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수련은 직지인심이다’는 것에 대한 옅은 깨달음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이것은 매우 엄숙한 문제입니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법에 입각하여’와 ‘당문화(공산당 문화)에 따라’는 완전히 별개의 두 가지 개념입니다. 대법제자들의 법에 따른 신성한 행위를 어찌 당문화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수련과정에서 사람들의 언행과 사고방식이 법에 맞지 않고 오히려 당문화에 부합하면서도, 당사자는 이를 깨닫는 데 늦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개인 수련과 사명 완수에 큰 손실이 발생합니다.

‘당문화’는 중국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일반인들의 사고방식과 말하는 방식이 거의 항상 강한 당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수련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사악하고 증오스러우며 변형된 요소들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것이 당문화에 속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그것을 제거해야 하는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모두가 오랫동안 그 문화에 깊이 빠져있기 때문에, 여전히 당문화의 특정 요소들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오랫동안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방해받고 지연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정부기관, 공공기관, 국유기업에서 일했던 수련생들, 즉 소위 ‘체제 내’에서 일했던 분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파룬따파가 중국 본토에 널리 전파되었을 당시, 사회의 주된 활동 형태는 ‘체제 내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이러한 환경은 다양한 당문화의 영향을 가장 받기 쉬운 곳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문화 속의 ‘교활함’

과거 정부기관에서 일하던 사람들, 특히 소규모 공직에 있었던 이들은 물 흐르듯 매끄럽고 흠잡을 데 없는 말투를 개발해왔습니다. 관료사회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관료사회는 민간기업과 완전히 다릅니다. 민간기업에서는 실질적인 능력과 실무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평생 체제 밖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체제 내에서 오랫동안 지낸 사람들과 교류해야 할 일이 생기면, 마치 전혀 다른 두 세계에 사는 것처럼 느끼게 되며, 생각하는 방식과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해 정부에서 문제 해결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갈 때, 그들의 말이 일리 있어 보이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모두 헛된 말이었고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들이 당신을 속이려고 거짓말을 많이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원칙을 고수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예를 들어 일반 대중이 자주 듣는 말로는 “어느 지도자가 이 문제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 “해당 행위가 확인되면 엄중히 조사하여 처리하겠다” 등의 허황된 말, 공허한 표현, 관료주의적 언사, 거짓말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수련을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일부 대법제자들은 수련생, 가족, 또는 다른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거나 소통할 때, 가장 먼저 “이 일은 제가 잘하지 못해서”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겉으로 보면 이는 분명 ‘법에 입각한’ 것 같고, 수련자가 갈등에 직면했을 때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원칙에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진지하게 물어봅니다. “정확히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러면 그는 대답하지 못하고, 이것이 사실은 갈등 상황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당문화에서 발전된 교활함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이미 잘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는데, 또 뭘 원하는 거지?’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이런 생각은 선의(善意)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인품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같은 말이라도 “이 문제에 있어 저도 잘하지 못했어요. 화내지 마세요”라고 하면, 상대방 관점에서 생각하려는 의도와 사과의 뜻이 담겨 있어 효과가 전혀 다릅니다.

당문화의 ‘허황된 말’

당문화에서는 ‘허황된 말’이 너무나 흔해서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교란 요소가 대법제자들 사이에도 존재하며, 일부 사안에서는 큰 손실을 초래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명혜망에 보도된 교류문에서 많은 수련생들이 보았듯이, 일부 지역(특히 중국 본토와 기타 공산주의 국가)의 수련생들이 서명운동, 미디어 이벤트 등 대규모 활동을 조직하고자 하며, 그 결과 사악하고 광기어린 박해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많은 대법제자들이 불필요한 시련을 겪게 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잔혹한 박해로 인해 한때 대법을 지지하고 이해했던 사람들까지도 압력에 굴복하고 자신의 의지에 반해 대법에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는 정말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으며 자신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 책임질 수도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 말하자면, 일부 수련생들은 자연스럽게 그 해의 창춘 TV 방송 삽입 사건을 떠올릴 것입니다. ‘왜 당시에는 그 삽입방송 사건이 그토록 주목받았고 사부님께서도 긍정하셨는데, 지금은 왜 더 큰 파장을 일으키는 일을 장려하지 않는 걸까?’ 만약 우리가 정말로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법리를 분석해본다면, 지난 20년간의 정법 과정에서 중생을 구하는 환경이 크게 변화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창춘 삽입방송 사건은 사악한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상황에서 발생했으며, 대법에 관한 긍정적인 정보가 전파되기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정보 감시 기술은 지금보다 훨씬 뒤처져 있었고, 많은 지역의 공안 기관은 신분증 시스템조차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엔 인터넷 검열을 우회하는 소프트웨어가 일반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어 있습니다. 제가 일했던 곳과 만났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방화벽을 우회하는 소프트웨어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법에 대해 자발적으로 알고 싶어한다면, 과거처럼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날의 감시 시스템은 예전과 전혀 다릅니다. 안면 인식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감시 카메라는 어디에나 설치되어 있습니다. 과시심과 환희심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 표면적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일을 하면서 실질적인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함정에 스스로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요? 출발점과 목적이 체포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 특별한 시기에 봄비가 모든 것을 부드럽게 적시듯, 소란 없이 이름도 남기지 않고 마음을 다해 일한다면, 사람들은 진선인(眞·善·忍)의 아름다움을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지 않을까요?

