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난 속에서 정념으로 걸어 나오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올해 일흔세 살이고 학력은 초등학교뿐입니다. 남편과 제가 수련 전과 수련 후에 겪은 남다른 경험을 꼭 써 보고 싶었지만, 막상 펜을 들면 글자가 떠오르지 않았고, 몇 줄 쓰다 보면 마음이 쓰렸습니다. 그렇게 미루다 보니 십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이 수련 과정을 글로 정리해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게 됐습니다.

1. 법을 얻기 전

저와 남편은 모두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1972년, 성(省) 소재지에서 한 차례 노동자 모집이 있었고, 그 기회로 우리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생활도 그때부터 달라졌습니다. 결혼하던 해 저는 스물여섯, 남편은 스물여덟이었습니다. 우리 작은 가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좋아 보여 동창들과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우리는 같은 직장에서 일했고, 월급도 비교적 괜찮아 양가 부모님을 도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점이 있었으니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처음 검사에서는 류마티스성 심장병과 심각한 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몸을 조금도 차게 할 수 없었고, 손으로 차가운 물건을 잡지도 못했으며, 발바닥이 차가워지는 것도 안 됐습니다. 찬 음식을 한 입만 먹어도 속이 쓰리고 신물이 올라와 입을 벌리면 신물을 토해냈습니다. 여름에 과일을 먹을 때도 뜨거운 물에 담가 따뜻하게 한 뒤에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위장 부위에는 늘 면 솜 누비 주머니를 두르고 있었고, 한 번이라도 몸이 냉해 병이 도지면 며칠씩 음식을 먹지 못하고 토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얼굴빛은 누렇게 변했습니다. 심할 때는 아예 출근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았고 매일같이 약을 먹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원래 말도 잘하고 잘 웃으며, 밝고 급한 성격에 정의롭고 강직했던 남편은 병에 시달리면서 점점 이성을 잃을 정도로 초조해졌습니다.

그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저는 몹시 마음이 아팠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제 마음도 점점 무거워졌고 하루 종일 기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20대였던 저는 이런 억눌린 환경 속에서 그저 남편이 하루빨리 나아지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근심에 잠겨 지내던 중, 남편은 심장병이 악화되면서 갑작스러운 의식 상실과 경련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밤, 남편은 갑자기 온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얼굴은 자줏빛으로 변했고, 눈은 흰자위가 뒤집혔으며,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그런 광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온몸이 떨렸습니다. 저는 울부짖으며 남편을 흔들었습니다. “당신 왜 이래요? 제발 눈 좀 떠봐요!” 그 순간 저는 완전히 넋이 나가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의사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밤중에 슬리퍼를 신고 동네 진료소로 뛰어갔습니다.

당직 의사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남편의 경련이 이미 멈춘 상태였습니다. 그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마치 물을 끼얹은 듯 이불까지 축축했습니다. 얼굴빛은 자줏빛에서 하얀 종이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습니다. 의사가 “방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남편은 “별일 없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련을 일으킨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어떤 느낌이 있느냐고 묻자 머리가 몹시 아프다고 했습니다. 울고 있는 저와 의사를 보고는 오히려 놀라며 “무슨 일이 있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방금 전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괜찮아”라고 말한 뒤 곧 깊이 잠들어 버렸습니다. 의사는 이런 증상은 큰 병원에 가서 뇌 CT를 찍고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형 병원에서 진단한 결과, 남편은 류마티스성 심장병으로 이첨판 협착이 생겨 뇌로 가는 혈액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경련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은 베이징으로 가서 수술을 받고 금속 인공 심장판막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는데, 판막 하나에 6만 위안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우리집 형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결국 약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남편은 두 종류의 수면·진정제를 복용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약을 복용했음에도 초기에는 병이 자주 재발했습니다. 대부분 밤에 잠을 자던 중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어느 날 밤, 막 잠이 들자마자 남편이 또 갑자기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급히 진료소로 달려가 의사를 불러왔습니다. 의사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남편이 이미 온돌 침상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상태였고, 얼굴은 자줏빛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의사도 긴장한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과연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몰라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후 의사는 제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또 발작이 일어나면 진료소로 급히 달려오지 마세요. 은침 하나를 드릴 테니 그가 경련을 일으키면 인중을 찌르세요. 그러면 곧 의식이 돌아올 겁니다. 의사가 와도 같은 방법을 씁니다.”

