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수련생이 ‘5·13’ 기고문을 수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수련생이 법을 얻기 전의 경험을 읽어보니 참으로 힘겨운 삶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수련생들의 수련 체험담을 듣거나 읽을 때마다, 법을 얻기 전의 비참한 경험 이야기가 나오면 차마 끝까지 듣기 힘들었다. 어느 수련생의 체험담은 너무 처참해서 끝까지 듣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이번에 또 그런 상황을 맞게 됐다.
사부님 법상 앞에서 연공을 준비하며 서 있는데,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한 가지 생각이 일었다. ‘왜 수련생들의 전반생은 이토록 고통스러운 걸까?’ 그 순간, 허공에서 한 가지 의념이 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법을 얻기 위해서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사부님의 크나큰 은혜와 한량없는 자비여!’
나는 30여 년을 수련한 대법제자이고, 날마다 법을 공부하고 외운다. 하지만 세인의 많은 관념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착실하게 수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통’이라는 문제를 이렇게 오래 수련하면서도 오늘에야 비로소 그 함의를 조금이나마 깨달았으니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예전에 읽었던 수련 이야기 ‘성고령화(聖苦靈花)’가 생각난다. 그 이야기에는 이런 장면이 있었다.
온갖 병으로 몸이 성치 않고 장애까지 있는 거지가 있었다. 그는 평생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혹한과 폭염 속에서 노숙하며 끝없는 허기 속에 세월을 버텨왔다. 매 순간 고통을 겪으면서도 고통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때로는 운명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여겼고, 때로는 하늘을 향해 왜 자신에게 이토록 잔인하냐고 분노에 찬 물음을 던지기도 했다.
어느 날 거지는 우연히 법사를 만나게 됐고, 매일 법사가 불경을 읽는 소리를 들으며 점차 기운을 회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지가 물었다. “고통이란 무엇입니까?” 법사가 손을 내밀자 순식간에 손 위에 오색찬란한 꽃 한 다발이 피어났다. 꽃들이 손 위에서 가볍게 흔들리며 피어 있는 모습이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거지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고통이 이런 모양을 하고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나 아름답구나.’ 법사가 꽃잎 하나를 따서 거지에게 건네며 말했다. “맛을 보아라, 어떤 맛인지.” 거지는 받자마자 바로 삼켜버렸다. 오랜 세월의 굶주림으로 허겁지겁 먹는 것이 몸에 배어버린 탓이었다.
꽃잎을 삼키고 나서야 거지는 정신이 들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꽃잎이 이렇게 쓸 줄이야! 극도로 쓴 맛에 그는 바닥을 뒹굴며 어쩔 줄 몰랐다. 법사가 말했다. “움직이지 마라.” 거지는 정말로 움직일 수 없었다. 차츰 쓴맛이 온몸의 혈관과 뼈와 근육을 타고 스며들더니 서서히 사라졌고, 그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평생 겪어온 고통이 이 꽃잎 하나의 쓴맛에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법사가 거지를 일으켜 세우자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굽어 있던 몸이 꼿꼿이 펴졌고, 동상에 걸렸던 손발이 완쾌됐으며, 온갖 고질병이 모두 사라졌다. 몸 안팎이 깨끗하고 상쾌했다. 거지는 기쁨과 감격에 겨워 통곡하며 법사에게 거듭 절을 올렸다.
법사가 그를 부축해 일으킨 후 선방에서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순식간에 방 전체의 바닥, 벽, 천장에 온갖 형태와 자태의 빛나고 아름다운 꽃들이 크고 작게 빛을 발하며 가득 피어났고, 기이한 꽃향기가 온 방을 가득 채웠다. 법사가 그에게 말했다. “이 꽃을 ‘성고령화(聖苦靈花)’라 하느니라. 나 역시 생생세세 세상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세상의 온갖 고통을 겪고, 고통을 참고 고통 속에서 수련하여 피워낸 꽃이다. 세인이 고통만 겪는다고 해서 이 성고령화를 피울 수는 없느니라. 오직 정법의 보호와 가지(加持) 아래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꽃잎 하나하나가 형성되려면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거지가 말했다. “대사님, 이토록 많은 고통을 겪으시고 심혈을 기울여 이 성고령화를 키우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중생을 위해서지!” 법사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너도 앞으로 고통을 참고 수련하여 성고령화를 피워내고,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구해야 하느니라…”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고생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직 사람만이 고생을 하면 나쁜 일이고 고생을 하면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고 여긴다. 수련인으로서, 고생을 하면 소업을 할 뿐만 아니라 또 층차도 제고할 수 있으며, 원만을 이룰 수 있다. 그럼 당신이 말해 보라. 나는 사람 속에서 행복하려고 하고, 나는 고생을 조금도 하고 싶지 않으며 편안하고도 편안하게 연공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당신은 업을 제거할 수도 없고, 心性(씬씽)도 제고할 수 없으며, 원만을 이룰 수도 없는데, 바로 이런 이치이다.”(각지 설법1-미국 제1차 설법)
사부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고 간곡하게 고통과 수련의 관계를 가르쳐 주셨지만, 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실천했을까? 법공부 할 때는 연공인이지만 현실에서 어려운 고비에 처했을 때, 세인처럼 대처하지는 않더라도 많은 경우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억지로 이렇게 다독인다. ‘나는 연공인이니 반드시 참아야 해, 나는 연공인이니 반드시 높은 자세를 취해야 해.’ 법을 자신에 대한 일종의 구속으로 여기지, 법 속에 녹아들어 법과 동화되거나 진심으로 고난을 좋은 일로 여기며 기꺼이 받아들이고 고비를 넘기지 못한다. 더더욱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고난을 만들어준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생겨나지 않는다.
