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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생’이 대법으로 회귀해 정진실수(精進實修)하다

글/ 내몽골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99년 7월 20일 이전에 어머니와 함께 법을 얻은 ‘90년대생’(주링허우 세대) 대법제자다. 이제 나는 서른 살이 됐다. 나는 수련의 길에서 비틀거리면서 느낀 점이 많다.

법을 처음 얻었을 때 나는 철없는 아이였다. 비록 어렸지만 법은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법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박해가 시작됐고 나는 항상 ‘진선인(真·善·忍)’ 원칙을 마음속에 품고 주변 친구와 잘 지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사춘기의 반항, 고등학생 때의 혼란, 대학에서의 허송세월, 사회 초년생의 타락을 겪었다. 나는 결국 마음속 그 정토를 잊지 못하고 대법의 순정함으로 회귀했다. 다음은 나의 수련 과정이다.

1. 변고

내가 일을 시작한 후 수련생인 어머니는 나에게 법공부를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이전에 학교에 다닐 때는 시간이 없었지만 이제 마침 좀 한가해졌으니 법공부를 해야 한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법공부를 하지 않으려 하니? 남들이 다 집에 가고 나서 울어도 소용없다.” 어머니는 상냥하셨지만, 당시에는 나를 그저 딸로 대하고, 깊은 사람의 정을 품고 말씀을 하셔서 나는 정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에게 법공부를 하라고 강요받는 것이 싫었다. 특히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돈도 벌 수 있고 어지러운 세상 풍토에 눈이 멀었다. 쉴 틈만 나면 친구와 쇼핑하고, 식사하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고, 끝없이 놀면서 흥이 다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 병업 가상이 생기셨다. 나는 오랫동안 법에서 멀어져서 정념도 부족했고 수련자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어머니와 나는 이 관을 잘 넘지 못했다.

어머니의 가상은 더욱 심화됐고 시력도 심하게 손상돼 결국 아버지의 강요로 수술을 받게 되셨다. 수술 후 결국 두 눈이 다 실명되었다. 자유롭고 여유로운 내 삶은 완전히 무너졌고 퇴근 후 어머니를 돌보는 것 외에는 여유가 없었고 예전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버지도 어머니의 병으로 거의 무너지셨다. 어머니는 전능한 ‘슈퍼우먼’에서 모든 일에 보살핌이 필요한 중환자로 변했고 심리적으로도 엄청난 압박을 받으셨다.

나는 더는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가족의 기둥이 되어야 했다. 직장 내 갈등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고 퇴근 후 집에서는 내가 처리해야 할 잡다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퇴근하고 집에 올 때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자신을 방임한 채 오가는 인파를 쳐다봤다. 이 사람들은 모두 무엇 때문에 바쁜지, 왜 그런지 몰랐다. 그 시기 내 기억은 흐려지는 것 같고 설명할 수 없는 괴로움을 자주 느꼈다. 자신의 자유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도 잃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구세주가 아니었고 남도, 나 자신도 구원할 수 없었다.

2. 회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무감각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나는 다시 마음속 그 정토를 생각하게 됐다. 다시 ‘전법륜(轉法輪)’을 펼쳐 들었지만, 정진실수(精進實修) 하지 못했다. 생활 속의 사소한 것들에 얽히고설켜 헤어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자비롭게 다른 수련생을 시켜 나를 도와주셨다. 어느 날 꿈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꿈을 꿨는데 한 소녀가 내 손을 잡아 단번에 나를 끌어올렸다.

일주일 후 우리 집에 젊은 여자 수련생이 왔다. 예전에도 수련생이 어머니를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수련생이 법공부하고 정진하라고 할까 봐 두려워 방으로 피신했다. 나는 지키지 못하고 사부님을 실망하게 해드릴까 봐 아무 약속도, 대답도 못 했다. 이번 수련생은(이하 A 수련생으로 칭함) 달랐다. 나와 몇 살 차이도 안 되는 젊고 예쁘고 세련된 차림이었다. 당장 어떻게 하라는 요구 대신 자기 수련에 대해 많이 얘기하면서 “법공부를 많이 하고 발정념을 많이 하세요.”라는 진심 어린 조언 두 마디를 건넸다. 어머니가 이 말을 내게 수없이 하셨지만 나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듣고 기억했다. 나는 법공부와 발정념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곧 나에게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법공부와 발정념은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

곧 그녀가 날 집으로 초대했는데 함께 오는 수련생들이 몇 명 있다고 했다. 다른 수련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겁이 났다. 나는 다른 수련생들은 모두 정진하는데 나만 못해서 부끄럽고, 다른 수련생들은 법에 대해 말하는데 나만 말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이 수련생은 내 걱정을 알아차렸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다들 젊은 사람들이니 같이 앉아 있어요. 친구들과 회식하는 것처럼 그냥 친구 몇 명을 더 아는 것으로 생각해요.” 나는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됐다.

