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망(顧望)
[명혜망] 서방 사회에서 ‘청원[上訪]’은 쉽게 볼 수 없는 단어다. 시민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가 있으며, 심지어 10만 명, 50만 명이 대통령 관저 앞에 모여 시위하는 것도 정상적인 현상이다. 2020년 미국 각지의 시민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기 위해 워싱턴DC에 모인 인원이 거의 100만 명에 달했지만, 군경과 아무런 마찰 없이 편안하고 조화로운 분위기였으며, 긴장된 기류는 전혀 없었다.
태평양 건너편 중국에서는 지난 100년 역사 속에서 이런 광경이 단 한 번만 나타났다. 1999년 4월 25일, 1만여 명의 파룬궁수련자들이 중난하이 서문에 있는 ‘국무원 민원사무실’에 청원했다. 전 과정에서 그들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도로 가장자리에서 기다렸으며, 행인이나 차량을 방해하지 않았고, 표어나 구호도 없었으며, 큰 소리로 떠들지도 않았다. 경찰들은 옆에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마침내 소통을 통해 문제가 해결됐다. 이는 ‘중국 청원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이성적이며 평화롭고, 가장 원만하게 해결된 청원’이라고 불렸다. 국제사회는 ‘4.25’ 파룬궁수련자들의 중난하이 만인 청원 사건에서 양측이 보여준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는 중국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중국 대부분 민중의 인식 속에서 4.25 청원은 중난하이를 습격한 것이며, 이것이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심지어 중공과 가까운 일부 서방 인사들도 중공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정부를 포위한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늘 우리는 몇 가지 기본 개념을 명확히 해보고자 한다.
1. 국무원 민원사무실과 베이징시 공안국의 말이 맞는가? 아니면 장쩌민(江澤民)의 말이 맞는가?
우선 중국에서는 청원이 허용되며, 국무원 민원사무실은 중난하이 서문에 위치해 있다. 중난하이의 정문은 창안가를 향한 신화문이지만, 청원하던 파룬궁수련자들 중 단 한 명도 신화문으로 향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난하이를 습격했다는 기본적인 사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4.25 이후 두 달 남짓한 기간, 당시 중앙판공실, 국무원판공실 민원국과 베이징시 공안국은 이 청원 사건에 대해 ‘공고’를 발표했는데, 이 ‘공고’에서는 청원자들이 중난하이 주변에 “집회했다”고 표현했을 뿐, “중난하이를 포위 공격했다”고 규정하지 않았다.
4.25 이후인 1999년 4월 27일, 국무원 민원국 책임자가 신화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발언을 통해 파룬궁수련자들이 베이징에서 ‘집회’를 했다고 언급하면서 “각종 기공 건강 활동에 대해 각급 정부는 한 번도 금지한 적이 없다. 다양한 견해와 의견을 갖는 것은 허용된다”고 밝혔다. 이는 4.25가 합법적인 청원이었음을 보여준다.
두 달 후인 6월 14일, 중앙 민원사무실과 국무원 민원사무실의 공고가 중국의 신문, 라디오, TV에서 동시에 발표되어, 어떤 기공 유파도 금지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 파룬궁에 대해 고압적 정책이나 탄압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최종 결론이 아직 내려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수년 후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중공 상무위원회 7명 중 6명이 파룬궁 탄압에 반대했다. 파룬궁에 대한 성격 규정은 장쩌민이 중공 당 기관지 《인민일보》 8월 13일 자 기사를 통해 4.25 청원을 파룬궁 수련자들의 “중난하이 포위”로 바꿔놓은 것이었다.
2. 파룬궁이 중공에 도전한 것인가? 아니면 장쩌민의 질투와 권력 남용인가?
파룬궁수련자들은 왜 중공의 정치적 심장부 근처에 모였을까? 이것이 중공에 대한 도전이었을까? 4.25 사건이 중공이 파룬궁을 근절하기로 결심한 근본적인 이유였을까?
1998년 12월, 상하이 TV에서 방송된 뉴스를 보자. “오늘 이른 아침, 상하이 체육센터는 인파로 붐볐습니다. 본 시의 약 1만 명의 파룬따파 애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홍보 시범을 진행했습니다. 파룬따파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사부는 1992년에 사회에 공개적으로 공법을 전수하고 설법하기 시작했으며,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6년간 이 공법은 연공 시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의념 유도가 필요 없는 등 다른 기공과 다른 전혀 새로운 내용으로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주었고, 독특한 특색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홍콩, 마카오, 대만을 포함한 전국 각지에 자발적인 대중 연공 조직이 있으며, 유럽, 미국, 호주, 아시아 4대 대륙에 전파되어 전 세계적으로 약 1억 명이 파룬따파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상 본 방송국 기자 ○○의 보도였습니다.”
