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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다

(원제목:수련 도중 몇 번의 선택)

글/ 랴오닝 대법 제자

[밍후이왕] 1999년 7월 20일 박해가 시작되어 20년이 지났다. 20년간 우리 매 대법제자는 모두 많은 비바람을 겪었다. 매번 우리는 사람 마음과 정념의 갈등에서 선택해야 했다. 오늘 나도 수련생들과 내가 겪은 몇 번의 선택을 교류하고자 한다. 법에 어긋나는 점은 수련생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의 박해가 시작된 후 법을 수호하고 대법과 사부님의 결백을 요구하기 위해 베이징에 갔다. 그곳에서 많은 수련생과 함께 불법적으로 여자 쯔창학교에 구금되어 약 2개월 박해받은 후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몸은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남편도 수련생인데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현지 경찰에게 납치되어 돌아온 후 불법적으로 노동교양 3년을 선고받았다. 악이 늘 소란을 피워 나는 어쩔 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여 집에는 두 노인이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이것도 모자라서 아이 할아버지를 납치해 불법적으로 노동교양 1년을 선고했다. 이리하여 우리 가족 5명 중 할머니와 아이만 남아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박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다

밖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나는 몸과 마음을 다해 법을 실증하는 일에 몰입했다. 일하려는 마음이 강해 법 공부, 발정념을 중시하지 않아 한번은 법 실증 과정에서 악인의 고발로 불법적으로 7년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집에 돌아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집’에 대한 집착이 점점 심해졌다. 2008년 정법 수련 9년 동안 나는 8년을 수련에서 이탈했다. 감옥에서 수련생들이 나에게 이번에 집에 돌아가면 예전처럼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하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당부했다. 나도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지만, 당시 내심에서 찾고 심성을 닦을 줄 몰랐기에 수련생이 한 말이 옳다고 여겼다. 실은 이 말은 나의 사람 관념에 부합되었다.

집에 돌아온 날 저녁, 몇몇 수련생이 나를 보러 와서 나와 교류했다. 한 협조인은 나에게 법을 잘 배우고 하루빨리 조정하라면서 아직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협조인이 이렇게 말한 것은 내가 불법적으로 노동교화소에 감금된 기간에 다른 수련생이 내가 떠돌이 생활할 때 법을 실증한 일을 들려주어 그는 내가 하루빨리 조정하면 내게 협조인 일을 맡기려 한 것이다. 나는 협조인의 뜻을 알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속으로 먼저 법을 많이 배운 후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열 시간 이상 법을 배웠고 ‘7.20’ 이후 사부님의 국외 설법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 법 공부가 유난히 마음에 와닿았고 사상은 늘 법을 따라가 나의 층차에서 매일 많은 법리를 깨달았다. 그때 한 법 공부는 이후 나의 수련에 매우 좋은 기초를 다졌다.

매일 대량으로 법 공부를 했지만, 박해의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협조인이 나를 데리고 교류회에 참가하고 집에 늦게 돌아오면 가족은 매우 긴장했다. 사실 가족은 내가 불법적으로 감금된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두려운 마음이 있어서 협조인이 되는 것을 우려했다. 협조인이 되면 현지 수련생의 전체 수련과 법 실증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하고 법에 대해 책임지고 정체에 책임져야 한다. 수련은 속인 중의 지도자가 아니기에 일에 부딪히면 앞에 나서야 하며 감당해야 하기에 위험에 직면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 나는 줄곧 나의 진실한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후, 한 달 동안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 동영상 외 모든 대법책을 한번 다 보았다. 또한 진상 CD, 9평 공산당, 션윈, 천음 가곡도 다 보았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진선인(真∙善∙忍) 국제 미술전’이었다. 수련생은 우리가 걸어 온 몇 해 일을 거의 다 그렸다. 특히 수련생이 시체 침대(死人床-양팔과 양다리를 묶은 침대)에 묶여 있고 주위에 흰 가운을 입은 악인이 수련생에게 음식물을 주입하는 장면을 봤을 때 나는 마음이 떨렸다. 이 장면이 나에게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구치소에서 음식물 주입을 받은 후 감옥과 병원 또 다음 감옥에서도 계속 거의 반년 동안 단식했고 여러 번 각종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그런 고통은 언어로 형용할 수 없기에 마음에 남은 기억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웠다.