모임은 예정대로 다가와서 비슷한 또래의 젊은 수련생들을 여럿 만났다. 모두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었지만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속인 모임에서 처음 만나면 저마다 거드름 피우며 다른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넘겨 짚어보고 다른 사람에게 쉽게 호의를 나타내지 않는다. 이번 모임은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처음 만났지만 모두 오래전부터 알던 친구처럼 친절했다. 저녁은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췄고 모두가 만찬을 함께 하며 웃었다. 식사 후 한 수련생이 디저트를 준비했다. 우리는 동그랗게 둘러앉아 서로의 수련 과정에 관해 이야기하고 음식을 즐겼다.

알고 보니 다들 젊은 대법제자들이었다. 사부님의 자비로 우리는 다시 모이게 됐다. 수련생들 사이에 신기한 이야기가 많아서 우리는 서로 교류하고 격려했다. 급기야 모임이 한창 활기를 띨 때 젊은 대법제자들이 자기 집 주소 가까운 곳에 법학습팀을 조직하자고 주인 수련생이 제안했고 모두 동의했다.

당시 나는 이 수련생 집의 법학습 팀에서 법공부를 하기로 정했는데 나와 한 수련생이 그 집에서 아주 좋은 한때를 보냈다. 그해 겨울은 날씨가 추웠지만 내 마음은 내내 따뜻했다. 사부님께 감사했고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게 됐다.

3. 협조

A의 노력으로 젊은 수련생들의 대열이 커져서 나는 그녀 집의 젊은 수련생들 회식에 여러 차례 참석했다. 매번 새로운 얼굴을 마주쳤지만, 처음처럼 다들 거리낌 없이 친근하게 지냈다. 이들 젊은 수련생은 교사, 의사, 기자, 운전기사, 은행원, 기업체 사원, 자영업자, 공무원 등 사회 각 분야에 있었고 그 시절 우리 부모님처럼 이제 우리도 그들의 발자취를 다시 걸으며 대법을 실증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A는 예전 수련생들을 되찾아 오기 위해 어려움을 무릅쓰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으며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이나마 그녀를 도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 사부님께서 기회를 주셨다. 한 노수련생이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다음에 A가 당신 집에 오면 내 며느리(이하 B 수련생으로 칭함)도 법공부를 시작했다고 알려주세요. 며느리가 다른 수련생들과 소통이 잘 안 되어 젊은 수련생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며느리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겼고 어머니는 나에게 시간을 내서 A를 만나서 알려주라고 하셨다.

당시 며칠 동안 A를 만날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왜 내가 먼저 B를 보러 가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내가 B의 집에서 가까우니 내가 먼저 가서 한 번 만나고 시간을 약속하고 내가 다시 A와 약속하면 똑같지 않을까? 나는 주소를 갖고 B를 찾아갔다. 그 동네가 익숙하지 않아서 나는 장소를 잘못 찾았다. 노점상에게 물어보니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이 옆에 있는 다른 동네라는 것을 알았다.

차를 세워 놓고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청했다. ‘사부님 가지(加持)해주세요. 저는 이 수련생을 돕고 싶습니다. 사부님께서 제가 순조롭게 그녀의 집을 찾을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마침 경비원이 있어서 길을 물었더니 어떻게 가는지 친절하게 알려줬다. 수련생 집에 순조롭게 도착해서 문을 두드렸는데 그녀의 시어머니가 바로 그날 우리 집에 왔던 노 수련생이었다.

나는 B에게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내가 직접 체득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대화를 나누던 중 그녀도 당시 젊은 대법제자였고 어머니도 수련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수련생끼리 있으면 언제나 할 말이 끝이 없다. 한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아직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날이 이미 저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음 주에 우리 집에서 식사하자고 초대했고 그녀는 흔쾌히 동의했다.

나는 언제 A를 찾아갈지 생각했고 지난번 경험에 비추어 사부님께 청했다. 주말 아침 문득 머릿속에 오늘 A를 찾아가자는 일념이 스쳤다. 차를 몰면서 조용히 사부님께 청했다. ‘오늘 A가 집에 있게 해주시고 꼭 만나게 해주세요.’ 신기하게도 차가 길목에 이르렀을 때 A가 맞은편에서 차를 몰고 왔다. 그녀의 차는 높고 커서 눈에 띄었기에 나는 운전자가 A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즉시 차를 돌려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차와 비교할 때 내 차는 너무 작아서 속도부터 현저히 차이 났다. 나는 가속페달을 세게 밟으며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가지를 더 청하고 내 차를 가지해 달라고 청했다. 곧 우리가 나란히 섰을 때 나는 그녀에게 차를 세우라고 경적을 울렸다. 처음엔 그녀는 추월하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날 쳐다봤다. 나는 얼른 손을 흔들며 경적을 울렸다. 그녀가 날 알아보고는 내가 그저 인사하는 줄 알고 손을 흔들며 웃었다. 그녀가 차를 세우지 않아서 나는 계속 경적을 울리며 손을 흔들어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녀는 알아차리고 길옆에 멈췄다.

