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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을 만나니 경사가 많다

글/ 헤이룽장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헤이룽장 농촌 마을에 사는 51세 여성 대법제자다. 나는 1996년 봄에 대법을 수련하고 다시 살아나 생명에 희망이 있게 됐고 생활이 즐거웠다. 가족도 구원받았는바 우리 가족은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은혜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암담하고 고통스러운 인생

나는 헤이룽장의 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나는 세상 물정을 좀 아는 나이가 되어서부터 1m 이상 떨어진 물건은 보지 못했다. 밥을 먹을 때 구들에 떨어진 것이 감자채인지 밥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집이 매우 가난해 날 치료해줄 돈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게 하려고 말씀드리지 않았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책 읽는 것을 매우 좋아했지만 2분도 지나지 않아바늘로 눈을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나는 나에게 큰 흠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크게 위축됐다. 평소에 사람을 만나면 그림자만 보일 뿐,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어 인사도 감히 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내가 사람을 만나도 인사하지 않는다고 철이 없다고 할 것 같아 늘 사람을 피하고, 가능한 한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집안과 밖에서는 늘 꽁무니를 뺐다. 쉬지 않고 일만 해서 열 살 정도 되자 집안일이나 밭일을 모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즐겁게 뛰노는 다른 애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는 마음이 매우 강해서 공부를 줄곧 잘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는 칠판의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 선생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는 전부 머리에 기억해야 했다. 나는 평생 공부로는 출세할 수 없으니 아예 일하자고 생각하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런데 일을 많이 하면 몸은 피곤하지 않는데 눈이 먼저 피곤하고 아팠다. 나는 눈을 멀게 할까 봐 어쩔 수 없이 쉬어가면서 일했다. 친구가 매일 학교에 가고, 방학 때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감히 울지도 못했다. 나는 상심해 살아서 뭘 할지 모르겠고, 온종일 죽을 생각만 했지만, 또 내가 죽으면 엄마는 어떻게 사실까 걱정됐다. 암담한 하루하루가 이렇게 이어졌다.

나중에 결혼 상대를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내가 언제 장님이 될지 모르기에 남의 일가족을 망칠 수 없다고 생각해 감히 만나지 못했다. 우리 집 내막을 잘 아는 친척이 내가 말없이 일을 잘하는 것이 마음에 들어 우리 부모에게 청혼했다. 나중에 친척 사이에 혼인이 성사돼 나는 결혼하게 됐으며, 결혼할 때 나는 남편에게 시력이 나쁘다는 말을 못 했다.

기쁘게 대법을 얻어 웃음꽃이 피다

1996년 봄, 이웃집 셋째 아주머니는 머리가 아프고, 걸으면 숨이 차고, 허벅지에 큰 혹이 생겨 수술한 후 일할 수 없게 됐다. 병으로 비실비실하면서 온종일 화를 냈다. 하루는 도심에 사는 파룬궁수련생이 우리 마을 한 아저씨네 집에 와서 파룬궁 사부님의 설법 동영상을 방영했다. 이웃집 셋째 아주머니가 사람들의 소개로 사부님의 설법 영상을 보고 7~8일 만에 모든 병이 사라져 완전히 딴 사람으로 됐다. 모두 그녀의 변화를 직접 보고 “파룬궁은 정말 신기하네요. 참 대단하네요”라고 말했다.

하루는 그녀가 집집이 찾아다니면서 온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두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보러 가게 했다. 나도 일을 끝내고 갔다. 처음엔 몇 사람이나 왔는지 똑똑히 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방 안에 20여 명이 앉아 있었다. 나는 마음이 환해지고 있어 본적 없이 편안했다.

셋째 아주머니가 나에게 ‘파룬궁’이란 책을 주면서 책을 보고 심성을 닦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내가 어찌 감히 책을 읽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지만, 책을 이미 받았으니 두 페이지만 보자고 생각했다. 어느새 반나절을 보았는데 정말 몰입했다. 나는 사람이 왜 고통을 받는지, 왜 병이 나는지, 사람의 고생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인 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주 오랫동안 책을 읽고 있었다. 눈이 왜 안 아팠지?! 나는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나는 속으로 너무 기뻤는데 28년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내 왼쪽 눈초리에 뭔가가 생겼는데 가족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병원에 갔다. 검사 후에 나는 처음으로 내 눈이 선천적인 영양실조로 망막이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이치대로 말하면 나는 물체를 볼 수 없다고 말하면서 또 약을 먹어야 하고, 안약을 써야 하며, 다시 자라면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돈이 없어 치료도 못 하고 견뎌왔는데, 더군다나 지금 와서 파룬궁을 수련하고 사부님께서 관계하시는데 더욱더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갖고 온 연고도 쓰지 않고 바로 법공부하고 연공을 했다. 모르는 사이에 눈가의 것이 사라졌다.

하루는 글씨가 아주 작은 파룬궁수련생의 수련교류 문장도 읽을 수 있었고, 오랜 시간을 보아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너무 기뻤다.

