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기록: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이다

글/ 중국 후난성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청소년 시기에 대법을 얻은 대법제자다. 대법의 불광 속에서 이미 26년을 걸어왔다. 그동안의 수련 체험과 깨달음을 글로 써서, 대법의 위대하고 광대한 위덕과 사부님의 무량한 자비를 증언하려 한다.

대법을 굳건히 믿고 흔들리지 않다

1999년, 대법(大法)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을 때도 나는 단 한순간도 대법에 대한 올바른 믿음(正信)을 흔들리지 않았다. 텔레비전·뉴스·신문이 미친 듯이 대법을 모독하고 왜곡했으며, 주변 친구와 동료들도 떠들썩하게 말하며 여러 번 수련을 그만두라고 권했지만, 나는 대법이 초범적이며 사부님이 사람을 제도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2000년 7월, 사악이 미친 듯이 박해할 때 혼자서 베이징으로 가 대법을 실증하는 길에 올랐다.

베이징에서 사흘을 지냈다. 어느 날 밤 공원에서 수련생들과 함께 있을 때 현지 파출소에 납치됐고, 돌아온 후 37일 동안 불법 구류된 뒤에야 풀려났다. 당시 단위(직장) 지도부는 나를 해고하려 했지만, 직원 대표들이 반대하며 말했다. “이 청년이 비록 베이징에 다녀오긴 했지만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해고할 수는 없다.” 결국 나는 2년간 관찰 처분을 받았다.

박해받은 주된 원인을 찾다

2003년부터 2005년 사이, 나는 여러 차례 납치됐고 매번 사악은 나를 불법 판결하려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대법의 위엄과 사부님이 주신 정념으로 매번 빠져나왔다. 첫 번째는 31일간 단식·단수했고, 구치소에서 고밀도로 발정념을 하자 사악은 더는 보충되지 못하고 결국 무조건 석방했다.

몇 개월 후 나는 또 납치됐는데, 이번에는 검찰원이 소위 ‘체포’라는 명목으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사부님과 대법을 100% 믿기만 하면 대법은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신념을 굳게 지켰고, 10일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정념으로 빠져나왔다. 그때는 9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상태였다. 석방 당일, 어머니(수련생)가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당당하게 구치소 문을 걸어 나왔다. 그 장면을 경찰과 수감자들이 모두 직접 봤다. 그러나 매번 돌아온 뒤에도 나는 스스로에게 박해받은 이유를 찾지 않았고, 집착을 제거하지도 못했다.

2005년 상반기 어느 날, 단위의 ‘610 사무실’ 악인들이 검찰원을 불러 나를 소위 ‘수감’하려 했다. 나는 단위 숙소에서 그들을 마주쳤고 그 자리에서 바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차로 쫓아왔는데, 검찰원 사람들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오직 610 인원들만 내려 나를 붙잡았다. 그때 차 안의 검찰원 사람들이 “우리는 정말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나는 자신의 근본 집착과 사람 마음을 찾지 못했고, 결국 구세력에게 빌미를 잡혀 4년의 불법 판결을 받았다. 이후 꾸준히 법공부를 하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며, 반복된 박해의 원인을 분명히 찾게 됐다.

첫째, 나는 원망심을 버리지 못했다. 단위의 610 인원과 간부들이 공안·검찰·법원보다 더 사납게 대법을 박해한다고 느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고, 이것을 사람과 사람 간의 박해로만 인식해 강철을 녹이는 자비와 의지를 발하지 못했다.

둘째, 지역 사회에 악을 폭로하는 일이 충분치 않았다. 어떤 단위 610 인원이나 향(鄕)정부 직원들은 공검법 경찰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법을 박해했지만, 우리는 그들을 폭로하는 데 소홀했다. 같은 단위 사람,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람의 정’ 때문에 내려놓지 못했다. 설령 하더라도 요점을 정확히 겨누지 못해 악을 소멸하지 못했고, 이 틈을 악이 이용해 자양분과 생존 공간을 얻은 것이다.

