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헤이룽장(黑龍江)성 대법제자
[명혜망] 28년간의 수련의 길에서 저는 수많은 난제에 부딪혔지만, 종종 기적처럼 해결되곤 했습니다. 지난 한 해 겪었던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사부님의 위대함과 대법의 초범성을 실증하려 합니다.
1. 사부님께서 자비롭게 제자를 보살피시다
1) 지난해 9월, 저는 노년 수련생을 찾아뵈러 외지에 갔습니다. 그분은 그곳 수련생들과 연락이 닿지 않았으며, 학교에 다닌 적은 없었지만 『전법륜(轉法輪)』에 있는 글자들을 읽을 줄 알았습니다. 다른 대법 책은 보지 않으셨고, 자신이 나이가 많다면서 일부 경서를 두고 싶지 않으시다며 제가 보관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책을 집에 가져와 보니, 이 몇 권의 책은 모두 글자를 수정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살 반 된 손녀를 돌보고 있었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일 세 가지 일을 꾸준히 잘해야 했기에 시간이 너무 빠듯해 글자를 수정할 여유가 없어 매우 난감했습니다.
10월 1일 휴일이 됐을 때, 아들이 저에게 손녀가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니 유치원에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의논했습니다. 저는 기뻐하며 “그럼 보내자”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저에게 글자를 수정할 시간을 주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곧바로 저는 시간을 쪼개 글자를 찾기 시작했고, 작은 병 유백색 접착제를 사서 매일 세 가지 일과 집안일을 하는 것 외의 시간에는 한 권 한 권 정성껏 글자를 수정했습니다. 한 수련생이 제가 너무 바쁜 것을 보고 책 네 권 수정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저는 한 달 남짓 만에 다섯 권의 책을 수정했습니다.
글자를 다 수정하고 나니 한숨 돌릴 수 있었는데 이때 아들이 또 저에게 아이가 너무 어려서 유치원에 가면 계속 감기에 걸리니, 아무래도 할머니가 손녀를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저에게 책 속의 고쳐야 할 글자를 모두 고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시고 정법 노정에 발맞출 수 있게 해주시어 저의 걱정을 덜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렸습니다.
2) 우리 지역의 몇 군데 자료 거점이 경찰의 교란과 파괴를 겪어 현 단계에서는 자료가 없었습니다. 저와 함께 진상을 알리던 수련생은 “어떤 분은 학식이 매우 높아서 진상을 잘 이해하시는데, 그분들이 중국의 진정한 역사를 알 수 있도록 『9평 공산당』(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을 드리면 더 좋을 텐데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호신부(護身符)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다른 지역의 한 자료점 수련생을 만나게 돼 그분에게 『9평』과 호신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희는 다음 만날 시간을 약속했고, 이렇게 자료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됐습니다.
이 수련생과 저는 실은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자료가 필요할 때 사부님께서 그분을 만나게 해주셔서 본래 매우 어렵게 느껴졌던 문제가 금방 해결됐습니다. 사부님께서 다시 저에게 놀라움과 기쁨을 주셔서 저는 사부님께서 제 곁에 계심을 느꼈습니다.
3) 올해 3월 29일 오전에, 저는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것을 몰라 전날과 똑같이 옷을 입고 아침 식사도 하지 않은 채 진상을 알리러 나갔습니다. 결국,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어도 대략 10시 반까지 견뎌내고,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점심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집에 도착한 후 집도 차갑게 느껴졌고, 바쁘게 점심을 준비하느라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식사 시간이 돼 식탁에 앉으니 구토가 나오려고 했습니다. 저는 ‘내일 사촌 동생의 딸 결혼식에 참석해 많은 친척을 만나게 되는데, 어떤 생명도 내 몸을 박해하거나 내가 대법을 실증하고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할 자격이 없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서둘러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앉아 발정념을 했습니다. 그러자 몸이 더욱 차가워졌지만 저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제 몸속의 찬 기운을 배출하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게다가 점심에 전 세계 발정념 시간에 저는 한 시간 넘게 발정념을 했습니다. 점차 몸이 그렇게 차지 않았고 다시 연공과 법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녁 식사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밤 9시쯤 됐을 때, 저는 몸이 이미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느껴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므로 죽 한 그릇을 먹었는데 잠시 후 모두 토해냈습니다. 저는 ‘어디가 법에 부합하지 않는 거지? 내일은 몸이 반드시 정상으로 회복돼야 해. 누락이 있다 해도 난 대법에서 바르게 잡을 것이니 어떤 생명도 내가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돼. 사부님께서 저에게 결정해주세요’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사부님의 도움으로 제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4) 손녀는 태어날 때부터 제가 돌봐주었으며 두 살 반 이후에는 제가 그냥 집에서 돌보고 싶어 저는 아들과 며느리(그들은 자영업을 합니다)와 상의하고 매일 저녁 퇴근 후에 그들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 보통 정오가 다 돼서야 손녀를 저에게 데려다주었기에 오전에 저는 진상을 알리러 나갈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가끔 아들이 어떤 이유로 일이 있다며 아이를 데리러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여름에는 손녀를 안고 광장이나 사람이 많은 곳에 놀러 가서 인연 있는 사람을 만나면 진상을 알릴 수 있어 괜찮은데, 이곳은 동북 지역이라 겨울이 되면 손녀가 너무 어려서 밖에 나갈 수 없었고, 아들이 손녀를 데리러 오지 않으면 저는 진상을 알리러 나갈 수 없고 법공부와 연공에도 영향을 받아 안타까웠습니다. 아들에게 일이 있어도 손녀를 데려가라고 말하자니 상식에 어긋나고 아들과 갈등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사부님 법상(法像) 앞에 서서 사부님께 진상 알리러 나갈 시간을 주십사 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그날 저녁에 손녀를 데려갔습니다. 그때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가 없었다면 세 가지 일을 잘하기가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2. 아버지가 내 심성 제고를 도와주시다
저는 집에서 맏이이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다른 지역에서 일했습니다. 아버지가 입고 쓰시는 것은 대부분 여동생이 사서 보냈습니다.
