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랴오닝성 대법제자
[명혜망]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한 지 20여 년이 됐습니다. 성격과 외모부터 처세 방식까지 제 몸과 마음은 그야말로 상전벽해와 같은 거대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법을 얻기 전후의 인생 경험을 조금이나마 적어 내려가며, 위대한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은혜에 감사를 표하고자 합니다.
1. 쓰디쓴 세월
제가 어릴 때 아버지는 ‘취로구(臭老九, ‘냄새나는 아홉 번째 놈’, 문화대혁명 시기 지식인에게 강제로 씌운 차별적 호칭)’였고 어머니는 ‘지주 부농’ 출신이라는 이유로 우리 가족은 외딴 농촌으로 하방(下放)됐습니다. 가난하고 폐쇄적인 산골짜기에서 저는 억눌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병원에 갈 자격조차 없었던 외할머니와 마을 병원에서 주사 과량 투여로 숨진 여동생, 이렇게 두 명의 가족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텃밭을 두고 이웃과 싸우다 산기슭으로 밀려 떨어져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온몸에 병을 달고 살게 됐습니다. 저와 오빠는 영양 부족으로 어릴 때부터 키가 작고 왜소했습니다. 아버지는 농촌에서 능력을 발휘할 곳이 없었고, 생활을 나아지게 하려고 때로는 살쾡이와 쥐까지 잡아먹어야 했습니다. 척박한 생활 환경 탓에 온 가족의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훗날 도시로 이사한 후에도 저는 학교와 직장에서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은 ‘임대옥(林黛玉, 소설 홍루몽의 연약한 여주인공)’이 됐습니다.
그때 제 몸은 정말 허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비쩍 말라 가련해 보였기에 친구들은 저에게 ‘마른장작’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아버지는 큰딸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셨습니다. 당시에는 걷는 것만으로도 지쳤고 조금만 멀리 걸으면 배가 아팠습니다. 자전거를 타면 손에 힘이 없어 핸들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길가 밭으로 자주 넘어졌습니다. 조금이라도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바로 설사했고 편두통, 부비동염, 관절염, 신경쇠약 같은 자잘한 병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고 양방에서 한방으로, 처방약이 떨어지면 민간 비방으로, 날마다 양약은 병째로 삼키고 한약은 사발째로 들이켰지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직장에 다닌 지 얼마 안 됐을 때 상급 지도자가 업무 검사를 나왔다가 저를 보고 부서장에게 물었습니다. “이 직원 큰 병이라도 있는 건가요? 어쩜 이렇게 말랐어요? 어서 병원에 보내요, 늦으면 안 됩니다.” 그때 저는 하루 종일 멍하니 흐리멍덩한 상태였고 사는 게 정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결혼 후에도 몸이 약해 임신을 해도 두 번이나 유산했습니다. 세 번째 임신에서는 열 달 내내 거의 하루 종일 누워 태아를 지키려 했으나 결국 출산 때 사산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운명’이라는 말의 냉혹한 실체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왜 기뻐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인생에 그토록 많은 무상한 일들이 갑자기 닥쳐오니 스스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고, 웃지도 못했으며 너무 기뻐하지도 못했습니다. 웃음소리가 채 그치기도 전에 불행한 일이 또 찾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몸이 허약했기 때문인지 제 성격은 매우 편집적이고 고집스러웠습니다. 스스로 고고하다 여기며 거만했고 말투는 신랄하고 매몰찼습니다. 우울해서 잘 울고 자주 신경질을 부리던 이런 ‘임대옥’에게는 아무도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고 건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공무원이었는데 일하면서 사업가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돈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덕도 품위도 없다고 여겨 그들에게 말할 때도 불친절하고 강압적으로 대했습니다. 돈 없는 사람들은 자존심도 버리고 작은 이익을 위해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다고 여겨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매우 반항적으로 굴며 존중할 줄 몰랐고 동료들에게도 까다롭게 굴어 말이 조금만 안 맞으면 더는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친척들도 수준이 낮고 탐욕스럽다고 업신여겼습니다. 남편 쪽 친척들과는 어울리기 싫어 점점 소원해졌고 친정 친척들도 보면 짜증이 나 왕래가 드물었습니다. 저는 주변 사람들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었으며, 스스로도 불행하고 남에게도 기쁨을 주지 못하는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2. 법을 얻어 다시 태어나다