셋째, 나는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 정·정욕·색욕의 집착이 있었다. 이성과의 부적절한 행동을 한 적은 없지만 때로는 표현이 강렬했고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집착을 실질적으로 수련해 제거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박해를 불러온 원인이었다.

사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회를 잡아 대법을 실증하다

나는 어느 시의 입감센터로 끌려갔다. 차에서 내려 감옥경찰 사무실까지 약 100m 남짓한 거리, 나는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붙잡고 크게 외쳤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파룬따파하오! 세상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을 믿지 마세요! 파룬따파하오! 파룬따파하오!”

내 목소리는 온 감옥 구역 위로 울려 퍼졌고 모든 사람의 심령을 진동했다. 수많은 수감자가 창문에 몰려들어 꽉 메울 정도였다. 그 순간 내 마음은 매우 순수했고 내보낸 에너지도 강했다. 다른 공간에서는 매우 장관이었을 것이라고 느꼈다. 감옥경찰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멈추지 않았다. 감옥경찰은 건장한 죄수 4~5명을 시켜 나를 구타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사부님의 법을 기억하며 순간적으로 고통을 모두 전이시켜 버렸다.

다음 날, 감옥경찰은 ‘사오자(邪悟者, 삿되게 깨달은 자)’를 앞세워 나를 전향시키려 했다.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진상을 말했고 사부님의 일부 법리를 얘기하자 감옥경찰들도 깜짝 놀랐다. 사람은 누구나 깨어 있는 일면이 있으나, 큰 환경에서 사악에게 억압돼 본성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이후 감옥 교육과장이 나와 이야기를 했다. 그는 말하길 “나는 오늘 당신을 ‘전향’시키러 온 게 아니다. 당신의 기본 상황을 알고 싶어서 왔다. 당신이 온 순간부터 우리는 무거운 기운을 느꼈다.”

그는 내가 대법에서 큰 직무를 맡고 있는지 물었다. 사실 파룬궁수련생은 명예·지위를 구하지 않는다. 연공장 보도소장이나 보도원도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보도소장 등 어떤 직책도 맡은 적 없고, 일반 사회에서의 고급 지식인도 아니다. 내가 반(反)박해 속에서 보인 지혜와 비범한 용기는 모두 대법 수련을 통해 얻은 것이며 사부님이 주신 것이다. 이는 일반인들이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두 달간의 소위 ‘입감 구류’ 기간이 끝날 무렵, 떠나는 날 죄수 우두머리가 나를 문까지 배웅하며 “당신 처음 왔을 때 내가 몇 번 손찌검을 했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여기 감옥경찰들이 당신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보다 더 좋았습니다.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악의 요구와 지시에 협조하지 않고, 법을 실증할 환경을 개창하다

이후 나는 어느 감옥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은 대법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두는 검은 소굴(黑窩)이었다. 모든 대법제자에게 두 명의 감시자가 배치돼 밤낮으로 감시했고, 생활 구역과 복도에는 모니터가 가득 설치돼 있었다. 한 방 안에만도 네 대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대법제자의 모든 행동을 불법적으로 감시했다. 벽과 칠판에는 대법을 모독하는 구호가 가득했다. 매주 두 번씩 대법을 비방하는 영상을 보도록 강요했고, 시청 후에는 감상문과 ‘전향 보고서’를 쓰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대법제자 몇 명은 서로 약속하지도 않았는데도 모두 이렇게 썼다. “파룬따파하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1400건 사망 사례’ 역시 모두 조작된 누명이라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1999년 박해 이전 중국의 파룬궁 수련 인구는 약 7천만 명에 달했고, 1998년 관련 기관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평균 사망률은 1,000명당 6.5명이었다. 이 수치대로라면 7년 동안 파룬궁 수련자 사망자는 백만 명 이상이어야지, 수천 명 수준일 수 없다. 이는 역으로 파룬궁이 얼마나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건강을 회복시켰는지 증명하는 것이다. 또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의 허점에 대해서도 일일이 지적했다. 감옥경찰들은 우리가 쓴 내용을 보고 더는 강제로 비방 영상을 보라고 하지 않았다.

