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6년에 어머니를 따라 대법 수련에 들어섰는데 그해 아홉 살이었습니다. 이생에 아직 세상의 오염에 깊이 물들지 않은 어린 시절에 대법을 얻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29년 동안 비록 정진하지 못한 때가 많고 정진하면서 착실하게 수련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할 많은 기회를 놓쳤지만,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는 제 마음속에 뿌리내렸습니다. 저는 생명이 법을 위해 왔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으며 반드시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1999년 7월, 하늘을 뒤덮는 사악한 박해가 시작되자 어머니는 베이징으로 청원을 가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유일하게 걱정된 것은 저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제 의견을 물으셨을 때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안심하고 대법을 실증하라고 매우 확고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제 생각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대법과 사부님은 너무나 좋으시고 대법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었을 수도 있습니다(어머니는 중병으로 수련에 들어서셨고 수련 후 병 없이 몸이 가벼워지셨습니다). 사람은 은혜를 저버리면 안 되니 반드시 대법을 수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일념 때문에 어머니께서 청원하신 후 친척들이 왜 어머니를 지지했느냐고 저를 비난했을 때 저는 사부님의 보호를 깊이 느꼈습니다. 비록 낮에는 엄청난 압력 때문에 울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매일 밤 구름 위에서 자는 것 같았고 심신이 편안하고 매우 행복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구치소에서도 수련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저는 어머니가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그해 저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비록 집안이 불안정했지만,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갈 때 저는 중점 학교 합격선보다 10여 점 높은 성적으로 성(省) 중점 중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그 후 어머니가 떠돌이 생활을 하시는 바람에 저도 다른 도시로 전학 가서 공부하게 됐고 점차 수련 환경을 잃었습니다. 비록 마음속에 대법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법공부와 연공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세속의 온갖 나쁜 것에 끌려 내려갈 때마다 마치 마법 같은 힘이 저를 올바른 길로 다시 이끄는 것을 느꼈고, 이런 상태는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학업 압박과 미래에 대한 막연함에 직면해 저는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저 자신에게 편지를 썼고 반드시 대법을 굳건히 수련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제 마음을 보시고 저의 복통, 각막염 등 병증을 말끔히 없애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더 이상 가족을 따라 수련하는 어린 대법제자가 아니라 독립적인 사고를 통해 끝까지 굳건히 수련할 진정한 대법제자가 되겠다고 제 생명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때 저는 『전법륜(轉法輪)』과 사부님의 다른 설법을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이 읽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변 친구들에게 진상을 말했고 몇몇 친구들은 진상을 이해한 후 모두 삼퇴(중공의 3가지 조직 탈퇴)를 했습니다. 한 친구는 여러 번 진상을 들었지만 탈퇴하려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숨이 막히고 반쯤 정신을 잃는 상태가 됐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황급히 학교 의사를 부르는 동안 저는 그녀의 귓가에 끊임없이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우라고 당부했습니다. 학교 의사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제가 물었더니 그녀는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울 때 몸 위로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면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건 후 그녀도 삼퇴를 했습니다.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 세 명은 진상을 이해한 후 저와 함께 법공부와 연공도 했습니다. 한 친구는 사부님 홍음(洪吟)의 ‘사람 되기(做人)’를 영어 교과서 첫 장에 베껴 쓰고 늘 외웠습니다. 다른 한 친구는 대학 입시에서 대법을 비방하는 문제가 나온다면 차라리 0점을 받더라도 답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들 모두 각자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한번은 국어 수업 시간 전 3분 스피치 차례가 됐는데 저는 미리 수련생들에게 발정념 해달라고 부탁했고, 연설 중에 칠판에 ‘진선인(眞·善·忍)’ 세 글자를 쓰고 멀리 계신 사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국어 선생님은 학교 정치 주임이었는데 평가하실 때 감격하며 그 세 글자에 동그라미를 치고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 글자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자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이 세 글자대로 행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수업 후 진상을 이미 이해하고 있던 한 친구가 제게 와서 제가 사부님께 감사함을 표현할 때 자신도 눈물이 나려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의 마음은 너무나 순수했습니다. 방학 때마다 먼저 수련생들에게서 진상 자료를 한 보따리 받아 진(鎭)으로 가 배포했습니다. 어머니는 밤에 눈이 잘 안 보이셔서 자전거를 밀고 시골길을 천천히 가셨고 바구니에는 자료가 실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자료를 들고 양쪽 집집마다 배포하고 다 배포하고 나면 다시 자전거 바구니에서 꺼냈습니다. 시골집은 대부분 단독 주택이었고 길이 고르지 않고 불빛도 없었지만 저는 환하게 느껴졌고 그 속을 오갔습니다. 가끔 개가 짖어도 무섭지 않았고 자료를 빨리 다 배포한 후 떠났습니다. 비록 어려서부터 대법을 얻었지만 저에게는 그 시절이야말로 수련의 초기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가정환경 때문에 저는 정상적인 대학 진학 코스를 밟지 못했습니다. 비록 대부분 시간을 혼자서 외지에서 일했지만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는 항상 저를 보호하고 보살피셨으며 여러 수련생을 안배해 저를 돕고 수련 환경을 만들어주셨습니다. 2009년 저는 불법 감금됐는데 당시 구치소에는 저를 포함해 세 명의 대법제자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끊임없이 법을 외우고 발정념하고 같은 방에 있는 수감자들에게 진상을 말해 그들이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게 했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기적 같은 일이 나타났는데 저는 세 차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지만 모두 신체 부적합을 이유로 수용이 거부됐습니다[이것은 사부님께서 제자를 보호하기 위해 연화(演化)하신 가상(假象)인데 사실 그때 몸이 불편한 느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노동수용소로 가는 길에 저는 매우 평화롭게 경찰에게 가족, 생활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둘만 있을 때 그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정말 언젠가 지진이 와서 앞에 벽이 무너지려는 순간,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기억해 재앙을 피한다면 오늘 대법제자가 한 모든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진심으로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 말씀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0여 년의 수련 길, 법 속에 젖어 있으면서 세 가지 일을 잘한 기쁨도 있고 해이해져 진상을 알릴 인연을 놓친 후회도 있습니다. 이렇게 비틀거리면서 왔습니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결코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내내 저를 보살피시고 깨우쳐주셨습니다. 그 당시 대법 어린 제자는 어느새 청년이 돼 어린 제자의 어머니가 됐습니다.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동시에 어린 제자를 잘 양육해야 할 중요성도 깊이 느낍니다. 이에 제자는 자비롭게 중생을 구원해주신 사부님의 은혜에 절하며 감사드립니다. 더 많은 세인이 하루빨리 진상을 이해하고 이 만고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5년 12월 3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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