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부모님은 저희에게 어려서부터 남을 선하게 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성장한 후 어머니는 저희 자매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시집가서는 시부모님을 잘 모시고 웃어른께 효도해야 한다. 시어머니 노릇이 쉽지 않으니 시어머니를 이해해야 한다. 너희 중 누구라도 시댁에 못된 짓을 하는 걸 내가 알게 되면, 다시는 이 집에 못 들어오게 할 것이다.”
원한의 인연
저는 어머니의 말씀을 명심하고 결혼 후 시어머니와 잘 지내 좋은 며느리가 돼 어머니와 같은 고생을 시어머니께 시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일은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하든지 시어머니가 꼬투리를 잡고 트집을 잡는다는 것을 발견했고, 시어머니의 뜻대로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또 우리 부부 사이를 이간질했고, 남편은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늘 어머니 말만 믿고 저를 억울하게 괴롭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불만을 드러내면, 시어머니와 남편은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남편은 시어머니 댁에 가서 돌아오지 않아 저는 시어머니와 남편 두 사람에게 사면초가로 몰렸습니다. 이 집에서는 제가 아무리 잘해도 시어머니 눈에는 늘 바깥사람일 뿐이고, 시어머니는 자신의 자녀들만 보물처럼 여겼습니다.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제가 받은 고통을 친정에 가서 하소연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일들을 겉으로는 참아내고 억지로 눌러 참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억울했습니다. 마음속의 서러움과 원한을 풀 길이 없어 결국 저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고, 며칠 밤낮을 잠 못 이루고 지냈습니다. 온몸이 까맣고 깡말랐으며, 눈 밑은 거무튀튀했고,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습니다.
좋은 며느리 노릇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고 나서 저의 심각한 우울증은 저절로 나았고, 저는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안색은 붉어졌고 체중도 정상으로 회복됐습니다. 저희 친정과 시댁 식구들은 모두 제 몸에서 파룬따파가 드러낸 신기함을 목격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구해주셔서 저에게 새 삶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저는 정말 오늘까지 살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오랫동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의혹도 대법 중에서 답을 얻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은혜와 원한이 인연에서 비롯됐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와 올케는 한 종류의 인연이고, 저와 시어머니는 또 다른 종류의 인연인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고부관계가 천고의 난제라고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어머니는 88세의 노인이 되셨는데, 수련 후 저는 진심으로 시어머니를 잘 대해드렸으며, 과거에 시어머니와 남편이 저에게 주었던 상처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생활 속에서 시어머니가 아무리 저를 괴롭혀도 저는 수련인의 표준으로 시어머니를 선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비록 대법 수련에 들어오지는 않으셨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사부님의 경문을 자주 보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염하셨습니다. 시어머니는 식사 때마다 밥상 위의 반찬을 아들 밥그릇에 집어주는 습관이 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이 밥을 먹을 때도 시어머니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젓가락으로 갈비를 집어 멀리 떨어진 아들 밥그릇에 던지듯 놓아, 때로는 식탁 위에 반찬 국물이 가득하게 만들기도 하셨습니다. 남편은 효심이 깊어 한 번도 시어머니께 말씀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시어머니가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 제가 마음속으로 아주 반감을 느꼈고, 심지어 시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에게만 주고 저의 감정은 무시하는 것을 질투하기도 했습니다. 수련 후, 시어머니의 이런 습관에 대해 저는 더 이상 어떤 불만도 없으며, 노인이 자식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나중에 저도 시어머니가 됐는데, 저희 시어머니는 며느리 앞에서 하인처럼 이것저것 시키고, 저에게 이 일 저 일을 지시하며 어른의 위세를 부렸고, 저에게 손자 며느리를 시중들라고 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도 시어머니가 손자 며느리를 사랑하는 이런 방식을 받아들였습니다.
