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각종 사조 속에서 심성을 높이고 중생을 구하다

글/ 영국 대법제자

[명혜망]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제이미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교류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난세 속에서 서양인에게 진상을 똑똑히 알리는 과정 중 어떻게 심성을 더 잘 높이고 중생을 구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대법제자들은 이미 반(反)박해 속에서 5년을 걸어왔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보고 들으며 어른들을 따라 법공부하고 수련했는데, 법공부는 제 생활의 일부분이었고 마치 공기를 마시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웠지만, 이는 제가 능동적이고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저는 자신과 사회 속 속인 사이의 거대한 차이를 의식하게 됐고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집단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삶은 저에게 진정으로 수련에 들어설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제야 저는 비로소 진정으로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이성적으로 착실히 수련하는 길에 점차 들어섰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부님께서 종결 시간을 거듭 연장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자비로 부여하신 유한한 시간 내에 우리는 서둘러 제고해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오늘날 세상의 기풍이 날로 쇠퇴하고 도덕이 급격히 추락하며 무신론이 성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공산주의 유령은 인류의 구세주로 위장해 수많은 선량한 사람을 속였습니다. 동시에 과학기술의 진보는 편리함을 극대화했지만 현실 세계의 유혹 또한 증폭시켜 세상 사람들이 진위를 분별하기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주가 성(成)ㆍ주(住)ㆍ괴(壞)ㆍ멸(滅)하는 과정 중에서 대법제자의 출현이 바로 가장 마지막 단계이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서 생명이든, 물질이든 모두 최후 가장 나쁜 때에 이른 것이다. 표현 역시 가장 복잡하고 선악(善惡)과 정사(正邪)의 분별이 가장 어려운 때이다.”(각지 설법 11-대법제자란 무엇인가)

오늘날 이 세상은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우리 세대 젊은이들은 정법의 최후의 최후에 살고 있으며 진정으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이 무신론에 세뇌됐고 잔존하는 약간의 도덕만이 사회의 흐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의 사교 생활은 키보드와 숏폼 영상에 국한돼 있습니다. 사회에는 각종 사조가 만연하고 폭동이 빈번하며 사상이 타락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극단적인 사상은 자신들의 이론을 ‘위대함’과 ‘고상함’으로 포장해 도덕적 우위를 차지합니다. 반면 전통 가치를 고수하고 신을 믿는 사람들은 오히려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다물며 이단아가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인류는 사실 정법이 아니라면 일찍이 훼멸되었을 것이다. 인류의 사상표준은 이미 지옥 아래에 있다.”(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대법제자로서 이런 혼란상 속에서 어떻게 사람을 구할 것입니까? 저는 막막함에서 실천에 이르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서양 젊은이들과 대화할 때 저는 만약 처음부터 ‘신’이나 ‘초자연적’인 것을 논한다면 많은 사람이 즉시 소통의 문을 닫아버리고 심지어 마음속으로 비웃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중공사당은, 당신들이 진상을 알리지 않아도 사람들은 점차 그것이 사악한 것이라는 것을 분별해 낼 것이다. 무신론은, 이런 문화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분별할 방법이 없으며 정말로 분별하기 어렵다.”(각지 설법13-2015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그렇다면 세속 사회에서 대법제자가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속인의 집착심에 맞추어 진상을 똑똑히 알릴 수 있을까요?

수많은 시사 평론 프로그램을 본 후 저는 논쟁 중 ‘신성(神性)’을 ‘이성(理性)’에서 분리해 속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세속적인 언어로 표현하려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신앙은 점진적일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가 깨닫지 못했던 것은 이렇게 할 때 저도 모르게 한때 신뢰했던 평론가들의 영향을 받아 제 관점이 은연중에 형성되고 좌우됐다는 점입니다. 저는 공산주의의 사악한 이론을 파헤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도덕적 틀이나 이데올로기를 찾기를 몹시 갈망했습니다. 사악한 공산주의 이론을 분석할 때 저는 신앙의 관점을 내려놓고 도덕적 틀이나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더욱 나쁜 것은 제가 자신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집착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화제든 일상 뉴스든 저는 기꺼이 반대편에 서서 비판하려 했습니다.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 하나하나는 제 논쟁에서 점수를 얻고 자존심을 높이는 기회가 됐습니다. 저는 점차 정치적 관점에서 가치감을 찾고 이를 통해 자아를 실증하는 데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수차례 논쟁을 겪은 후 저는 마침내 오직 대법에 대한 신앙만이 진정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신에 대한 신앙을 떠나면 속인의 그 어떤 이론도 뿌리 없는 나무이자 근원 없는 물과 같아서 진정한 시련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이를 깨달은 후 속인에게 진상을 알릴 때 제 마음은 훨씬 홀가분해지고 순수해졌습니다.

올해 6월 저는 한 회의에서 ‘에포크타임스’(영문) 부스를 맡았습니다. 그 기간 각양각색의 각기 다른 목적과 가치관을 가진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이 신문에 짙은 흥미를 보였습니다.