그 후 매일 ‘수형자 행동 규범’을 외우고 그에 따르도록 강요했다. 감옥경찰 사무실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쪼그려 앉아야 했다. 나는 수형자 규범을 외우지도 않았고, 쪼그려 앉지도 않았다. 쪼그리는 행위는 죄를 인정하고 굴복하는 의미가 있다고 느꼈고, 이는 시민의 인격을 모욕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자 감옥경찰들은 나에게 장시간 기립을 시키며 체벌했다. 나는 끊임없이 정념을 발하여 그들 뒤에 있는 사악한 요소를 제거했고, 사악이 보충되지 못하도록 계속 발정념했다. 동시에 감옥경찰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전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한 번도 파룬궁을 ‘사교(邪敎, 사이비 종교)’로 규정한 적이 없고, 중국 민정부와 공안부가 명확히 인정한 ‘14종 사교 명단’에도 파룬궁은 없다. 감옥경찰들의 기세는 점점 꺾였다.

장기간의 단식과 단수로 내 몸은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체벌을 견디는 동안 몸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단 한순간도 발정념을 멈추지 않았다. 밤 10시쯤, 아마도 사부님께서 내가 기준에 이르렀다고 보셨는지, 다른 감옥경찰이 와서 체벌을 중단하라고 하고 방으로 돌아가 쉬라고 했다. 그날 이후, 행동 규범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나는 더욱 고밀도로 발정념을 강화하며 사악한 것이 틈타지 못하도록 했다. 약 열흘 뒤, 나를 감시하던 죄수 한 명이 싸움 사건으로 다른 대대로 옮겨졌다. 그는 그곳에서 대법제자들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악독했고, 감옥경찰의 소위 ‘조력자’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나는 이것이 정념의 힘으로 제거된 것임을 알았다. 그때부터 나의 환경은 훨씬 느슨해졌다.

그 같은 사악한 환경 속에서 나는 반박해를 능동적으로 하지 못하면, 곧 그 안에서 박해를 받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곳에서는 강제로 삭발을 시켰는데 사실 삭발 역시 인격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매번 머리를 자르라고 하면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해 “파룬따파는 좋다”, “대법제자는 죄를 짓지 않았다”, “대법에 대한 모함은 천고의 억울함이다” 등을 외쳤다. 비록 감옥에 불법적으로 끌려왔지만 내 마음속에는 박해의 그림자도, 죄책감도 없었다.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창생(蒼生)을 위해서이며,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높은 층차에서 보면 이는 구원이고, 인간의 가장 낮은 이치로 봐도 우리는 인류의 도덕과 정의, 양심을 지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그 정신적 공헌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다. 우리는 역사 속 이 시기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한 내 인식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았고 따라서 진정으로 털어버릴 수 있었다.

감옥경찰들이 대법을 오해하고 마비된 상태에서 박해할 때, 나는 그들이 너무나 불쌍하다고 느꼈다. 같은 사람인데 그들을 기다리는 결말은 너무도 참혹했고, 그들 역시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의 대상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피를 흘리는 듯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서원을 세웠다. ‘그들이 아직도 구원될 기회가 있다면 나는 그들의 업의 일부라도 대신 짊어지겠습니다.’ 이는 순수하고 선한 염원이었지만 그 때문에 뒤에 더 큰 난이 닥쳤고, 사부님께서 대부분을 대신 짊어져 주셨음에도 나에게는 매우 위험한 일이 됐다. 그래서 웬만하면 이런 발심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나와 수련생들이 끊임없이 진상을 알리고, 발정념하고, 반박해를 하자 온 감옥을 뒤덮고 있던 억압적이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마치 거대한 빙산처럼 서서히 녹아내렸다. 수련생들끼리 서로 말도 나눌 수 있게 됐고 감옥경찰들도 더는 대법제자들을 이상한 눈빛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도 대법제자들이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정념으로 악인의 악행을 제지하다

