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만 대법제자
[밍후이왕] 구조 플랫폼에서 전화로 진상을 알리는 기간에 나도 모르게 일부 관념이 형성되었다. 예를 들어 어느 직장의 전화가 비교적 연결되기 쉽고, 어떤 도구가 수신율이 높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과거의 전화 경험으로 형성된 생각으로,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공간장에서 어떤 물질을 형성하여 전화하는 상태에 반영되며, 종종 나타나는 결과는 바로 생각하는 그대로였다.
수련생들도 플랫폼에서, 우리 수련은 높은 층차에서 문제를 봐야 한다고 교류했고, 표면적인 결과에 집착하면 속인 상태에 빠져서 문제를 보게 된다는 것을 나도 체험했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이러한 관념은 전화로 진상을 알리는 데 방해가 되기에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한번은 특별한 사건과 관련된 전화번호를 받았다. 원장이나 서기와 같은 지도층의 전화번호였다. 첫 번째 전화번호는 법원장의 번호였다. 그런데 전화해보니 없는 번호였다. 당시 이어서 두 번째 번호로 전화하지 않고 안으로 찾아보았다. 잠재의식 속에는 ‘지도층의 전화는 잘 연결되지 않으며 당연히 받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다. 비록 이전에도 이러한 관념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깨끗하게 배제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이 염두를 찾아낸 후 억제하고 배척했다.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상대방의 신분과 직위가 어떠하든 그들은 모두 진상을 들으러 온 것이다. 특히 지도층은 더 더욱 진상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자신의 상태를 잘 조절하고 두 번째 번호로 전화했다. 검찰 원장이었다. 신호가 울리자마자 받았으며 모두 네 번을 받았다. 나는 상대방이 전화를 받은 것은 내가 전에 자신의 사람 마음을 찾았기에 사부님께서 격려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진상을 들은 시간이 모두 길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이 수련해야 할 부분이 있거나, 상대방이 온 층차가 좀 높거나, 배후 사악의 요소가 비교적 많거나, 자신의 선과 자비의 공간장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반드시 법리에 대한 인식과 심성(心性)을 제고해야 한다.
또 한 번 받은 사건의 전화번호는 모두 휴대전화 번호였다. 이 번호들을 보자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휴대전화는 유선전화보다 수신율이 낮고 수신 시간도 짧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과거의 전화 경험과 교류를 통해 얻은 결론이다. 당시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이 생각은 아주 완고하여 수시로 반영되어 나왔다. 그래서 나는 버튼을 누르는 한편 이런 생각을 배제했다. 처음에는 전화마다 거의 받지 않았지만, 중생들은 서서히 받기 시작했으며 수신 시간은 10여 초에서 2~3분으로 늘었다. 마지막 전화에서는 상대방이 호응했을 뿐만 아니라 진상도 끝까지 들었다. 이것은 내가 특별히 말을 잘했거나 원고를 수정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안으로 찾아 자신의 공간장을 깨끗이 함으로써 중생이 진상을 듣도록 한 것이었다.
나는 진상을 알리면서, 반드시 심성이 제고되고 대법에 대한 이해 또는 법 공부와 발정념에서 다소 제고되어야만 전화 결과가 좋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사람 마음이 비교적 많아 사부님께서 나를 구조 플랫폼에서 전화로 진상을 알리는 수련의 길로 배치하셨는바, 안으로 자신을 찾고 일사 일념을 닦아야만 전화 상태가 안정되었다.
일사 일념을 닦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나는 일찍이 심성관(心性關)을 겪었다. 그때 오랫동안 안으로 찾았지만, 그 속에 깊이 빠져 뛰어나오지 못했다. 다행히 사부님께서 점화해 주시고서야 확 트여 집착심을 내려놓았다. 그전에 나는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의식했지만, 그것을 중시하지 않았고, 억제하거나 제거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이 사람 마음이 구세력에 의해 확대되거나 다른 집착이 더해졌다. 마치 처음에는 작은 돌멩이가 서서히 큰 돌이 되고 나중에는 큰 산으로 변한 것처럼, 이것은 집착이니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식했을 때는 이미 큰 난(難)이나 심성관으로 변하여 이것을 지나가려니 매우 힘들었다.
