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법에서 깨달아 근본적으로 변화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어릴 적 오락실에 가면 ‘두더지 잡기’라는 게임을 자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게임대 위의 수십 개 구멍 사이로 작은 두더지들이 불규칙하게 빠르게 솟아올랐다가 금세 들어가 버렸죠. 그 짧은 순간에 두더지를 때리면 점수를 얻고, 더 많이 때릴수록 점수가 높아지는 게임이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저는 수련 속에서 종종 그 ‘두더지 잡기’와 같은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 수련생들의 말이나 행동이 법에 부합하지 않을 때면 저는 늘 막으려 했죠. 또 그들의 부족함으로 저에게 번거로움이 생기면 참지 못하고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마치 장난꾸러기 두더지가 머리를 내밀기만 하면 얼른 내려쳐서 제 수련에 방해되지 않게 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되다 보니 갈등에 부딪히면 마음을 지키지 못하거나 피하고 싶고, 숨고 싶은 마음이 생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법공부 중 사부님의 한 말씀에 깊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해 이 어려움 중에서 잘할 수 있으면, 그것이 위덕이 아닌가?”(2015년 뉴욕법회 설법)

사부님의 이 가르침은 이전에도 여러 번 배웠던 법이지만, 이번에 “이 어려움 중에서”라는 구절이 제 마음을 강하게 울렸습니다. 그 순간, 수련 중 수년간 넘지 못했던 관념이 단번에 바뀌었습니다.

지금껏 제가 품고 있던 불만, 불공평, 남의 부족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마음, 타인의 언행이 나의 수련 상태를 방해한다며 밖으로만 원인을 찾던 모든 집착들. 솔직히 말해, 다 ‘남이 내 수련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탓했던 것입니다. ‘안으로 찾는’ 수련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깨닫게 됐습니다. ‘이 어려움’이야말로 생명을 성취하는 과정이 아닙니까? 그동안 넘지 못했던 고비(關)와 난(難)들은, 결국 수련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늘 ‘어려움’을 없애거나 피하려는 데만 힘을 쏟았죠. 그런데 왜 제 주의와 노력을 ‘내가 잘할 수 있는가’에 두지 않았을까요?

더 나아가 보면, 제가 그동안 말한 ‘잘한다’는 것은 대부분 조건부였습니다. 편안한 환경일 때, 어려움이 없을 때, 제가 만족할 때만 잘하려 했죠. 그것이 과연 수련이겠습니까? 그 상태에서 제 자신이 어떻게 변할 수 있겠습니까? 변화 없는 기초 위에서 잘하려는 것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구세력’의 행태와 같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전히 그것들의 산, 여전히 그것들의 물, 여전히 그것들의 신, 여전히 그것들의 상태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바로 그렇게 성취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개변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개변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표면형식을 좋게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옷 그것을 깨끗이 씻는다 해도 여전히 그 옛 옷인 것처럼, 말하자면 이런 뜻인데, 이 형용이 정확하지 않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지 원래의 어느 것도 잃지 않는 기초 위에서, 그것들의 세심한 배치를 통하여, 교묘하게 이 겁난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것은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그것들이 얻으려는 목적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것들을 부정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비록 이 일체를 훼멸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도리어 이 일체를 훼멸하게 될 것이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알고 보니, 구세력의 그 ‘교묘한 안배’와 ‘자신이 영리하다고 여기는 마음’은 생명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이었습니다. 생각 속에서 늘 ‘어떻게 바꿀까’, ‘어떻게 피할까’ 하며 어려움을 줄이려는 사고방식 자체가, 바로 구 우주 생명이 소멸해 가는 징조였죠. 그 강한 ‘자아(自我)’야말로 수련의 길에서 거대한 장애물이었습니다.

법공부를 통해 저는 자연스레 최근 명혜망에서 공유된 채팅방 개설과 난법 행위에 대한 토론을 떠올렸습니다. 그런 행위 역시 스스로 생각하기엔 ‘주도면밀하고 완벽하다’며,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수련 상태에 맞고 도움이 된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다른 수련생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흥분하며 자가 확신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편차는 명백히 법에서 벗어난 것으로, 본인은 미혹돼 깨닫지 못합니다.

또한 수련생들을 괴롭히는 원망, 불만,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마음, 질투, 남을 깔보는 마음 등도 모두 ‘사아(私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 또한 예전에는 이렇게 밖으로만 원인을 찾는 잘못된 사고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봐요, 당신은 꼭 이렇게 하네요. 저렇게 하면 갈등이 생기지 않잖아요. 봐요, 당신은 항상 그래요. 그 버릇을 좀 고치면 이런 문제가 없잖아요. 당신의 집착심도 너무 심하잖아요. 그래서 제 마음이 이렇게 불안한 거예요.”

와! 이렇게 써놓고 보니 우습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관념이 바뀌지 않으면, 그 ‘작은 속셈’이 그럴듯해 보입니다(인간의 이치로는). 하지만 그것은 수련의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은 것입니다. ‘갖은 수단으로 난이도를 낮춰 통과하려는 방식’은 정법(正法)에서 결코 인정되지 않습니다.

한번은 명혜 방송을 들었는데 한 수련생의 글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안배하시면 어떻게 되는 것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매 순간, 매 초가 모두 사부님의 자비로운 안배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어떻게 표준에 도달하고, 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저의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5년 10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0/6/498956.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10/6/498956.html

ⓒ 2025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