어느 날 오후, 내 뒤에 앉아 있던 한 수련생이 쉬는 시간을 이용해 발정념을 하고 있었다. 매 정시가 되면 우리는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고 발정념을 했지만, 다만 손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때 옆에 있던 감시자가 수련생의 뺨을 이유 없이 한 대 때렸다. 마침 그 순간 감옥경찰이 들어오자 그는 즉시 일어나 감시자가 이유도 없이 사람을 때렸다고 보고했다. 수련생은 매우 평온한 태도로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감옥경찰은 공정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거만하게 그 수련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앉아! 일어서지 마!”라고 호통쳤다.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감옥경찰의 이런 부당한 행동을 막고자 했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두 명의 감시자가 아무 말도 없이 내 뺨을 두 대 때리며 “이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라고 윽박질렀다. 그 순간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법정건곤(法正乾坤)! 사악전멸(邪惡全滅)!”

목소리는 우렁차고 천둥 같아 온 감옥 구역에 울려 퍼졌다. 감옥경찰과 죄수들은 모두 놀라 멈칫했다. 5~6명이 허둥지둥하며 나를 끌어 감옥경찰 사무실로 끌고 갔다. 그때 나는 정념 하나면 산도 깰 수 있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느꼈다. 감옥경찰은 이를 갈며 주먹으로 내 얼굴을 내리치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일념을 냈다. ‘그 주먹은 그 사람 자신에게 떨어져라!’

내 얼굴에는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막아 준 듯했다. 곧이어 6명의 죄수가 수갑을 가져와 나를 묶고 땅에 눌러 억지로 쪼그려 앉히려 했다. 그때 나를 때리려 했던 감옥경찰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다리와 몸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가슴을 펴고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고 감옥경찰은 두려워하여 죄수들에게 “고개를 눌러! 나를 보게 하지 마!”라고 지시했다. 경찰은 자신이 상황을 잘못 처리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죄수들에게 “앞으로 함부로 사람 때리지 마라. 너희나 대법제자나 다 똑같다”라고 말하며 수습했다. 다음 날, 그 감옥경찰의 얼굴에는 작은 혹이 올라와 며칠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또 한 가지, 매우 신기한 즉각적인 현세현보(現世現報)의 사례가 있었다. 한 감시자 우두머리 죄수가 감옥경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비방 영상을 틀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우리에게 법을 실증하는 데 또 다른 난관을 가져왔고, 특히 새로 들어온 감시자들에게도 해악이었다. 우리는 그 우두머리 죄수에게 고밀도로 발정념을 했다. 약 일주일 뒤, 사부님께서는 현세현보의 한 장면을 연화(演化)해 보여주셨다.

어느 날, 감옥 상급 기관에서 검사를 나오면서 몇몇 상자를 열어 확인했는데 그 죄수가 쓰던 상자에서 플라스틱 병에 담긴 술이 발견됐다. 그날 바로 그는 처벌을 받아 ‘관리수(管事犯)’ 직책을 박탈당했다. 그 이후로 감옥 구역에서는 다시는 대법을 비방하는 영상을 틀지 못했다.

나는 깨달았다. 현세현보는 악인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며 위대한 불법의 위엄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의 정념이 일정 수준에 도달했을 때 이런 현세현보는 계속 나타나며 사악을 질식시키고 진압하여 대법에 대한 손실을 크게 줄여 준다.