사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셨다. “특히 대법제자, 당신들의 일사일념은 매우 많은 생명의 존재와 부존재(不存在)를 결정하고 있다. 당신들이 어떻게 하는지, 그 일을 잘하는지 그 일을 잘못하는지가 그들이 미래에 존재할지 존재하지 않을지를 결정하는데, 당신이 말해 보라. 그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1]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에서 나는 정법 수련이 거의 끝나가는 이 시기에 일사일념을 수련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은 베이징(北京)에 전화를 건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첫날에 두 가지 사건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첫 전화부터 마지막 전화까지 대부분 벨만 울리고 받지 않았으며, 단지 한 통만 10여 초 정도 들었을 뿐이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계속 버튼을 눌렀으나, 벨 소리만 들렸을 뿐, 상대방에게 진상을 알릴 수 없었다. 나는 좀 소침해져 다시 전화할 힘을 내지 못했다. 당시 수련 상태가 바르지 못한 것을 느끼고 자신의 마음을 찾아보니 전화 수신 결과에 대해 구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전에는 일할 때 늘 “구함이 없어야 스스로 얻는다”[2]라는 말씀을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경연 대회에 참가했을 때, 경연에 심혈을 기울이기만 했을 뿐, 결과가 어떨지는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결과가 모두 좋았기에 이 방면에서는 수련을 괜찮게 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 전화로 진상 알리기에 참여하면서, 결과에 대한 집착심이 아직도 남아있어 깨끗이 수련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의기소침해질까? 다시 자신의 마음을 깊이 파헤쳐보니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을 찾아냈다. 이전에 연속해서 두 사건의 전화를 통화하지 못했던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화 수신 결과를 플랫폼에 피드백하려니 그다지 보기 좋지 않았다. 이것은 강한 자존심으로, 닦아버려야 마땅하다.
요즘 수련 상태가 줄곧 정체되어 제고된 곳이 없었다. 나는 이번 전화 수신 결과는 사부님께서 설치하신 작은 심성관으로, 심성을 높이라는 것임을 문득 깨달았다. ‘진정으로 심성이 제고되어야만 전화 상태도 돌파할 수 있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자, 의기소침했던 마음이 단번에 사라지고 자신의 공간장이 일시에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으며 마음도 편안해졌다.
다음 날 한 사건의 전화번호를 받았을 때는 아무런 생각이 없이 마음이 평온했고, 전화 수신율이 다소 높아지고 수신 시간도 다소 늘었다. 나는 이것은 전날 안으로 자신을 찾아 심성이 일부 제고되어 사부님께서 가지(加持) 해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련 중에서 당신들이 부딪힌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모두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들이 수련하기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3] 수련 중 무슨 일이 나타나든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적극적이고 바른 심리로 대해야만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정법 수련의 길을 더욱 잘 걸어갈 수 있다.
우리는 사람마다 수련의 길이 달라 다른 사람의 길을 참조할 수 없다는 것을 법에서 알고 있다. 전화하면서 부닥친 개인 수련의 문제도 스스로 돌파해야 함을 나도 체험으로 깨닫게 되었다.
랴오닝(遼寧) 특별 사건과 관련, 전화하기에 참여하면서 첫날 두 가지 사건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그런데 거의 모든 전화가 뚜뚜 하는 소리만 나는 것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한편으로는 안으로 자신을 찾았다. 며칠 전부터 안일한 마음이 일어난 것을 찾아냈다. 타이베이(台北) 법회에서 돌아온 후 너무 피곤하여 숨을 돌리고 쉬고 싶어 나가서 연공하지 않았고, 법 공부와 진상 알리는 것도 빠뜨렸다. 나는 또 표면적인 결과에 집착하는 마음을 찾았다. 전화가 여러 번 연결되지 않으면 ‘다음 전화도 연결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집착심을 찾은 후 제거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발정념으로 자신의 공간장을 깨끗이 정리했다. 그러자 마지막 전화를 할 때는 상대방이 받아 4분가량 들었다. 나는 이것은 안으로 찾고 발정념하여 일으킨 효과라고 생각한다.
