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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순시 왕샤오옌 18년 박해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랴오닝 보도) 푸순(撫順)시에 있는 59세의 파룬궁 수련생 왕샤오옌(王曉燕)은 중공(중국공산당) 사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21년 동안 여섯 번 납치당하고, 두 번 세뇌반에 감금됐으며, 한 번 2년 6개월간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2003년에는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8년 동안의 불법 구금 동안, 특히 15년 동안 선양(瀋陽) 다베이(大北) 감옥에서 억울한 옥살이 중, 각종 고문으로 학대를 받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왕샤오옌은 말했다. “나는 1999년 7월 20일부터 2017년까지의 18년 동안 줄곧 사악의 박해로 심신에 극심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오른쪽 다리 장애, 뇌 반응이 무딘 증상,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정신이 흐리멍덩하며 앞이 똑똑히 보이지 않았고, 전신 관절이 아픈 증상이 나타났으며, 뇌, 어깨, 등은 전부 검은색을 띨 뿐만 아니라 근육이 괴사해 마치 딱딱한 판자처럼 전신이 뻣뻣하고 불편했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줄곧 자백하지 않고 전향하지 않아, 몇 차례나 박해로 거의 생명을 잃을 뻔했습니다.”

왕샤오옌 여사는 그녀의 일부 경력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 대법을 수련해 새 삶을 얻다

1989년, 겨우 28세인 나는 한창 젊고 재기발랄했으며, 사업을 시작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불편함을 느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는 나에게 입원 치료를 요구했다. 선양 의과대학 병리 검사를 거쳐, 결과 갑상선암으로 확진을 받았다. 이것은 나에게 정말 청천벽력으로 갑작스러운 날벼락이었다.

그 당시 아들은 겨우 3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른들이 아이에게 내가 죽을병에 걸려 목숨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아이는 나를 껴안고 매우 슬프게 울면서 “엄마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엄마가 없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라고 말했다. 어린 아들이 이런 말을 하자 내 마음은 찢어질 듯했다. 부모는 매일 눈물로 나날을 보냈고, 온 가족은 모두 깊은 슬픔에 빠졌으며, 친척과 친구들은 나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했다.

두 차례 수술하고 서양 의학, 한약, 화학 요법 및 치료법을 모두 써봤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수술 후 증후군으로 인해 몹시 고통스러웠는데, 정말 사는 게 죽기만 못했다. 성격도 좋지 않게 변해 세상의 불공평한 것에 분노하며, 온종일 남편과 다투고 시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아 뭘 봐도 화를 냈다. 원래 행복하던 가정은 침울하고 소침해졌다. 나는 삶에 대한 믿음을 잃고, 사람들이 왜 살아 있고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지를 몰랐으며, 빨리 죽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내가 고통스럽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 나는 운 좋게 만고에도 만나기 어려운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얻고, 사람들이 왜 사는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사람들이 왜 병에 걸리는지 등 어떻게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던 문제를 단번에 모두 깨닫고 생활에 목표가 있게 되었다.

연공한 후에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했고, 대법 ‘진선인(真·善·忍)’의 이념으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했다. 그리고 생활, 업무 중에 최선을 다해 다른 사람을 고려해 주고 상대방의 각도에서 문제를 볼 수 있었으며, 더는 남편과 싸우거나 시어머니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수련에서 제고하고 승화됨에 따라, 나의 온몸의 병은 매우 빨리 전부 나았다. 질병 없이 온몸이 가볍고 걸음걸이가 나는 듯한 상태에 이르렀고, 사람도 더욱더 젊고 아름다웠으며 착했다. 다시는 주사를 맞고 약을 먹을 필요가 없었으며, 더구나 병원에 갈 필요가 없게 되어 국가에 대량의 의료비를 절약해 주었고 또 병가를 낼 필요가 없었다.

나의 변화를 보고 시어머니도 대법 수련에 들어섰는데, 원래 매우 심각하던 시어머니의 심장병도 완쾌됐고 사람도 온화하고 착하게 변했다. 일가족은 화기애애하게 이전의 즐거움과 행복을 누렸다.

