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대법제자로서 대법과 사부님을 수호하는 것은 본연의 사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호는 반드시 일반 속인의 인식을 초월해야 하며, 속인의 층차에서 이해하고 실행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속인이 편을 들거나 제 식구를 감싸는 격이 되고 만다. 심지어 고통스러운 고비를 넘기는 중에 어떤 가상(假相)에 미혹돼, 진상을 명확히 알리기는커녕 자신마저 미혹에 빠질 수 있다.
수련의 본질을 꿰뚫어 보라: 모든 것은 법을 위해 왔다
사부님께서는 법을 전하기 시작하실 때, 수련 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며 반드시 우리의 집착을 겨냥해서 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그저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데 그쳐 입으로는 안다고 말하지만, 막상 일을 당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대법이 비방과 유언비어에 시달리기 시작했을 때 사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드셨다. “대마두(大魔頭)와 중공(中共)이 수련생에게, 너희들의 선생은 어떠어떠하게 돈이 있으며, 북경과 장춘에서 어떠어떠한 호화로운 주택에서 살았으며 생활이 어떻게 사치스러웠다고 날조하였다. 그때 중국에서 법을 전할 때 내 생활은 아주 단출했다. 중국 대륙의 한 수련생이 말하기를, 우리 사부님은 가장 좋으시며, 그렇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우리 사부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나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당시 마음이 아주 괴로웠으며, 나는 과거에 하세(下世)하여 사람을 구도한 신(神)의 당시 고달픔을 더욱 헤아릴 수가 있었다. 수련은 자신을 닦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을 보아야 한단 말인가?”(각지 설법7-미국서부국제법회 설법)
속인의 기준으로 가늠한다면 이는 확실히 문제가 없다. 현대인의 관념은 마치 더 청빈할수록 더 정파(正派)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련인의 각도에서 본다면 그것은 차이가 너무나 크다!
“내가 여러분에게 수련을 가르친다고 하여 나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수련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각지 설법7-미국서부국제법회 설법)
우리는 제공(濟公)의 예를 들 수 있다. 제공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을 때, 속인 중에 과연 몇 명이나 진심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제공에게는 모두가 익히 아는 명언이 있다. “술과 고기는 창자를 지나가나, 부처님은 마음속에 머무신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 뒤의 문장인 “세상 사람들이 만약 나를 배운다면, 마도(魔道)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라는 구절은 간과한다. 사부님의 법은 매우 명확하다. 모든 사람 중에서 오직 사부님만이 수련 중에 계시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과 심지어 많은 수련생조차 일을 당하면 습관적으로 속인의 잣대로 사부님을 가늠하며, 속인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형상’으로 사부님을 정의하려 하지 않는가?
때때로 나는 사부님께서 정말 어려우시겠다는 생각을 한다! 속인 속에서 법을 전하시기에 세인들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모든 중생을 구하셔야 하므로, 만약 지나치게 ‘속인 상태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신다면 대다수 세인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심지어 반대편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대법제자 집단 내에서 생기는 집착을 구세력이 또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으니,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사부님께서는 반드시 ‘장계취계(將計就計, 상대의 계략을 역이용함)’로 이러한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많은 연극을 하셔야만 한다. 이러한 소재들이 ‘빌미’가 되어 사악한 자들과 사오(邪悟)한 자들에게 끊임없이 공격당하며, 이를 통해 집착이 있는 제자들을 찾아내려 하는 것이다.
법난(法難) 중의 가상에 미혹
주지하다시피 해외 인터넷상에서 몇몇 전직 대법 매체 인원과 전직 션윈 단원들이 일부 서구 매체 플랫폼과 결합하여 대법을 훼손하고 여론을 오도함으로써, 국내외 진상 알리기에 어려움을 더하고 일부 수련인들에게 시험을 주고 있다. 사실 세인들은 원래부터 대법과 수련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일부 수련생은 여전히 어떤 속인이나 속인 조직이 사악을 소멸하고 대법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가소로운 것이며 완전히 법에 있지 않다.