수련 이후 체험담을 나눌 때도, 많은 경우 수련 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병으로 고생했는지를 쓰고, 수련 후 대법이 몸을 정화해 오래된 고질병이 사라졌다거나, 대법을 수련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등을 쓰며 대법이 주는 인간 세상의 행복에 매우 큰 비중을 둔다. 나도 예전에는 그랬다.
막 법을 얻은 신수련생이거나 세인에게 홍법하거나 진상을 전할 때라면, 이러한 인식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20~30년을 수련한 오래된 수련생이다. 이성적으로 볼 때, 대법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안 된다.
보호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 모든 대법제자는 알고 있다. 우리가 사부님과 서약을 맺을 때(속세에 들어와 사부님의 정법을 돕고 중생을 구하는 것), 사부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지켜보시고 보호하고 계셨다. 생생세세 윤회하는 가운데 한 순간도 사부님의 안배와 보호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법을 얻기 전의 고난과 우리가 생생세세 겪어온 고통과 고초 역시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업을 소멸하시고, 이를 덕(德)으로 전화시켜 대법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신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하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늘로 이르는 사다리를 놓아주신 것이 아닌가? 생생세세의 업력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이번 생 전반생에 지은 죄업만 해도 18층 지옥에 떨어지고도 남을 것이다.
법을 얻기 전에는 이것을 몰랐고 법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법을 얻고 난 뒤에도, 그 고통들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입에 달고 살면서 인간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이 그토록 강해도 되는가? 수련 전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글 속에 ‘운명의 불공평함’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다면, 이는 사부님의 안배를 원망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우리가 겪은 고통은 생생세세 윤회하며 산처럼 쌓인 업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더 많은 죄업은 사부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감내하고 계신다. 법을 얻기 전에 겪은 고통조차 우리가 마땅히 갚아야 할 죄업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체험담을 쓸 때, 설령 수련 이전의 경험을 쓸 때라도 수련인의 마음가짐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써야 한다. 우리의 업을 소멸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리고, 지옥에서 우리를 건져 깨끗이 씻어주셔서 이 법을 들을 수 있고 이 법을 얻을 수 있는 충분한 덕과 능력을 갖추게 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하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고 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렇게 보면 수련 가운데 우리의 얼마나 많은 생각이 신(神)의 정념이고, 또 얼마만큼이 인간의 관념인가? 법 위에서 깊이 반성해 볼 만한 문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라, 최후로 갈수록 마땅히 자신의 길을 잘 걸어야 하며, 시간을 다그쳐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 많은 일을 해놓고 되돌아보면, 모두 사람의 마음으로 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일을 한 것이지, 정념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그 속에는 대법제자의 위덕이 없다. 바꿔 말하면, 신이 보기에 비록 일은 했지만, 그것은 일을 얼버무려 한 것이고 위덕이 아니며 수련도 아니다. 비록 했지만 말이다.”(각지 설법11-대법제자는 반드시 법 공부를 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품고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와 일부 수련생들의 진실한 모습이다. 지금까지도 관념을 바꾸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도 기꺼이 즐거워하는 것’과 ‘인간 세상의 행복 추구’ 사이에서 진심으로 정념으로 문제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신(神)을 이루지 못하며, 사람이 일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자 한다. 이 글의 관점은 불합리한 것을 무조건 참고 원칙을 저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더더욱 끝없는 시련 속에 피동적으로 빠져들어 자신의 명백한 면이 나와 정법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다른 공간의 교란에 대해서는 반드시 즉시 알아채고 정념으로 제거해야 한다.
개인의 현 단계에서 얻은 얕은 소견이며, 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랍니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이다.]
원문발표: 2026년 4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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