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랴오닝(遼寧)성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1999년 1월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했고, 남편은 1998년부터 수련했다. 남편이 대법을 수련한 후 대법이 너무나 좋다며 나에게도 배우라고 권했지만 나는 배우지 않았다. 어느 날 남편이 열이 나고 설사를 했다. 내가 남편에게 링거 주사를 놓아주려고 했지만(나는 병원에서 일했다), 남편은 “주사는 필요 없어, 이건 업을 소멸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남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한바탕 언쟁을 벌였지만 남편은 끝내 주사를 맞지 않았다. 남편이 말했다. “당신은 글을 읽고 판단할 줄 아니까 『전법륜(轉法輪)』을 보면 좋을 거야. 대법은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하고, 사람의 도덕 수준을 높일 수 있어.” 나는 “나는 병원에서 이렇게 오래 일했어. 병에 걸린 사람이 약을 안 먹고 주사를 안 맞아도 낫는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죽는 사람이 있는데, 책을 읽는다고 병이 나을 수 있겠어?”라고 했다. 그렇지만 남편은 고집을 부리며 주사도 맞지 않고 약도 먹지 않았지만 이틀 만에 나았다. 나는 대법이 너무나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1999년 1월, 나는 『전법륜(轉法輪)』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뒤에서부터 앞으로 읽는 습관이 있다. 미리 결과를 알려는 것이다. 『전법륜』 책 뒤쪽의 사부님 약력을 보고 매우 많은 신기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어서 너무 놀랐다! ‘대법을 수련하면 신기한 일이 많이 생길 수 있구나’라고 느꼈다. 참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이 책은 뒤에서부터 읽으면 안 돼. 앞에서 뒤로 한 번에 모두 읽어야 해.” 읽으면서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부님의 말씀 중 “ 법을 스승으로 모시다”(시드니 법회 설법)라는 말씀과 “사람을 욕하거나 때리지 않는다”는 말씀을 기억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1999년 ‘4·25’가 되었다. 수련생이 말했다. “대법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으니 베이징에 가서 청원을 해야 해요.” 나는 ‘난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니 보도원이 가면 되고, 나는 나중에 소식을 들으면 될 거야’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베이징에 갔고 나는 집에서 법공부를 하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돌아와 말했다. “대법제자들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사람이 1만여 명이나 됐는데, 아주 장관이었어요. 우리는 대법제자이므로 당연히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해야 해요.” 당시 심성이 높지 못한 나는 그 말을 깨닫지 못하고, 부부 중 한 사람만 가도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어느덧 ‘7·20’이 되었다. 박해는 단계적으로 가중됐고, 장쩌민(江澤民)이 대법과 사부님을 미친 듯이 박해하고 비방했다. 수련생들은 모두 현지 관청에 가서 대법을 실증했다. 나도 대법제자이므로 마땅히 지체 없이 가서 법을 실증해야 했다. 즉시 관청으로 향했지만 중간에 향(鄕) 정부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되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후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서, 이번에는 반드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차를 한 대 빌려 현(縣) 정부 입구까지 갔다. 많은 수련생이 이미 현 정부 청사 정문 양쪽에 줄을 맞춰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 부부도 수련생 대열에 끼어서 청사 안에서 대화를 하는 수련생 대표의 소식을 조용히 기다렸다. 밤 10시가 넘자, 각 향진(鄕鎭) 파출소에서 사람들을 잡기 시작했다. 우리 지역 파출소장도 몇 명의 건장한 남자를 대동하고 와서 우리 부부 수련생을 끌어내려 했다. 우리는 철제 난간을 꽉 잡고 그들에게 끌려가지 않았다. 화가 난 파출소장이 소리를 지르며 전화로 몇 명을 더 불러 합세해서 우리를 떼어냈다. 나는 법공부가 깊지 않아 심성을 지키지 못하고 그들과 싸움을 벌였다. 나는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소장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직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왜 저를 잡아가는 거죠?! 저는 단지 ‘파룬따파가 좋다’는 한 마디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대법제자는 좋은 사람입니다!” 소장이 노발대발하며 말했다. “당신은 이 지역에서 살지 마. 당장 꺼져!” 나는 대꾸했다. “나는 베이징에 편지를 써서 당신을 고발할 겁니다.” 그들은 내가 방심하는 틈을 타서 낚아채어 짚차에 밀어 넣고 파출소로 끌고 갔다. 그들은 파출소에서 두 시간이 넘게 대기 시켰다가 우리를 풀어줬는데, 밤 1시가 넘은 캄캄한 밤이라 손가락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어둠 속을 더듬으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어떤 물체에 부딪혔다. 그 물체가 불이 켜지자 보니 승용차였다. 무척 기뻤다. ‘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차를 보내주셨구나!’ 내가 운전사에게 물었다. “운행하시나요?” 운전사는 한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차에 올랐다. 운전사가 말했다. “길을 가다 여기에서 졸음이 와서 차를 세우고 잠깐 쉬고 있었는데, 두 분이 오셨네요.” 운전사는 우리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항상 제자를 보살펴 주시는 사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집에 돌아온 후, 잠이 오지 않아 마당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니 수많은 별이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남편이 말했다. “장쩌민이 사부님을 비방하고 대법을 모독하고 있어요. 나는 내일 베이징에 가서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한마디 해야겠어요. 방에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이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거예요!” 남편은 먼저 떠났다. 나는 다섯 살 아이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가 날씨가 너무 더워서 도중에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남편 소식을 기다렸다. 그렇게 나는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할 기회를 또다시 놓치고 말았다.