그때부터 저는 의사가 말한 대로 했습니다. 처음 몇 번은 차마 제대로 찌르지 못했습니다. 손이 심하게 떨려 침이 자꾸 빗나갔고, 피도 조금 났지만 정확히 찌르지 못했습니다. 너무 긴장한 탓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은 윗입술이 몹시 아프다고 했는데 이미 부어 있었습니다. 저는 전날 밤 일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발작은 대개 2~3분을 넘지 않았고, 본인은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만 낮에 두통을 호소할 뿐이었습니다. 낮에 두 차례 발작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는 넘어져 온몸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다행히 직장 내에서 발생해 동료들이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이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나날은 십여 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저는 매일 밤 남편이 또 발작을 일으키지 않을지 걱정하며 깊이 잠들지 못하고 그의 상태를 살폈습니다. 이런 불행한 상황은 양가 가족 모두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저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2. 법을 얻은 후

1998년 말 어느 날, 남편이 제게 말했습니다. “사촌 형이 외지로 출장 갔다가 어제 전화를 했는데, 파룬궁이라는 공법을 소개해 주더라고. 지금 배우고 있다는데, 이 공법이 아주 좋고 사람의 도덕 수준을 높여 주며,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데 특별한 효과가 있다고 해. 진선인(眞·善·忍) 세 글자에 따라 수련하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거래.”

‘좋은 사람이 된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진선인에 따라 수련한다니, 남편이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겠어요?” 그는 “일단 알아는 봐야지”라고 했습니다. 평소 남편은 병으로 늘 예민했고, 성격도 급해 작은 일에도 금세 화를 냈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인(忍)’자는 그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온몸이 병이니 그 고생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전법륜(轉法輪) 두 권을 모셔와 한 권을 제게 주었습니다. 저는 책을 펼쳐 사부님의 사진을 보는 순간 멈칫했습니다. “어머! 이분을 내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집 친척인가?” 남편은 “그럴 리가 있겠어?”라고 했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무척 낯익고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디서 뵈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사부님께서 저를 일깨워 주신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내일 우리 둘이 법공부 장소에 가자.” 저는 “당신 혼자 가요. 나는 안 갈래요. 집에서 혼자 배울게요. 당신이 한 달만 꾸준히 하면 그때 가 볼게요”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혼자 법공부 장소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첫날 다녀온 뒤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했는데 마음에서 우러나는 웃음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여요?”라고 묻자 그는 말했습니다. “당신도 빨리 단체 법공부에 참가해. 이거야말로 진짜 경전이야!” 저도 곧 단체 법공부와 연공에 참여하게 됐고, 빠르게 수련생 단체 속에 녹아들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법공부하고, 법을 외우고, 필사하며 서로 비교하고 수련했습니다. 매일 대법 수련의 기쁨 속에 잠겨 지냈습니다.

남편은 저보다 학력이 높아 법을 이해하는 속도가 빨랐고, 깨달음도 좋아 법 속에서 빠르게 승화됐습니다. 우리는 전법륜을 여러 차례 반복해 통독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전하신 것이 우주의 대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우리는 진선인에 따라 자신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되고, 더 좋은 사람이 되며, 더 높은 경지의 기준에 도달해 마지막에는 반본귀진(返本歸眞, 선천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한다는 이치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라는 고덕(高德) 대법을 얻게 된 것을 매우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때부터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됐고, 업력과 윤회의 관계를 알게 됐으며, 병의 근원도 이해하게 됐고, 많은 법리를 깨닫게 됐습니다. 남편은 집에 비상용으로 가득 쌓아 두었던 약 한 서랍을 단호히 모두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반본귀진의 수련 길을 걷게 됐고, 우리 인생에는 분명한 목표와 방향이 생겼습니다.

