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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외우는 중의 수확

글/ 지린 대법제자

[밍후이왕] 직장에 다니다 보니 내가 매일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비교적 빠듯하다. 여태껏 법공부를 잘하지 못해 많이 고민하다가 밍후이왕에서 수련생들이 법을 외운 교류문장을 보고 제대로 법을 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2020년 10월 1일부터 반년에 걸쳐 ‘전법륜’을 한 번 다 외웠다.

오늘 마지막 몇 페이지를 외울 때 줄곧 자비로우신 사부님의 가지(加持)를 느꼈고, 온몸이 에너지장에 싸여있었다. 외우면서 몇 번이나 사존의 홍대한 자비에 감동해 울음을 터트렸다. 이 아름다움과 행복은 사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법을 외우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는데 여기에서 여러분과 수련 제고한 몇 개 과정을 교류하려 한다.

1. 원한심을 닦아버리다

밍후이왕에는 수련생들이 원한심을 닦아버린 교류문장이 아주 많은데 나에게 큰 도움이 됐다. 이전에 나는 자신이 원한심이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한 가지 작은 일 때문에 남편 수련생과 딸은 서로 한마디씩 하면서 나를 나무랐고 아무리 해석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수련자가 어떤 일에 부딪히든 모두 안으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해석하지 않고 그들이 말하게 놔뒀다. 하지만 마지막에 끝내 참지 못해 화장실 문을 잠그고 안에서 통곡했다.

눈물이 떨어지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즉시 나를 통곡하게 만든 것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나를 통곡하게 만든 넌 누구냐? 왜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하지? 당장 너를 없앨 테다.” 순간 눈물이 멈췄고 속에 있던 억울함도 해소됐다.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켰던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그 둘에 대해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도 사라졌다. 그래서 정말 깜짝 놀랐다. 그제야 이 ‘자아’가 원망하고 미워하며, 이 ‘자아’가 남이 뭐라고 말하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것을 똑똑히 구분하고 없애려 하자 그것은 바로 사라졌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진지하게 안으로 찾기 시작했다. 이전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한 적이 있는가? 남편, 딸, 수련생, 어머니, 친척이나 친구, 절친, 동료, 그리고 진상을 알릴 때 들으려 하지 않은 사람들 등등 내가 만났던 사람에 대해 거의 모두 원망하거나 미워한 적이 있다는 걸 찾아냈다. 크게 미워하기도, 작게 원망하기도 했다. 이렇게 생긴 원한이 다른 공간에 얼마나 많이 쌓였겠는가? 게다가 이건 겨우 이번 생에 생긴 원한이 아닌가? 정말 깜짝 놀랐다.

계속해 안으로 찾아봤다. 이런 원한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예를 들면 왜 내 수련의 길은 저렇지 않고 이러한가? 왜 나는 이토록 어렵고 고달프게 수련하는가? 왜 다른 사람은 아주 홀가분하게 수련하는가 등등이다. 내 수련의 길은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것인데 내가 이런 원망을 내보내면 이건…. 더 이상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내 목숨을 포함해 모든 것을 사부님께서 주셨는데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어찌 이토록 불경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즉시 경사경법(敬師敬法)하지 못한 나쁜 생각들을 제거해버렸다.

‘마귀가 우리 세계를 통치하고 있다’라는 책에서 우리의 생각이나 행위 중에 모두 증오를 품고 있다고 명확히 지적했다. 우리는 시시각각 그것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모르고 있다. 나에게 증오가 생기기만 하면 공산사령(共產邪靈)에게 에너지를 주입하는 것이다.(원한도 증오라고 이해함) 정말 끔찍하다!

나는 엄숙하게 자신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일사일념 중에서 끊임없이 원한심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운전해 출근할 때 원래 시간이 빠듯한데 누군가 앞에 끼어들면 속으로 생각한다. ‘앞에 끼어들었으면 운전이라도 좀 빨리해야지. 참….’ 그러면서 원한이 생겼다. 나는 즉시 그 마음을 붙잡고 말했다. “너는 내가 원망하고 미워하기를 바라는데 소용없어. 나는 네 말을 듣지 않고 대법 사부님의 말씀을 들을 거야. 대법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중생을 자비롭게 대하라고 하셨으니 널 없애버릴 거야!” 그리고 즉시 ‘원한심’과 원한을 생성한 ‘자아’를 해체시켰다.

이렇게 ‘원한’의 물질이 올라오기 바쁘게 즉시 그것을 붙잡았고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나는 그것에게 말했다. “네가 말한 건 소용이 없어. 나는 대법 사부님의 말씀대로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할 거야.” 그 후 끊임없이 속으로 말했다. ‘나를 도와 심성을 제고시켜 준 남편(딸, 동료 등)에게 감사를 드린다.’ 말하다 보니 원한이 사라지고 정말 감사한 마음만 남았다.

