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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안으로 찾은 경험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한동안 안으로 찾고 집착을 파내며 착실하게 수련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평온한 상태로 들어갔다. 나중에 발생한 한 가지 일로 예전에 안으로 찾은 것은 모두 위사(爲私)한 것이었다는 걸 알았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이 아이를 교육하는 태도가 좋지 않아, 나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말하는 태도를 고치라고 권하고 싶었다. ‘상대방을 반드시 설득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표준으로 다른 사람을 가늠하는 것이 아닌가? 표면 태도가 좋아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고 할 때 상대방은 그런 순정하지 못한 물질을 느낄 것인데, 어떻게 내가 한 말이 들어가겠는가? 게다가 자신의 인식을 상대방에게 강요해 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 나는 이 관을 잘 넘지 못한 것이다. 비록 표면에서는 그와 모순이 발생하지 않았고, 나도 마음을 움직여서 괴롭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음 고비가 곧 찾아왔다. 남편과 장을 보러 가려고 차에 탄 후, 나는 여전히 수련생과 통화를 했다. 차가 출발한 다음 나는 통화를 마치고 은행에 가야 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방향은 반대쪽이었다. 은행에 가야 한다고 하니 남편은 화가 나서 미리 말해주었어야 한다며 차를 돌리기 귀찮아하며, 내가 늘 미리 해야 할 일을 잊는다고 불평했다. 나는 설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이 고비를 잘 넘어야겠다. 절대 대꾸하지 않고 심성을 지키겠다.

남편이 계속 불평해 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잘못된 곳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계속 말하겠는가?’ 최근에 나는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지 않는 것은 내가 좋지 않다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남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았다. ‘그렇다. 만약 내가 운전기사라면 처음부터 다른 사람이 목적지를 알려주기 바랄 것이다. 출발해서 한참 갔는데 다시 차를 돌리려면 얼마나 귀찮겠는가.’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남편에게 사과하고, 다음에는 반드시 미리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차에서 내려서 걸어가고 있는데 사부님의 법이 생각났다.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1] 이 구절 법리에서 나는 다시 한번 승화했다. 수련에 막 입문했을 때부터 참음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층차로 계속 올라가고 고비를 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참음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어서 한 가지 에너지가 체내에 들어왔다. 사부님께서 자비로운 느낌을 나에게 주셨다. 그 시각 세계의 모든 사람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자비로운 눈물이 흘러내렸으며, 곧이어 신체의 모든 세포가 즐겁게 활짝 펴지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께서 나의 신체에 있는 나쁜 물질을 가져가셨다. 그런 시원함, 수승함을 나는 시간을 멈추고 영원히 느끼고 싶었다.

그날 첫 고비에서 마음을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이런 승화된 느낌은 없었다. 두 번째 고비에서 진정으로 ‘위타(爲他)’한 안으로 찾음을 해내서야, 사부님은 이렇게 큰 상을 주시며 나에게 자비의 경지를 느끼게 해주셨다.

첫 번째는 보기에는 안으로 찾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지만 위사(爲私)한 것이었다. 층차가 떨어져선 안 되기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해, 마치 안으로 찾는 것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런 식으로 안으로 찾는 것은 불합격이라는 걸 알았다. 사부님께서도 의념을 보내셔 ‘위타’한 안으로 찾는 것만이 합격이라는 걸 기억하라고 하셨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타인을 위해 생각하는 안으로 찾는 것만이 진정한 안으로 찾는 것이고, 그래야만 사(私)에서 나올 수 있으며, 선을 수련하고 자비를 수련해 낼 수 있다. 가족 수련생이 내가 안으로 찾았다며 어떻게 집착심을 깊이 파냈다고 하면 “당신은 진정으로 안으로 찾지 못했다”라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부님이 그의 입을 통해 점화해 준 것이 아닌가? 그래도 나는 깨닫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내가 어떻게 안으로 찾았다는 과정을 말하지 않고 “이번은 안으로 찾은 것이 맞는가?”라고 물으니 남편은 “이번에 당신은 안으로 찾았다”라며 만족해했다.

그는 또 “많은 사람이 모순에 부딪히면 우선 자신이 어디에서 잘못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모순을 만들어 준 것은 자신의 용량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해, 이 일에서 수련해 지나가지 못한다. 자신이 어디에서 잘못했는지 몰라 자신을 개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모순이 다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라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오래 수련하며 줄곧 안으로 찾고 집착심을 깊이 파내며 아주 착실하게 수련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예 불합격이었다.

이번에 안으로 찾은 이 일은 나의 수련과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번 수련의 돌파는 보기에는 고비가 크지 않은 것 같지만, 나는 명명백백하게 ‘위사’에서 ‘위타’로의 사유 개변을 완성했고, 더 나아가 진정으로 자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됐으며, 진정으로 자비를 수련해내야만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하는 역량이 있을 수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何爲忍)’

 

원문발표: 2020년 6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25/4081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