좋은 시어머니 노릇
이제 저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두 가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 두 역할을 잘 수행하려면 정말 모든 면에서 법의 표준에 따라, 수련인의 마음으로 대해야만 잘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며느리가 임신했을 때 아들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며느리가 말했는데, 애를 낳아도 아이에게 젖을 안 먹일 거래요.” 저는 한창 밥을 하고 있었는데 아들은 말을 마치고 그들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젖이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젖이 있는데도 아이에게 안 먹일 리가 있나?’ 저는 며느리가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올해 6월, 며느리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계속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매달려 있었지만 인간 세상의 일도 잘해야 했기에 며느리가 사는 도시로 가서 산후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며느리는 산후 도우미를 불렀지만 도우미는 낮에만 돌봐주었고 밤에는 제가 돌봐주었습니다. 며느리는 정말 아이에게 젖을 안 먹였습니다. 젖은 잘 나왔지만 아이에게 먹이지 않고 억지로 젖을 말려버렸습니다. 저는 시어머니로서 잔소리를 많이 할 수 없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그녀에게 말해도 듣지 않았기에 분유를 먹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한 번에 분유를 많이 먹지 못해서 밤에는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아이를 세심하게 돌보았습니다. 저는 ‘며느리가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이렇게 번거롭게 분유를 탈 필요도 없을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저는 어떤 일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아이가 깨면 젖을 먹으려 했기 때문에 저는 기저귀도 갈아줘야 했고, 분유도 타야 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너무 바빠서 아이에게 분유를 정량보다 한 스푼 적게 탔는데, 아이가 마시는 분유는 정해진 비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아들이 방에서 나와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이에게 분유 몇 스푼 탔어요?” 저는 “두 스푼”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불쾌해하며 제 방 입구에 서서 저를 나무라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분유를 이렇게 타면 물이 분유보다 많아져서 아이에게 안 좋다는 걸 몰라요? 왜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으세요? 엄마 머리는 왜 이렇게 기억을 못 해요? 왜 저를 안 깨웠어요?” 저는 말했습니다. “네가 자고 있어서 깨우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내가 타서 먹였지.”
저는 ‘아들이 어떻게 나를 나무라든 참아야 하고 다투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후 아들이 말했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자든 안 자든 분유는 제가 타서 먹일게요.” 그 후 매일 밤 저는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고 돌보았고, 아들은 아이에게 분유를 타주었습니다. 아들의 불만에 대해 저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을 돌이켜 생각했습니다. ‘불쾌함도 정(情)이 아닌가? 아들에 대한 정을 수련해 없애야지, 그를 중생으로 대해야지.’ 제 마음은 즉시 편안해졌습니다.
산후조리 기간에 며느리는 산후 도우미 2명을 고용했습니다. 첫 번째 도우미는 며느리가 아이를 낳은 후, 도우미가 병원에서 아이를 안고 며느리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 도우미가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우미는 아침에 와서 저녁에 갈 때까지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며느리는 자기 방에 있어 별일 없으면 나오지 않았는데, 원래 며느리도 말이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낮에는 법공부하고 연공했습니다.
휴식을 마치고 때로는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들기 위해 아이 방에 가서 아이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밤에 아들이 말했습니다. “엄마, 저기 도우미가 말을 안 하는 게 안 보여요? 엄마는 아기에게 왜 말을 해요? 이렇게 작은 아기가 무슨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저는 이 도우미가 아이를 잘못 대하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일하든지 며느리 앞에서 이간질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며느리가 도우미 회사에서 고용한 것이고, 도우미가 어떻게 일하는지는 그녀 스스로 알 것이며, 고용할지 말지는 그녀 스스로 결정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며느리가 산후도우미에게 아이에게 젖을 먹일지 말지 조언을 구하며 이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이에 도우미는 말했습니다. “젖을 먹이기 싫으면 안 먹여도 돼요, 별거 아니에요.” 며칠 후, 며느리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회사에 전화해서 도우미를 바꿔달라고 해야겠어요.” 그러면서 도우미가 지난 몇 달간 한 몇 가지 일을 말했는데, “제가 보니 그녀는 모든 일을 대충 하는 것 같아요”라며 매우 불만족스러워했습니다.
다음날, 회사에서 두 번째 도우미를 보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도우미가 며느리를 설득하여 제 손자가 모유를 먹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시어머니인 저는 직접적으로 말을 많이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도우미는 정말로 며느리에게 모유 수유를 권했습니다. 도우미는 방법을 사용해 며느리의 젖을 다시 나오게 했고, 손자는 더 이상 변비로 고통받지 않아도 됐습니다.
