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노년 대법제자입니다. 약 50년 전, 저는 대지진 때 무언가에 깔려 내장이 심하게 손상되고 하반신 마비가 돼 장애인이 됐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제가 살아남은 건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해 저는 겨우 서른 살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연로하셨고 두 아이는 어렸습니다. 저는 구들장에 마비된 채 누워 스스로 앉지도 못했고, 남편 혼자 생계를 꾸려야 했습니다.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했고, 하루하루 고통 속에 버티며 희망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21년 후 저는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얻었고, 그때부터 생명이 완전히 새로워져 사부님을 따라 오늘까지 걸어왔습니다.
그가 말하자마자 나는 믿었다
1997년 정월 초이틀, 남동생이 신이 나서 직장에서 알게 된 공법이 있는데 정말 좋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전에 파룬궁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난 믿어”라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남동생이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빌려다 줬습니다. 책을 받아 들자마자 동생은 책을 맨 뒤로 넘겨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소전(小傳, 간략한 소개글)을 보여줬습니다. 소전을 다 읽자마자 동생은 제게 책을 남겨두기 아깝다는 듯 손에서 책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저는 마음이 허전하고 불쾌했으며 늘 그 일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며칠 후 올케가 놀러 왔길래 저는 대뜸 불평부터 했습니다. “남동생은 참 아이 같아. 그날 책을 가져와서는 조금 보여주더니 다시 가져가 버렸어.” 올케가 무슨 책이냐고 묻기에 저는 ‘전법륜’이라고 했습니다. 올케는 “그 책 우리집에 있어요. 아주 두꺼운데, 내가 지금 가져다줄게요”라고 했습니다.
‘전법륜’을 펼치자 가장 먼저 사부님의 법상(法像)이 보였는데, 어디서 뵌 분처럼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논어(論語)’를 읽어보니 너무 심오해서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어졌습니다. 게다가 책을 보는데 저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가족들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습니다. “무슨 책을 보는데 그렇게 울어?” 저는 왜 우는지 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전법륜’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간단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좋았고 너무 늦게 만난 것이 한스러웠습니다.
저는 책을 받쳐 들고 하루 종일 읽으면서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그러고는 밥을 먹고 잠이 들었습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20여 년간 앓던 불면증이 씻은 듯이 나았고 정신도 맑아졌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상했습니다. ‘하루만 책을 봤는데 사부님께서 나를 관여해주시는 건가?’ 이튿날 저는 또 하루 종일 책을 읽어 다 마쳤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결심했습니다. ‘이 공법을 배워야겠다!’
나중에 저는 남동생에게 부탁해 ‘전법륜’ 한 권과 사부님의 공법교육 비디오를 구해 집에서 혼자 배웠습니다. 동작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 저는 힘든 것과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매번 비디오를 보며 배울 때마다 휠체어에 앉아 가슴을 펴고 똑바로 앉았습니다. 이렇게 저는 하루 만에 다섯 가지 공법을 모두 배웠습니다.
서서히 저는 대법이 단지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수련을 가르치고 사람을 제도하러 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배우는 날이 길어질수록 사람의 언어로는 대법이 얼마나 좋은지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느꼈습니다. 이렇게 좋은 공법을 저는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법을 알리기 시작했고 친척과 친구들을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대법의 좋음과 저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알려줬습니다. 그렇게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대법 수련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 마을에 법공부 팀과 연공장이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10여 명에 불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30여 명으로 늘어났고, 집에서 배우며 연공장에 나오지 않는 사람도 40여 명이나 됐습니다. 다른 수련생들이 주변 마을로 가서 법을 알리기 시작하자 주변 마을에서도 금세 많은 사람이 법을 얻고 연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법을 알리는 수련생들을 보며 기뻤지만, 저는 그렇게 큰일을 할 수 없어 작은 일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집 문 앞에 탁자를 하나 놓고 녹음기로 ‘제세(濟世)’와 ‘보도(普度)’ 음악을 틀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대법 소개 자료를 한 장씩 건넸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걸 보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대법이 좋다는 걸 알았고 제가 혜택을 입었기에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입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부님의 다롄(大連) 설법 비디오를 보던 때가 기억납니다. 화면에 막 ‘제2강’이라는 자막이 나오자마자 강력한 에너지가 제 얼굴과 상반신(저는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습니다)을 덮치는 것을 느꼈고, 온몸이 저릿저릿했는데 바로 에너지가 통과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법공부와 수련을 하면서 저는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세계관마저 전변(轉變)이 생길 것”이라는 말씀처럼 사상이 승화되는 것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체 변화는 더 커서 심계항진, 저혈당, 갑상선 비대, 기침, 심각한 불면증 같은 많은 증상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싹 사라졌습니다. 게다가 주름이 줄고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등 변화가 아주 뚜렷했습니다. 저는 원래 46~47세에 폐경이 됐는데, 연공 후 50대인 제가 다시 월경이 시작돼 신체가 젊어지는 방향으로 변했습니다.