내가 집에 돌아온 지 한 달 되던 날 밤, 나는 협조인과 함께 교류회 참석차 시골에 갔다. 그날 수련생이 몇 되지 않아서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두려운 마음까지 있어서 원래 다음날 다른 곳에 가기로 했는데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협조인에게 내일 가지 않고 집에서 사부님의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을 보겠다고 했다. 가족도 내가 자꾸 나가는 것을 싫어하고 남편이 나를 근심한다고 말했다. 수련생은 스스로 결정하라고 했다.

이튿날 저녁 남편이 집에 없을 때 나는 시부모님 집의 DVD 플레이어를 내 방에 옮겨놓고 사부님의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을 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DVD가 돌아가자 모자이크 현상이 나타났으며 때론 좋았다가 때론 나빴다 했다. 나는 시부모님께 CD와 기계에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기계와 CD는 다 좋은 것이라며 본인들이 몇 번이나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영상을 보면서 자신을 찾았다. 내가 집에 돌아온 후, 한 달 동안 명, 리, 색, 정이 다 드러났다. 많은 수련생이 나를 보러 와서 한 말은 다 칭찬과 정념이 어떠어떠하게 강하고 구치소에서 7년을 선고받은 후 며칠 단식하여 정념으로 나왔다는 칭찬의 말이었다. 나중에 또 납치되어 감옥에 갔지만 7년 있는 동안 줄곧 마지막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등등.

그때 우리 지역에는 수십 명의 수련생이 노동교화소에서 대부분 ‘전향’되어 돌아왔다. 이런 칭찬을 들으면서 나는 입으로는 겸손한 말을 했지만, 마음은 사뭇 흐뭇했다. 정에도 엄중한 집착이 드러났다. 거의 8년 집에 있지 못하다가 지금 마침내 정정당당하게 집에 있을 수 있게 됐다. 수련생과 동창생들이 번갈아 가며 나에게 밥을 사주어 거절할 수도 없었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육친정과 집에 대한 의존이 남김없이 드러났고 기점이 법에 있는 것인지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매일 대량으로 법을 배웠지만 진정하게 자신을 찾고 자신의 마음을 닦지 않았다. 동영상을 보면서 자신을 찾았더니 틀어놓은 사부님의 설법 동영상 효과도 좀 좋아졌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다 보지 못했는데 기계가 멈추었고 완전히 한 곳에서 멈춰 버렸다. 나는 속으로 아직도 완전히 찾지 못한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더 보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연공을 다 한 후 나는 일념을 내보냈다. “오늘 나는 꼭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을 다 볼 거야. 어떤 생명도 교란해서는 안 된다.” 아들이 학교에 간 후 나는 또 CD를 돌렸는데 어제와는 뚜렷이 달랐다. 영상이 매우 또렷했고 음질도 매우 좋았다. 아침에 내보낸 그 일념에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 공간장을 청리해주신 것임을 알았다. 나는 조용히 보았고 사부님의 설법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되돌려 다시 들었다. 일부 수련생은 흐리멍덩하게 속인의 일에 이끌려 그다지 정진하지 못한다고 하신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당시 나는 울었다. “사부님께서 나를 방할하신 것이다!” 감옥에서 돌아온 후 이 한 달 동안 드러난 그런 사람 마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놓기 아쉬운 것이다.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수련을 포기할 수 있는가?” 대답은 “포기할 수 없다!”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이후의 수련의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 대법제자 앞에 놓인 한 갈래 길은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이고 한 갈래는 구세력이 안배한 길이다. 세 번째 길은 없다. 수련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수련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안배한 길을 걷는다면 마지막까지 갈 수 있는가? 구세력이 안배한 길은 우리를 망칠 뿐이다.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걸어야만 마지막까지 갈 수 있다.