수련하기 전 남편의 건강 상태로는 현장 노동직이 적합하지 않아 발전소 물자 공급 부서로 옮겨져 계획 담당 겸 구매 업무를 맡게 됐습니다. 저는 발전소 전기반 반장이었습니다. 우리 둘의 업무는 직장에서 이익을 차지하기에 매우 편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제가 반에서 자재 청구서를 한 장 작성하면 남편 쪽에서 이를 변통해 돈으로 바꿀 수 있었고, 절차만 갖추면 재무과에서 정상적으로 비용 처리가 가능했습니다. 겉으로는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장부가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대법을 얻었습니다. 비록 수련 초기였지만, 파룬따파의 넓고 깊은 법리는 우리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준을 분명하게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해 우리집은 새로 아파트를 배정받아 인테리어를 해야 했습니다. 직무상의 편의를 이용한다면 우리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매우 좋은 집으로 꾸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습니다. 반드시 사부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며,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수련하는 사람이니 수련인의 모습이 있어야 하고, 대법의 기준으로 실제 행동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는 법리를 알게 됐고, 남의 이익을 취하면 덕을 잃고 흑색물질인 업력을 얻게 된다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바르게 행동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대법을 배운 뒤 달라진 모습을 증명하는 길이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인테리어 목수를 데리고 시내로 자재를 사러 갔습니다. 거리가 멀어 왕복에 세 시간이 걸렸고, 한 번에 필요한 물건을 다 사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목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편리한 조건을 왜 이용하지 않습니까? 큰돈 들여 자재를 사면 누가 두 분이 좋은 사람인 걸 알아주겠어요?”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공적인 이익은 차지하지 않으면 손해이고, 가져가지 않으면 바보라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가 날로 나빠지고 도덕이 급속히 미끄러져 내려가는 오늘날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런 흐름을 오히려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련인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대법의 법리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해야 했습니다.

인테리어 과정에서도 작은 부속품이나 자잘한 자재가 급히 필요할 때가 있었습니다. 작은 못이나 붓 같은 것들이 부족해질 때마다 목수는 시간을 절약하고 공정을 지체하지 않으려면 직장에서 가져오라고 권했습니다. 때로는 이런 작은 자재가 없어 공사가 멈추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심성을 잘 지켜 반드시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와 남편은 모두 수련인이었기에 법에 근거해 서로를 일깨워 줄 수 있었고, 동시에 자신에게도 엄격했습니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가르쳐 주신 ‘좋은 사람이 되는 법리’를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인테리어가 끝난 뒤 남편이 품삯을 계산하면서, 자재가 부족해 공정이 지연된 데 대한 보상으로 약간 더 얹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기뻐했고, 대법을 수련하면 정말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데 감탄했습니다.

그 후 그 목수는 다른 친구 집 인테리어를 하면서도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형님 부부는 둘 다 파룬궁을 수련하는데, 집에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서 공적인 재물을 한 푼도 차지하지 않았어요….”

남편의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습관과 관념에도 천지개벽과도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중 가장 먼저, 또 가장 뚜렷하게 좋아진 것은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인(忍)’에서 자신을 닦는 데 힘을 쏟는 것이 분명히 보였습니다. 예전 병적인 상태에서 드러났던 조급함, 옳다고 생각하면 상대를 용납하지 않던 태도, 일에 부딪히면 쇠뿔 끝을 파고들던 버릇, 사사건건 불평불만을 품고 억울함을 참지 못하던 기질 등 나쁜 습관들이 하나씩 사라져 갔습니다. 그는 점점 활력이 넘치게 됐고, 온몸을 짓누르던 병색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누렇게 뜨던 얼굴빛은 희고 붉은 기운이 도는 건강한 빛으로 바뀌었고, 하루 종일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남편의 여러 질병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몇 달 뒤 설을 쇠러 고향에 내려갔을 때, 여동생이 말했습니다. “형부가 더 젊어지셨어요. 결혼하셨을 때보다도 더 젊어 보이네요!” 아들도 말했습니다. “아빠가 파룬궁을 배운 뒤로 나쁜 습관이 하룻밤 사이에 다 고쳐졌어요.” 정말 그 말대로였습니다. 우리집은 마침내 오랫동안 이어졌던 고통과 근심의 나날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습관처럼 짓던 저의 한숨도 사라졌고, 마음과 몸이 유난히 가볍고 편안해졌습니다.