“대법은 좋습니다,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실 중공(중국공산당) 악당의 대법제자에 대한 교란과 박해는 우리 지역에서는 1999년 ‘7·20’ 이전부터 나타났습니다. 당시 우리가 아침에 단체 연공을 할 때면 낯선 사람이나 경찰이 주변을 어슬렁거렸습니다. 그들은 현지 수련생들이 주말에 시 광장에 가서 단체 연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작은 연공장마다 감시하며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주말 어느 날, 날이 훤히 밝기도 전에 누군가 우리 연공장 주변을 어슬렁거려 공포감을 조성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저는 주변 수련생들에게 옷과 방석도 챙기지 말고 한 명씩 차례로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고, 그들이 발견했을 때는 나이 든 수련생 몇 명만 남아 가부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급히 차를 몰고 쫓아갔습니다.
그날부터 우리 연공장은 제 남동생 집 마당으로 옮겼습니다. 동생은 한 자 세 치 길이의 붉은 천을 내왔고, 우리는 ‘진선인(眞·善·忍)’ 글자와 파룬 도형이 있는 현수막을 직접 만들어 연공할 때 앞에 걸어뒀습니다.
1999년 7월 20일 아침 5시가 넘었을 때, 한 무리 사람들이 강도처럼 동생 집으로 쳐들어와 현수막과 녹음기를 빼앗고 우리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연공하지 말라고 위협하며 그렇지 않으면 군중 소란죄로 처벌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동생 집으로 모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았고 대법은 바르며, 우리의 연공할 권리를 함부로 박탈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마당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그 무리가 들이닥쳤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뒷문으로 나갔고 우리 자매 넷만 남았습니다.
그 무리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큰소리로 고함쳤습니다. “당신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모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제가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집회예요? 우린 친자매라고요.” 올케도 거들었습니다. “그냥 같이 연공하고 법공부하며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데 뭐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자 한 사람이 즉시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악을 썼습니다. “말하지 마, 다들 얌전히 있어. 얌전히 안 있으면 다 잡아갈 거야!”
그 후로는 매일 보고 듣는 것이 온통 세상을 덮을 듯한 거짓말과 모함, 탄압뿐이라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당시 제 마음은 정말 어머니 잃은 아이 같았고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수련 환경이 파괴됐는데 어떡하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아무리 어려워도 저는 수련해야 했습니다. 대법은 좋고 바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설법에서 제자들에게 “법을 스승으로 삼으라”(미국동부법회설법)고 하셨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실하게 수련하는 자는 구하고자 집착하지 않아도 스스로 얻을 것이며, 일체 공(功), 일체 법은 모두 책 속에 있는 것이라, 대법(大法)을 통독(通讀)하면 스스로 얻을 수 있다. 배우는 자는 스스로 변하니 반복적으로 통독함이 이미 도(道) 중에 있는 것이다. 사부는 법신(法身)이 있어 조용히 보호해 주니, 꾸준히 견지하면 훗날 반드시 정과(正果)를 이룰 것이다.”(정진요지-사부를 모시다)
외부 봉쇄가 매우 심하니 집에서 수련하며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고, 평소와 같이 법공부하고 연공하며 굳게 마음먹으니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고성능 스피커에서 마을 수련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모든 파룬따파 서적을 전부 상납하라고 했습니다. 몰래 숨겨두다 적발되면 연행해서 형을 선고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제 첫 생각은 ‘낼 수 없어! 책을 그들에게 주면 난 어떻게 법공부를 하라고?!’였습니다.
