을 내게 가져다주며 먹으라고 했다. 한 입 먹어보니 소금이 입을 쏘았지만 배가 고파 70g도 안 되는 소금 섞인 옥수수죽을 다 먹었다. 식사 후 범죄자 리젠양은 나를 세면장으로 데려가 1kg짜리 굵은 소금 한 봉지를 가져와 사형 유예수에게 내 등을 문지르라고 시켰다. 그들은 내가 신음조차 내지 않자 나중에 죄수들은 나를 ‘독한 놈’이라고 불렀다.

다음 날 경찰 리카이는 나를 통제실로 불러 경찰 세 명을 향해 무릎을 꿇으라고 강요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나는 오직 사부님과 부모님께만 무릎을 꿇는다’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경찰 리밍양은 가시가 달린 몽둥이를 들고, 선쉬둥은 전기충격기를 들고 내 손등과 팔을 지졌다.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두 눈으로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5분 후 그들은 전기 충격을 멈췄다. 그런 다음 우리집에서 누가 연공하는지 묻기에 아내가 수련한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아들 전화번호를 알려주면 그들을 불러 너를 전향시키겠다고 했다. 나는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했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나를 감방으로 돌려보내 집중 훈련을 받게 했다.

셋째 날, 경찰 리카이와 범죄자 관나이유는 죄수 5명과 나를 감시하며 함께 감옥 병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갔다. 감옥 의사 역시 경찰이었는데, 내 눈가의 큰 혹을 보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리카이는 나를 쳐다보며 직접 말해보라고 했다. 나는 입을 열어 “나는 진선인(眞善忍-진실·선량·인내)을 수련하는 사람이니 진실을 말하겠습니다”라고 한 뒤 리카이를 보며 “바로 당신들이 때린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범죄자 관나이유가 내 옆에서 내 얼굴에 맹렬히 주먹을 날렸고, 나는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맞았다. 이어서 내 다리를 세게 걷어차고 나를 문밖으로 끌어낸 후 벽을 보고 똑바로 서 있으라고 큰소리로 욕했다. 30분 후 관나이유는 나를 방으로 불러 인쇄된 종이에 서명하라고 했지만, 나는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서명하지 않았다. 관나이유는 내 손을 억누르며 서명하게 했다.

감방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할 때 경찰 리카이가 들어와 큰소리로 “쉬훙위, 너는 밥 먹지 마라”라고 말했다. 나는 매일 밥을 먹던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때 범죄자 리젠양은 물이 가득 담긴 큰 물컵을 들고 내 정수리를 세게 내리치며 “똑바로 앉아 있어라”라고 욕했다. 이렇게 4일이 지났다. 소금이 들어가 입을 쏘는 70g도 채 안 되는 옥수수 가루 죽조차 먹지 못한 데다 매일 집중 훈련, 벌서기, 전기 충격, 구타와 욕설까지 더해져 머리가 무겁고 눈이 부어올랐다. 5일째 되는 날, 리카이와 정나이유(鄭乃友)는 죄수 7명과 함께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 심전도를 찍고 혈압을 쟀다. 당시 내 최고혈압은 220mmHg, 최저혈압은 120mmHg였다. 그 후부터는 매 끼니 소금을 넣은 죽만 먹게 했고 물 마시는 양도 제한했다.