2. 수련을 견지해 여러 차례 납치 감금당하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江澤民)을 우두머리로 한 중공 깡패집단은 파룬궁에 대해 천지를 뒤엎을 듯이 사악한 탄압을 시작했다.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라는 멸절정책을 펼쳐 중국 본토에 있는 수천 명의 파룬궁 수련자들과 함께 나는 박해당했고 가족이 사방으로 흩어져 집과 가족을 잃었다.

나는 대법이 이렇게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파룬궁 수련을 통해 질병이 모두 나았고 도덕이 제고되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 되려 함은 국가의 어떠한 법률, 법규를 방해하고 간섭하지 않았으며, 사회와 가족 및 개인에게 백 가지 좋은 점만 있고 한 가지 나쁜 점이 없다. 정부에서 정말 잘못했고, 파룬궁을 금지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1999년 9월 10일, 나는 댐 강가로 가서 연공을 했다. 잠깐 후에 한 무리 경찰이 오더니 나를 마치 범죄자처럼 대했다. 그리고 나에게 “연마할래요, 안 할래요?”라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좋은 공법을 연마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의 상황은 만약 ‘연마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풀려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연마한다’라고 말하면 유치장으로 보내질 수 있었다. 나는 유치장으로 보내졌고, 보름 후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세뇌반으로 납치돼 계속 박해를 당했다.

세뇌반에서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문을 엄청 당했다. 그곳에서는 법도 없고 인권도 없었다. 나는 한 달 이상 구금된 후에 비로소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2000년 3월쯤, 어느 한 수련생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함께 베이징에 가요.”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우리 집 전화가 불법으로 도청당하고 있어서 나는 “베이징에 가요.”라는 한 마디 때문에 유치장으로 납치되었다. 그 후 또 푸순(撫順) 우자바오(武家堡) 세뇌반으로 납치당했다. 당시 날씨는 여전히 매우 추웠다. 저녁에 긴 나무 의자 위에서 잠을 자게 했는데, 나는 추위로 떨려서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감금당한 지 약 80여 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2000년 7월, 나는 베이징 텐안먼 광장으로 가서 대법을 실증하기로 했다. 청원할 방법이 없고 정부도 우리의 진실한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때문에 파룬궁 수련생은 청원하러 갔다가 납치를 당했고, 우리는 정부로 가서 청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톈안먼으로 가서 세인에게 진상을 알렸다. 우리는 세인에게 대법이 좋고 파룬궁은 정법이며, 국민은 신앙의 자유가 있고 우리가 마음을 닦아 선을 행해 좋은 사람이 되려 함은 잘못이 없음을 알게끔 하려고 했다. 톈안먼 진수이(金水)교 앞에 도착해 나는 연공을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파룬궁 제2장 공법 포륜(抱輪)을 연마하면 다른 사람이 보고 바로 파룬궁임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포륜을 연마하는 순간, 또 많은 파룬궁 수련생이 있었는데, 그들도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내 주변에 와서 자동적으로 질서 있게 줄을 서서 동시에 포륜(터우첸빠오룬)을 연마했다.

