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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모순 속에서 안으로 찾고 층층의 사람 마음을 버리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존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법공부 팀에는 세 명의 수련생이 있는데, 저는 10년 가까이 일부 일 때문에 A 수련생과 종종 다퉜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언쟁을 벌여도 언제나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저는 이 일로 A 수련생이 저를 오해하고 저를 억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A 수련생은 항상 제 인품이 너무 나쁘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저를 좋은 친구로 생각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그녀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녀를 돕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제가 여러 번 해명했지만, 그녀는 제가 변명하고 스스로 정당화한다고 여겨 더 화를 냈습니다. 우리는 몇 번이고 불쾌한 마음으로 헤어졌습니다.

1. 사람 마음을 찾다

처음에는 이 일에서 제가 무엇을 닦아야 하는지, 어떤 마음을 버려야 하는지 몰랐지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밝히려 할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지거니”[1] 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내가 왜 설명해야 하지? 나는 어떤 마음이 중하지?’라는 생각을 했고, 단지 제가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당하거나 수모, 모욕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만 찾았습니다. 이 일을 바탕으로 사부님께서 제게 대인지심(大忍之心)을 수련하게 하셨다는 생각은 했지만, 저는 여전히 사타구니 밑을 기어가는 수모를 참는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왜냐하면 속인을 상대하므로 각종 속인의 마음이 모두 당신을 교란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당신이 그의 병을 잘 봐주었지만, 그는 당신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당신이 그의 병을 봐줄 때, 나쁜 것들을 많이 떼어버리고, 그에게 아무리 치료해 주어도 그 당시에 꼭 뚜렷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마음속으로 좋아하지 않고 당신에게 감사하지도 않으며, 당신이 그를 속였다고 욕할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를 겨냥해 당신의 마음을 이런 환경 중에서 연마(魔煉)하게 한다.”[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마음속에 법을 담았고 모순에 다시 부딪쳤을 때 좀 더 잘할 수 있게 되었기에 한동안은 평온하게 A 수련생의 각종 책망에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순이 또 왔습니다. 수련생은 “저는 당신이 말하면 듣기가 싫네요. 당신이 말만 하면 저는 마음이 괴로워요.”라고 말했습니다. 법공부 팀에서 저는 다른 수련생 앞에서 질책을 당했습니다. 저는 그 수련생들보다 수련한 시간이 긴 대법제자였기에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체면을 지키려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저는 ‘A 수련생은 왜 내 말을 듣기 싫어할까? 내가 어떻게 말했더라? 어떤 말들을 했었지?’ 안을 향해 찾았습니다. 저는 교류를 할 때 자신에게 과시심이 있다는 것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을 실증하고 자아를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며 수련생의 위에 있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때로는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 사부님께서 다음과 같이 요구하신 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늘 말했다. 만약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티끌만큼도 자신의 목적과 인식이 없다면, 한 말은 상대방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고. 나는 단지 당신들에게 대법(大法)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나의 작풍(作風) 역시 당신들에게 남겨놓은 것이다. 일 처리 중의 어투, 선한 마음, 도리(道理)를 더하면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킬 수 있으나 명령은 영원히 할 수 없다!”[3]

사부님의 설법에 대조하고서야 저 자신이 말을 할 때 늘 자기의 이 인식이 맞다, 저 인식이 맞다고 강조했지 수련생들의 서로 다른 층차에서의 인식과 법에 대한 이해는 부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목적을 품고 급급히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혹은 어떤 일을 언급하는 이유는 자신을 내세우고 실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선한 마음이 부족한 채로 이치만 말했고, 어투도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문제를 토론할 때는 냉정하지 못해 언어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조금씩 찾아내면 그만큼 수련했습니다.

2. 선(善)을 수련하기 시작하다

A 수련생이 제게 선하지 못하다고 했고, 저는 또 변명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다른 사람은 저를 두고 선량하면서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했고, 저 자신도 이렇게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더욱이 또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게 되었는데 어찌 선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무엇이 선인가? 나는 어떻게 선을 수련했는가? A 수련생이 나에게서 본 선량하지 않다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조용히 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수련하기 때문에 大慈悲心(따츠뻬이씬)을 수련해 낼 수 있는데, 慈悲心(츠뻬이씬)이 나오기만 하면 중생이 모두 고생스러움을 보게 되므로 곧 소원을 품어 중생을 널리 제도하려 한다.”[2]

사부님의 이 한 단락 설법이 떠올랐고, 저는 자신이 줄곧 이를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어떻게 선을 수련해야 하는지 몰랐으며, 단지 선에 대한 속인의 인식 층차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부동한 층차의 선의 표현은 무엇인가?’ 일상 속의 작은 일에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을 통해 저는 무엇이 선인지를 체험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선, 순수한 선’이며, 무엇이 ‘선한 일념’일까. 제가 의식적으로 선을 수련하기 시작했을 때, ‘만약, A 수련생이 내가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한다면 나는 모종의 언행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왜 저 때문에 고통을 느꼈겠습니까?