나중에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그곳은 수련생이 많고, 소식도 빨랐으며 매일 정상적으로 법공부도 할 수 있었다. 1999년 10월이 되자, 수련생들이 매일 우리집에 와서 자신들이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할 때 겪은 신기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대법이 모욕당하고 사부님께서 공격을 받고 계시니 나도 대법제자로서 반드시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1월, 우리 부부는 사부님과 대법의 결백함을 되찾기 위해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기로 하고 준비했다. 남편이 말했다. “충분히 생각했어요? 혹시 6·4 민주화 운동(천안문 사태)처럼 기관총으로 갈길지도 몰라요.” “갈기든 안 갈기든 나 하나뿐인데, 난 두렵지 않아요. 난 반드시 가서 대법이 좋다는 말 한마디를 해야겠어요. 법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나는 남편과 함께 집에 있는 돈을 모두 챙기고, 아이를 안고 집을 떠났다. 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이번 길에 어떤 일과 마주할지,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베이징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자리에 막 앉았을 때 경찰이 와서 말했다. “파룬궁수련생은 내려!” 나는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잠시 후 수련생 여러 명이 끌려 내려갔다. 나는 자리에 앉아 굳게 다짐했다. ‘나는 반드시 베이징까지 갈 수 있다.’
결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우리는 안정을 취하고 전국에서 온 수련생들과 함께 어떻게 나서서 법을 실증할지 교류했다. 다섯 살 아이도 어른들과 똑같이 매일 찐빵 한 입과 절인 채소를 먹었지만, 여전히 정신은 맑았고 신기한 일도 많이 일어났다. 한 달 뒤, 나와 몇몇 수련생이 임시로 빌린 집에서 경찰에 납치되어 베이징 주재소로 끌려갔다가 거주지 공안에 넘겨져 돌아왔다. 그 과정은 험난했다. 아이를 안고 남편과 함께 거주지 구류소로 끌려갔다. 다섯 살 아이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침착하게 지켜보면서 울거나 보채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구류소에 감금됐고, 아이는 혼자 의자에 앉아 삼촌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며칠 뒤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매일 법공부와 법 실증 일을 계속했다.
2001년 11월, 나는 베이징에서 한 달을 살았지만, ‘대법이 좋다’는 말을 외치지도 못했고, 현수막도 들지 못해 법을 실증하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느꼈다. 다시 한 번 더 베이징에 가기로 마음먹고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법을 실증하러 베이징에 가는데, 너도 갈래?” 아이는 아주 천진하게 말했다. “어린 제자는 한번만 가면 돼요. 엄마는 다녀오세요. 나는 외할머니 집에서 기다릴게요.” 다음 날, 나는 아이를 외할머니 집에 맡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떠났다.
우리 부부는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베이징에 도착했다. 도착한 다음날,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자료를 배포하면서 대법이 정법이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TV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렸다. 일주일 동안 법을 실증하는 일을 했지만 우리 부부는 서로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어느 날 밤, 베이징의 한 수련생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저랑 같이 한 사합원(四合院)에 좀 가요. 거기에 수련생 수백 명이 머물고 있어요.” “가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일주일 동안 자료를 배포했고 이제는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가고 싶어요.” 그렇지만 그 수련생이 너무나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결국 그 베이징 수련생을 따라갔다. 도착해 보니 마당이 크고 방도 많았다. 우리가 막 집안에 들어선 지 몇 분 되지 않아 정전이 되었다. 나는 즉시 경찰에 포위당한 것을 직감했다. 베이징 수련생에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경찰에 포위됐어요. 잠시 후에 무슨 일이 있든 저는 도망쳐서 잡히지 않을 거예요. 지난번엔 방 안에서 경찰에게 붙잡혔지만, 이번엔 꼭 톈안먼에 가야 해요. 안 그러면 또다시 와야 해요.” 베이징 수련생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나는 “믿기지 않으면 나가서 직접 봐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마당으로 나가서 보고 깜짝 놀랐다. 많은 수련생이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땅에 쭈그려 앉아 있었고, 담장 위, 복도, 대문 입구엔 경찰들이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다른 수련생에게 말했다. “앞으로 가세요. 저는 뒤로 갈게요.” 그리고 수련생들에게 말했다. “일어나서 뛸 수 있으면 뛰어야 해요. 경찰에게 잡히면 안 돼요. 경찰보다 우리가 더 많으니 겁낼 것 없어요.” 그렇게 수련생들은 모두 일어나 대문 쪽으로 향했고, 방안에 있던 수련생들도 밖으로 뛰쳐나왔다. 모든 수련생이 대문 앞에 모이자 경찰이 막아섰고, 그들은 경찰 차량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때 수련생들이 일제히 대문 쪽으로 몰려들었고, 대문이 ‘우지직’ 소리를 내며 열리자 수련생들이 파도처럼 문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나는 수련생들과 뒤엉키고 싶지 않아 비교적 한산한 방향으로 찾아 뛰어나가 골목에 도착했다. 