2021년 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스스로 요리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버지를 돌보게 돼 매일 아버지에게 식사를 준비해 드리고, 청소와 빨래를 해드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과 손자에게는 돈을 주시면서 저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게다가 남동생의 경제 여건은 저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저는 때때로 마음이 평형을 이루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제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과 질투심을 버리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이니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해야 하고, 속인의 이치로 가늠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정진요지-경지(境界)』를 몇 번이고 외우면서 정념을 더하고 심성을 높였습니다.
조카며느리가 아이를 낳았을 때 아버지는 1만 2천 위안을 주셨고, 그 후 매주 소고기, 붕어 등 영양 보양식을 사서 갓 태어난 증손자를 보러 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연세가 많아 걸음이 느리셨기에 제가 자진해서 동행했습니다.
반년 후, 저의 며느리가 아이를 낳자 아버지는 2천 위안을 주시고, 그 후로는 다시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솔직히 마음이 좀 불편했습니다. ‘아버지는 누가 좋은지 모르시는구나.’ 제 아들과 며느리는 설이나 명절, 혹은 외할아버지 생신이나 외할아버지가 입원하셨을 때면 선물을 들고 찾아뵈었고, 우리 가족 중에서는 매우 철이 든 아이들이라고 공인받았습니다(이 때문에 가족들은 저에게 복이 많다고 칭찬했고, 그럴 때마다 저는 자랑스럽게 ‘대법 수련으로 얻은 복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저만 이렇게 아버지를 보살피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이렇게 처사하시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두 고모도 이 사실을 아시고는 “네 아버지는 좋고 나쁨을 모르셔”라고 분개하며 심지어 저에게 아버지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제가 대법제자라는 것을 알기에 아버지께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잘 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버지를 보살폈고 자신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나는 대법제자다. 잘 수련해 사부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아무리 큰 손해를 봐도 싱글벙글해야만 수련자의 가장 기본적인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의 마음이 솟아오를 때마다 저는 끊임없이 ‘나는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이니 아무리 큰 손해를 봐도 싱글벙글하면서 받아들여야 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담담해졌고, 오히려 아버지께서 연세가 많으셔서 매일 혈압약과 혈당약을 드시고, 심장 박동이 느려 걸음도 느리셔서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2년간 남동생이 돌아와 이곳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들 가족은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는데 난방비, 수도세, 전기세, 텔레비전 요금, 모든 식비는 대부분 아버지가 부담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종종 아버지를 찾아뵙곤 했는데, 나중에 가보니 아버지 방을 청소해 드리는 사람도 없고, 설거지도 직접 하시는 것을 보고 순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정을 아직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음을 알게 됐고, 동시에 마음의 용량을 넓혀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게다가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후 저는 매주 즐거운 마음으로 아버지 방을 청소해 드리고, 더러운 옷이 있으면 빨아드렸으며, 남동생 부부와 줄곧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지난여름, 여동생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전화드렸는데 기침하시는 소리가 들렸어. 그래서 아버지께 ‘오빠한테 말해서 병원에 가서 검진을 좀 받아보세요’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다음 달 월급 나오면 가겠다’라고 하셨어. 그래서 또 여쭤봤지. ‘어떻게 돈이 없을 수가 있어요? 매달 받는 월급은 다 어디다 쓰셨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1만 2천 위안 모은 걸 며느리와 손자며느리에게 각각 반지 하나씩 사줬다. 기념으로 남기고 싶어서’라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아버지를 돌보지도 않는데, 왜 그들에게 반지를 사주셨어요? 아버지를 챙기는 딸에게는 뭐 하나 남겨주신 게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그런 생각은 못 해봤다고 하시더라고. 언니, 분할 일이 아니야? 아버지가 오빠와 함께 사신 후로 월광족(月光族, 월급을 받으면 받는 족족 다 써버리는 사람을 비판하는 신조어)이 되셨어.”