저는 사부님의 설법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타이위안(太原)에서 설법하고 공을 전할 때, 50여 세 되는 수련생이 있었는데, 그들 노부부가 학습반에 참가하러 왔다. 그들이 큰길 가운데에 왔을 때 승용차 한 대가 아주 빨리 달려왔는데, 그 승용차의 백미러가 순식간에 노부인의 옷을 걸었다. 걸고는 그녀를 10여 미터 끌고 가다가 땅바닥에 ‘탁’ 내동댕이쳤고, 차는 20여 미터나 더 가서야 멈췄다. 기사가 차에서 뛰어내린 후 기분 나빠하며 말했다. “아니, 당신은 길을 가면서 보지도 않습니까.” 오늘날의 이 사람은 바로 이러한데, 문제와 마주치면 우선 책임을 떠넘기고, 탓할 것이든 탓하지 않을 것이든 그는 모두 밖으로 미루어 버린다.”[2]

제가 바로 이러한 심리가 있었는데, ‘이 사건은 내 탓이 아니다. 그때의 상황은 어떻고 어떻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원망하든 안 하든 저 자신을 모두 내려놓고 A 수련생이 어떻게 느꼈을지에 관심을 가졌고, 그 수련생에게 책임을 전가할 것이 아니라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한 층의 법리를 인식한 저는 차를 타고 A 수련생의 집에 가서 진심으로 그녀에게 사과했습니다. 이로써 제가 A 수련생에게 준 고통이 감소하기 바랐습니다. 동시에 그녀와 함께 사부님의 이 한 단락 설법에 대한 제 인식과 이해를 교류했습니다.

돌아온 후, 이 과정을 통해 제게 또 어떤 선하지 못한 점이 A 수련생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안을 향해 찾아보았습니다. 이렇게 찾고서야 비로소 제가 이 ‘선’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많은 선하지 못한 일들을 했는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또 제게 존재하는 질투심, 쟁투심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질투심이 있는 악한 자에게 어떻게 선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깨달았고, 이미 형성되어 있는 관념으로 늘 좋고 나쁨을 가늠하고 있었다는 점을 찾아냈습니다. 이로써 다른 사람들을 얕잡아보고 심지어 깔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타인을 진정 선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럴진대 평소의 제 언어, 행동, 시선에 어떻게 선이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과 모순이 생기면 다투고 투쟁하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의 이런 좋지 못한 마음과 표현이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을까요? 저는 마음속으로 A 수련생과 예전에 제가 상처를 입혔던 사람들에게 깊이 사죄하는 마음이 들었고, 이러한 좋지 못한 마음을 수련해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3. 명예를 구하는 마음을 닦아 버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순이 또 발생했습니다. 다투던 중에 그 일이 되풀이되어 또 A 수련생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다투고 있는가?’ ‘명예를 다투고 있구나!’ 한 목소리가 대뜸 저에게 대답을 주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명예를 다투고 있다고?’ 저는 이것이 사부님의 점화라는 것을 알았고, 그 순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명예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강렬한 마음입니까! 장기간 오히려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서 저는 자신이 텅텅 빈 듯하면서도 허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몸은 가벼웠지만, 머리는 좀 흐리멍덩한 느낌이었는데, 온종일 계속 이러했습니다. 저는 명예가 도대체 무엇인지 자세하게 되돌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현재의 층차에서 인식하기로는,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에 대한 타인의 오해를 용인할 수 없기에 천방백계로 변명하고 자신이 맞다고 하며, 자신에게 잘못이 없고 자신이 좋다고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음을 해낼 수 없고, 더욱이 한신이 사타구니 밑을 기어 지나가는 모욕을 참았던 것과 같은 대인지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진정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다투는 상황에서 어떻게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타인을 위할 수 있겠습니까?