대문 쪽을 바라보니 수많은 경찰이 경찰차에 경찰견을 태우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 집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대법은 참으로 신기했다. 그렇게 높고 두껍고 견고한 두 개 대문이 원래는 안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깥쪽으로 열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골목을 빠져나와 대범하게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원래 있던 숙소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 나는 놀람과 동시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베이징 수련생과 또 다른 수련생이 하나의 커다란 수갑에 채워진 채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들은 경찰에 잡혀 함께 수갑에 채워졌지만, 지혜롭게 도망쳐서 돌아온 것이다. 나는 건물 1층에 건자재상이 있다는 생각이 나서 다른 수련생에게 그곳에 가서 쇠 톱날 몇 개를 사오게 해서, 수갑을 자르려고 했다. 수련생이 톱날을 사 와서 수갑을 톱질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 톱질해도 수갑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으므로 모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고민했다. 그때, 나는 별 생각 없이 두 손을 수갑 위에 얹으며 말했다. “제가 풀어드리지요.” 옆에 있던 수련생이 말했다. “농담이겠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내가 힘도 주지 않고 손을 살짝 움직이니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수갑이 부러졌고, 두 수련생의 손이 분리됐다.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단단한 특수강으로 만든 수갑을 내가 어떻게 벌릴 수 있었지? 이렇게 신기할 수가 있나?’ 그것은 사부님께서 풀어주신 것이다. 우리 대법제자는 정념이 충족하기만 하면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위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
수갑이 분리되자 그 수련생은 떠났다. 베이징 수련생이 나에게 함께 나가서 흩어진 수련생들을 좀 찾아보자고 했다. 나는 방금 전 조마조마했던 탈출로 아직도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으므로 갈 마음이 없었다. 베이징 수련생이 말했다. “이 밤중에 흩어진 수련생들을 찾지 않으면 밖에서 추위에 떨 거예요. 너무 늦은 밤이라 저 혼자 나가기도 좀 그러니, 함께 가줘요.” 나는 생각을 바꿔 그래도 그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흩어졌던 수련생들을 찾아 데려왔을 땐 새벽 3시가 넘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날이 밝았다. 나는 몇몇 수련생과 함께 톈안먼으로 향했다. 톈안먼 광장에는 꽃이 피어나듯 크고 작은 현수막이 잇달아 대법제자의 손에서 펼쳐졌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사부님의 결백을 되찾자’는 외침이 온 우주로 울려 퍼져 대궁(大穹) 천체를 진동시켰다. 너무나 장관이었다.
수많은 수련생이 경찰에게 붙잡혀 경찰차에 실려 갔다. 우리는 가슴이 쿵쿵 뛰면서 수련생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현수막을 꺼내 들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오랜 시간 생각했다. ‘왜 다른 수련생들은 할 수 있는데, 나는 못했을까? 여전히 두려워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생사를 내려놓지 못하는 인간의 집착이 있는 것이 아닌가?’ 수련이란 입으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다. 심성이 표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정말로 해낼 수 없다. 수련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다음 날, 나와 수련생은 현수막을 들고 단호하게 톈안먼으로 향했다. 도착한 우리는 생각을 하거나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우리는 넓은 공간을 찾아 한 수련생이 현수막 한쪽을 잡고 동쪽으로 달리고, 나는 다른 한쪽을 잡고 서쪽으로 달렸다. 또 다른 수련생은 가운데를 들어 올렸고, 3미터가 넘는 대형 현수막이 우리 세 명의 수련생에 의해 펼쳐졌다. 우리는 크게 외쳤다.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그 순간 우리는 비할 바 없이 거대함을 느꼈을 뿐, 주변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 분 후, 우리는 경찰에 잡혔고 경찰차에 태워져 파출소로 끌려갔다. 이미 잡혀온 수많은 수련생이 마당에서 『홍음(洪吟)』을 외우고 있었다. 그 후 나는 감옥으로 끌려갔다가 현지 공안에 넘겨져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풀려나 집에 돌아온 후에도 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 일은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할 것이다. 나는 정법 일을 사부님을 따라 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할 것이다! 사부님의 제도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7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7/13/497025.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7/13/4970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