우리 마을에는 백여 호가 있는데 당시 집집마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있었다. 집집마다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한 신기한 일들이 있었는데, 그 몇 년간 마을 사람들은 모두 화목하고 화기애애해 매일 명절을 쇠는 것 같았다.

대법이 우리 가족의 목숨을 구했다

남편은 내가 온종일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당신은 마치 보물이라도 주운 것 같네?”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내 마음에 묻어 둔 나를 열등하게 하고, 30년 가까이 괴롭혔던 근심과 괴로움을 말하면서 지금 사부님께서 나를 지켜주시니 어찌 기쁘지 않겠냐고 했다,

그때 우리 집에서는 젖소를 키웠는데, 남편은 젖을 짤 때면 팔과 손이 다 아팠다. 내가 남편에게 수련하라고 하니 그도 수련했다.(‘7.20’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그는 감히 수련하지 못하고 외지에 나가 돈벌이를 했다. 지금은 가끔 연공은 한다.) 아들도 어렸을 때 대법서적을 봤지만, 아직 수련에 들어서지는 않았으나 내가 컴퓨터를 배우고 진상자료를 제작하는 것은 모두 아들이 가르쳐 줬고 매우 지지해줬다.

대법 사부님께서도 항상 나와 가족을 보호하셨다.

1999년 추수할 때, 남편은 옥수숫대를 집으로 실어 나르려고 차에 3m나 높게 옥수숫대를 싣고 그 위에서 밧줄을 조이다가 너무 힘을 주어서인지 곧추 아래로 떨어졌다. 트레일러 견인봉 위에 떨어졌는데 발도 땅에 닿지 않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곧 ‘나에게는 사부님이 계신다. 별일 없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또 땅에 굴러떨어졌는데 바지에 대소변을 쏟기도 했다. 멀리서 본 사람도 이 사람은 틀림없이 끝장났다고 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천천히 땅에서 일어나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집으로 갔다. 나중에 아들이 보니 남편의 허벅지가 온통 가지색이었다. 생식기 주변이 부었고, 항문은 매일 고름이 흘렀으며 3년 동안 흘렀는데, 지금까지도 그의 꼬리뼈의 마지막 두 마디가 겹쳐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편은 농사일을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할 수 있었다.

단순히 꼬리뼈만 부러져도 사람이 움직일 수 있을까? 너무 신기했고 우리는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2014년에 남편이 오토바이에 날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길에 사람이 없고 차도 없어 그는 속도를 냈다. 갑자기 숲에서 흙을 끄는 차가 튀어나와서 남편은 사륜차 밑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굴을 땅에 박았고, 피가 계속 흘러 화장지 한 통을 다 썼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 오토바이는 길 다른 쪽으로 날아갔다. 깜짝 놀란 운전자는 우리가 빨리 운전했다고 탓했다. 남편은 차 밑바닥에서 기어 나와 말했다. “우리는 대법을 수련합니다. 우리는 괜찮으니 가세요.” 남편이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우고 시동을 거니 시동이 걸려 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단숨에 집까지 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보건소에 가지 않았고 스스로 피가 그쳤으며, 지금은 얼굴에 흉터가 남았다. 남편은 매우 두꺼운 속옷이 계란만큼 큰 구멍이 뚫렸지만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쇄골 부분에 혹이 생겼지만 별로 아프지 않았고 농사일이나 생활에 지장이 없었다.

사건 현장을 본 사람들은 모두 “이 두 사람은 정말 명이 크네요!”라고 말했다. 그렇다! 사부님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우리 둘 다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그의 이모부를 역으로 데려다줬다. 앞에서 직진하던 차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바람에 아들은 본능적으로 길옆으로 몸을 피하려다가 2m가 넘는 도랑에 빠졌다. 도랑 안에는 돌이 널려 있었는데 사람들이 우리 아들을 끌어올려서 보니 털끝만큼도 손상이 없었고, 옷도 찢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은 신불(神佛)이 보호하며 온가족이 혜택을 본다는 것을 믿었다.

그리고 어느 해에 아들이 건설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가 3층 건물 발판 위에 서 있었는데 발판이 부러졌다. 그 순간 아들은 머릿속이 공백이었다. 다행히도 아들은 2층의 좁은 발판 위에 떨어져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무 신기하다. 땅에 떨어졌다면 죽지 않아도 장애가 됐을 텐데”라고 말했다. 아들은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원에 한없이 감사드렸다. 아들은 시간이 있으면 과일을 사서 공손히 사부님 법상에 드린다.

우리는 줄곧 아들 가족과 함께 지냈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나는 늘 내가 대법제자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집안일을 내가 다 하고, 두 손녀는 모두 내가 데리고 키웠다. 며느리가 시집온 지 10년이 넘었는데, 나는 진심으로 며느리를 귀여워해서 우리는 서로 얼굴을 붉힌 적이 없다. 대법의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처신하면서 갈등을 겪으면 내가 어디서 잘못했는지 생각한다. 우리 온 가족들은 매일 즐겁다.

우리 가족을 보호해주시고 자비롭게 구원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0128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28/40039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