3. 1999년 7월 이후

1999년 7월, 중공(중국공산당) 악당은 파룬따파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지역의 ‘중점 관리 대상’으로 분류되어 엄격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박해를 당했습니다. 대법에 대한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른바 중공의 ‘민감일’이 될 때마다 남편은 불법적으로 구류됐습니다. 평소 근무 중에도 직장 간부와 파출소 경찰이 수시로 찾아와 괴롭혔고, 명절이나 공휴일에는 반드시 자신의 행방을 보고해야 했습니다.

설을 앞둔 음력 섣달 스물아흐레 날, 파출소 경찰이 전화를 걸어 남편에게 “설 기간에는 외출할 수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남편이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지금 베이징 기차역에 있는데 아직 표를 구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출소장이 경찰 한 명을 데리고 우리집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남편을 강제로 구치소로 끌고 가 15일 동안 불법 구금했습니다. 남편은 엄격한 감시와 빈번한 괴롭힘 속에서 늘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렸으며,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2001년 봄, 남편은 더 이상 이러한 부당한 박해를 견딜 수 없어 사직을 결심했습니다. 현지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지로 떠돌게 됐습니다. 우리는 외지에 20여만 위안을 투자해 묘목과 선인장을 재배하며 현지 농민들과 협력했습니다. 투자자 신분이었던 우리는 현지 마을 간부와 읍 정부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았고, 그렇게 타지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고향을 떠났지만, 우리는 고향의 수련생들과 계속 연락을 유지했습니다. 생활이 안정된 뒤, 저와 남편은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하는 항목을 시작했습니다. 권선(勸善, 선행을 권하는) 편지를 쓰고, 진상 전단을 배포하며, 진상 현수막을 거는 등의 일을 이어갔습니다.

권선 편지 쓰기:

남편은 “우선 권선 편지를 써서 체제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냅시다. 그들이 먼저 파룬궁의 진상을 알게 해야 해요. 편지 형식은 전파가 빠르고, 내용도 비교적 전면적이어서 사실을 분명히 설명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당시는 박해가 극심하던 때로, 컴퓨터나 프린터도 없었고 사용할 줄도 몰라 모두 손으로 써야 했습니다. 남편은 글솜씨가 좋아 그가 쓴 진상 내용은 읽기에 자연스럽고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저는 글씨를 잘 써서 몇 가지 변형체로 정성껏 베껴 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호흡을 맞추어 협력했습니다. 남편이 내용을 쓰면, 저는 그 원고를 손으로 옮겨 적었고, 사이에 복사용지를 끼워 한 번에 다섯 부에서 여섯 부씩 필사했습니다.

남편은 편지 발송을 맡았습니다. 서로 다른 색의 봉투와 우표를 사용했습니다. 상세 주소와 우편번호는 평소에 마음을 두고 모아 두었는데, 마을 간부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현지 공안·검찰·법원 및 파출소 관련 정보를 알아내기도 했고, 신문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정보를 찾았습니다. 권선 편지의 대부분은 고향의 공안·검찰·법원과 파출소, 그리고 우리 부부의 옛 직장 간부들에게 보냈으며, 주류 사회의 지위 있는 인사들과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우편으로 발송했습니다.