사부님을 제외한 모든 세인, 즉 모든 대법제자, 각계의 영매(靈媒), 각 문파의 대사(大師) 등을 포함한 모두가 일정 정도 미혹 속에 있다. 그 누구도 사부님께서 하시는 일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모든 대법제자를 초월한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헛수련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세상의 모든 조직과 사람, 우리의 가족과 친구 등을 포함하여 누구도 우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이해한다면 그들은 우리 대법제자와 같아지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수련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들의 소위 이해라는 것은 사실 매우 한정적이고 심지어 가련할 정도로 적으며, 대부분의 경우 인류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수련 문화에 대한 아주 미미한 정보적 동의일 뿐이다. 하지만 이 미미한 정보적 동의만으로는 오늘날 진정한 수련인들이 직면한 대시험의 미혹 속에서 대법을 이해하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것이 아마도 일부 유명 서구 매체들이 지속적으로 대법을 공격하는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내 생각에는 단순히 사당(邪黨)의 자금 수급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빌미’가 없다면 사악도 풍파를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개된 정보로 볼 때 이번 대시험 중에 많은 수련생, 심지어 일부 ‘덕망 높은’ 수련생들조차 중대하고 관건적인 일에서 정말로 법에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수련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자신을 닦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닦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수련 중의 이러한 심각한 공적 사건들을 볼 때, 우리는 경각심을 갖고 자신을 대조해 보아야 하며, 더욱 법에서 명석한 인식을 가져야만 환상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다. ‘덕망 높음’, ‘명성’ 이런 것들은 모두 속인의 것이 아닌가? 법에서 법을 인식하느냐가 진정한 가늠의 척도다.
과거에 매일 사부님과 함께 지내던 페이텐(飛天) 학생들과 교사들도 뜻밖에도 여전히 속인의 층차에서 대법과 사부님을 이해하고, 진선인(眞·善·忍)을 이해하며, 수련인이 직면한 시험을 이해하는 것을 보고 나는 반드시 마음가짐을 더욱 바로잡고 수련에는 지름길이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느꼈다. 『전법륜(轉法輪)』에서 말씀하신 바처럼, “이 마음을 닦지 않으면 누구도 올라가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정말이다.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고 수련할 줄 모른다면 매일 사부님 곁에 머문다 해도 소용이 없다.
법에서 대법과 사부님을 수호해야 한다
교훈은 이미 충분하다. 만약 우리 모두가 법에서 대법과 사부님을 수호할 수 있다면, 사악은 절대로 어떤 큰 풍파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이 완고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이러한 미혹의 국면이 조성되어, 사부님께서 사악에게 지속적으로 공격당하실 뿐만 아니라 대법 내부에서조차 ‘비난’을 받으셔야 한단 말인가? 나는 우리가 더 이상 사부님을 이렇게 고생하시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수련생은 법에서 진상을 알리자고 하면 항상 “너무 높게 말한다”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사실 그런 수련생들이 그렇게 말하는 데는 주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그가 주관적으로 세인들의 수용도가 그렇게 높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은 여전히 무신론을 선전하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초월적인 내용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객관적으로 그가 아예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진상 알리기를 그저 수련 과업을 완수하는 것으로 여기며, 비록 인정하지는 않지만 평소에 그저 ‘녹음기’처럼 행동한다. 많은 내용을 기계적으로 옮길 뿐이며, 누군가 관련 의문을 제기하면 ‘표준 답안’을 외울 뿐 정작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할 수도 있다.
우선 한 가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세인에게 대법과 사부님의 진상을 알릴 때 만약 속인 층차에만 머문다면, 내가 다년간 관찰하고 결론 내린 바로는 많은 경우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사실 많은 중국인은 나이가 좀 들고 여러 일을 겪었으며, 특히 현재 국학(國學) 열풍과 중의(中醫) 열풍의 배경 아래 전통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면 신에 대한 인식이 강화된다. 그런 사람들은 귀신이나 인과 등 초월적인 내용들을 대부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 다시 진상을 알린다면 정말 깊은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하며, ‘깊은 내용’은 반드시 주제를 직설적으로 찔러야지 우회해서는 안 된다. 중생은 모두 사람이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예외 없이 영성의 제고와 생명의 각성을 위해 왔다. 이 점은 서구의 영성 학설이나 양자 최면 학설 등으로도 동시에 입증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의 높이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많은 경우 그렇게 미혹되지 않으며 더 명확하게 보인다. 수련인으로서 이러한 시각 아래 육안으로 보이는 가상을 끊임없이 타파하고 심성을 높이며, 자아의 승화와 집착심을 내려놓는 것을 참되게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수련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는 자는 불법(佛法)과 수련을 속인의 이론처럼 배우고 속인의 각종 관점으로 가늠하려 하기에, 단연코 수련인을 이해하기 어렵고 사부님의 고심을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람을 구하는 어려움을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날 일어나는 많은 일은 속인 층차에서는 이미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사실 역사적으로 일찍이 관련 참고 사례를 남겨두었으나, 당시에는 출가 수련인이라는 소수 집단을 겨냥한 것이었고, 또한 법리가 고심하고 난해한 등의 이유로 널리 전해지기 어려웠을 뿐이다.