명예를 구하고 있기에 어떤 일이든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를 수 없고, 누가 나를 좋거나 나쁘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늘 타인에게 좋은 면만 보여주려고 하고, 나쁜 면은 감추려 했으며, 타인이 저를 인정하지 않거나 저를 나쁘게 평가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겉보기에 좋은 일처럼 보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더라도 결코 진심으로 타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이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곧 사(私)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수련생들과 스스럼없이 쟁투하면서 수련생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부님의 요구와 차이가 너무 멀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늘 慈悲(츠뻬이)하고 선(善)으로 남을 대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 매번 문제와 마주칠 때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이 감당해 낼 수 있는지 없는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우선 생각한다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2]

여기서 한 층의 법리를 인식하고서 저는 평소의 일사일념 중에 이 완고한 사심(私心)을 제거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저는 사존께서 개시해주신 바를 굳게 기억해두었습니다. “명(名)에 집착함은 유위(有爲)의 사법(邪法)이라, 세간(世間)에 이름을 날리려 필연 말은 선하게 하나 마음에 마(魔)가 있어, 중생을 미혹케 하고 난법(亂法) 한다.”[4]

4. 무사무아(無私無我)를 인식하다

A 수련생은 여전히 저에 대한 불만을 계속 토로했고, 심지어 저를 몇 번이나 쫓아내는 등 저를 보기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집은 우리 팀의 법공부 장소였기에 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몇이나 갑자기 어떤 사람이 삿대질하며 당신에게 욕할 때 심정이 담담할 수 있는가? 몇이나 다른 사람의 비평과 지적에 직면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가?”[5]

저는 비록 떠나지는 않았지만 평온하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지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A 수련생이 저를 쫓아낸 이유는 제가 잘하지 못하고, A 수련생을 잘 대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며, 제가 아직 강대한 자비심을 수련해내지 못해 이 공간장의 좋지 않은 요소들을 해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마음속의 좋지 않은 생각을 배척했습니다. 예를 들면, A 수련생에 대한 불만과 몰이해, 억울한 마음, 우울함 등 부정적인 생각들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수련생, 혹은 타인을 잘 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안 좋게 변했습니다. A 수련생은 “제가 만약 잘 수련하지 못하면 당신이 책임져야 할 거예요.”라고 말하며 수차례 저를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각심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정체이다. 좋지 않은 상황이 나타나거나 수련생이 수련을 잘하고 못하는 것이 나에게 책임이 있는가? 나는 이 정체를 위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 정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저는 사악한 요소가 작용을 일으켜 우리 피차간에 수련해내지 못한 사람 마음의 빈틈을 타고 이 정체를 교란하고 있고, 저와 수련생들 사이를 이간질하여 이 정체를 파괴하고자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발정념을 시작해 자신의 공간장을 청리하고 우리 공동의 공간장을 청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법공부 팀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모두 이 정체 속에서 우리 각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이 정체가 더욱 좋아질 수 있는지 생각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 역시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매우 괴로울 때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물러나 서로 간에 안정을 되찾고 자신을 잘 수련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단체 법공부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형식인바, 그 속의 내포를 제가 아마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정말로 떠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악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서로 깨우쳐 주고 공동으로 정진할 수 있는 이 환경을 제가 잘 수호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수련에 누락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신의 능력이 너무 작은 것이 아닙니까?

며칠간 저는 우선 일정 기간 물러나 모두 냉정을 되찾고 좀 지난 뒤에 다시 보는 게 어떨까 망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사람들이 시험장에서 시험을 보는 꿈이었습니다. 저는 문제 대부분을 거의 풀 줄 몰라서 시험을 치지 않고 먼저 시험장을 빠져나오려고 생각했습니다. 깨어난 후에 사부님의 점화라는 것을 알았는데, 현재의 난관이 바로 시험을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시험을 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인가?’ 저는 절대로 이 정체를 떠나지 않고, 이 정체를 잘 수호할 것이라고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법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법공부를 잘해야만 출로가 생기고, 자신이 어떻게 앞으로의 길을 잘 걸어 나갈 수 있을지를 알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 사부님의 법이 자연적으로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마음에 眞善忍(쩐싼런) 품었나니 자신의 수련은 백성에게도 이롭도다”[6] 당시에는 정말로 사부님께서 제 마음속으로 법을 부어 넣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대법은 한 걸음 한 걸음 저를 이끌면서 저의 마음속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살펴보니 제 마음은 전혀 즐겁지 않고 매우 괴로웠습니다. 그렇다면 A 수련생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저보다 더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저는 예전의 제가 마음이 좁아 자신의 감정, 정서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단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결코 진정으로 타인의 감정에 관심을 갖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진정으로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진정으로 타인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위사(爲我), 위아(爲我)의 체현이 아닙니까?