한 독일 신사가 열정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회의장 곳곳에서 논쟁할 사람을 찾으며 자신의 철학 사상으로 남을 정복하려 했습니다. 한 스위스인을 성공적으로 ‘격파’한 후 그는 우리 부스로 왔습니다.

언론사에 대한 저의 간략한 소개를 다 들은 후 그는 예의상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곧바로 존재의 본질, 완전함과 허무,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의 철학관을 끊임없이 쏟아냈습니다. 저는 미소를 지으며 서서 건성으로 그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이 사람은 타인의 기분을 배려하지 않고 자아에 너무 집중해 청중이 흥미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 비친 나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눈앞에 있는 이 신사는 그야말로 저의 승부욕과 과시심을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그의 장광설이 끝난 후 그는 ‘결정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객관적 현실을 믿습니까?” 저는 그가 복잡한 철학적 답변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때 사부님의 설법이 생각났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일깨워주셨습니다. “수련하여 어느 한 층차 중에 이른 사람, 그는 단지 그 한 층차 중의 광경을 볼 수 있을 뿐, 이 층차를 넘어선 진상을 그는 보지 못하며 믿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이 한 층차 중에서 본 것만이 옳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가 그처럼 높은 층차 중까지 수련하지 못했을 때, 그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믿을 수 없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층차가 결정하는 것으로서, 그의 사상도 승화해 올라갈 수 없다.”

그래서 저는 대법 속에서 수련해 낸 이해를 바탕으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 객관적 현실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인식 수준과 아는 범주에 제한됩니다. 당신이 제 맞은편에 앉아 있을 때 저는 당신과 소파가 두 개의 독립된 개체이고 하나는 움직이고 하나는 정지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 미시적인 분자 구조를 볼 수 있다면 아마 소파 역시 움직이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두 가지 인식이 동시에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그는 제 대답에 매우 놀라워하며 만족해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아는 많은 독일인이 불교 등 동양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많은 서양 지식인들이 사실 대법을 기다리고 갈망하고 있음을 의식했습니다. 저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이 신사는 대법에 짙은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는 겉옷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마치 트로피를 들어 올리듯 높이 치켜들었는데 마치 이것이 그가 기나긴 정신적 탐구 끝에 얻은 소중한 보상인 듯했습니다.

이번 우연한 만남은 저의 쟁투심을 반성하게 했습니다. 각기 다른 사조를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접촉하고 대법이 부여한 지혜를 활용해 어떻게 진리를 밝힐 것인가에 대해 돌아보게 했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또 젊은 기독교 변증가 두 명이 와서 저와 대화를 나눴는데 그들은 영국이 기독교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배경 하나를 보충하자면 ‘문화적 기독교인(Cultural Christian)’이란 기독교 사회에 속해 있고 명절 풍습(예: 크리스마스, 부활절)을 지키지만 내심으로는 진정으로 기독교를 믿지 않고 진정으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제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기독교를 믿지 않고 영국 사회가 문화적으로만 기독교 문화를 유지한다면 이것으로 정말 충분할까요? 생명의 나무는 신성한 뿌리가 끊어짐으로 인해 서서히 시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중 한 젊은이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습니다. “단지 ‘문화적 기독교인’에 불과하다면 확실히 신의 구원을 얻지 못하겠죠. 하지만 그저 건강한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것으로 어쩌면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인류가 근본적으로 신을 믿지 않는다면 신과 관련된 문화도 결국 형식으로 흐르고 도덕 체계도 필연적으로 붕괴될 것입니다. 사람이 만약 자신만을 위해, 사리사욕을 위해 산다면 인류는 결국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말이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고 그가 생각에 잠기게 했음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올해 저는 다행히도 션윈 관객 인터뷰 보도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션윈은 순수하고 바른 전통 문화를 보여주었고 가사에서 무신론과 진화론의 해악을 직접적으로 폭로했는데 사람을 뒤흔드는 이런 함의는 관객의 영혼을 직접 씻어주었습니다. 션윈 무용수 다수는 저와 또래인 젊은이들인데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헌신은 저에게 큰 감동과 전율을 안겨주었습니다. 제 일은 관객을 인터뷰하는 것이었지만 이 순정(純正)한 에너지장 속에서 저 자신도 정화됨을 느꼈습니다.

인터뷰 과정 중 저는 ‘자아를 내려놓기’의 중요성을 더욱 체득했습니다. 만약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고 자신을 실증하려는 마음을 품는다면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인터뷰를 완성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진정으로 자아를 내려놓고 완전히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배려하며 자비로 경청해야만 비로소 중생의 마음을 진정으로 열어 그들이 속마음을 털어놓고 대법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수련의 길에서 저는 더욱 법공부를 다그치고 쟁투심과 자아를 닦아버리며 대법 속에서 수련해 낸 지혜로 더 많은 서양 중생을 구하겠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26년 미국 워싱턴DC 법회 발언 원고)

​

원문발표: 2026년 9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9/25/514879.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9/25/514879.html

© 1999-2026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