나중에 체포되어 베이징 주재 푸순 사무실로 납치됐고, 징위 파출소에 납치되어 푸순으로 돌아왔으며, 15일 동안 불법으로 구금되었다가 또 세뇌 수업반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2년 6개월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우자바오(武家堡) 노동교양소에 불법으로 감금당한 기간에 어떤 파룬궁 수련생은 연공을 해 경찰 쩡추옌(曾秋豔)에게 구타, 욕설, 체벌을 당했다. 수갑을 채운 채 매달았는데, 이것을 보고 파룬궁 수련생은 단체 단식 항의를 했다. 교양소 소장이 와서 조사했는데 나는 실제 상황을 소장에게 알려주었고, 쩡추옌은 처분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앙심을 품고 늘 기회를 찾아 나에게 보복하려 했다. 몇 차례나 나에 대해 손을 쓰려 했으나 모두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한번은 감방을 수색할 때, 나의 침대 위에서 경문을 발견했다. 그녀는 나를 사람이 없는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나에게 한바탕 크게 소리쳤다. 그런 다음 무방비 상태에서 작은 나무 몽둥이로 나의 머리를 쳤다. 순식간에 나는 구타당해 똑바로 서지 못했고, 머리가 아찔하고 눈앞이 캄캄했으며, 머리에는 시퍼런 혹이 생겼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그녀가 나에게 한 박해 사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 나를 군인 병실에 감금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 전향하도록 핍박했으나 나는 전향하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22일, 나는 기타 파룬궁 수련생과 함께 악명이 높은 ‘마싼자(馬三家)노동교양소’로 보내졌다. 그곳은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하는 사악한 소굴이다. 마싼자에서 날마다 전향을 핍박당했는데, 전향하지 않으면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악은 날마다 대법을 비난하고 사부님을 모독했으며, 유언비어를 날조해 선전하며 끊임없이 세뇌를 진행했다. 이때 나의 몸은 이미 박해를 당해 매우 위급했는데, 끊임없이 기침하고 구타당해 이미 말을 하지 못했다. 그 후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게 되어, 새해 전날 밤에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수련을 포기하지 않고 어떠한 보증을 쓰지 않은 이유로, 3년 동안(1999년에서 2002년까지) 다섯 번 연속 납치되어 거주지 감시, 전화 감청, 외출함에 추적당했고, 또 불법으로 구금당했다. 그리고 불법으로 구치소, 요양원, 세뇌반,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 감금됐고, 여러 차례 사악에게 가택 수색 당했다. 한번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을 때, 그들은 또 10여 세인 아이도 파출소로 납치했다! 이런 상황에 만약 계속 집에 거주하면 여전히 납치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핍박에 못 이겨 유랑생활을 했다. 박해를 당한 시간이 너무 길었던 이유로 일부 구체적인 시간과 발생한 사건은 이미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3. 거듭 납치를 당해 불법으로 징역형 15년을 선고받다

2002년 4월 10일, 나는 핍박당해 유랑생활하는 기간에 또 셋집에서 사악한 경찰에게 잠복 감시당했는데, 2명 파룬궁 수련생과 함께 동시에 징위 파출소로 납치됐다. 이것은 여섯 번째 납치, 박해를 당한 것이다. 내가 협력하지 않고 진상만 알린 이유로, 또 나를 장쥔(將軍) 파출소로 옮겨 계속 심문을 진행했다. 그들은 나의 가방 안의 물건을 전부 거둬갔다. 약 2만 위안(한화 약 341만 원)의 현금, 핸드폰 2개, 호출기 2개 그리고 기타 물품이다.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사악에 협력하지 않고 줄곧 진상을 알렸다. 이 때문에 체구가 건장한 남자가 나의 손을 잡고 강제로 지장을 눌렀다[그중 한 사람은 관융(關勇)이라고 부름]. 그 후 나를 강제로 푸순 구치소로 보냈다.

구치소에서 나는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해 20일이 되어 생명이 위급했다. 그들은 나에게 생명 위험이 나타난 것을 보고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있는 기간에 위층과 아래층은 경찰과 사복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이때 어머니와 남동생은 나를 만나러 급하게 왔다. 방안에 들어와 얼마 되지 않아 곧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어머니에게 문을 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때 문은 이미 열렸고 수십 명의 경찰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나를 방안에서 가로막고 여전히 연마하는지를 물으며, 연마하면 즉시 납치해가고 연마하지 않으면 납치하지 않고 집에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나의 생명은 모두 대법이 준 것입니다. 나는 대법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연마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와 남동생은 눈을 뻔히 뜨고 내가 이 토비 같은 무리의 경찰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이 무리 경찰들은 또 가족에게 나를 데려갔다가 나중에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나는 “거짓말을 하여 속이는 것이니 믿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강제로 나를 끌어갔고, 또 나를 구치소로 보냈다.

반년 후, 구치소에서 푸순 공안의 한 곳으로 데려가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관융은 나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한 가지 일을 알려 줄게요. 쩌우구이룽(鄒桂榮)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떨어져 죽었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당신들이 살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자살은 죄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절대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내가 믿지 않고 협력하지 않는 것을 보더니 곧 나에게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 나의 두 엄지손가락을 등 뒤로 묶고 힘껏 매달아 놓아 사람 전체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힘껏 “나를 내려놓으세요, 나를 내려놓으세요.”라고 외쳤다.

