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년 대법제자
[명혜망] 속인 중에서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상적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은 남의 결점을 대놓고 지적하는 것을 꺼리며, 두 사람의 관계를 망치거나 타인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까 봐 두려워한다. 일부는 상대방 마음에 상처를 줄까 두려워하는 ‘좋은 마음’이 있는데, 사실 대부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수련인은 너나 할 것 없이 정체(整體)다. 자신의 집착을 전부 제거해야 원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다른 수련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상대를 위해서라면 부족함을 알려줘야 제고할 수 있다. 나는 이 이치를 알고 아내(수련생)의 부족함을 볼 때마다 직설적으로 지적해줬지만 결과는 항상 서로 불쾌해하며 끝났다. 최근에 일어난 작은 일에서 이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게 됐고, 글을 써서 수련생과 함께 교류해 공동 제고하려 한다.
며칠 전 나는 가족이 두려운 마음에 사람 구하는 일을 너무 소심하게 하는 것을 보고 엄숙하게 지적했다.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고 화를 냈으며 나도 참지 못하고 논쟁했다. 매번 논쟁 후에 우리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결코 이 상태를 돌파하지 못했다.
이번에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으로 찾아보니 강한 조바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일을 빨리하고 성질이 급한 것이 내 선천적인 특성이지 집착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에야 ‘빠름’과 ‘급함’은 전혀 별개의 일이며, 수련인은 효율을 높이되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 서유기 드라마에서 관음보살이 손오공을 불렀을 때 어조가 느리고 자비로우면서도 위엄이 넘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신의 법력은 끝이 없어서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지지만 오히려 침착하다.
나는 나에게 강요하는 마음과 잘난 체하는 마음, 무시하는 마음, 가족애, 남에 대한 집착, 냉혹하게 말하는 극단적인 공산당 문화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자신을 고치는 데 집중할 때라고 생각한 나는 조용히 아내에게 말했다. “더 이상 당신을 상관하지 않을 거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도 말하지 않을게요. 어쨌든 말해도 변하지 않을 거고 제고할 수 없으니까요. 이제 봐도 못 본 체할 것이며 당신의 행동에 너무 집착하지 않을 텐데, 그럼 결국 당신은 제고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계속 이렇게 하면 나도 당신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영향을 받게 돼요.” 동시에 발정념을 강화해 이 마음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함구하며 더 이상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마침 ‘캐나다법회 설법’의 한 구절을 공부했다.
“제자: 어떤 수련생들은 마난(魔難)에 부딪힌 시간이 꽤 오래됐는데도 넘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지적해 주어도 됩니까, 아니면 마땅히 그로 하여금 법 학습을 통해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합니까?
사부: 여러분이 그가 나아가지 못하는 원인을 보았다면 왜 그에게 지적해 주지 않는가? 선의(善意)로 그에게 알려주는 것은 문제가 없다. 화를 낼까 봐 두려워서인가? 상대방의 태도를 수련에 사용하면 좋은 것이 아닌가? 설령 당신이 한 말을 그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우리는 속인의 이 정(情)을 내려놓아야 되지 않겠는가? 문제를 보면 반드시 알려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늘 한 층차에 머물러 올라가지 못하는데, 올라가지 못할수록 그는 더욱 책을 보지 않으며 더욱 정진할 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관(關)과 난(難)은 갈수록 커져서, 그에 대해 말한다면, 갈수록 동요되어 최후에는 수련할 수 없게 된다. 시종 이러한 문제가 존재한다. 수련은 아주 엄숙한 일로서, 추호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당신이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절대로 그 층차에 진입할 수 없다. 평범하고도 평범한 속인이 원만에 도달하여 대각자(大覺者)처럼 그렇게 신성(神聖)해지려고 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명석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 중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을 공부한 후, 나는 내가 잘못 깨달았고 중간을 취하지 못했으며, 한 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으로 갔음을 발견했다. 이기심으로 인해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갈등을 피하려 했다. 무위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 행동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마주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 승려와 같으며 우리가 수련하는 것은 주의식(主意識)이다! 사부님의 법은 내가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데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주셨다.
우선 수련생의 부족함을 보고 반드시 지적해줘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지적한 후 세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수련생이 공감해 듣고 나서 기뻐하며 부족함을 고치고 제고하는 것이고, 둘째는 수련생이 당시에는 공감하지 않았지만 좋은 태도를 갖고 나중에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이 세상에 내려올 때 ‘서로 일깨워주겠다’라는 약속을 지켜 수련생에 대한 책임을 이행한 것이다. 셋째는 수련생이 받아들이지 않고 나쁜 태도를 보이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타인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데 장애가 되는 주된 이유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해주신 심성 제고의 기회가 아닌가? 속인 중에 ‘화내는 것은 남의 잘못으로 자신을 벌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수련의 관점에서 보면 ‘화내지 않는 것은 남의 잘못으로 자신을 제고하는 것’이다!
동시에 지적할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이 평온하고 선의적인 태도여야 한다. 만약 자신의 감정에 휘말려 서로 논쟁했다면 무엇 때문인지 바로 안으로 찾아봐야 한다. 그의 행동이나 태도가 자신의 정과 조급함, 무시, 강요, 체면, 질투, 이기심, 자아와 같은 어떤 집착심을 건드린 것은 아닌가? 어떤 마음이든 이 기회에 모두 드러나게 해서 즉시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이 점에서 다른 수련생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것은 스스로 제고할 좋은 기회다. 이에 앞서 우리는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하는데 마치 답을 미리 알고 있듯이 먼저 평온한 마음가짐을 유지해야 하며,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우리가 심성을 지키면 수련생이나 자신이 제고할 수 있고, 누가 제고하든 모두 대법제자의 정체 제고다. 가족 간이나 수련생이든 법학습장에서든 이런 기회가 많으니 우리 모두 서로 도우며 용맹정진해 빠뜨리는 것 없이 닦아 조사정법(助師正法)을 더욱 잘해야 한다.
층차가 제한되어 있으니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바로잡아주시길 바란다.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깨우침에 감사드리고, 수련생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에 따라 작성된 것이므로 수련생 여러분께서 서로 교류하고 ‘비학비수(比學比修)’ 하는 데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4년 2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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