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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이 제위치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정진하지 못하는 구실이 될 수 없다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6월 4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현재 가장 긴박한 것은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매우 많은 동수들이 시간을 다그쳐 걸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더욱 큰 범위로 일대일로 진상을 하여 삼퇴를 촉진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류하던 중에 이에 대한 원인이 매우 많은 것을 발견하였다. 예를 들면 연령이 너무 많다거나(또는 너무 젊다거나), 시간이 없다거나, 하는 일의 성격에 적합하지 않다는 등등이다. 귀납해 보면, 이런 원인의 핵심은 여러분이 모두 인식할 수 있다. 사실은 바로 자아를 내려놓지 못한 것이며 심성이 제 위치에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새로운 이유가 또 나타난다. 어떻게 하든지 먼저 법공부를 하고 심성을 제고시켜야만 나가서 진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심성이 제위치에 놓이지 않아 중생을 구도하는 효과도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은 들어보면 마치 도리가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사실 법의 기점에 있지 않은 것이다.

사부님은 《2006년 캐나다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모든 것을 다 잘해야 하지만 오히려 지나칠 수 없다. 지나치기만 하면 또 집착이다. 아울러 대법에 대한 태도는 바로 잡아야 하며 자신을 진정한 수련인으로 여겨야 한다. 어떻게 정진하고 어떻게 법을 대하고 어떻게 수련할 것인가는 당신이 책을 보는 시간의 길고 짧음을 포함해서 모두 홀시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더욱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당신들의 길이며 당신들이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속인사회 중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당신들은 바로 정법과 함께 있어야 하며 중생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때문에 비로소 이렇게 수련하는 것이다.”

개인체득인데 사부님은 이 한 단락 설법중에서 “책을 보는 시간의 비례”를 주의해야 한다고 하셨다. 바로 우리들에게 일깨워주셨다. 비록 사부님은 거듭 법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사실 책을 보고 법공부하면 다른 일체를 잘하지 않아도 되는 구실이 될 수는 없다. 그 원인은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우리가 법공부하여 마음을 닦는 목적은 바로 중생을 구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올 때 품은 홍대한 소원이며 우리가 반드시 완성해야 할 사명이다. 현재 정법은 이미 막바지에 이르러 대법제자가 중생을 구도하는 시간은 더욱더 적어지고 있다. 우리는 오직 최선을 다하여 걸어나가 사람들속에 깊이 들어가야만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연분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며 그들을 구도할 수 있다.

현재의 시간은 정말로 한 시각이 천금의 가치가 있으며 만금의 가치가 있다! 마치 쓰촨대지진 후, 72시간 내에 여진이 부단히 일어나는 위험한 시기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황금시기인 것과 같다. 우리가 현재 이 시기에 진상하는 것을 일단 놓쳐버리면 다시는 만회할 수 없게 된다. 법정인간 시기가 곧 오게 된다. 우리 대법제자는 바로 사람을 구하러 온 것이다. 우리들이 나가서 하루 동안 진상하여 오직 한 사람을 구했다 해도 그것은 최대의 성공이다. 매일 천만 명이 되는 대법제자가 걸어나가서 매 사람이 한 사람을 권고하면 그것이 바로 천만 명이 구도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상을 이야기하는 과정은 하나의 더욱 잘 수련하는 과정이다. 이야기하는 과정중에서 당신의 경험은 더욱더 풍부해지고 화제는 더욱더 많아지며 태도도 더욱더 자연스러워지며 정념은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왜 그런가? 원인은 단지 당신이 더욱더 자신을 내려놓았을 때라야만 당신은 사람들과 더욱 잘 교류할 수 있으며 가까이에서 입장을 바꾸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으며 상대방의 심리와 집착에 순응하여 순리롭게 그들에게 진상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좋은 수련과정중에 있는 것이 아닌가?

명혜망에 게재한 매우 많은 시간배치 방면의 교류문장에서, 나는 매우 많은 개발을 받았다. 매우 많은 동수들은 법공부 시간을 저녁에 배치한다. 낮에는 나가서 자료를 배포하거나 일대일로 진상하여 사람을 구한다. 현재 여름이 되어 매우 많은 사람들은 저녁식사 후에 한 단락 시간 동안 밖에 나가서 산책하며 바람을 쐰다. 이것도 우리가 진상하는 좋은 기회이다.