내려놓은 후, 약간의 선심이 있는 경찰이 낮은 목소리로 “당신의 안구마저 떨어지려 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내가 한 일은 나라의 법과 규정을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한 일체는 모두 중생에게 진상을 명백히 알려 거짓말에 속지 앓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수련한 후, 집에서는 좋은 아내와 어머니이고, 직장에서는 좋은 직원이며, 사회에서는 좋은 시민으로, 약간의 나쁜 습관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해 비로소 해낸 것인데, 대법을 수련함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관융은 또 약이 바싹 올라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당신을 아래층에 던져 떨어져 죽게 하고 당신이 자살했다고 말하겠습니다! 저우구이룽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면 알겠죠!”라고 말했다. 나는 “파룬궁 수련생을 죽이는데 사용된 거짓말이 마침내 탄로가 났네요!”라고 말했다. 관융은 더욱 화가 났다. 그래서 음란하게 “보아하니 당신은 아주 예쁘고 희게 생겼고 말쑥하네. 당신을 침대 위에 넘어뜨려 강간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때 나는 큰 소리로 “당신은 깡패이고 인간쓰레기예요. 무슨 인민 경찰이라고 합니까? 당신은 인간의 찌꺼기입니다. 당신은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외쳤다. 내가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이 들어왔다. 관융은 나무 몽둥이를 들고 큰 소리로 “나는 당신의 쇄골을 구타해 부러뜨려 놓고 당신의 다리를 벌려 놓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다가와 나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나는 절대 그가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필사적으로 다리를 뻗었다. 결국, 그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소용이 없다. 여전히 당신에게 판결을 내려 확정할 것이다.”라고 소란을 피웠다.

이 기간에 3일 동안 나에게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구두 자백 위에 쓴 것은 모두 그들이 그들 생각에 따라 쓴 것인데, 근본적으로 내가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나에게 내가 말한 것이라고 승인하도록 했다. 나는 단호히 승인하지 않았다. 나를 끊임없는 학대한 후 또 나를 구치소로 돌려보냈다.

구치소에서 꼬박 1년 동안 감금했다. 이 기간에 판결서가 내려왔는데, 어떠한 법률적인 근거 없이 나에게 징역 15년의 불법적인 선고를 했다. 나는 판결에 불복해 상소를 제기했다. 상소를 기각해 무고한 판결을 유지했다. 일부 정의로운 경찰마저 불공평한 감을 느껴 사사로이 “뭘 하는 거죠? 파룬궁을 연마했을 뿐인데 15년을 선고하다니, 정말 함부로 꾸미네요.”라고 말했다.

4. 감옥에서 각종 잔인한 박해를 당하다

나는 2003년 4월 10일에 강제로 선양 다베이 감옥으로 납치당했다. 내가 암에 걸린 이유로 감옥에서는 수감을 거부했다. 나는 가족에게 1000위안의 생활비를 달라고 했는데, 사악한 ‘610’에 의해 강탈당했다. 게다가 2000위안을 나를 감옥으로 보내려 뒷거래하는 데 사용한다고 했다.

막 감옥에 가뒀을 때, 나에게 전향하도록 핍박했고 죄수복을 입도록 핍박했다. 당시는 한창 사스가 성행해 감옥 측은 감옥을 봉쇄하여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밖에서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집에서 물건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무런 일용품도 없었고 입을 것도 없었다. 온종일 곰팡이가 낀 옥수수떡을 먹었는데, 먹은 다음이면 위가 불편했다. 게다가 날마다 수련을 포기하도록 핍박당해 정신과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감당했다. 날마다 차 바퀴 전술(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면서 끊임없이 세뇌했다. 온종일 대법을 비방하고 미친 듯이 파련궁수련생을 공격하여 숨 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의 몸이 극도로 허약한 상황에 늘 쇼크 상태가 나타났는데, 악독한 경찰 장옌퉁(張豔彤)은 여전히 내가 꾸민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심각한 상황을 본 후, 그녀는 오히려 놀라 달아났다.