다음날 또 다른 사건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전화번호 목록의 앞 순위에 있는 번호 몇 개는 벨 소리만 울릴 뿐 받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찾고 발정념했다. 그러자 목록의 뒤 순위에 있는 전화가 한 통 연결되었으나, 상대방이 진상을 15초가량만 들었다. 당시 왜 그런지 이해되지 않아 ‘안으로도 찾고 발정념도 했는데 왜 소용이 없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마음을 조용히 한 채 이틀 동안의 전화 결과를 정리하고는, 개인 수련에서 부닥친 문제는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설치하신 시험문제가 어찌 답안이 같을 수 있겠는가? 지난번의 수련 체험을 다음번의 수련에 적용하려는 것은 지름길을 가려는 것이다! 당연히 안 된다. 나는 부동한 층차에는 부동한 법이 있기 때문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깨달으라고 하신 것은 매번 다르고 답도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 관(關)에서는 수련인에 대한 법의 요구가 높아지므로 심성의 층차가 새롭게 돌파되고 제고되어야 한다.
나는 전에 전화하면서 몇 군데가 계속 연결되지 않자 ‘전에는 상태가 좋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전과 비교할수록 상대방이 더욱더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을 느끼면서, 과거의 전화 결과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인식했다. 때로는 다른 수련생의 피드백을 보고는 수신 결과를 부러워했으며, 다른 수련생처럼 지금보다 더 높은 수신율과 더 긴 수신 시간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수신 결과를 비교했다. 그때 “그들은 늘 사람과 비교하며, 늘 그들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법의 각 층차의 요구로 자신을 가늠하지 못합니다.”[4]라고 하신 사부님의 법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수련생 간의 비교가 비학비수(比學比修)가 아니라면 오히려 질투심을 일으켜 심성 제고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맨 처음 플랫폼에서 전화할 때 아무 관념 없이 마치 한 장의 백지처럼 원고를 들고 진상을 알리자 전화하는 상태가 매우 안정되었던 것이 생각난다. 나중에 전화를 많이 할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공간장도 점점 순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진상을 알릴 때 아무 관념이 없는 상태로 전화하고 과거의 수신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 전화로 진상 알리기에 얼마나 오랫동안 참여했든지, 전화할 때마다 처음 진상을 알리는 것처럼 번호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대하고 번호와 관련된 중생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의 공간장을 순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수련을 처음과 같이 하면”[5]이라고 하신 사부님의 말씀과 같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처음 수련을 시작했을 때 매주 대법을 실증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예를 들면 자료를 배포하고, 서명을 받고, 진상을 알리며,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등 기세가 드높았다. 하지만 한동안이 지나자 심신이 지쳐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그때 자신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수련인가?’라고 물었다. 만약 옳다면 왜 승화하는 느낌이 없을까? 나중에 수련생의 일깨움으로 밍후이망(明慧網)의 교류 문장을 읽으면서 점차 수련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했다. ‘대법 수련은 바로 심성 수련이구나!’ 법 공부, 연공, 진상 알리기 등 모든 방면에서 심성을 높여야만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을 잘 해낼 수 있다. 나는 전화하는 것은 수련을 대체할 수 없으나, 전화할 때 나타나는 중생의 반응은 자신의 사람 마음을 드러나게 하며, 그 속에서 집착을 찾아 심성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성을 높인 후 다시 전화해야 전화 상태를 돌파할 수 있고, 진상을 더욱더 잘 알릴 수 있다.
이상은 1년가량 구조 플랫폼에서 전화하면서 수련한 체험이다. 법에 있지 않은 곳은 수련생들이 포용해주고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 ‘2015년 뉴욕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3–시카고 법회’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시간과의 대화(和時間的對話)’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설법’
원문발표: 2020년 1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22/3996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