정념으로 감옥의 ‘면회 불허’ 규정을 부정하다

나는 검은 소굴에서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고, 감옥경찰들은 나의 어머니 또한 대법을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머니가 면회하려면 반드시 지역의 ‘610 사무실’에서 소위 증명을 발급해 와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매번 아무 증명도 없이 와서 결국 나를 만나고 돌아갔다. 우리는 결코 사악한 요구에 협조하지 않았다. 어느 날 몇몇 죄수들이 나를 폭행했는데, 감옥경찰은 내가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할까 두려워 면회를 허락하지 않으며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거듭 다짐시키려 했다. 나는 말했다. “저는 제가 겪은 상황을 가족에게 사실대로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억울하게 하거나 왜곡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감옥경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찰은 불안해하며 면회를 계속 막았다. 나는 사부님의 가호를 청하며 계속해서 다른 공간의 사악한 요소를 해체하는 정념을 보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고밀도로 발정념을 한 뒤, 어머니도 감옥 책임자를 찾아가 따져 물었다. 어머니는 표준어를 하지 못하고 고향 말을 썼지만 그 굳센 마음과 끈질긴 정성은 감옥 측도 느낄 수 있었다. 감옥 책임자는 “회의해서 결정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라고 말했다. 나와 어머니의 정념 속에서 결국 면회가 허락됐다. 나는 경찰들이 죄수들을 시켜 폭행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그대로 알렸다. 또 한 번 대법의 위엄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나와 다른 수련생들이 끊임없이 진상 편지를 쓰고, 발정념을 하고, 감옥의 사악함을 외부에 폭로하자, 사악은 더는 박해와 강제 전향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2007년, 감옥 내 집중 불법구금 환경은 해체됐고 우리 여러 명의 대법제자는 다른 감옥으로 분산됐다. 그 이후 환경은 이전처럼 악독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서 반박해하며 법을 실증하다

새로운 환경에서 나는 사부님의 최근 설법 중 기억할 수 있는 부분을 베껴 적고, 진상을 이해하는 친구(수감자)를 통해 다른 중대의 대법제자들에게 전달했다. 장기간 사부님의 설법을 볼 수 없었던 일부 수련생들은 소위 ‘전향’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으나, 사부님의 설법을 본 뒤 점차 마음이 안정됐다.

새 환경에서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고, 구세력의 배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나는 단식을 통해 박해에 맞섰다. 그때 가장 큰 소망은 여전히 정념으로 검은 소굴에서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며칠 뒤 교육과 감옥경찰이 나를 불러 면담하며 “뭘 요구합니까? 왜 단식합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오래 마음속에 눌러둔 말을 쏟아내며 엄정하게 말했다. “나는 무죄 석방을 요구합니다. 파룬따파는 무죄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감옥경찰에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뒤에 있는 구세력 요소에게도 전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정념으로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온몸이 가볍고 깨끗하게 씻긴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상적인 환경에서라면 이런 말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지만, 그 특수한 환경에서 이 말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수련으로 쌓은 정념이 기반이 돼야 했다. 수련생들은 내가 단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급히 지지하며, 감옥경찰에게 대법제자를 박해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를 통해 감옥경찰은 대법제자들 사이의 조용한 보조와 헌신적인 협력, 사악에 대한 억제력을 목격하게 됐다.

감옥에서는 연공을 할 수 없고, 본체(本體)가 충분히 연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 단식은 구치소보다 훨씬 어려웠다(구치소에서는 연공이 가능했다). 단식을 시작한 지 나흘째, 아직 천목(天目)으로 볼 수 없었을 때, 사부님께서는 꿈을 통해 깨우침을 주셨다. 꿈속에서 나는 가파른 절벽 아래에 있었고, 위를 바라보아도 정상이 보이지 않았다. 90도에 가까운 절벽뿐이고 붙잡고 오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나는 손에 손오공의 금고봉(金箍棒)과 같은 법기를 들고 당당하게 몇 걸음 내딛자 바로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많은 왕이 둥글게 앉아 있었고 내가 올라오자 하나씩 환호했다. 그 장엄한 광경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꿈에서 깨고 나서 깨달았다. 그 신들은 내가 구원해야 할 중생을 상징하며, 여기에는 감옥경찰과 수감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배경이 있고 모두 법을 위해 온 존재였다.