그 후 또 대장이 와서 두 명의 죄수를 시켜 나를 작업실로 부축하여 가서 자리를 찾아 앉혀 놓았다. 나는, 내가 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죄수가 아니므로 소극적으로 감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단식으로 인간성이 없는 이런 식의 불법 감금 박해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위선적으로 사람을 파견해 나에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원래 나는 암에 걸려 곧 죽을 사람인데, 대법을 수련한 후 기사회생하여 도덕이 고상해졌어요. ‘진선인(真·善·忍)’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몸이 건강하게 됐어요. 나는 국가의 어떠한 법률을 위반하지 않았으나, 당신들은 오히려 여러 차례 나를 납치했고 또 나에게 15년 형의 무고한 징역형을 선고했어요. 이런 악랄한 환경 중에서 나는 심신에 타격을 입었고, 또 온종일 나에게 전향하도록 핍박했어요. 나는 죽을 때까지 대법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연마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나는 15년의 억울한 징역형을 선고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내가 이렇게 단호한 것을 보고 곧 “어쨌든 그녀는 나가지도 못하는데, 15년 동안 천천히 고생하라고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사악은 또 일종의 방식을 바꿔 나를 박해했다. 매일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6시 반에 일하러 나갔고, 저녁 8시 반에 일을 끝냈는데, 경축일과 휴일, 일요일이 없었다. 일을 끝내는 시간을 무한 연장했는데, 어떤 때는 저녁에 일을 끝내지 않고 이튿날에 이어서 일을 해 사람은 지쳐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감옥 측은 조금의 인성도 없이 사람을 핍박해 궁지에 몰았다. 어떤 죄수는 견뎌내지 못해 자살했는데, 맥을 자른 사람, 목을 매어 죽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핍박해 죽은 사람에 대해 악독한 경찰은 핍박당해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한 죄수는 병에 걸려 위험했으나 여전히 일하도록 강요당했다. 맨 마지막에 이 죄수가 지쳐 위험해도 여전히 꾸민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며칠이 되지 않아 이 사람은 죽었다.

중공 교도관의 수단은 매우 잔인해 사람이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했다. 문명과 인성화(人性化)된 관리라는 탈을 쓰고 마귀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다. 만약 그 장소에 직접 가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믿겠는가? 정치가 맑고 깨끗하고 천지가 태평한 상황에 어떻게 이렇게 사악하고 어두운 곳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곳은 그야말로 바로 인간 지옥이다. 그곳의 악인은 정말 마귀 같았다. 당연히 감옥 측에는 사망 인원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구타해 죽인 사람이든지 아니면 박해해 죽인 사람이든지를 막론하고 모두 자연적인 사망 혹은 정상적인 사망이라고 말했다. 감옥 측은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고, 경찰도 말하지 않을 것이며, 죄수는 더구나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목숨을 잃을 정도의 재앙을 초래할까 두려워 이미 집으로 돌아간 죄수도 더는 자신에게 번거로움을 감당하려 하지 않았다.

아침 7시에 일하러 나가서 저녁 7시에 일을 끝냄은 겨우 몇 해 동안의 일이다. 역시 대외적으로 말했는데, 그곳의 노역은 모두 가장 잔혹하다. 들어가 참관하고 검사한 사람은 단지 표면적인 가상만 보았을 뿐, 사악한 당의 체제와 법률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거짓말과 속임이었는데 그곳에서는 더구나 남김없이 다 드러났다. 어떤 일은 내가 단지 개괄적으로 말했을 뿐, 그곳에서는 근본적으로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구타하고 욕하고 체벌을 가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매일 12시간 동안 노예 노동을 했는데, 어떤 때는 밥을 먹고 화장실로 가는 시간마저 없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감방으로 돌아가서 쭈그려 앉아 감옥 규정을 외우도록 강요했다. 사람마다 감옥 규정을 다섯 번을 썼는데, 빨리 쓰면 밤중에야 다 쓸 수 있었고, 늦게 쓰면 날이 밝을 때까지 써야 했는데, 온밤 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이것은 세뇌와 체벌을 동시에 사용한 박해이다. 게다가 또 듣기 좋은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공부를 좀 시킨다’라고 말했다. 그곳의 죄수는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특히 사악한 무리는 파룬궁 수련생을 핍박해 전향을 진행할 때, 일체의 극히 사악한 수단을 다 썼는데, 최저한의 존엄마저 없었다. 더구나 무슨 인권을 말할 나위도 없다. 개인 물품은 늘 아수라장으로 뒤져져, 하루 동안 일을 하러 나갔다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쳐도 여전히 물건을 정리해야 했다.