1997년 어머니는 여동생의 병을 고치려 기공사들을 많이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운 좋게도 대법을 만나 지금까지 수련해 오고 계십니다. 그때 저도 대법 책을 봤지만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 후 특별한 일 하나로 인해 이듬해에야 수련의 길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1998년의 일입니다. 부모님이 불치병에 걸린 막내 여동생의 병을 고치려 기공사들을 많이 찾아다녔는데, 그중 한 명이 그 지역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외지에서도 성·부급 관리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치료를 받으러 왔고 치료비도 매우 비쌌습니다. 그때 저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그 기공사는 저를 보자마자 기어이 진료해주겠다며 앞으로 제 처지가 얼마나 험난해질지 이야기하더니, 자기 집 창고 같은 곳으로 저를 데려가 불순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앞으로 제 병이 여동생보다 더 심각할 것이고 어느 특정 부위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니 자기한테 배우면서 평소에 술을 많이 마시라고, 많이 마실수록 좋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가 속셈이 불순하다는 걸 알았지만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갑자기 마음속으로 사부님이 떠올랐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아직 사부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지만 언젠가 반드시 사부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람의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니 제발 도와주세요!’ 이 한 가지 생각뿐이었는데, 그 남자는 즉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의자 위에 푹 주저앉더니 온몸에 땀을 흘리며 황급히 가족을 불러댔습니다. “빨리! 빨리! 나 기력이 빠졌어. 얼른 국수 한 그릇 끓여와. 빨리 이 사람 내보내!” 그러더니 저의 아버지를 향해 큰 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당신은 성의가 없어요! 왜 이런 사람을 데려왔어요? 당장 나가요! 나가라고요!”
집에 돌아온 저는 대법 서적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사부님 사진 앞에서 말했습니다. “사부님, 저 이제 정식으로 대법을 배우겠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은 굳건했습니다. 저는 대법제자로 태어난 사람이고 사부님의 제자이니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거침없이 파룬따파 수련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수련한 지 얼마 안 돼 몸이 완전히 건강해졌습니다. 걱정 많고 예민했던 ‘임대옥’이 몸이 건강하고 낙관적이며 명랑하고 온화하며 선하고 기꺼이 헌신하는 대법제자로 거듭났습니다.
시어머니 댁에 가도 제가 밥을 했고 부모님 댁이나 우리집에서도 제가 밥을 했는데 불평 없이 즐거웠습니다. 몸을 굽혀 예전에 제가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누이의 신발 끈을 매줬고, 병중의 시누이 남편이 코를 풀고 가래를 뱉은 더러운 휴지 뭉치를 건네주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병업 고비에 처한 수련생의 대변을 치워주기도 했고 오래된 수련생이 그릇에 남긴 국수를 먹기도 했습니다. 수련 전에는 결벽증이 조금 있었던 저였지만 수련 후에는 이런 일들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됐습니다. 저의 변화를 본 주변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것들은 수련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예전에는 기름진 것을 조금만 먹어도 멀리 나가지 못했습니다. 화장실을 제때 못 찾을까 봐 걱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추위를 매우 많이 탔는데, 이후 수련생과 함께 눈 덮인 겨울 날씨에도 진상을 알리며 3~4시간씩 서 있었는데도 따뜻함이 느껴졌습니다. 원래는 피부가 희다 보니 햇볕을 유독 두려워했는데 지금은 햇볕 아래 서서 진상을 알려도 태연자약합니다.
한번은 버스에 막 올라탔을 때 한 노인이 갑자기 어지럼증으로 정신을 잃고 뒤로 꼿꼿하게 쓰러지려 했습니다. 버스 안에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일제히 한쪽으로 비켜나 그가 쓰러질 공간을 만들어줬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뒤에서 두 손을 뻗어 그를 안았고 또 다른 마음 착한 분도 손을 뻗어 옷을 잡아줘 노인이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키가 큰 그 노인은 100여 kg은 됐을 텐데 제가 뒤에서 가뿐하게 그를 안을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절대 있을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진상을 알리다가 채소를 산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무거운 손수레를 버스에 올리고 내리는 것을 힘겹게 하는 모습을 보면 대신 올려주고 내려줬는데도 아주 거뜬했습니다.
중국공산당(중공) 바이러스가 전국 국민들에게 ‘양성(확진)’의 물결을 몰고 올 때도 우리 가족은 모두 안전하고 건강했으며 아는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두르며 놀라워했습니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수련해줘서 감사해요. 덕분에 우리에게 긍정적인 기운이 넘치는 환경이 만들어져 바이러스가 들어오지 못했어요.”