남편이 편지를 부치러 나가는 일은 매우 고된 일이었습니다. 현지에서 기차를 타고 가장 가까운 역에 내린 뒤 그곳부터 우체통에 넣기 시작했는데, 한 우체통에 열 통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두 곳의 우체통만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기차 시간은 정해져 있어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렇게 점점 더 먼 곳까지 가게 됐고, 남편은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날마다 같은 일을 반복하며, 얼마나 많은 권선 편지를 보냈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진상 전단 배포:

대부분의 진상 자료는 고향에서 우편으로 보내왔습니다. 저와 남편은 각각 중고 자전거 한 대씩을 사서, 밤이 조금 어두워지면 가방을 메고 출발해 십여 리 떨어진 외곽 지역까지 가가호호 방문하며 진상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매우 순수했습니다. 두려움도 없었고, 다른 잡념도 없었습니다. 그저 당시 처한 환경을 잘 활용해 사람들이 하루빨리 파룬궁의 진상을 알게 하자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서둘러 잘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사부님께서 제자들에게 자비로운 가호와 보호를 내려주신다고 믿었기에, 우리는 매번 매우 순조롭게 일을 마칠 수 있었고 어떤 위험이나 문제도 겪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진상 자료 공급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남편이 일부러 동북의 고향으로 돌아가 복사점에서 인쇄를 했습니다. 당시 복사점에서는 이런 일을 맡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남편이 그들과 상의하며 말했습니다. “밤에 문을 닫고 하룻밤 작업하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비용은 더 드리겠습니다.” 남편은 그들과 함께 밤새 작업했고, 다음 날 인쇄물을 포장해 다시 현지로 보냈습니다. 한 번은 무게가 조금 초과되어 운송 과정에서 상자가 거의 풀어질 지경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진상 자료가 집에 도착했을 때 상자는 이미 흩어졌지만, 내용물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이것이 사부님의 보호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시골로 내려가 진상 자료를 배포할 때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을과 마을이 서로 바로 이어지지 않아 이리저리 굽이돌아 가야 했고, 어느 날 밤에는 얼마나 먼 길을 걸었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농촌 길에는 가로등이 없어 자주 진흙 구덩이를 밟았고, 특히 돌아오는 길에는 날이 어둡고 길이 미끄러워 더욱 힘들었습니다. 대부분 흙길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남편이 하던 말을 기억합니다. “내가 앞에서 탈 테니, 당신은 뒤에서 꼭 따라와요!” “알겠어요.” 대답은 했지만, 저는 도무지 그를 따라잡지 못하고 조금만 방심하면 진흙탕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습니다. 남편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멈춰 서서 저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러다 남편이 또 말했습니다. “좋은 방법을 알려 줄 테니 잘 들어요. 흰색은 흙이고, 반짝이는 건 물이고, 검은 건 진흙이니 과감하게 앞으로 달려요.” 아, 정말 맞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반짝이는 곳과 검은 곳을 피해 흰 흙길만 골라 자전거를 몰았고, 그날은 아주 순조롭게 집까지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얼마나 많은 마을을 다녔는지, 또 얼마나 많은 진상 자료를 나누어 주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진상 현수막 걸기:

저와 남편은 진상 현수막을 거는 일과 진상 자료를 배포하는 일을 따로 진행했습니다. 자료를 돌릴 때와 동시에 하지 않고 분리해서 했는데, 그렇게 하면 정신을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우리 둘의 호흡도 훨씬 잘 맞았습니다. 큰 현수막은 고향에서 보내온 것이었고, 작은 것은 우리가 직접 만들어 붓글씨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라고 써서 나무에 걸었습니다. 현수막 아래에는 작은 무게추(모래주머니)를 달고, 위쪽에는 가는 끈을 묶어 직접 만든 작은 쇠갈고리에 연결했습니다. 땅에서 나무를 향해 약간 힘을 주어 던지면, 현수막이 순식간에 위로 날아올랐다가 중력에 따라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나뭇가지에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경험이 부족해 힘껏 던지면 현수막이 그대로 땅으로 떨어지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나무 아래 깊은 도랑으로 떨어지기도 해서, 사람이 도랑 안으로 내려가 힘들게 기어 올라와야 했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됐습니다. 도로 양쪽에는 차량 통행이 끊이지 않아 우리는 늘 상황을 살피며 기회를 보아 행동했습니다. 저는 조금 긴장했지만 남편은 침착하고 지혜로웠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이건 아닌 것 같아요. 각도를 조정해야겠어요.” 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 몇 걸음 뒤로 선 다음, 위로 던지는 자세를 다시 맞추었습니다. 과연 그 말대로였습니다. 한 번 던질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성공했고, 모든 일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부부는 얼마나 많은 진상 현수막을 걸었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4. 납치 및 박해