여동생의 말을 듣고 저는 당시 매우 침착하게 여동생을 설득했습니다. “아버지의 월급은 본래 아버지 돈이니 아버지가 쓰시고 싶은 대로 쓰실 수 있고 아버지께서 결정하실 수 있는 거야. 쓰시고 싶은 대로 쓰시면 되는 거고 어떻게 쓰시든 잘못될 것 없어. 우리 둘과는 관계가 없으니 아버지가 건강하시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해.”
올해 3월 6일 저녁,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누나, 아버지 한쪽 손이 저리다고 하시는데 난 출근해야 하니까 내일 누나가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가서 검사 좀 해.” 저는 순간 좀 멍해졌고 속으로 ‘손녀를 돌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나도 시간이 없잖아. 네가 일도 바쁘지 않으니 하루 휴가 내서 모시고 가면 되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즉시 ‘나는 수련인이니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해’라고 깨닫고 아무 말 없이 흔쾌히 응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아들에게 전화해 “오늘 내가 외할아버지 모시고 병원에 가야 해서 아이를 돌볼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오후에 아들은 외할아버지를 보러 병원에 갔고, 그날 아들과 며느리는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돌봤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날 입원한 분 중에는 95세 노인 한 분이 계셨는데, 학식은 없었지만 젊어 보이고 얼굴이 불그레하고 80대로 보였습니다. 스스로 걸을 수 있으셨고 아버지와 같은 병실에 배정됐습니다. 그 노인은 귀가 어둡지 않고 눈도 침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는 둘째 아들과 며느리가 그분을 병원에 모시고 왔는데 그 노인의 며느리가 저에게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들딸이 넷 있는데, 번갈아 가며 모십니다. 어르신은 전혀 정신이 흐리지 않으시고 계산도 아주 분명하십니다. 돈 일부를 네 자녀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일부는 자신이 생활비와 치료비로 사용하세요.”
병실에는 침대 세 개가 있었는데, 가운데 침대에는 80세의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며느리와 아들이 함께 간호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은 매우 화목했습니다.
우리 몇몇 보호자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집안 사정을 물었습니다. 저에게 물었을 때, 저는 웃으며 솔직하게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집에서 일만 하는 사람이에요. 아버지 돈은 아들과 손자에게 다 주시고 저한테는 한 푼도 안 주세요.” 그들은 저의 웃는 모습을 보고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제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보호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저에게 다가와 분개하며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아버님은 정신이 멀쩡하신데요. 전혀 흐리멍덩하지 않으세요. 돈을 아들에게 다 주는 것은 바보인 척하는 거예요.” 저는 듣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젊었을 때 수재라고 불렸고, 글씨를 아주 잘 쓰셨으며, 신문과 잡지에 아버지의 글이 실리기도 했어요. 출납원도 하시고 통계 업무도 하셨으며 나중에는 간부로 일하셨어요. 퇴직 전에는 국가 간부셨는데 어떻게 흐리멍덩할 수 있겠어요?” 가운데 침대의 아주머니도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젯밤에 아주머니 동생이 왔었는데, 누나가 아버지한테 참 잘하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아버지는 누나한테는 돈을 안 주신대요.”
우리집은 그 지역에 있었고 병원에 감기 환자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여 아버지는 매일 오전 병원에서 두 병의 수액을 맞고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보호자들은 한편으로는 수액 병을 지켜보며, 한편으로는 휴대전화를 보았습니다. 저는 틈을 타서 보호자들에게 바이두(百度)에서 유백온(劉伯溫)의 『태백산비문』을 검색해보라고 제안했습니다. 거기 나오는 글자 수수께끼가 바로 ‘진선인(眞·善·忍)’이라고 알려준 후 자연스럽게 대법 진상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장자석(藏字石)’을 검색해보라고 하고 천멸중공(天滅中共-하늘이 중공을 멸한다) 진상을 알려주었더니, 그들은 모두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그 시간에 의사와 간호사들이 계속 병실을 드나들었고, 다른 사람들도 오가서 아쉽게도 그러한 환경에서 저는 정기(正氣)를 갖고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를 권하지 못했습니다. 병실의 모든 사람이 진상을 깨닫고 이 재난을 피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명예와 이익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게 도와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는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속인 중에서 저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아버지가 이렇게 남동생을 편애하신 데 대해 저는 아버지가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아버지 댁 문턱을 다시는 넘지 않았을 것이고, 평생 왕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에게 천서(天書)를 하사하시고, 광대하고 심오한 법리로 끊임없이 저의 이기적이고 더러운 나쁜 생각을 씻어내 주시어, 제 마음을 넓게 변화시켜 주시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매일 세 가지 일을 하며 행복에 젖어 불법(佛法)을 수련하면서 살아갑니다.
원문발표: 2025년 11월 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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