얼마 후, 아들이 자발적으로 저에게 사과했습니다. “엄마, 제가 아내한테 말했는데, 지난번 도우미가 있을 때 도우미가 아기에게 말을 안 하니까 저도 엄마한테 아기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제가 정말 틀렸던 것 같아요. 보세요. 이 도우미는 활발하고 명랑해서 아기가 자지 않으면 계속 아기에게 말을 걸어요.” 저는 말했습니다. “너는 아기가 말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임신했을 때부터 왜 태교를 해야 하는 줄 아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엄마, 죄송해요. 화내지 마세요. 제가 첫 아기라 아무것도 모르고 경험도 없었어요. 지난번에 엄마가 아기에게 분유 먹일 때 한 스푼 덜 넣은 것도 괜찮아요. 조금 더 먹거나 덜 먹는 건 상관없어요. 큰일도 아니에요.”
아들의 말을 듣고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생활 속에서 큰일은 없지만, 작은 일도 내 심성을 시험하고 어떻게 고비를 넘길지 시험하는구나. 되돌아보면 어떤 일도 별일 아니야, 내가 스스로를 수련인으로 여긴다면 모두 통과할 수 있어.’
며느리가 아직 산후조리 기간에 있을 때 아들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아이 호적을 아이 외가에 올릴게요.” 저는 듣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손자는 우리 집의 뿌리인데, 왜 외가에 올려야 하는 걸까?’ 하지만 저는 ‘나는 수련인인데 이런 인간의 것을 따져서 뭘 하지? 내가 이런 사람마음을 갖고 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진상 알리기
이제 저는 수련인의 표준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선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약혼한 이후로 며느리가 올 때마다 진심으로 대했으며,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며느리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생활상의 요구를 최대한 만족시켜주었습니다. 며느리가 올 때마다 식사를 마치고 친정으로 바로 돌아갔기 때문에, 저는 며느리에게 진상을 알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진상을 알리다가 납치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남편과 아들의 압박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제게 며느리에게는 대법에 관한 일을 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작년 정월 초하루, 아들과 며느리가 밖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돌아왔는데, 며느리는 거실 소파에 앉았고, 아들은 방에 들어가 잠을 잤습니다. 제가 보니 이것이 바로 제가 진상을 알릴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날 저는 며느리 맞은편에 앉아 말했습니다. “너희가 결혼한 지 반년이 넘었는데, 우리 둘이 앉아서 잘 얘기해 본 적이 없구나.”
저는 며느리에게 파룬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며느리는 말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을 알아요. 어머니 방에 법상이 있는 것을 남편이 제게 말해줘서, 저는 그게 대법 사부님의 법상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저는 며느리에게 파룬따파가 전 세계에 널리 전해지고 있는 일,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따파를 박해하고 ‘천안문 분신’ 조작극을 꾸며냈으며, 파룬궁수련생의 장기를 적출해 폭리를 취하고 있는 일 등을 말했습니다. 저는 중공이 대법을 박해하고 수련인을 잔혹하게 해치는 것은 반드시 하늘의 징벌을 받을 것이며, 사람들이 모두 이 사악한 조직에서 탈퇴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녀에게 많은 대법 진상을 알려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말한 것을 많이 들었는데, 다 이해했지? 너도 이 조직에서 탈퇴하고 싶니?” 며느리는 머리를 높이 들고 소리가 크고 우렁차게 말했습니다. “탈퇴하고 싶어요!” 저는 며느리를 껴안고 감격해서 말했습니다. “사실 네가 우리집에 온 것은 단지 내 며느리가 되기 위한 것만이 아니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법 진상을 알게 돼 대법의 제도를 받고 아름다운 미래를 갖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야.”
이제 저는 더 이상 아들과 며느리를 피해 법공부하고 연공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족들도 더 이상 제가 수련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지(加持) 아래, 저는 납치로 인해 겪었던 가정 고비를 이겨냈습니다. 저는 며느리가 저에게 두 달간의 휴가를 주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원문발표: 2025년 11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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