약 2011년쯤 우리가 막 새로운 감구역으로 옮겨갔는데, 작업실과 감방에서는 모두 신을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단지 신 한 켤레만 신을 수 있었을 뿐이다. 비가 내리기만 하면 비참했다. 땅 위는 차가워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어 얼마나 괴로운지 말하지 못할 정도였다. 경찰이 보더니 또 남의 불행을 즐기며 “목숨을 버리고 재물은 버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매일 일을 끝낼 때면 몸수색했는데, 날씨가 얼마나 추웠던지를 막론하고 맨 말로 차디찬 시멘트 위에서 수색을 다 끝낸 후에야 비로소 신을 신었다. 매일 10분 동안만 세수할 수 있었다. 게다가 3명이 2개의 수도꼭지를 사용하고, 두 사람이 하나의 수도꼭지를 사용했다. 어떤 때는 마침 물이 없는 시간에 마주쳤고, 어떤 때는 또 고의로 물을 적게 열어놓았으며, 또 모두 냉수를 사용했다. 목욕은 오랫동안 겨우 한 번만 할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약간의 인간성도 없었다. 그리고 무슨 위생을 따졌다. 시간이 오래되어 몸에는 모두 매우 고약한 냄새가 났다.

5. 약물 박해

아마 2009년일 것이다. 감옥에서는 이른바 ‘치료 감구’를 만들었는데, 역시 파룬궁 수련생을 겨냥해 박해를 진행했다. 새로 들어온 파룬궁 수련생은 모두 그곳에서 핍박에 못 이겨 전향 당한 후에야 비로소 각 감구로 배치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각 감구에서 전향되지 않는 사람은 또 그곳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모든 사악한 수단을 동원해 파룬궁 수련생을 살해하여, 다른 감구역도 모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박해를 당해 병 상태가 나타났을 때, 그것들은 치료 감구로 가서 약을 가져와서는 의과대학에서 가져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그 후에야 비로소 독약을 넣었음을 깨달았다. 그때 먹은 약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장기간 박해당한 관계로 지금 어떻게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대뇌 중추신경을 파괴하는 약인데, 이런 약은 독성이 매우 크다.

나는 핍박에 못 이겨 약을 먹은 후, 전신에 기운이 없는 증상, 바람을 두려워하는 증상, 전신의 뼈가 마비된 증상, 뼈관절이 아픈 증상, 붉게 부어오르는 증상, 대뇌에 환각이 나타나는 증상, 눈에 맹점이 나타나는 증상, 일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증상, 뇌 반응이 둔한 증상이 나타나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빨리 깨닫고 이로부터 약 먹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나를 핍박해 치료를 거부한 것에 서명하도록 했다. 만약 무슨 나쁜 결과가 나타나면 치료를 거부해 조성된 사망이라고 말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죽어도 병으로 사망한 것이고, 박해를 당해 사망한 것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여 사악이 대법에 먹칠하기 쉬웠다. 이후 또 나에게 핍박해서 채혈했는데 매주 한 차례 피를 뽑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피를 뽑는지 묻자, 그들은 감옥 밖에서 화학 연구를 해 병세 호전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꾸 피를 뽑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는 감옥에서 병을 치료하지 않는데 나는 더는 뽑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채혈함은 생체로 장기를 적출하기 위해서인 것을 알게 되었는데, 정말 사악하기 짝이 없었다.

감옥 측은 나를 이른바 ‘완고하기 짝이 없는 강경 분자’, 중점적으로 고립해 탄압하는 대상으로 정해 시종 엄한 관리를 진행했다. 누구도 나와 말을 하고, 접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누가 나와 접촉하면 곧 형기를 줄여주지 않았고, 파룬궁과 선을 긋지 못하면 날마다 시달리거나 욕을 듣고 구타당해야 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내가 말을 할 줄 모르고 말을 잊었음을 발견했다. 그들이 나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 내가 말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그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입이 있는 것은 말을 하라는 것이다. 말을 함은 사람으로 된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그 후 나는 내가 누구와 말을 하고 싶으면 그녀에게 “내가 당신에게 말을 한 것이지 당신이 나와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물으면 당신은 듣지 못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고 말하세요.”라고 말했다. 사악한 경찰은 맨 마지막에 나에 대해서도 방법이 없었고, 어쨌든 나에게 형기를 줄여주지도 않았고 또 나에게 점수를 주지도 않았다.