그리고 안으로 찾아봤다. 왜 일이 내 뜻대로 안 되면 원한을 품는가? 누구 마음에 들지 않고, 누구 뜻대로 되지 않았는가? 바로 그 ‘자아’였다. 기분이 언짢거나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원한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이미 기제(機制)가 형성됐다. 그래서 반드시 ‘기제를 형성한 원한’과 ‘원한을 생성한 자아’를 제거해야 한다. 이래야만 원한을 철저히 우리 공간장에서 제거할 수 있다.

비록 내가 다른 공간을 보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원한을 제거한다면 다른 공간에 쌓인 그것의 물질들이 계속 줄어들고, 절대 증가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언젠가 나는 그것들을 완전히 깨끗이 제거해버릴 것이다.

원한심을 끊임없이 제거해버리면서 차츰 자비롭고 자상하게 변했다. 사람이나 일을 대할 때 마음속에 그를 잘 대해야겠다는 일념만 있었고 원한이 생기지 않았다. 남이 나를 잘 대하든, 잘못 대하든 모두 나의 덕과 업력에서 비롯됐고, 인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나를 수련 제고시키려고 그들을 배치하신 것이라는 걸 알기에 마음속에 감사만 있고 원망이 없었다. 이렇게 내 마음은 늘 평온하고 부드러웠으며 아주 행복했다.

2. 두려움을 닦아버리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법률이 속인 중의 일을 상관하는 이것은 문제가 없다. 연공인이라면 바로 초상(超常)적인데, 그렇다면 당신은 초상적인 사람으로서, 초상적인 이치로 당신에게 요구해야 하지, 속인 중의 이치로 가늠해서는 안 된다.”[1]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을 외우면서 나는 속인 중의 법률은 수련자를 상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불법적으로 감금되거나 사악에게 박해받는 행위는 모두 대법 법리에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법률은 속인을 상관하고 우리는 사부님에게만 속한다는 일념을 확고히 했다.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두려움’은 ‘추구함’이 아닌가? 만약 경찰을 무서워하고 불법 감금될까 봐 두려워하며 주민센터 직원들이 집까지 찾아와 노크할까 봐 두려워한다면 이건 경찰에게 붙잡으러 오라고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주민센터 사람들이 와서 관리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경찰들과 대법제자 박해에 참여한 수많은 중생은 대부분 법을 얻고 구원받기 위해 온 것이다. 만약 사악이 내 두려움을 틈 타 그들을 이용해 날 박해하고, 더 나아가 대법에 죄를 짓게 만들어 그들이 정말 소멸된다면 이건 나와 관계가 있지 않은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2]

나쁜 사람을 봤을 때 만약 자신을 생각한다면 두려움이 나온다. 하지만 그가 부디 박해에 참여하지 말기를 바라고, 참여한다면 소멸될 수 있기에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박해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조사정법(助師正法), 중생을 구하러 온 것이지 중생을 해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두려움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3. 진정으로 고생을 낙으로 삼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은 수련 중에서 많은 관(關)을 넘어야 하는데, 원인은 사람이 출생한 이후 끊임없이 인류사회 인식 중에서 각종 각양의 관념이 생김으로써 이로부터 집착이 생긴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사회는 바로 고난(苦難)과 이익의 향수(享受)가 병행하는 세계이며, 당신이 아무리 돈이 많고, 어떠한 사회계층에 있든지 간에 인생은 바로 많은 고난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고달프게 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사람은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고난에 대항하는데, 목적은 좀 행복하게 살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하는 중에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피해(傷害)를 받지 않고 어떻게 잘 살며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공명을 성취하며 어떻게 더 많은 것을 얻고 어떻게 강자가 되겠는가 하는 등등이 형성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런 경험이 있는 동시에 또한 인생의 관념이 형성됐고 경험은 또 실천 중에서 관념으로 하여금 완고(頑固)하게 변하도록 했다.”[3]

최근에 연공할 때 나는 여기가 아프지 않으면 저기가 아파 편할 때가 없었다. 사부님의 이 단락 법에 비추어보니 나에게는 고난에 대항하려는 관념이 있었다. 고생하기 싫어하고 편해지려고 한다. 고생해 소업(消業)하는 것은 방금 수련을 시작해도 알 수 있는 이치다.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고생을 싫어하는가?

그래서 자신에게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고생은 무조건 받아들이고 더 이상 대항하지 말자고 알려줬다. 그래서 쪼그리고 앉을 때 다리가 아프면 ‘아픔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생해 소업하자’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몸이 오히려 그렇게 아프거나 괴롭지 않았다.

내가 ‘전법륜’을 첫 번째로 외울 때 어떤 단락은 여러 번 외워도 완전히 숙련되게 외우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익숙하다고 여기면 지나갔다. 이렇게 했는데도 사존께서는 자비롭게 제자에게 무한한 가지(加持)와 격려를 해주셨다.

사존께서 제자에게 주신 모든 것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인류의 언어로는 사부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수 없다. 앞으로 나는 계속해 법을 외울 것이다. 법공부를 잘해야 사람을 더 많이 구할 수 있고, 조사정법과 중생구도를 더 잘할 수 있다.

수련 층차의 제한으로 잘못 깨달은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 주시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佛性無漏)’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3-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

 

원문발표: 2021년 6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1/6/7/4265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