2002년 어느 날, 고향의 한 수련생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는 현지 파출소 경찰에게 미행을 당하고 있으며, 곧 납치될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집으로 오는 열차 편과 주소를 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남편은 그에게 서둘러 그곳을 떠나 가능한 한 빨리 우리집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사악한 세력에게 붙잡혀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수련생이 우리집에 온 지 사흘째 되던 날, 현지 공안 시스템이 전화 추적을 통해 그의 위치를 파악했고, 우리가 임시로 머물던 지역의 공안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곧이어 경찰차 세 대와 경찰 십여 명이 들이닥쳐 우리집을 에워쌌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가택수색을 강행했습니다. 수색 과정에서 대법 서적과 진상 전단지, 아직 걸지 못한 진상 현수막 십여 개, 권선 편지 초안과 관련 인원 명단 등을 압수했습니다. 또한 현금 1만 1천 위안도 빼앗아 갔습니다.

불법 가택수색 중 한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경찰이 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이 그들에게 보낸 권선 편지였고, 수신인은 그들 국장이었습니다. 그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이거 당신이 쓴 거 맞지? 우리 국장이 뭐라고 지시했는지 봐.” 그는 편지를 펼쳐 보였고, 오른쪽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즉시 이 사람을 찾아 엄중히 처벌하라.”

국보 경찰은 즉시 이 사실을 국장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세 사람 모두 시 공안국으로 끌려가 각각 분리되어 불법 구금됐고, 하루 밤낮 동안 불법 심문을 당했습니다. 남편은 신앙을 굳게 지키며 당당하게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두 사람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수시로 전기봉에서 전류가 흐르는 소리를 들었고, 남편이 전기충격을 당하며 지르는 비명을 들었습니다. 마음속으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념을 발하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틀 뒤, 고향의 시·구 공안국과 우리 직장 관할 파출소 소속 경찰 다섯 명이 와서 우리 세 사람을 다시 본구 공안국으로 납치해 불법 심문을 이어갔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남편과 수련생은 저를 보호하며 제가 연루되었을 뿐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직장 파출소 소장과 시 부국장은 우리가 보낸 권선 편지들을 책상 위에 펼쳐 놓았습니다. 소장은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습니다.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다. “이렇게 멀리 가 놓고도 가만히 있지 않고, 또 이런 편지까지 보냈나? 공을 많이 들였군.” 그 순간 우리 세 사람은 그들이 이미 편지를 모두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진상을 접했다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기뻤습니다. 남편은 말했습니다. “받았으면 됐습니다. 잘 읽어 보세요. 여러분도 다 이해하시게 될 겁니다.”

결국 남편은 불법적으로 5년형을 선고받았고, 그 수련생은 불법 노동교양 2년형을 받았습니다. 저는 불법 구류 15일 처분을 받았습니다.