3. 재정권을 내어주다
지금의 중국 가정은 대부분 여성이 재정권을 쥐고 있으며 여자가 집안을 주도하며 결정하는 경우가 절대다수입니다. 저의 남편은 성품이 순해서 결혼 후 돈 문제에 있어 싸움 한 번 없이 당연하게 제가 관리하게 됐고 저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세월 동안 집안의 재정권은 모두 제 말 한마디로 결정됐습니다. 남편이 시어머니나 그쪽 친척들에게 돈을 쓰면 저는 내키지 않아 크게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부아가 치밀어 그를 친척들 앞에서 민망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수련 후 저는 가정 안에서의 이런 강압적인 태도가 전통문화에 어긋나는 것이며 중공 악당 문화에 의해 변질된 습관과 관념이 만들어낸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재테크를 못하니 당신이 관리해요.” 그는 아직 익숙지 않은 듯 작은 소리로 “알겠어”라고 했습니다. 저는 집안의 재정 상황을 하나하나 알려주고 돈의 큰 부분을 그의 카드로 이체해 그가 좀 더 자유롭게 돈을 쓰고 어르신들께 더 편하게 효도할 수 있게 했습니다. 시댁에 크고 작은 일이 생기면 그가 미처 기억 못 할까 봐 때때로 돈을 써야 할 곳을 알려줬는데, 지금은 제가 직접 대신 챙기게 됐습니다. 할머니, 시어머니, 시숙, 시숙모, 큰시누이, 작은시누이, 오빠 내외, 조카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돈 쓰는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만약 수련 전의 그 의심 많고 사소한 일에도 끝없이 집착하던 저였다면 절대로 집안 재정권을 내놓지 않았을 것이고 남편도 감히 받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제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집 재정은 투명하며 부부 사이에 ‘비밀 금고’를 따로 숨겨둘 필요가 전혀 없어졌습니다.
한번은 남편 직장에서 친목 행사를 열면서 가족 대표 몇 명을 초대하고 큰 돈봉투도 준다고 했는데, 남편은 저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잡담하다가 그 이야기가 나오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내가 동료들에게 우리 아내는 아예 못 온다고 했어. 10만 위안을 줘도 안 올 거라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제가 돈에 대해 보였던 태도가 그에게 그런 인상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고, 또 수련 후 제 인품이 변한 모습이 가족들에게 놀라움을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누군가가 ‘대법제자들이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알리는 것은 배후에서 어떤 사람이나 어떤 나라가 돈을 대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을 때 남편에게는 그 유언비어가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대법을 배우는 사람은 남의 돈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법 항목에 돈을 써야 할 때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때로는 소모품을 사는 것도 도와줬습니다. 특히 음성 전화로 사람들을 구하던 시기에 저는 여러 대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고 매달 통화요금만 해도 1~2천 위안이 들었으며 경제 형편이 어려운 수련생을 위해 전화 카드를 수백~수천 위안씩 사주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돈들이 그 자체로 대법의 자원이며 대법으로 사람을 구하는 항목에 쓰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내놓는 것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은 사부님의 것이고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내려주신 은혜입니다. 사실 우리집에 거창한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도 구체적으로 얼마나 있는지 자주 확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련인에게는 충분합니다.
4. 사부님이 내려주신 하늘처럼 큰 담력
일찍이 ‘지주 부농’으로 분류된 어머니와 ‘취로구’였던 아버지는 서로 다른 시대에 중공의 박해를 받았고 그분들의 마음은 늘 조마조마 했습니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자란 저는 비록 고집스럽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자기보호를 배웠고 분수를 알았으며, 일을 만나면 두려워하고 심지어 공포스러워했습니다. 성격 속에 매우 나약하고 겁 많은 면이 있었습니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로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파룬궁이라는 세 글자만 나오면 본능적인 반응이 이랬습니다. ‘아직도 저걸 수련한단 말이야? 집도 필요 없어? 목숨도 필요 없어?’ 이런 붉은 공포 박해 환경 속에서 수련하려면 정말로 약간의 담력이 필요했습니다.