단식을 시작한 다섯째 날, 몸은 극도로 쇠약해 말조차 힘들고 매 순간이 고통이었다. 그때 감옥에서 양심과 정의감 있는 감옥경찰이 내 상황을 명혜망(明慧網)에 알렸고, 감옥 유선전화도 남겨 가족이 빨리 와서 나를 찾도록 했다. 고향의 한 수련생이 컴퓨터로 이 정보를 보고 바로 내 어머니에게 알려주었다.

사실 어떤 환경에서든, 심지어 가장 사악한 환경에서도 사부님께서는 대법을 도와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생명을 배치하신다. 구세력의 배치가 질서 있게 보일지라도 사부님의 배치는 훨씬 더 질서가 있다. 다만 많은 경우 대법제자의 정념이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긍정적 작용을 하는 존재는 구세력에 의해 억제되어 정면적인 작용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실 우리는 역사 속 이 시기의 주인공이며, 중신(衆神)들도 대법과 우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이후 해외 수련생들이 감옥경찰에게 진상을 알리는 전화도 걸어 좋은 효과를 봤다. 나는 비록 무죄 석방은 되지 않았지만 이후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하는 데 매우 좋은 기초를 마련했다.

감옥경찰에게 진상 편지를 쓰다

나는 새 구역에서 1년 남짓 불법 구금돼 있었다. 그 기간 총 4번 감옥경찰과 상급 지도자에게 진상 편지를 썼다. 첫 번째 편지는 다른 지역에서 막 전송돼 왔을 때 작성했으며, 파룬궁의 기본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두 번째 편지에는 대법이 해외에서 널리 전해진 상황과, 왜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가 필요한지 설명했다. 약 8쪽 분량이었다. 당시 감구 지도원은 편지를 상부로 전달하기를 두려워했다. 나는 편지를 베개 밑에 두었고, 사부님의 배치에 따라 감옥 청소할 때 감옥경찰이 찾아서 제출했다.

세 번째 편지는 매우 포괄적으로 작성됐으며, ‘1400건의 사례’라는 억울한 사건,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의 허점과 의심점, 파룬따파의 세계적 전파와 환영받는 상황, 무엇이 진정한 애국인지 설명했다. 파룬궁수련생이 진상을 알리는 것은 정치 참여가 아니라, 악인의 악행을 제지하고, 일반 대중의 알 권리를 지키며, 인류 사회의 최소한의 도덕과 양심을 수호하는 위대한 정의로운 행동임을 강조했다. 약 12쪽 분량이었으며 감옥경찰은 보고 난 후 더는 전향을 강요하지 않았다.

출소하기 2달 전, 나는 감옥경찰들에게 진상을 보다 상세히 알리기 위해 마지막 진상 편지를 작성했다. 나는 생명이 어디서 와서, 왜 존재하는지, 생명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탐구해도 풀리지 않은 의문과, 오늘날 사부님께서 전수하신 대법이 이를 명확히 보여주었음을 상세히 적었다. 이 편지는 20쪽이 넘었으며 내 무거운 기대와 소망이 담겨 있었다.

편지를 감옥경찰에게 전달하자 그들은 다 읽고 나서 하나같이 웃으며 기뻐했다. 출소 며칠 전, 농구장에서 감구 지도원과 마주쳤다. 나는 “지난번 쓴 편지 읽어보셨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흥분하며 말했다. “봤습니다! 다 봤습니다! 정말 잘 썼더군요. 우리가 감사해야죠! 당신이 쓴 것은 우리가 잘 보관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진심으로 안심하고 마음이 놓였다.

법정인간 시기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제자는 법공부를 잘하고 자신을 잘 수련하며, 앞으로의 수련 길을 안정적으로 걷고, 이 옛 우주와 옛 천체에서 진정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스스로 신이 되어 법을 실증하고 더 많은 중생을 구하며,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 돌아가야 한다.

이상은 개인이 법을 실증하면서 얻은 체험 일부이며 적절하지 못한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발표: 2025년 11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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