법난이 발생한 초기를 돌이켜보면, 대법 전체 수련 집단 내에는 갖가지 장기적이고 굳어진, 아마도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강한 집착심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람 마음은 사부님께서 보시기에 이미 제자들이 반드시 닦아버려야 할 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세력이 보기에는 이것이 아주 좋은 ‘빌미’였다. “보아라, 너희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두 ‘형상(相)’에 집착하고 장기간 사람의 관념을 붙잡고 놓지 않으며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하니,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 걸러내겠다!”
“너희가 대법 수련은 성명쌍수(性命雙修)라고 하니, 너희 내부 사람(사오한 자)을 시켜 너희 내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말하게 하겠다. 법을 전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인류의 최고 수명보다 오래 산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너희가 사부의 생활이 간단하다고 하니, 너희 내부 사람을 시켜 사부가 자주 사람들을 데리고 비싼 음식을 먹고 명품을 입는다고 말하게 하겠다….”
“너희가 사부가 바르고 자비롭다고 하니, 너희 내부 사람을 시켜 사부가 자주 화를 내고 고의로 수련생 내부 갈등을 일으킨다고 말하게 하겠다….”
이러한 한 장면 한 장면의 ‘표상’을 수련인으로서 어떻게 가늠해야 할까? 우리는 매 순간 우리가 수련하고 있음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수련은 자신을 닦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닦는 것이 아니며,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이 이 목적을 위해 온 것이다.
대법제자에게는 속인이 말하는 ‘입장’ 같은 것이 없다. 대법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눈을 감고 사오한 자들이 하는 말을 무조건 부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다. “보아라, 너희는 ‘입장’만 중요하고 ‘진실’은 필요 없구나. 맨날 진상을 알리겠다고 떠들더니 정말 이중잣대구나!?”
그래서 그들(사오자)은 자신들이 더 ‘순수’하고 ‘선한’ 사람이며 자신들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우스꽝스럽게 생각한다. 사실 이 점이 오히려 더 미혹성이 있는데, 만약 사람 마음으로 가늠한다면 결코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전법륜』에는 분명히 “물체가 존재하는 형식은 이런 것이지만, 그것의 표현 형식은 도리어 이런 것이 아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 수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대법제자가 세상을 떠났는가? 수량이 확실히 적지 않지만, 우리 주변에는 수십 년간 하루같이 건강하며 약 한 알 먹지 않은 수많은 수련인이 실제로 존재한다. 속인의 각도에서는 이 정도까지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연 있는 사람에게는 더 높은 차원의 인과나 수련인의 겁난(劫難) 등을 말하거나, 역사 속의 수련 이야기를 통해 더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 인연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무조건 ‘너무 높게 말할까 봐’ 두려워하여 기회를 놓치지 마라. 물론 절대로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되며, 반드시 듣는 이의 수용 능력에 맞춰야 한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진정으로 인연 있는 많은 사람은 당신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
사부님께서는 “해외 수련생 중에 명혜는 속인이 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줄곧 견지하는 한 부류가 있고, 그래서 명혜 홍보를 거절합니다”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은 이 사회 중에서도 층차가 나뉘는 것이다. 당신이 보기에 평범하고 평범하게 거리를 걷는 사람이지만,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도덕이 좀 높아 그가 인식하는 것도 곧 다르다. 어떤 사람의 도덕은 좀 더 높아 그가 인식하는 것이 더욱 다르다. 어떤 사람은 능력이 있는데, 게다가 어떤 사람은 큰 능력이 있다. 이런 사람도 무척 많고, 심지어 계층이 나뉜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동일한 능력하에 그들은 서로 연계가 있고, 더욱 높은 능력의 사람 역시 하나의 계층이며, 그들은 서로 간에 모두 연계할 수 있다. 이 인류사회는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고정된 관념으로 인류사회를 보지 말라.”(각지 설법15-2019년 뉴욕법회 설법)