우리 둘은 차에서 내려 서로 마주 보고 크게 웃었다. 내가 드디어 A를 멈추게 했다고 말했더니 그녀도 웃으며 나에게 무슨 일이 그렇게 급하냐고 물었다. 내가 일의 대략적인 과정을 말했더니 그녀가 말했다. “날 쫓아와서 다행이네요. 저는 며칠 후에 집을 떠나려던 참이었어요. 오늘 우리 집에 갔더라도 헛걸음을 했을 거예요.” 우리 둘은 즉시 사부님께서 우리 둘에게 이 신기한 만남을 배치해 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만날 시간을 약속했다.

그날 A 부부와 B가 약속이나 한 듯이 함께 왔다. 비록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수련생 사이의 친밀함은 말할 것도 없고 생활 중의 고민과 수련 속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곧 다음 모임 시간을 약속했고 B도 곧 같은 법공부 팀에 합류하면서 인연이 이어졌다.

4. 시어머니와 며느리

나는 결혼 후 평온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고 시어머니도 수련인이므로 속인의 갈등은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그런데 나는 자신이 고부지간 문제에 있어서 매우 큰 심적 고비를 넘기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친구 중에 나는 가장 늦게 결혼했다. 속인 친구들의 다양한 고부갈등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다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다. 만약 어느 동년배가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부모에게 빌붙어 살기’를 하지 않고 잘 살아간다면 모두 믿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속인들은 대인관계에서 고부갈등은 고사하고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경계한다. 어떤 집안이 만약 고부지간에 평화롭게 지낸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겉모습만 그럴 거라고 말한다.

나의 고부갈등은 내가 임신하고 나서 불거졌다. 시어머니는 집안일을 잘하지 못하고 남도 잘 돌보지 못하시는 분이다. 내가 임신한 후 어머니가 날 돌봐줄 수 없자 나는 시어머니께 도움을 청했다. 이는 시어머니를 매우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서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갈등이 첨예해졌다. 시어머니는 내가 옹졸하고 고집이 세다고 생각했고 나는 시어머니가 사리에 어둡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일이 너무 바빠서 나에 대한 배려가 소홀했기에 나는 시어머니께 희망을 걸었다. 시어머니는 남편이 불효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시어머니가 이기적인 것이 더 원망스러웠다. 서로 기분 나쁘게 헤어져 나는 매일 친정으로 가고 시어머니는 나 몰라라 하셨다.

우리의 갈등이 첨예해지자 나는 유산 증세를 보였고 시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으셨다. 이런 일이 생긴 상황에서 나는 돌봐줄 사람이 더욱 필요했다. 시어머니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주머니 한 분을 고용해 돌봐주시겠다고 했다. 나는 시어머니의 진실한 얼굴을 보고 믿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두 달 치 비용만 내주고 이후부터는 우리가 책임지라고 하셨다. 남편은 말이 없었고 나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밤잠을 설쳤다. 시어머니와 한판 붙고 싶었다.

집에 오는 날 저녁, 나는 시어머니를 집으로 오시라고 해서 이 일에 관해 이야기하자고 했다. 시어머니는 방에 들어오셔서 첫날 어땠는지, 아주머니가 마음에 드는지 물으셨다. 나는 괜찮다고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렸다. “어머님, 우리에게 얼마 동안 돈을 내게 하실 거예요?” 시어머니는 내가 이렇게 직설적인 모습을 본 적이 처음이어서 당황하며 말씀하셨다. “다 너희들 몫이지.” 내가 말했다. “그건 아니에요, 우리 둘 다 돈을 받지 않을 테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래도 시어머니는 “이젠 너희가 해야지. 나는 나이가 들어 물러날 때가 됐어. 너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게.”라고 대답하셨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그럼 아주머니 월급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에 시어머니는 “너희들이 알아서 결정하면 되지, 너희들이 논의해 보거라.”라고 말했다. 말이 오가는 동안 시어머니는 내게 즉답(卽答)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편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시 시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시어머니는 여전히 “너희들이 시키는 대로 할게.”라는 한마디셨다. 당시에 나는 정말로 이렇게 묻고 싶었다. ‘그때 어머님이 아주머니를 고용하셨잖아요? 지금 어머님은 그걸 인정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결국 나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어른께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하신 분은 사부님이실 것이다.

다행히 날 도와주신 아주머니도 수련생이었는데 이 수련생과 교류한 뒤 나는 이것이 내 삼성관이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미움, 불만이 말끔히 지워졌고 오히려 후회와 죄책감이 들었다. 당시의 공격적인 말투와 시어머니의 난감한 표정을 생각하니 나는 내가 너무 나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수 대법제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 관이 지나가고 나니 마음속의 불만과 집착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었다.

속인 친구들은 일찍이 나에게 아이를 낳은 후에 일이 더욱 많아지므로 남편, 시어머니부터 교육해야 한다고 했다. “시어머니에게 돌봐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선 안 돼. 안 쓰면 손해야, 잘 못 하시더라도 시키지 않으면 안 돼. 무슨 이유로 그녀는 쉬고 네 엄마만 힘들게 하니?” 속인이 고부갈등을 대하는 태도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대법제자는 고부지간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정념으로 대하고 대법제자로서 관대한 태도로 대하고 대처해야 한다.

나의 모든 것은 대법에서 비롯된다. 날 버리지 않으신 사존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린다.

 

​원문발표: 2021년 11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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