진정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세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세 가지 일을 착실하고 안정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항상 대단한 일을 하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당문화에서 나오는 ‘허황된 말’의 요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어떤 수련생들은 표면적으로는 법에 부합하고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제자가 납치되어 구타당하고 압력 속에서 사악과 타협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 이 사람은 확고하지 않군요. 전 두렵지 않습니다. 맞든 전기봉으로 감전되든 파룬따파는 좋다고 외칠 겁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종류의 ‘뒤늦은 비판’은 사실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자아와 과시심에 기초할 뿐입니다. 다른 이들이 고통받을 때, 정말로 그들을 돕고 싶다면, 법공부를 하고 스스로를 조정하도록 상기시켜주어야 하며, 심지어 함께 법공부를 하여 그들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납치되게 한 사람마음의 집착을 찾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며 유사한 사람 마음과 집착이 있는지 확인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일깨워주는 것이 법에 입각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마음을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위험을 초래한다면, 일부 대법제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악이 파룬따파 수련생들을 박해하는 데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전기 충격입니다. 경찰용 전기충격기는 대부분 출력 전압이 20~30만 볼트이고 전류는 약 1.5암페어입니다. 반면 민간용 전기충격기의 출력 전압은 보통 10만 볼트를 넘지 않으며, 전류는 4밀리암페어를 초과하지 않습니다. 즉, 이 두 종류의 장치가 인체에 가하는 전기 충격의 느낌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토록 ‘자신만만한’ 사람들이 있다면, 자신이 무지하거나 오만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온라인에서 몇십 위안만 주고 민간용 전기충격기를 구입해 그 느낌을 직접 체험해보고, 자신이 어떤 구호를 외쳤는지 명확히 기억할 수 있는지 시도해보길 권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실수를 하거나 어떤 업력으로 인해 납치되었을 때, 어떻게 정념을 활용하여 그 박해를 해소할 수 있을까요? 명혜망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일부 대법제자들이 강한 정념을 가졌을 때 폭력을 행사한 경찰에게 전기를 돌려보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항상 정념을 유지해야 하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조금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다수의 파룬궁수련생들이 각자의 이유로 납치되어 전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폭력적인 경찰에게 그 전기가 돌아가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일부 수련생들은 납치된 후 자신의 부족함을 신속히 발견했고, 사부님 법신의 가지(加持)로 박해를 극복해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수련생들은 납치된 후 잔혹한 박해를 받았고, 반복적으로 납치되어 잔혹한 박해를 당했음에도 안으로 찾고 깨달으며 변화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석방된 후에도 계속 수련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의기소침해지는 이도 있고, 심지어 반대 방향으로 가는 이도 있는 등 여러 상황이 존재합니다. 수련에는 공식이 없지만, ‘수련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라는 핵심은 체포되었든 직접 박해를 받았든 변함이 없습니다.

일부 수련생들은 오랫동안 병업(病業)으로 고통받는 수련생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정상적인 삶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한 소업 상황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항상 잘 해나가며 사악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결과가 생기면 수련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이런 수련생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더 큽니다. “아, 그의 깨달음은 좋지 않아요”, “사부님과 법에 대한 믿음이 깊지 않네요” 등의 말을 합니다. 의미는 여전히 같습니다.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단지 그런 상황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나는 식사를 거르고도 일할 수 있어요. 잠이 안 오면 그냥 가부좌만 하면 되는데…”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고, 대법제자들 중에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원인은 역사적 배경, 업력의 크기, 깨달음의 질, 집착심, 법에 대한 믿음 정도, 오랜 세월 수련에 대한 오해 등 매우 복잡할 수 있습니다. 이전 단계의 수련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다음 단계의 수련은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위험이 이미 나타났지만 정념을 강화하지 못하고 법수련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구세력의 잔혹한 공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다시 회복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일반인의 강인한 의지력을 초월하는 특별히 강한 정념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관련 당사자들이 그것을 해낼 수 있는지 여부는 다른 이들이 당연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당연시하는 태도는 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의하며 거만하고 자만하는 태도 역시 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 박해를 받아본 적이 없거나 심각한 병업을 겪어보지 않은 수련생들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속인의 상태에 부합합니다. 역사책에 ‘고기죽을 왜 먹지 않느냐’는 고사가 있지 않습니까?(역주: 진나라 말기의 황제인 혜제는 기근이 심해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백성들은 쌀이 없으면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지역에 그런 사람이 두 명 있었습니다. 박해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모두가 천안문 광장에 가서 법을 수호했는데, 그들도 매우 ‘적극적’이었고 생사를 초월한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곳에 가보고 난 후, 현실의 박해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한 사람은 구타당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사악과 타협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당문화 속 ‘관료적인 상투어’

일부 대법제자들은 오랜 기간 당문화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이런 사고방식이 형성되어, ‘체제 밖’의 수련생들이 그들의 말을 들으면 ‘이 사람은 왜 관료적인 상투어만 쓸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많은 수련생들은 ‘체제 내’에서 온 이런 수련생들과 교류한 후에도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할 때, 그들은 진부한 표현과 상투적인 말만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수련생이 구체적인 어려움에 직면했거나, 대법이 공격을 받아 보호가 필요할 때, 그들은 실질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고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말만 반복합니다. “대법제자는 항상 법에 입각해야 합니다”, “시련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아야 합니다”, “대법제자의 가장 큰 사명은 법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등과 같은 말들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겉으로는 고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는 법을 이론과 지식으로만 공부하고, 자신을 수련하며 일상에서 법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로 인해 실제 문제에 직면했을 때 곧바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수련생들이 생겨났습니다. 수련생들이 이 문제를 토론할 때, 대법제자는 능동적으로 법을 수호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수련생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법을 수호해야 하는지 계속 물어보기만 합니다. 다른 수련생이 그와 교류할 때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했고, 심지어 매우 상세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줬음에도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왜 성과를 내지 못했을까요?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수련생이 제안한 것이 그의 본래 기대와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법을 수호하는 것과 같은 신성하고 위대한 일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이해할 수 없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위에 적은 내용은 제가 최근 수련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법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5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5/7/493618.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5/7/4936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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