5. 남편의 수감 이후

남편은 수감된 당일, 감옥 집훈대의 감옥경찰들에게 삼각 가죽벨트로 두 손을 맞아 손이 심하게 부어오르고 손바닥에서 피가 났으며, 오른쪽 위 어금니 한 개가 부러졌습니다. 남편이 수감된 그날, 저와 시누이도 감옥으로 달려갔습니다. 시누이는 지인을 통해 면회를 주선했고, 우리는 남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어떤 상태예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남편은 짧게 대답했습니다. “금강부동(金剛不動)이오.” 그의 굳건함에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누이는 수화기를 들고도 울음이 북받쳐 한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신앙을 굳게 지켰다는 이유로 감옥 내 이른바 교화과(‘610’)의 정신적 박해를 받았습니다. 밤 12시 이전에는 잠을 재우지 않았고, 파룬궁을 비방하는 영상을 강제로 시청하게 하며 강제 세뇌를 시행했습니다. 장기간 수면 부족으로 남편은 심장병이 발작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감옥은 이른바 ‘전향률’을 높이기 위해 끝까지 남편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박해가 계속되면서 남편의 병세는 점점 악화됐습니다. 호흡이 곤란해지고 전신이 부어올랐으며,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정식으로 감옥에 보석 치료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장은 석방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소식을 차단하고 박해를 더욱 강화했으며, 가족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는 남편의 병보석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감옥 측은 온갖 이유를 대며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감옥 대대는 감옥 병원으로, 병원은 다시 대대로, 대대는 또다시 감옥장에게 떠넘겼습니다. 감옥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에서 죽어도 병보석은 절대 안 된다!”

2년 후, 남편은 결국 병보석 형식으로 감옥에서 나오게 됐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지 2주 만에, 억울함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6. 하늘이 무너져도 정념으로 마주하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는 뇌출혈 후유증으로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시는 상태가 됐고, 아들은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며 아직 졸업도 하지 못했습니다. 수만 위안의 빚은 해결할 길이 없었고, 20여만 위안의 투자금도 모두 물거품이 됐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정말 압박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과 거듭되는 박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습니다. 엄청난 압력과 두려움은 저를 고립과 무력감 속에 빠뜨렸습니다.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고, 머릿속에서는 온갖 일들이 소용돌이쳤습니다. 이것이 구세력의 교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자주 그 속에 빠지곤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 법공부와 암송을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규칙적인 시간을 정했습니다. 아침에 연공을 마친 뒤 6시 정념을 발하고, 7시 전에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다시 7시 정념을 발했습니다. 그다음 전법륜을 한 시간 동안 암송했습니다. 암송할 때는 분량이나 진도를 구하지 않고, 그저 마음을 고요히 하여 외웠습니다. 또한 매일 두 시간씩 법공부 팀에 참여했습니다. 법공부 팀은 우리집에서 진행됐으며, 전법륜을 중심으로 하고 사부님의 각지 설법을 교차해 학습했습니다. 일정 기간마다 사부님의 설법 영상도 시청했습니다.