그 후부터 악독한 경찰과 악인은 감히 노골적으로 나를 박해하지 못하고 몰래 나를 괴롭혔다. 작업실에서 재봉질했는데, 날씨가 더울 때면 나를 가장 더운 곳에 배치했다. 앞쪽에는 큰 다리미 대가 있었는데 쪼여져 정말 몹시 뜨거워 견디기 어려웠다. 날씨가 추울 때면 나에게 가장 추운 곳에 앉게 해 추위에 떨게 했는데, 오랫동안 앉아있으면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박해 당해 몸이 허약했으나 여전히 강제로 과부하의 노동을 했다. 어떤 때는 몸이 극한을 감당해 마치 임종에 가까운 감을 느껴 의식이 이미 흐릿해도 여전히 끊임없이 기계적으로 일을 했다. 악인은 여전히 끊임없이 나를 욕했다. 이때 나는 끊임없이 재봉틀을 밟았는데 다리는 부어올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걸을 때 발은 이미 감히 땅을 밟지 못했다. 이것은 약을 먹은 후 나타난 현상이다. 당시 혈압은 이미 200이 넘어 뇌혈전 증상이 나타나, 팔, 다리마저 제대로 쓰지 못했는데, 그들은 여전히 끊임없이 나를 박해하고 강제로 나에게 일을 시켰다. 세수할 때마저 3인 행동팀의 세 개의 세숫대야와 세면도구마저 한데 엎어 놓고 두 사람은 빤히 보며 들지 않고 또 나에게 들게 했다. 나는 절뚝거리며 들 수 없었는데, 그녀들은 여전히 고소하게 생각하며 고의로 나를 비웃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나는 대장을 찾아가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를 박해하는지를 물었다. 대장은 “당신이 형기를 줄이면 당신을 괴롭히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형기를 줄이려면 자백하고 5서를 써야 함). 전향하는 것과 같았다. 아,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국민은 신앙 자유의 권리가 있어요. 판결은 불법적이며, 나에 대한 박해입니다. 나는 잘못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자백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장웨이(江威) 대장은 “그것은 내가 그 죄수들에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몇 해 동안 그녀는 공을 세우고, 간부로 승진하기 위해 정말 나를 전향시킬려고 적잖게 머리를 썼다.

6. ‘공격’과 학대

약 2011년 10월쯤, 내가 속한 이른바 ‘모범 감구’의 전향률은 반드시 100%에 도달해야 했다. 그녀들은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공견’박해를 시작해 나에게 전향하도록 핍박했다. 그리고 당신 한 사람만이 남았는데 전향하지 않으려고 해도 전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가오추쥐(高秋菊)가 그 당시 죽어서 그렇지 만약 지금 살아있었더라면 그녀도 전향해야 하며 반드시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그들은 또 나를 속여 “당신의 가족은 여러 차례 요구했는데, 당신을 전향시켜 일찍이 집으로 돌아오게 하라고 했어요. 우리가 당신을 데리고 공부를 시키겠어요.”라고 말했다. 사악은 나를 작고 검은 방안으로 끌어들였는데, 전문적으로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하는 곳이었다. 경찰들은 윤번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모두 공을 세워 장려금을 얻고, 간부로 승진되려고 했다. 나는 절대 사악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비인간적인 학대를 경험한 후, 여전히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전향도 하지 않았다. 사람에게 가장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소음으로 나를 세뇌시키는 것이다. 나는 본래 혈압이 높았는데,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언급하기도 싫다. 혈관마저 파열될 것 같았고, 뇌마저 폭파할 것 같았다. 만약 억제하지 못하면 곧 미쳐버리고 정신 이상으로 될 것 같았는데, 너무 사악했다. 정말 극단의 수단을 쓰지 않는 곳이 없었다. 나를 괴롭히던 그 사악한 죄수는 자신마저 견딜 수 없었다.