18일째 되는 날, 파룬궁 박해를 전담하는 관리 중대 중대장 옌리타오(閆立濤)가 수련자 세 명을 데리고 왔다. 한 명은 대학교수 류멍(劉猛), 한 명은 저우칭주(周慶柱), 다른 한 명은 내 친척인 양(楊) 셋째 형이었다. (셋째 형네 네 식구는 지난 몇 년간 줄곧 정법의 선두에 서 있었다. 처음 셋째 형과 두 아들이 감옥에서 박해받았을 때, 큰아들은 정신 이상과 뇌 둔화 증세를 보였다. 교사였던 아내는 큰 충격으로 정신 분열과 소뇌 위축을 앓다가 이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은 대학생이었고 사부님을 믿으며 발정념이 강했다. 2005년 부자 3명이 진상을 알리고 직접 차를 운전해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가 납치됐는데, 큰아들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고, 둘째 아들과 셋째 형은 각각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둘째 아들은 제2감옥에, 셋째 형은 궁주링에 수감됐다.) 셋째 형은 옌 중대장에게 내 사상을 전향시키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만났을 때 모든 경찰은 자리에 없었다. 셋째 형이 말했다. “훙위, 넌 나를 알지. 내가 감옥에 들어온 지 8개월 만에 이 길을 걷게 됐다. 8개월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아느냐! 나는 이제 곧 출소한다. 네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 널 알고 너도 날 아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나는 셋째 형의 말을 이해했다. 이틀 전 사형 유예수 리젠양은 “궁주링 감옥에 오면 누구든 무사히 넘어갈 수 없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감옥 구역에서 쓰는 감시조는 모두 사형 유예수들이라 지극히 흉악했다. 리젠양은 사형 유예수 장궈둥(張國棟)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감옥에 와서 감시조를 하면서 여러 파룬궁수련자를 봤지만, 살아서 나가는 사람 중에 걸어서 나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하고 서서히 조금씩 죽게 만든다.” 그는 체격이 크고 건장한 파룬궁수련자가 한 명 있었는데 2년도 안 돼 뼈만 남을 정도로 말랐다고 했다. 그가 죽은 후 구급차를 부르고 산소통을 매단 채 동영상을 찍으며 병원으로 보내 응급 처치하는 척했고, 가족이 오자 병원에서 응급 처치했으나 사망했다고 알렸다는 것이다. 리젠양이 감시조 죄수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은 바로 내게 들려주기 위함이었고 목소리도 크지 않았다. 리젠양은 또 말했다. “어떤 파룬궁수련자는 먼저 큰 회전판에 수갑을 채운 뒤 우리가 회전판을 돌려 기절시켰다. 그러고는 큰 휘발유 빈 통에 넣고 위에 큰 나무 뚜껑을 덮은 뒤 우리 몇 명이 큰 나무 몽둥이로 쇠통을 두드렸다. 충격으로 그가 일어서지 못하게 된 후에야 감방으로 업고 돌아갔다.”

나는 양 셋째 형이 내게 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수련자가 오늘날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을 생각하니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이때 경찰 리카이, 리밍양, 선쉬둥, 옌리타오가 들어왔고 리카이는 인쇄된 보증서 몇 장을 가져와 내게 보여주었다. 그는 다른 것은 없고 그저 감옥 안에서 파룬궁을 연공하지 않겠다는 보증일 뿐이라고 했다. 내가 서명하지 않자 저우칭주가 내 손을 잡아당기며 “서명해. 서명해! 서명해!”라고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서명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서명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옌 중대장이 “지금부터는 정상적으로 물을 마시고 밥을 먹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 달 후 나는 신입 감방에서 파룬궁 박해 전담 중대로 내려갔고, 일주일 후 감시조가 펜과 종이를 가져와 내게 5서를 쓰라고 하며 “진짜 전향하려면 5서를 써야 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서명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러우며 지금부터는 아무것도 더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 태도가 완강한 것을 보고, 나와 추구이란(楚貴然) 수련자를 배신자 류멍 등의 감시하에 두고 매일 파룬궁을 비방하는 동영상을 보게 하며 사상 보고서를 쓰게 했다. 내가 박해에 협조하지 않자 어느 날 경찰 선쉬둥은 추구이란의 눈에 안대를 씌우고 종이봉투를 가져와 그 위에 앉게 했다. 나는 사악이 비열하고 야비한 수단으로 그와 나를 박해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추구이란에게 앉으면 안 된다고 말했고 추구이란이 손으로 종이봉투를 찢어보니 사부님 법상이었다. 추구이란은 8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정념이 강했고 사부님과 법을 굳게 믿었다. 사악은 그에게 사인상(死人床, 사지를 묶는 침대형 고문 도구), 전기 충격 등 다양한 고문으로 박해를 가했지만 그는 모두 정념으로 극복해 냈다.