기억하건대 제가 처음으로 집 밖을 나서 자료를 배포할 때는 주변의 모든 눈이 저를 주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거리에 나가 낯선 사람에게 진상을 알릴 때는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처음으로 휴대폰을 들고 진상 그림 문자를 보낼 때는 손이 떨렸고, 처음으로 진상 음성 전화를 걸 때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처음으로 직접 편집한 진상 자료를 인쇄했을 때는 온몸과 얼굴이 잉크투성이였습니다. 처음으로 수련생과 함께 중공의 생체 장기적출 진상 전단지를 붙이러 나갔을 때 우리 둘은 울면서 일했습니다. 그때 그 일은 우리의 심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고 이토록 잔인한 악행이 인간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한동안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사악한 환경 앞에서 우리 둘은 서로 말없이 눈빛을 나눴습니다. 무섭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무서워도 극복해야 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굳건히 해나가야 했습니다.
한번은 수련생이 병업으로 입원해 있는 동안 제가 우리 둘의 휴대폰 십여 대를 메고 나가 음성 전화를 걸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다가 층층이 칸이 나뉜 가방에서 휴대폰들을 꺼내 손에 올려놓고 작동 상태를 확인하며 번호 구간을 다시 선택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집중하다가 고개를 드니 눈앞에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고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경찰이 저를 뚫어지게 보며 제 손에 든 휴대폰들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를 바라봤습니다. 매우 평온하게 무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계속 작동시켰습니다. 신호등이 바뀌자 경찰차가 떠났습니다. 그제야 제 가슴이 쿵쿵 마구 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빠르게 자리를 피해 뒷길 옆에서 한참을 마음을 가라앉힌 후 다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순간 사부님께서 제 마음을 붙잡아 주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흔들림 없이 안정되게, 위험을 만나지 않게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저에게 하늘처럼 큰 담력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2015년 저는 수련생들과 함께 실명으로 ‘장쩌민(江澤民) 고소’에 참여했습니다. 그때의 생각은 대법제자로서 인간 세상의 정의를 행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사부님의 정법(正法) 노정이 거기까지 나아간 것이었고 각 공간에서 수많은 사악한 요소들이 제거됐기 때문이라는 점을 점차 깨달았습니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마두(魔頭)가 기소된 후 진상을 알리는 효과가 즉각적으로 크게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저 자신이 느낀 것은 이랬습니다. 이전에 찾아갔던 몇몇 안면 있는 가게들에서는 아무리 말해도 주인이 꿈쩍도 않더니, 그 이후에는 똑같은 말 몇 마디에도 바로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를 받아들였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진 것 같았습니다. 반발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들을 수 있었으며 들으려 했고 이해할 수 있었으며 이어서 삼퇴를 선택했습니다.
장쩌민 고소 얼마 후 수련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잠시 이 지역을 떠나야 할 것 같으니 저도 당분간 출근하지 말고 다른 곳에 가서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사악함이 만들어낸 공포 분위기는 정말이지 언제든 잡혀갈 것 같은 느낌을 주어 저는 출근할 때도 치마 대신 긴 바지를 입었습니다. 남편도 저를 설득하며 신분증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그건 안 돼요. 내가 한 일이고 나는 도장도 찍었어요. 안심하세요. 저는 사부님이 관리하세요.” 압박이 아무리 커도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하는 일은 하루도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수련 경지에서는 법리 인식에 한계가 있어 인쇄기와 일부 물건들은 옮겨두고 전자책과 진상을 알리는 데 쓰는 휴대폰만 남겨 계속 음성 전화를 걸러 나갔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그것들을 숨겨두고 주말과 공휴일에도 쉬지 않고 계속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부님께서 다시 한번 하늘처럼 큰 담력을 키워주셨습니다!