이어서 사악은 또 무슨 서명을 하라면서 수련생들에게 대법과 결별하겠다는 서명을 강요했습니다. 서명하면 집으로 보내주고, 안 하면 차에 태워 향(鄕) 정부에서 여는 세뇌반으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제가 장애인인 것을 보고는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진상 알리며 괴롭힘에 맞서다
그때는 대법 수련생이라면 서명을 했든 안 했든 마을 위원회 간부들이 거의 매일 경찰을 데리고 집으로 찾아와 괴롭혔고, 24시간 감시했습니다. 수련생 한 명당 다섯 명씩 붙어 외출을 금지했습니다. 밤이면 이들은 담장 밖에서 지키며 10분마다 한 번씩 “자나?” 하고 소리쳤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우리집에 와서 괴롭히기에 제가 뭐 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었습니다. 마을 간부가 소개해줬는데 향장 등 간부들과 파출소 경찰, 그리고 다른 부서 책임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수련생이 가져다준 진상 자료를 이불로 덮고 그 위에 기대앉았지만 가슴은 쿵쿵 뛰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세뇌시키려고 중난하이(中南海, 중국공산당 집무실 소재지) 포위가 어쩌고저쩌고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원인은 누군가 파룬궁에 대해 불공정한 보도를 했기 때문이에요. 수련생들이 상황을 알리러 갔는데 톈진(天津)에서 사람을 잡아갔고, 윗선에 가서 말하라고 했어요. 윗선이라면 당연히 베이징이니까 그래서 베이징 만인 청원이 일어난 거지, 무슨 포위 같은 게 아니에요.”
향장은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말은 참 잘하는군.” 그러고는 “다시는 연공하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습니다.
당시 저는 자료가 발각될까 봐 목소리가 좀 작았고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또 우리집에 왔는데 모두 낯선 얼굴들이었습니다. 저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우리 수련생들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박해 전에 우리는 마을 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매일 아침 마을 오락 센터에서 한 시간씩 연공했어요. 당시 그 마당은 매우 더럽고 어수선해서 잡초와 깨진 벽돌, 기와 조각이 널려 있어 도저히 쓸 수 없었어요. 우리 수련생 몇 명이 자발적으로 농업용 차량을 몰고 오고 집에서 삽과 곡괭이 등 농기구를 가져와 꼬박 이틀을 일해서 마당을 깨끗하게 치워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어요. 당시 마을 사람들은 다들 ‘저기 파룬궁 수련하는 사람들 좀 봐, 보수도 안 받으면서 일을 저렇게 잘해!’라고 했어요.”
“1999년 말, 전기요금을 낼 때였어요. 우리 지역은 분기마다 한 번씩 요금을 내는데 우리집은 매번 120위안 정도 나왔어요. 그해 겨울 마침 며느리가 산후조리를 하느라 침대 생활을 했는데, 온돌도 없고 난방도 안 돼서 전기난로를 빌려 썼어요. 그게 전기를 많이 먹어서 연말에 요금 낼 때 남편에게 돈을 넉넉히 가져가라고 당부했어요. 그런데 요금을 낼 때 회계원이 줄을 잘못 봐서 아랫집 요금으로 받고 우리집 이름 뒤에 체크를 한 거예요.”
“남편이 집에 와서 96위안을 냈다고 했어요. 저는 당장 말했죠. ‘틀렸어요. 평소에도 분기마다 120위안 정도 나오는데 올겨울엔 전기난로까지 썼으니 더 나와야지, 어떻게 더 적게 나와요?’ 그래서 남편을 다시 보내 회계원에게 확인하게 했더니 실수가 있었던 걸 알고 우리집은 508위안을 더 냈어요. 마을 서기가 즉시 스피커로 이 일을 방송했어요. 남들은 전기요금 더 나올까 봐 무서워하는데 우리집은 적게 나왔는데도 자진해서 더 냈다고요. 많은 사람이 우리보고 바보라고 했지만, 어떤 사람은 ‘파룬궁 수련하는 사람들은 남의 이익을 점하지 않는다더니 진짜네’라고 감탄했어요.”
상대방은 제 얘기를 듣더니 저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말씀 참 잘하시네요. 좋으면 집에서 몰래 하세요.”