말하자면 부끄럽다. 친지, 동료와 친구들에게 권고하여 탈퇴시키고 난 나는, 작년 여름부터 시작해서야 일대일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이야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처음에 나는 먼저 용기를 내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연습을 하였다. 정말 말을 걸 수 있었을 때, 그 기쁜 마음은 하루 동안 지속되었다. 만약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잘 나눌 때면 마치 “마음속에 웃음꽃이 활짝 피는 것”과 같았다. 낯선 사람과 감히 이야기할 수 있게된 후, 천천히 낯선 사람에게 진상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진상을 이야기하는 중에 조성된 “면목을 따지는” 등의 관념 장애로 인해 줄곧 진보가 크지 못했다. 나도 법공부하면서 자신에게 “담을 크게” 하였으며 머리속에 남아있는 자신이 진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저애하는 관념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효과가 현저하게 좋지는 않았다. 일년 동안 몇 명밖에 탈퇴시키지 못하였다. 좀 전에 갑작스러운 쓰촨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에야 철저히 자신에게 일깨워주었다. 나는 생각을 잘 했는가? 먼저 법공부하여 자신을 잘 수련한 후 진상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신이 예산한 것이 실현되는가? 중생을 도태시키려는 구세력이 당신을 기다리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수련하는 목적은 바로 심성을 제고하는 것이다.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불성무루》) 으로 수련되어야 한다. 그러면 광범위의 중생이 도태당하는 이 위기앞에서 한 명의 정법수련인의 첫번째 염(念)은 반드시 무엇이어야 하는가? 자신을 더욱 잘 보호해야 하며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하는가 아니면 중생구도에 더욱 중시해야 하는가?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사람과 신의 구분이 아닌가?

수련의 기점에서 안정하게 선 후, 나는 출근하고 퇴근하는 길에서와 점심 휴식시간에 거리에 나가서 진상을 이야기하였다. 하루에 몇 명씩 권고하여 탈퇴하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이상하다. 내가 사람을 구도하는 것이 일체보다 높다고 생각하였을 때, 낯선 사람과 진상을 이야기하여 삼퇴를 권고하면 즉시 매우 순리롭게 되며 신의 도움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밤에 법공부하고 연공해도 졸음의 마(魔)의 교란에 시달리지 않고 아침에 모닝콜을 사용하지 않아도 다섯 시가 되면 깨어나서 한 시간 동안 발정념할 수 있었다. 물론 매우 많은 동수들과 비기면 많이 부족하지만 나는 현재 확실히 자신의 최대의 능력을 다하여 하고 있다. 이 과정중에서 나는 중생을 구도하는 한 각자의 자비심을 체험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또 생각났다. 매우 많은 동수들은 마난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신통”해지지 못하고 있다. 사악한 마의 박해와 교란을 제거하는 것도 줄곧 “심성이 제위치에 놓이지 못해서이다”는 말은 흙덩이 속에 있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마치 나의 심성은 나의 신체건강마저도 보증하지 못하는데 나가서 진상하면 더욱 못할 것이라고 여긴다. 한번 생각해보라. 당신의 그 “신체가 좋지 않아서 나가 진상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돌파해야 할 집착이 아닌가? 만약 당신이 정말로 자신의 “신체” 상황을 내려놓고 나가서 사람을 구도할 때 당신의 그 “병업” 가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사람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도리이다. “심성이 제위치에 놓이지 않는다”는 생각은 중생을 구도하는 길을 막는 호랑이와 같다. 개인이 인식하건데 우리는 개인의 정황에 근거하여 일체 가능한 시간을 이용하여 나가서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면 이미 최고의 심성을 구비한 것이다. 반대로 대량의 시간에 문을 걸고 책을 보고 법공부하며 사람을 구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보고 아무리 배워도 “사(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동수들이여, 걸어나오라! 문을 나서는 그 한 시각에 당신은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무슨 집착, 무슨 층차, 무슨 “병업” 가상, 무슨 명, 리, 정 그 일체는 모두 그렇게 보잘것 없이 한번 말을 꺼낼 가치도 없게 된다. 오직 중생의 생명이야말로 가장 보귀한 것이며 우리들이 소중히 여길 가치가 있다. 문을 나서야만 당신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중생을 구도하는 발걸음을 제지할 것은 없다. 나는 이것이 바로 사부님께서 강의하신 “인간세상에서 강대한 불법(佛法)의 재현(再現)이다!” (《경언(警言)》)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장완성 : 2008년 6월 2일
문장발표 : 2008년 6월 4일
문장수정 : 2008년 6월 3일 21:56:24
원문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8/6/4/1796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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