중대 부대장 하오카이(郝凱)는 매우 사악했다. 한번은 그가 모든 수련자를 교실로 불러 감형 신청서를 손에 들고 한 장씩 나눠주며 서명하게 했다. 서명하기 전에 하오카이는 수련자들에게 앞줄 첫 번째 사람부터 사부님을 불경하게 하고 대법을 헐뜯는 말을 하게 했다. (이전에 하오카이는 양위차이(楊玉才)에게 사부님과 대법을 욕하라고 시켰다. 양위차이가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늘 협박했고 양위차이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협조했다. 양위차이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마지막 1년도 채 남지 않아 몸에 병세가 나타났고 출소 5개월을 채 앞두고 환자 감방으로 이송됐으며 이후 출소한 일반인을 통해 그가 옥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법을 얻기 전후의 심신 변화와 대법이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오카이는 이 말을 듣자마자 책상을 치고 일어나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책상 위의 종이를 찢어버리며 단 하루도 감형받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했다. 추구이란이 갓 중대로 내려왔기에 하오는 사악한 수단을 이용해 그를 변화시키려 했다. 수련자는 20여 명이었는데 추구이란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입장을 표명했다. 마지막에 웨나이밍(岳乃明) 수련자 차례가 되자 그가 일어나 “파룬궁은 사람에게 진선인을 수련하도록 가르치며 바른 법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오카이는 길길이 날뛰며 “쉬훙위, 웨나이밍, 너희 둘은 감방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때 선쉬둥이 내 앞으로 왔는데, 그는 우리 둘을 여러 차례 박해했기에 우리의 확고함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하오 대장이 좀 과격했으니 두 사람은 먼저 감방으로 돌아가라”라고 말했다. 모두가 우리 둘이 또 고문을 당할 줄 알았지만 그 후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또 한 번은 2020년에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궁주링 감옥에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감시조 왕위하오(王雨浩)가 서식 한 장을 가져왔는데 감옥의 법 집행이 공정하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중 한 조항은 수감자들을 인내심을 갖고 교육하며 인도적으로 관리하고 때리거나 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조항을 보고 서명하지 않았다. 왕위하오가 “당신네 사람들은 다 서명했다. 이건 감옥에서 내려온 문서니 만약 서명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스스로 잘 생각해야 할 거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수련자들을 한 감방으로 부르더니 모르는 감옥경찰 몇 명이 지키는 가운데 한 명씩 서명하게 했다. 내 차례가 되자 한 감옥경찰이 직접 표를 내 앞에 갖다 주며 펜을 주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갓 감옥에 들어왔을 때 세 개의 고압 전기충격기로 나를 때렸습니다”라고 말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찰은 나를 향해 “감히 서명을 안 해? 빨리 서명해!”라고 흉악하게 소리쳤다. 나는 펜을 책상에 던지며 “당신은 지금 법을 집행하면서 법을 위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형 유예수인 감시조 한 명이 나를 끌고 갔다.

2021년 1월, 감옥 측은 사악하게 깨달은 수란시의 리커쥐(李克舉)와 지린시의 마(馬) 씨, 그리고 쉬헝(許恆), 류멍 등 배신자들을 감옥으로 데려와 우리만 전담해 ‘전향’ 박해를 가했다. 그러면서 리커쥐와 마 아무개가 보름 안에 우리 몇 명을 전향시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들은 혼자 있는 방으로 한 명씩 불렀다.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가니 그에 대해 듣기만 했을 뿐 만난 적은 없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두 눈은 초점이 없고 말할 때는 침을 튀겼다. 그가 수란시 세뇌반에서 나쁜 짓을 하고 수란시 곳곳에서 진상 게시물을 떼어내고 현수막을 훼손한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를 보자 수란시에 이런 쓰레기가 나와 감옥에까지 와서 나쁜 짓을 한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나에게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라고 묻기에 화를 꾹 참고 대답했다. 그가 또 “머리는 염색한 거냐?”라고 묻기에 나는 “여기서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요?”라고 입을 열었다. 그는 내 심리 상태를 눈치채고 “우리는 성(省) 정법위를 대표해 전향 공작을 하러 온 거다”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이 중앙에서 왔더라도 내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상황을 똑바로 알고 조용히 있어라. 우리 둘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라고 했다. 마 씨는 “우리는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거다”라고 했다. 리커쥐는 눈을 부라리며 “당신이 이러면 집에 돌아갈 수 없다. 내가 말하는데 수란에서 내 눈에 띄지 마라”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당신이 이렇다 저렇다 결정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내 태도가 완강한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나를 감방으로 돌려보냈고, 나중에 쉬헝을 시켜 나를 찾게 했지만 나는 협조하지 않았다. 그들이 교육과에 보고하자 과장 왕인젠(王印堅)은 내 앞에서 인면수심의 모습을 보이며 “당신은 전향해야 한다. 내가 줄곧 당신에게 잘해줬는데 왜 자꾸 나와 엇나가는가. 당신은 4개월만 있으면 집에 가는데 그렇지 않으면 중대로 내려보내 노동을 시키겠다”라고 말했다. 나는 “왕 과장님 고맙습니다”라고 말했고 그는 감방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이렇게 감옥을 나오기 전까지 나와 추구이란은 매일 사악하게 깨달은 자와 감시조의 감시를 받으며 사부님과 대법을 모독하는 동영상을 강제로 봐야 했다. 내가 집에 돌아온 후 추구이란이 중대로 내려가 노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전에 겪은 박해 요약

1999년 9월, 나와 아내, 작은아들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아내와는 천안문 광장에서 헤어졌고, 작은아들은 다른 수련자와 천안문 광장에서 가부좌하고 연공하다 납치됐다. 현지 악당들은 작은아들에게 수갑을 채워 현지로 압송했다. 아내는 다시 천안문에 가서 연공하다 납치돼 수란 구류소로 압송됐으나 이후 담을 넘어 탈출했다. 나중에 또 베이징에 가려다가 지린시 기차역에서 납치됐고 수란시 구치소로 끌려가 1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고 박해받았다.