사악한 무리는 손쓸 길이 없게 되자 곧 또 조작을 시작했다. 그녀들이 스스로 쓴 전향서, 지장을 누르고 서명한 것 등은 모두 그녀들 스스로 꾸민 것인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가 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40여 일 동안의 비인간적인 학대를 경험하고 풀려나 작업실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암 통증이 자주 발생하는 것을 느꼈는데, 정말 곧 죽을 것 같은 감각이었다. 나는 몸이 일부 호전되기를 기다렸다가, 대장을 찾아 상황을 설명하고 “그것은 내가 쓴 것(전향서)이 아니며 나와 관계가 없습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모두 승인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들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또 트집을 잡아 온갖 방법으로 나를 헐뜯고, 날마다 구실을 찾아 나를 모함했다. 누가 나를 괴롭히고 나를 업신여기면 곧 관대한 대우를 받고, 감형을 받았으며, 또 표창받고 공을 세워 상을 받았다. 사악은 그녀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근본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죽고 사는 것에 관여하지 않았다.

나의 형기가 1년쯤 남았을 때 심리학을 배운 경찰이 나의 뒤에서 나를 가리키며 다른 사람에게 “매우 이상합니다. 그녀를 어떻게 괴롭혀도 멍청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곧 출소하게 되자 그들이 온갖 방법을 다해 나를 괴롭혀 멍청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들이 떳떳하지 못한 악행이 너무 많아 내가 출소한 후 그녀들이 한 나쁜 일을 폭로할까 봐 두려워했는데, 얼마나 사악한가!

7. 가족이 당한 박해

사악한 박해는 내 집과 가족을 다 잃게 했다. 내가 감옥에 갇힌 후, 나의 시어머니는 내가 15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뇌혈전에 걸렸는데, 결국 2014년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모진 고초를 겪은 노인도 파룬궁 수련생으로 사악에게 세 번 납치당했고, 혹독한 구타, 세뇌, 구류, 노동교양 처분을 받았다. 고희인 노인마저 그녀들은 가만두지 않았다. 박해 기간에 노인의 월급 지급을 중지했고, 또 난방비용을 주지 않아 겨울에 노인을 추운 방에서 떨게 했다.

남편은 각 방면의 압력을 감당하지 못해 핍박에 못 이겨 나와 이혼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악독한 경찰이 토비처럼 매번 가택 수색하고 납치하는 것을 목격한 이유로, 어린 심령에 떨쳐 버릴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때 아들이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난다. 아들은 “어머니, 저는 경찰차 소리를 듣기만 하면, 곧 경찰이 또 어머니를 납치하러 왔다고 생각하며 아주 두려워요.”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아들도 나를 멀리 떠났다. 사악이 파룬궁에 대한 20년 동안의 박해 중에서 나는 여러 차례 납치당했고, 모함과 거짓말에 속은 친척, 친구는 연루 당할까 봐 감히 나와 접촉하지 못하며 모두 나를 피했다.

나는 1999년에 파룬궁이 박해를 당한 후부터 2017년 7월까지 월급을 받은 적이 없다. 듣기로는 일부는 ‘610’이 가져다가 벌금으로 썼다고 한다. 2017년 7월에 사회보험에서 받은 월급은 단지 사회 최저 생활비에 불과했다. 불법 판결 기간의 월급과 근무 연한은 공제 당했다.

내가 써낸 내용은 단지 18년 동안 박해 중의 작은 일부분일 뿐, 많은 것은 이미 기억이 희미하다. 시간이 너무 길고, 더구나 머리는 박해당해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러나 금후의 수련 중에서 나는 전부 가장 좋은 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늘의 법망이 관대한 듯하나 죄인은 반드시 벌을 면치 못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박해에 참여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권고한다. 더는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악행을 저지르지 말고, 자신과 가족에게 악과를 남기지 말라. 선악에는 인과응보가 있음은 천리다. 사람은 무엇을 했다면 모두 갚아야 한다. 진심으로 당신들이 파룬궁을 요해하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믿고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자신의 선념(善念)을 남겨두어 자신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원문발표: 2020년 7월 10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7/10/4086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