사부님께서 협조인에 대한 설법을 말씀하실 때 나는 자신의 문제를 찾았다. 내가 협조인이 되겠다고 감히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앞장서기 싫고 위험이 있을까 봐 두려워하는 매우 강한 자아 보호, 가족을 보호하는 사심(私心)이 있기 때문이다. 수련에서 버려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사람 마음이다!

법리를 깨달은 후 나는 갈 길이 얼마나 어렵던 이후에 반드시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잘 걷고 사부님께서 어떻게 하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겠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지 반드시 정체를 우선으로 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제저녁에 왜 순조롭게 사부님의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을 다 보지 못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내가 수련생에게 내가 교류회에 가지 않으려고 한 것은 전날 교류가 나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진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점은 모두 위아위사(爲我爲私)였다. 수련생에게 사부님의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을 보겠다고 한 것은 자신에게 그럴듯한 이유를 찾은 것이다.

나는 줄곧 울면서 사부님의 설법 동영상을 다 봤다. 보면서 자신을 찾았는데 분명하게 깨달은 후 마음이 단번에 홀가분해졌다. 나는 내가 이전에 내려놓지 못한 많은 것을 내려놓았고 아울러 자신의 방향을 알았으며 어떻게 수련해야 할지를 알았다.

그날 저녁 나는 또 그 협조인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앞으로 나의 협력이 필요하면 24시간 수시로 나를 찾아도 되고 나는 무조건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듣고 그는 멍해 있더니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을 찾지 말라 하고 가족이 나가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더니 어떻게 하루 사이에 변했습니까?” 나는 그에게 앞으로 나는 법을 첫 자리에 놓고 박해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철저하게 제거하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나는 바로 우리 현지 정법 노정에 용입(溶入)되어 전반적인 조율에 참여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현지 수련생들은 자발적으로 시골에 내려가 십여 개 향진(鄉鎮) 수백 개 마을에 가 집마다 다니며 진상을 알리고 진상 자료를 배포했다. 어떤 지역은 한번 갔고 어떤 지역은 두 번 갔다 왔다. 고발로 납치된 일이 종종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수련생들은 즉시 행동했다. 발정념하고 파출소에 가 경찰에게 직접 진상을 알리고 수련생을 석방하라고 요구했기에 모두 짧은 시간 내에 납치된 수련생을 구출할 수 있었다.

한번은 수련생이 나와 교류할 때 언급했다. 한 수련생이 그녀에게 ‘전법륜(轉法輪)’을 다 배운 후 무엇을 깨달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감당을 깨달았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깨달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요 몇 해 나는 줄곧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나의 어깨의 책임이 너무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책임감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일에 부딪히면 늘 어떻게 법에 책임지고 정체에 책임지며 수련생을 위해 책임질 것인가를 생각했다. 박해가 잔혹한 시기든지 아니면 좀 홀가분한 시기든, 법을 실증하는 항목과 수련생을 구출하는 데서 물러서지 않았고 거슬러 올라갔다. 종종 사람 마음과 정념이 충돌할 때가 있었지만 매번 선택하는 과정이 바로 자신을 제고하는 과정이고 자신을 수련하는 과정이었다. 여러 번 위험에 처했을 때 속으로 어떻게 법에 대해 책임지고 정체를 위해 책임질 것인가를 생각하여 결과는 모두 위기를 안전하게 극복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은 모두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하셨기 때문이다.

수련에서 나에게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앞으로 길이 얼마나 짧고 길든지 나는 자신을 잘 수련하고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걸어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다!

(발췌)

 

원문발표: 2020617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17/4068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