같은 해 12월, 광저우에서 나와 딩옌(丁豔, 박해로 사망) 수련자는 광둥성 공안청에 함께 납치돼 톈허(天河) 구치소에 감금됐다. 20일 후 현지 경찰 장리타오(姜立濤)가 나를 데려왔고 공안국에서 세뇌반으로 이송됐으나 세뇌반에서 나는 정념으로 탈출했다.

2000년 7월, 쓰촨성 청두(成都)의 한 수련자 집에서 청두 진뉴(金牛)구 공안국에 납치돼 진뉴구 구치소에 감금됐다. 묵비권을 행사했기에 한 달 후 청두 수용심사소로 이송됐으나 사부님의 보호로 탈출했다.

2001년 현지 수란시 바이치진 ‘610사무실’(중공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은 현지 수련자 4명을 610 사무실에 가두고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게 강요했으며, 1인당 100위안의 보증금을 내고서야 풀어주었다.

2002년 바이치진 파출소는 나를 다시 납치했으나 인맥을 통해 조건 없이 풀려났다.

2003년 수란시 공안국은 대규모 경찰 병력을 출동시켜 아내와 아들을 납치하고 가택수색과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경찰 류쉐빙(劉雪冰)은 13살 난 아들의 머리채를 잡고 몹시 때린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내는 경찰 리줘(李卓)에게 자백을 강요당하며 심한 고문을 받고 공안국으로 압송됐는데, 그들은 아내가 공안국 3층에서 뛰어내리도록 몰아넣었다. 아내는 갈비뼈 6대가 부러지고 골반 압박 분쇄 골절로 생명이 위독해졌다. 나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2004년 5월, 나와 아내, 작은아들은 쓰촨성 메이산(眉山)시의 큰아들 거주지로 가서 생활했다. 같은 해 11월 내가 현지 수련자와 만날 때 메이산시 국보, 공안에게 납치돼 가택수색을 당했고 아내는 불법적으로 한 달간 감금됐다. 나는 메이산시 둥포(東坡)구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가 이후 3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고 쓰촨성 몐양(綿陽)시 신화(新華) 노동수용소로 납치됐으며, 그 기간에 법을 실증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2008년 나는 베이징에서 의전, 사회, 기획, 행사 일을 했다. 2010년 임시 거주증을 발급받을 때 하이뎬(海澱)구 융펑(永豊) 파출소 경찰이 우리집에 들이닥쳐 박해를 가하려 했고, 나중에 경찰은 주민센터를 조종해 나를 감시하며 베이징에서 추방하려 했다.

2012년 고향으로 돌아와 의전 행사를 열어 고향 사람들의 큰 사랑과 인정을 받았다. 행사 연회 자리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해 사람을 구했다. 한번은 지방세무국 친구 아들의 결혼 피로연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했는데, 연회석에서 식사하던 사람 중 한 명이 바이치진 610 우두머리였다. 당시 이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나 이후 수란시 610에 신고했다. 그는 바이치진 마을 당지부 서기 회의에서 나를 수란시 파룬궁의 우두머리이자 중점 감시 대상자라고 말했다. 내가 그 읍과 마을에 살고 있지 않았기에 마을 당지부 서기는 내게 알리지 않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누설했고 친척과 친구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2016년 수란시 610은 파터진 장터에 파룬궁을 헐뜯고 모독하는 전시 게시판을 설치했다. 작은아들은 이를 보자마자 사람들 앞에서 즉시 전시 게시판을 찢어버렸고, 파터 파출소에 납치돼 20일 구류 처분을 받았다.

지린성 궁주링 감옥은 궁주링 시내 동부 외곽 궁예(工業)대로 2289호에 위치해 있다. 지난 20여 년간 억울하게 수감된 파룬궁수련자들에게 수많은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박해를 가했으며, 온갖 수단으로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며 강제 세뇌 등 방식으로 파룬궁수련자들을 짓밟고 진선인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명혜망 통계에 따르면, 궁주링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자는 최소 량전싱(梁振興), 마잔팡(馬佔芳), 차이푸천(蔡福臣), 장후이(張輝), 쉬후이젠(徐會建), 왕언후이(王恩慧), 양바오썬(楊寶森), 류칭톈(劉慶田), 바이징즈(白晶志), 천롄둥(陳連東), 저우지안(周繼安), 장쯔유(張子友), 류옌룽(劉延龍), 장융(姜勇), 장샤오톈(姜嘯天), 왕리궁(王立功), 류장(劉江) 등이다.

 

원문발표: 2026년 3월 2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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