2000년 봄 어느 날, 촌장이 향 정부 사람 6~7명을 데리고 우리집에 와서 제가 집에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저는 “나 같은 사람이 어딜 가겠어요?”라고 했습니다. 촌장은 “오늘 당신들 사부 법신이 천안문에 나타나서 당신들 다 천안문에 와서 원만하라고 했다던데!”라고 했습니다. 저는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참 이상하네요. 제자인 저도 모르는 일을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이제 누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지 알겠죠?” 그 간부들은 순간 다들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후로 그들은 몇 년간 저를 찾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 어느 날, 마을 위원회 사람이 또 한 무리 사람을 데리고 갑자기 우리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저는 진상 호신부(護身符) 플라스틱 패를 만들고 있었는데 다급한 마음에 얼른 홑이불로 덮었지만 다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악이 보지 못하게 해달라고 발정념(發正念)을 했습니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여느 때와 똑같이 아직도 파룬궁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파룬궁은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게다가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데 기적 같은 효과가 있어서 개인에게나 국가에나 수많은 이로움만 있고 한 가지 해로움도 없는데 왜 안 하겠어요? 또 ‘헌법’에도 신앙의 자유가 규정돼 있고요.” 그러자 키 큰 남자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안 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요?” 제가 말했습니다. “네, 맞게 보셨어요.”
2008년 4월 말 어느 날 저녁, 막 연공하려는데 문밖에서 남녀 두 명이 바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파출소에서 왔다며 아주 공손하게 “방해한 건 아니죠?”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방해됐어요, 지금 연공 중이었거든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미안합니다”라고 하면서 두 손을 모아 읍을 했습니다.
그 여자는 대화를 시작하려는지 비디오카메라를 꺼내 녹화하려 했습니다. 저는 엄숙하게 제지했습니다. “녹화하지 마세요!” 그 남자도 눈짓으로 카메라를 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법이 전 세계에 전파된 것, ‘전법륜’이 여러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 발행된 것부터 시작해서 병을 없애고 몸이 건강해지는 기적적인 효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또 서민들이 병원 가기 힘들고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현실, 사회 분배의 불공정과 각종 부패에 대해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악에는 응보가 따르며 대법은 사람을 제도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얌전히 듣고만 있다가 마지막에 두 손을 모아 읍을 하고 뒷걸음질로 나가면서 제게 물었습니다. “우리 원망 안 하시죠?” 저는 말했습니다. “수련인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직업이라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이건 꼭 말씀드리고 싶네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기억하세요. 복을 받을 겁니다.”
작은 꽃을 피워 세상 사람을 구하다
2001년, 악당은 중국과 외국을 경악게 한 ‘천안문 분신’ 조작극을 꾸며냈고 한동안 민심이 흉흉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법제자로서 명백한 허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법은 살생을 금하니 자살은 죄가 된다는 점, 몸에 불이 붙었는데 머리카락은 멀쩡하다는 점 등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저 혼자만 알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천안문 분신’이 가짜라는 것을 알려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악독한 거짓말에 속아 망가질 것이라는 점을 더욱 깊이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골에는 대법제자가 적었고 학력도 낮았으며 나이가 많고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아, 온 마을을 통틀어 컴퓨터가 있는 집이 몇 집 안 됐습니다. 정규 진상 자료가 없어서 저는 손으로 썼습니다. ‘파룬따파하오’, ‘우리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달라’, ‘파룬따파는 정법(正法)이다’, ‘천멸중공(天滅中共)’ 등 문구를 종이에 써서 붉은 종이로 접은 작은 봉투에 넣어 각 집 문 앞에 배포했습니다.
나중에 읍내 수련생이 갑자기 우리집에 CD 복사기를 가져다줬습니다. 저는 얼른 우리 마을 수련생에게 연락해 공 디스크를 살 방법을 찾게 했습니다. 또 다른 10여 명의 수련생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컴퓨터를 샀고, 시내 수련생에게 배운 뒤 우리도 ‘작은 꽃’을 피워 작은 자료점을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자료를 만들어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대면해서 진상을 알리고 ‘삼퇴(중공의 3가지 조직 탈퇴)’를 권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걸을 수가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요? 저는 먼저 가족부터 시작했습니다. 제가 수련한 후 보여준 모습들을 가족들이 모두 인정하고 지지했기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가족 모두를 삼퇴시켰습니다.
손녀가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거쳐 대학원에 갈 때까지 손녀 친구들은 우리집에 오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 애들이 오면 저는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습니다. 그 외에 우리집 주변 이웃들도 모두 권해서 탈퇴시켰습니다.
정법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제도해야 할 중생은 아직 많습니다. 저는 사부님 말씀을 듣고 자신을 잘 수련해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을 잘하겠습니다.
(명혜망 제22회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11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1/22/502507.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11/22/502507.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