파룬궁은 1992년에 사회에 공개적으로 전해졌다. 1992년 5월 13일, 리훙쯔 대사는 창춘에서 첫 번째 파룬궁 학습반을 개설했으며, ‘진선인(眞·善·忍)’ 원칙을 바탕으로 수련자의 심성을 향상시키고, 5가지 부드럽고 완만한 동작을 가르쳤다. 국가체육총국은 1998년 5월 파룬궁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했다. 9월에는 의학 전문가로 구성된 팀이 이 조사에 협력하여 광둥성의 12,553명의 파룬궁수련자들을 대상으로 표본 설문조사를 실시했으며, 그 결과 질병 치료와 건강 증진의 총 유효율이 97.9%로 나타났다.
퇴역군인부터 중앙 고위 관리, 군인, 일반 노동자, 대학 교수에 이르기까지 파룬궁은 짧은 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광범위한 호평을 받았다.
파룬궁은 중국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 않고 기공(氣功)으로서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당시 중공 고위층 중 상당수는 기공이 건강을 증진시키는 운동 방식이므로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확대하여 큰 일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만약 이런 견해가 공통된 인식이 되었다면, 중공에게는 역사적으로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4.25 이후 두 달여 동안 내부적으로 얼마나 많은 의견 충돌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공 지도자 장쩌민은 파룬궁이 그와 민중을 놓고 경쟁한다고 생각했다. 수억 민중의 사랑과 찬사가 자신을 ‘황제’라고 여긴 장쩌민의 질투심을 불태웠다. 이미 1996년, 장쩌민은 중공 공안부에 파룬궁을 주시하라고 지시했다. 1997년, 1998년에는 전국 각지에서 파룬궁수련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며, 1999년에 톈진에서 여러 파룬궁수련자들이 체포됐다. 당시 파룬궁 서적은 이미 출판이 금지됐고, 일부 지역에서는 공개적인 연공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전국적으로 파룬궁은 금지될 위험에 처했다. 파룬궁 수련을 통해 혜택을 받은 일부 수련자들은 자발적으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서 정상적인 수련 환경을 회복하기를 희망했다.
4.25 청원에서 당시 국무원 총리 주룽지(朱鎔基)가 파룬궁수련자들과 원활하게 소통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했고, 청원 수련자들은 평온하게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장쩌민은 곧 이 성과를 부정했다. 그리고 두 달 후인 1999년 7월 20일, 파룬궁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를 시작했으며,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26년 동안 잔혹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다.
3. 장쩌민의 4.25에 대한 모함은 중국이 도덕적 기준을 잃게 된 여정의 시작
1999년 이후, 중공의 민원 제도와 민원 조례는 1999년 4.25 파룬궁수련자들의 평화로운 대규모 청원을 무시한 후, 완전히 악법으로 전락했으며, ‘민중의 고충을 전달한다’, ‘민중을 대변한다’는 표면적인 모습마저도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게 됐다.
중공은 민원 제도를 이용해 억울한 시민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갖게 하면서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중공이 설치한 그물처럼 촘촘한, 이른바 ‘펑차오 경험(楓橋經驗. 1960년대 저장성 펑차오(楓橋)에서 시작된 사회 관리 방식으로, 하부 사회 조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 사회 안정을 유지한다는 정책 모델)’이라 불리는 감시망이었다.
지난 26년 동안, 중국의 민중들은 중공이 설계한 민원이라는 길을 통해 자신의 권익을 지키고자 했다. 그 이유는 강제 철거, 가짜 백신, 부패 관리 고발, 악인 고발, 퇴역군인 청원, 친족 찾기 청원, 억울한 사건 청원 등 다양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잘 알려진 대로, 중공은 대량의 전담 인력을 조직하고 재정 자금을 투입하여 청원을 가로막고, 이후 청원자들을 비공식 구금시설에 가두거나 심지어 강제노동이나 형을 선고했다. 중국 민원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고 블랙화된 시작점은 바로 장쩌민이 파룬궁수련자들의 4.25 평화 청원을 모함하고, 중앙 민원사무실과 베이징시 공안국의 ‘집회’ 증언을 무시한 것이었다. 그는 이를 구실로 3개월 후 ‘진선인’을 비방하고 파룬궁을 근절하기 위한 전국적인 정치 운동을 일으켰다.
원문발표: 2025년 4월 6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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