5. 복음을 전하다
처음 사람들을 마주하고 진상을 알리기 시작할 때 저는 체면을 무척 중시했고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싸늘한 표정이었습니다. 욕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미쳤냐?”, “저리 비켜!” 같은 말들, 팔을 잡아끌며 파출소에 가자는 사람,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람, 깔보는 사람, 귀찮아하는 사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도 반응을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 속으로 화가 치밀었습니다. ‘어쩜 이렇게 고마운 줄을 모를까. 나는 평생 대접받고 살았지 이런 적이 없는데. 당신을 구하려는 게 아니었다면 당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 내가 돈이나 물건을 요구했어? 파룬궁이 당신한테 뭘 해코지했어? 정치질을 하려면 당신 같은 사람을 찾겠어?’ 이런 선하지 않고 다투려는 마음으로는 당연히 사람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심성이 조금 높아지고 나서 잘못됐음을 알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찾고 마음속으로 그 사람에게 미안함을 전했습니다. ‘수련이 부족해 당신에게 진상을 이해시키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수련을 더 잘한 수련생을 또 만나 제대로 알게 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진상을 알리고 돌아와 가족에게 몇 마디 하면 그들이 말했습니다. “아이고 정말 쉽지 않겠네! 왜 매일 사람들한테 작은 소리로 부탁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이때도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진상을 알리는 출발점이 잘못된 건 아닐까, 자세가 잘못된 건 아닐까, 사람들에게 당당하고 정정당당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것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법이 사람을 구하는 것이지 우리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진상을 알리는 일이 점차 성숙해졌습니다. 사부님의 정법 노정이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지금은 사람들을 대하며 진상을 알리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소리치는 사람도 줄었고 거부하는 사람도 줄었으며 간혹 삼퇴를 안 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리를 떠났습니다. 대부분은 진상을 들으면 바로 삼퇴하고 감사함을 나타냈습니다.
한번은 한 아주머니에게 진상을 다 알려주고 떠나려 할 때 그녀가 말했습니다. “잠깐만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저를 한번 안아줄 수 있어요? 안아보고 싶어서요”라고 했습니다. 우리 둘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로를 안고 상대방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이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깊은 인연인가요! 사부님 감사합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이 어쩜 이렇게 듣기 좋아요. 다 듣고 나니 정말 편안해졌어요.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일부러 교외에서 버스 타고 시내에 산책하러 왔는데 지금 기분이 정말 좋아졌어요. 이제 집에 돌아가야겠어요!” 버스 정류장에서 진상을 알릴 때 사람들이 진상을 알게 되면 매우 감사해하며 떠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보통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르는 사람이 됐고 버스에 올라서도 차 문 안에서 저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버스 밖에 있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친척 배웅해요?” 저는 “네”라고 대답하고는 이 ‘친척’에게도 진상을 알렸습니다.
한번은 한 아저씨를 만났는데 그가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자녀가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나랑 사돈 맺읍시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우리집에 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결벽증이 있었던 저,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았던 제가 지금은 농민공에게도 노인 고물상에게도 진상을 알리는 데 조금의 거리낌도 없습니다. 때로는 바닥에 앉아 알리기도 하고 때로는 걸으면서 알리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빠르면 저도 빠르고, 느리면 저도 느립니다. 발걸음이 가볍고 조금도 지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말했습니다. “좋은 사람이 당신네들만이에요? 저도 믿는 건 없지만 나도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말했습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게다가 정말 대단한 좋은 사람이에요.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이렇게 자신을 다스리며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또 어떤 이는 “저는 당신들 것을 믿지 않아요. 당신의 이념을 억지로 심어주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당신의 생각을 매우 존중해요. 저는 그저 제 건강하고 행복한 비결을 당신과 나누고 싶을 뿐이에요. 진선인(眞·善·忍)이 얼마나 좋아요. 파룬궁은 불법(佛法)인데 불법을 박해하면 하늘의 벌을 받아요. 저는 그저 훗날 당신이 행운아들의 대열에 서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럴 때 그녀들은 대개 웃으며 흔쾌히 삼퇴를 했습니다.
수련은 처음부터 사람과 신(神)의 갈림길에 관한 일입니다. 이 길을 걸어오면서 보통 사람이었던 과거로부터 지금의 수련인이 되기까지, 저는 사부님에 대한 감사를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부님의 노고와 감당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처음 대법 수련에 들어선 초심이 무엇이었든 지금 제가 느끼는 가장 근본적인 집착은 사람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과와 사람의 법칙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면 광대무변한 대법의 법리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밭을 적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불법(佛法) 수련이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반본귀진(返本歸眞, 선천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하여 정과(正果)를 이루는 대법입니다. 이런 기회와 인연을 놓친다면, 오늘까지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슬픈 일입니다.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모두 대법이 바꿔준 것입니다. 대법의 진선인 기준에 따라 사람으로서의 일을 하고 항상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헤아리며 더 많은 사람들을 선하게 대하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편안합니다. 인생에는 인연이 있고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는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에 세상의 명리와 정(情)과 원한을 위해 더 이상 다투지 않고 운 좋게 수련의 대도(大道)에 오를 수 있었기에 저는 날마다 마음이 편안합니다.
비할 데 없이 위대하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를 반본귀진의 길로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사부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6년 3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3/11/496619.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3/11/496619.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