진상 알리기는 법 암송 후에 진행했습니다. 권선 편지 쓰기, 진상 전단 배포, 대면 진상 설명, 삼퇴(중공의 3가지 조직 탈퇴) 권유 등 다양한 방식으로 했습니다. 저는 정해 놓은 시간표에 따라 쉬지 않고 반복하며 하나의 운영 체계를 형성했습니다. 1년 반 만에 전법륜을 한 차례 모두 암송했고, 법 암송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동안의 조정을 거친 뒤, 저는 빠르게 다시 법 속으로 돌아왔습니다.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수련과 개인 수련의 차이를 분명히 알게 됐고, 자신의 사명과 책임, 그리고 역사 이전에 맺은 서약을 깨닫게 됐습니다. 용맹정진하여 사부님의 정법을 돕고, 시간을 다그쳐 사람을 구하는 것만이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수련생들의 협력으로 저는 남편이 박해받아 사망한 진상 자료를 정리하여 시 공안·검찰·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했습니다. 감옥장 등이 고의로 병보석을 지연시켜 남편을 사망에 이르게 한 책임을 물었습니다. 자료가 준비되어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제 부정적인 사고가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다시 공안·검찰·법원 관계자들을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심리적 장벽이 컸습니다. 남편이 박해받던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고, 제가 또다시 박해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감당하지 못할까 봐 겁이 났습니다. 또한 성(省) 소재지와 거리가 멀어 왕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안일한 마음도 생겨났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두려운가? 남편은 분명히 좋은 사람이 되려다 박해로 죽은 것이다.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잘못인가? 내가 그들을 찾아가 고소하는 것은 너무도 정상적인 일 아닌가? 오히려 그들이 나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상식의 이치에도 부합한다. 정법 시기 대법제자로서 사부님을 도와 정법을 하고 박해에 반대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남편의 일을 통해 그들에게 파룬궁 박해에 가담하는 것은 불법이며 고소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는 사악을 제지하고 다른 대법제자들에 대한 박해를 멈추게 하는 것이며, 그들을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내가 나가서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에 힘이 생겼습니다. 이튿날 수련생의 동행 아래 저는 각 부서에 고소장을 제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 부서는 모두 떠넘기기식으로 대응했습니다. 자료를 읽어본 뒤에는 공안국은 검찰원으로, 검찰원은 법원으로 넘겼습니다. 이렇게 서로 미루면 우리는 다시 찾아가 설명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정념을 발했습니다. 조급해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았으며 결과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과정만을 중시했습니다. 그들이 내용만이라도 읽을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사악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며, 동시에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법원을 찾았습니다. 접견실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매우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고소장을 건넸고, 그들은 번갈아 가며 읽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마음으로 동정합니다. 하지만 파룬궁 관련 사건은 우리 쪽에 이미 40여 건이 접수됐는데, 단 한 건도 입건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파룬궁의 진상을 많이 설명했고, 이어 삼퇴를 권했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진상을 상당히 받아들이는 듯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법이 그렇게 좋다면 계속 나아가 보십시오.”

이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사악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고 사람들의 선념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습니다. 동시에 저 자신도 수련 속에서 한층 제고될 수 있었습니다.

7. 나의 수련, 새로운 출발점

우리집에 컴퓨터와 프린터가 생기면서 가정 자료점을 세우게 됐습니다. 사부님께서 지혜를 열어 주셨고,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수련생들의 인내 어린 도움 속에 저는 곧 인쇄 기술을 익혔고, 명혜망에 접속해 ‘명혜주간’과 각종 진상 소책자를 내려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후에는 대법서적 제작도 빠르게 배웠습니다. 현지 수련생들에게는 모두 한 세트씩 보급됐고, 인근 마을 수련생들의 법공부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을 구했습니다. 필요한 진상 자료를 자유롭게 제작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람을 구하는 효율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는 우리 지역에서 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리며 중생을 구하는 데 매우 좋은 조건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구출 활동이 바빠지면서 자료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프린터를 더 늘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중공 바이러스(우한 폐렴) 사태가 발생했을 때, 우리 지역 수련생들은 전체적으로 협력하여 수백 동의 아파트와 수천 가구의 단층 주택을 집집마다 방문해 진상 자료를 전달했습니다. 전염병을 피하고 큰 재난을 막을 수 있다는 진상 내용이 곳곳에 전해졌습니다. 저는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겼고, 컴퓨터 책상 앞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앞으로 나아갈 뿐, 물러설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부님의 가호와 보호 속에서 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순조롭게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수련생들은 자료점이 곳곳에 꽃처럼 피어나야 한다고 깨닫게 됐고, 우리 지역에도 여러 작은 자료점이 새로 세워졌습니다. 지금 저는 전심전력으로 정법 수련에 임하고 있습니다.

지나온 이 수련 과정을 돌아보면, 모두 대법의 법리가 끊임없이 제 마음을 정화해 주었기에 점점 더 성숙해질 수 있었음을 느낍니다. 대법에 비추어 보면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저는 서둘러 과시심,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마음,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마음, 남을 내려다보는 교만한 마음, 허영심 등을 닦아 없애야 합니다. 앞으로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더욱 단단히, 바르게 걸어가고자 합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이때, 저는 세 가지 일을 잘 해내고 더 많은 사람을 구하여, 서약과 사명을 완수하고 사부님을 따라 돌아가고자 합니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6년 2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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