저는 자아를 내려놓고 천천히 A 수련생이 어떠한 심정인지 어떠한 느낌을 받았을지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내가 어떻게 해야 그녀를 위하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이 정체를 위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7]

천천히 저는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7] 의 부분적인 내포를 체득하게 되었고, 법리가 한층 한층 펼쳐졌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제 마음의 용량이 너무 적다는 것을 제게 보여주셨고, 용량을 크게 키우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아무것도 아니며 어떤 것도 마음에 둘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마땅히 자아를 내려놓아야 하고, 정체에 협조하여 조사정법, 구도중생의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근본입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A 수련생의 집에 가서 저의 인식을 그녀와 교류했고, 어떻게 다시 A 수련생과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해 장기간 고심했던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제가 마음을 활짝 열고 마음속의 어두운 안개를 쓸어버리자 햇빛이 들어왔습니다. A 수련생도 기쁘게 웃으며 “저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10여 년 동안 끓임 없이 대인지심을 수련하고자 했으나 저는 해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저는 그러한 사람 마음을 제거하고 진정으로 자아를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대인지심이 생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일종의 경지이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홍대한 관용으로서,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보지 않고 따지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마음속에 진선인(真·善·忍)을 품고 진선인에 동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낡은 우주의 이기적인 속성에서 걸어 나와야 비로소 신 우주의 무사무아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으며, 비로소 대인지심이 생깁니다.

후기

여기까지 쓰고나서 저는 문장을 거의 다 완성한 것으로 여겨 잠시 멈췄다가 다시 타자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저는 《‘남령수’ 반 통의 전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야기에서 육홍점(陸鴻漸)은 당나라의 거사로서 다도에 능하고 물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육홍점과 친구 이계경(李季卿)은 양쯔강의 남령수를 얻어 차를 달이고자 했습니다. 이계경은 성실하고 조심스러운 병사에게 배를 타고 남령 깊은 곳의 물을 구해오라고 시켰습니다. 물을 얻은 육홍점은 국자로 물을 담으며 “강물은 강물인데 남령수가 아니라 강변의 물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물을 떠 온 병사는 “배를 저어 깊은 곳에 가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제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육홍점은 말을 하지 않고 물을 대야에 절반 정도 붓다가 멈추고는 또 국자로 물을 뜨더니 “이 밑이 비로소 남령수요.”라고 말했습니다. 물을 떠 온 병사는 졸지에 경악하더니 무릎을 꿇으며 “남령에서 물병을 품에 넣고 강변에 도착하였을 때, 배가 요동치는 바람에 절반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는 물이 적을까 봐 강변의 물을 떠서 병을 채웠습니다. 이 거사님의 감별능력은 정말 신통합니다. 누가 또 이분을 기만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제 마음속의 그 무언가를 찌른 것 같았습니다. 저는 다시 자신의 마음을 성찰했고 줄곧 A 수련생에게 변명했던 그 사건에 대해 돌이켜보았습니다. 가만 보니 제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그 병사와 같았습니다. A 수련생은 바로 그 육홍점 같았습니다. 그 수련생의 명백한 일면은 아마도 제 사상이 바로 절반은 남령수를, 다른 절반은 강변수를 담고 있는 그 물병과 같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A 수련생이 지적한 것은 불순하면서도 이기적인 그 ‘강변수’였고, 저는 그 ‘반 통의 남령수’를 두고 변명을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왜 A 수련생에게 ‘반 통의 강변수’에 관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을까요?

저는 더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명예를 구하는 그 마음이 요상한 짓을 한 것이었고,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약간의 실수도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타인 앞에서는 빛나는 그 ‘완벽’함을 드러내고 싶어 했습니다. 명예를 구하는 그 마음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아’를 수호하고 ‘자아’를 보호하고자 합니다. 이 ‘나’는 타인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 했고 탄로 나기 싫어했습니다. 심지어는 가짜로써 진짜를 혼란하게 하는 목적에 도달하고자 했는데, ‘진아(眞我)’를 대체하여 이 신체를 주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저에게 어떤 불순함이 있든, 어떻게 사부님을 기만할 수 있겠습니까?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바로 이 사건을 통해 A 수련생의 입을 빌려 저의 이기적인 마음을 폭로해주셨고, 제가 그것을 똑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수련하여 제거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약 10년간의 수련 중에서 저는 사부님의 인도로 점차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제거해버렸으며, 본성 역시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자신의 본모습을 서서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수련생들께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홍음3-少辯(논쟁하지 말라)’
[2] 리훙쯔 사부님 저서: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청성(淸醒)’
[4] 리훙쯔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수련자 금기(修者忌)’
[5] 리훙쯔 사부님 저서: ‘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6]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圓明(원명)’
[7] 리훙쯔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불성무루(佛性無漏)’

(밍후이왕 제18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원문발표: 2021년 11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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