사부님의 인간 세상에서의 언행에 관해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사부님은 수련인이 아니시며 더욱이 ‘그들 중 한 명’도 아니시다. 이 진상은 수련인의 각도에 서지 않으면 우선 자신부터 이해하기 어렵고, 세인에게 명확히 알릴 수도 없다. 특히 지금 같은 말법 시기에 세상의 대다수 종교 조직이나 정교합일(政敎合一) 국가의 지도자들은 상당수가 ‘사이비 교주’가 되어 신도들에게는 고생을 가르치고 자신은 향락을 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오자들이 사부님의 생활이 ‘사치스럽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반드시 반대로 사부님은 ‘청빈하다’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이것은 함정을 보고 뛰어드는 꼴이 아닌가? 대중 매체를 상대할 때는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대중 매체의 독자들은 『전법륜』을 정독해 본 적도 없고 수련을 동경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련하는 개개인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깨달음을 높여 속인의 이치를 초월해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전도자(傳道者)는 수련인과 동일하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 똑같은 행위라도 마음가짐이 다르면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똑같은 행위라도 전도자는 당신을 성취시키고 원만하게 하며 집착심을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한 것일 수 있지만, 속인은 반드시 자신의 집착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한 것이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아, 당신 논리라면 당신 사부가 나중에 무슨 ‘나쁜 짓’을 해도 다 변명할 수 있겠네?” 사실 우리는 대법과 사부님 자체를 겨냥한 이 마지막 공격에서, 사악이 모든 수단을 동원했음에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많이 캐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파룬궁을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사부님 본인에게서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늘 생각한다. 신앙만 붕괴되면 파룬궁은 순식간에 와해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악이 그렇게 오랫동안 소란을 피웠어도 고작 터뜨린 것이 사부님이 ‘화를 내신다’, ‘콜라를 좋아하신다’ 등과 같은 대수롭지 않은 정보들뿐이다. 앞뒤 맥락을 빼버린 이런 말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신 부모님이 당신을 꾸짖었다고 해서 더 이상 당신 부모님이 아닌 것인가? 부모님의 사랑과 양육이 모두 무효가 되는가? 또한 중공이 가장 원하는 ‘범죄 증거’, 즉 소위 축재(蓄財) 등과 관련해서는 사부님께서 만약 돈을 벌려 하셨다면 그 돈을 가져다 무엇을 하셨겠는가? 진짜 사이비 교주들을 보라. 그들은 일단 돈이 생기면 무엇을 하는가? 여자, 사생아, 파티, 호화 도박, 성적 변태 행위, 마약, 사치와 향락에 빠져든다….
탄압 초기 사부님께서 아직 중국에 계실 때부터 중공은 이미 칼을 갈고 있었다. 그로부터 30~40년이 흐른 지금, 그들의 뜻대로 되었는가?
맺음말
사실 현재의 형세에 직면하여 우리가 완전히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전 개인 수련 시대를 떠올려 보라. 선종의 2대 조사 혜가(慧可)는 달마에게 법을 구하며 수행의 결심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잘랐고, 마르파 상사는 밀라레파가 공양을 적게 했다는 이유로 끝없이 고통을 주며 체벌했다. 이러한 고대 수련 이야기를 요즘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아! 자해를 교사하다니, 종교의 이름으로 재산을 갈취하는 사이비 종교구나!”라고 할 것이다. 전통적인 사찰 수행에서도 정오 이후 음식을 먹지 않거나 불도단(不倒單, 평생 누워서 자지 않는 것) 하는 것은 다반사지만, 오늘날 무신론 선전에 오도된 속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함부로 딱지를 붙인다.
반면 우리를 보라. 사부님께서는 거듭 우리가 속인 중에서 수련하며 “최대한도로 속인의 상태에 부합”(싱가포르 법회 설법)하라고 훈계하셨다. 우리는 정체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고대 전업 수련자들처럼 극단적인 상황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속인 사회에 뿌리를 두고 지혜를 통해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진상을 명확히 알릴 수 있다.
원문발표: 2026년 2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2/25/507205.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2/25/507205.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